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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김정진 독와사 [4]

by 워낙3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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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수룩하신 이 노인네, 세찬으로 보내는 돈을 아니 받으셔요? 그런 거북살스런 연설 말씀은 고만 두시고 얼른 받아두시지요. 하하 내가 어련히 알고 가지고 왔겠습니까? 이것을 납채로 알고 받으시라면 생각하실 여지도 있겠습니다마는 아무 다른 의미가 없는 세찬이 아니오니까? 무슨 딴 생각을 하실 필요가 있어요?”

안의관은 언제든지 자기가 가지고 온 책임을 면하는 동시에 그 돈으로 벗 어나지 못하도록 황숙자에게 굴레를 씌우자는 것이 목적이다. 안의관이 권 할수록 냉정한 얼굴빛을 지으며 오과부는

“그렇지만은 아직 그런 돈 같은 것을 받을 수는 없어요. 아무리 세찬으로 주시는 것이지요마는 중간에 혼인 이야기가 연관이 되었으니.”

“저런 딱하신 말씀 있나? 혼인과 세찬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 돈은 딴 조건은 아무것도 없어요. 한참봉이 세시 때가 되어 섭섭하다고 보내는 것을 무얼 그렇게 여러 말씀을 하십니까?

안의관은 오과부의 태도가 냉정한 것을 보고 자기도 거짓 안색을 굳히며 어조를 높이었다.

“그래도 나는 다른 것과 달라서 그것은 못 받겠습니다.”

오과부는 눈을 내리깔며 어디까지 냉정한 태도로 앉았다.

안의관은 별안간에 성을 낸 듯이 언성을 높이어

“그 왜 그리 고집을 부리십니까? 그럼 이것을 날더러 어떡하라는 말씀이 오? 점잖은 사람이 보낸 것을 손 부끄럽게 도로 갖다 줄 수도 없고 대관절 중간에 든 내 처지가 곤란하지 않소?”

안의관이 언성을 높이어 담판 비스름하게 누르는 바람에 오과부의 냉정하 던 태도는 얼마쯤 누그러져 온다. 안의관은 곁눈으로 오과부의 얼굴빛을 엿 보며 말을 계속한다.

“이것이 누구를 속이자는 것도 아니오. 말하고 보면 단순한 정의에서 나 온 세찬인데 남의 정의를 막으면 내 체면은 무엇이 된단 말이오. 그리고 한 참봉의 낯도 좀 봐야지요.”

오과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안의관은 일이 예정대로 차차 되어가는 것을 속으로 웃으며 다시 어조를 부드럽게 고치어

“글쎄 아무리 세상일을 모르시는 부인네지마는 그렇게 외곬수로만 나가시 면 어떡합니까? 서로 미흡하신 생각이 있더라도 나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이 것은 받아두시게 하시지요. 원래 이 돈과 혼인이야기는 딴 문제이니까 아무 염려도 하실 것이 없습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한참봉 같은 사윗감은 다시 없습니다. 무얼 생각하실 여지가 있습니까? 내가 딸이 있다면 한참봉 같은 사위는 두 손으로 떠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하하.”

안의관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오과부가 수그러진 기회를 이용하여 돈 봉투 를 오과부 앞으로 들이밀었다.

51회 연애 모르는 처녀

오과부는 한참봉이 세찬으로 보낸다는 돈을 무한히 거절하여 보았으나 결 은 말솜씨 좋은 연통 안의관에게 강권을 당하여 부득이 받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안의관이 말하듯이 혼인문제와는 상관이 없고 다만 세찬이라는 명목 으로 뒤를 단단히 박고 받게 되었으나 마음에는 매우 찐덥지 못하여 마치 궂은 고기를 먹은 것처럼 뒷일이 걱정이 되어 안의관을 돌려 보낸 후에 오 과부는 안방으로 건너와서 자기 딸 숙자와 마주 앉아서 안의관이 두고 간 그 봉투를 뜯어보았다. 봉투 속에는 아직 서슬도 아니 가신 십 원짜리 지전 이 숱은 얼마 아니 되어 보이나 세어 보고 오과부와 숙자는 놀래었다. 그 봉투 속에는 요새 이 같이 돈 귀한 때에 오백 원이라는 적지 아니한 돈이 들어 있었다. 평생을 두고 모갯돈을 못 보던 그들이 놀랄 것은 정한 일이 다. 돈 액수에 깜짝 놀래인 오과부는 지전을 손에 든 채 입을 벌리며 “애 이것 좀 보아라. 이것이 모두 십 원짜리지? 쉰 장이나 들어 있다.” 하며 오과부는 손에 들었던 지전을 숙자의 얼굴 앞으로 쑥 들이 밀었다. 숙 자는 자기 어머니가 놀라는 바람에 따라서

“그럼 오백 원이나 되게?”

“글쎄 말이다. 우리는 처음 보는 돈이다. 이런 큰 돈을 남한테 무슨 명목 으로 받는단 말이냐. 내일이라도 안의관이 오거든 곧 돌려보내야지. 그게 납채돈이라는 말이냐. 납채라 하더라도 그렇게 많지는 아니할 터인데” 오과부는 찐덥지 않은 그 돈이 더구나 액수가 많음을 보고 의심된 마음이 더욱 깊어 간다. 숙자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럼 도로 보내구려. 돈만 아니 쓰면 고만이지요.”

“그렇지? 그대로 두었다가 돌려보내 버리자”

오과부의 마음에는 안의관이 오기만 하면 두 말 없이 그 돈은 도로 보내려 작정하였다. 숙자는 얼마 아니면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오게 된 여자이 나 원래가 성품이 안존한데다가 사나이 내음새가 없는 과부 어머니의 그늘 에서만 자라난 까닭에 보통 여학생들이 그 나이에 충동을 받는 남성의 그림 자는 아직 숙자의 머릿속에는 없다. 같은 반의 학생들이 연애이니 애인이니 하고 값싼 연애 소설을 옆에 끼고 다니며 틈틈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숙 자의 눈에는 심상하여 보이었다. 연애란 것이 물론 이성 사이에 일어나는 정적 관계인 줄은 짐작하지 않는 바는 아니나 원래가 늦되는 여자일 뿐 아 니라 또 다른 가정 같이 부부가 한데 섞이여 지내는 환경을 보지 못한 사람 이라 나이는 열여덟 살이나 되었지만은 입대까지 젊은 남성의 얼굴을 의미 있게 쳐다본 일은 없다. 숙자는 아직까지도 자기 홀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벗어나지 못한 처녀이다. 이와 같이 남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고 다만 자 기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의뢰하고 있는 터이라 물론 혼인문제 같은 것도 자기의 표준이 없는 이상 자기 어머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숙자는 자기의 혼인 문제가 일어난 뒤로는 자기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부끄 러움에 취하여 얼굴에 모닥불을 담아 붓듯이 화끈화끈한 것을 참아가며 두 어 사람의 남성과 한방에서 마주 대한 일이 있었으나 그 하나는 한참봉이었 다. 그러나 아직 남성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지만은 처음 한치각과 마주 대 할 때에 무엇이라고 꼭 집어낼 수는 없으나 마음이 섬뜩하며 머리를 누르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일어났다.

다시 말하면 숙자는 한치각을 대하던 첫 눈에 무서운 생각을 느끼게 된 것 이다. 그러나 한참봉이라는 사나이와 혼인을 완정한 것도 아니요 숙자 마음 에도 가까이 하는 것이 싫은 생각이 나서 될 수 있으면 한참봉을 피하려는 차에 불의에 안의관이 와서 세찬이라고 하며 받지 않는다는 돈 오백 원을 억지로 두고 가게 되어 숙자와 오과부 두 사람은 적지 아니한 걱정을 맡아 가지고 있게 되었다. 돈을 세어본 뒤에 오과부는 얼른 그대로 돌려 보내기 로 작성하였으나 안의관이 집에 오기까지 그 돈을 맡아두어야 할 터인데 사 나이 하나 없는 집안에 더구나 섣달 그믐날 밤에 큰돈을 집에 두게 되어 오 과부는 쓸데없는 마음이 졸이게 되었다. 오백 원이 들어 있는 돈봉투를 들 고 오과부는 이리저리 방안을 헤매이며

“에이 이것을 어디 두면 좋으냐?” 하며 돈 감출 곳을 찾는 중에 대문이 찌꺽하며 열리었다. 오과부는 소스라치게 돌라며 외마디소리로 “누구요?” 하며 물었다.

문밖은 철벽 같이 캄캄한데 아무 대답이 없다.

52회 노랑수염자리

안의관이 오과부에게 아니 받는다는 돈 오백 원을 억지로 떠맡기고 돌아오 는 길에 취하였던 술이 거의 다 깨게 되어 찬바람이 목 뒤로 돌며 으스스한 추위를 느끼어 오는 판에 종로 뒷골목을 들어서니 목로 술집 안에는 연기가 자욱한데 양복쟁이, 조선옷 입은 사람들이 뿌듯하게 들어서 있고 포장 밑으 로 쏟아져 안주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술의 포로가 되다시피한 안의관 은 게다가 오늘은 한치각의 중대한 심부름을 하게 된 삯으로 돈 십 원이나 얻어 넣은 것이 주머니에서 춤추고 있는 판이라 그 술집 앞을 그대로 지날 수는 없었다. 마음에는 속히 돌아가서 오과부집의 전말을 한치각에게 보고 해야 되겠다고 생각은 하나 술집 앞에서는 두어 번 주저하더니 어느 덧 안 의관의 시뻘건 얼굴은 모여선 사람을 헤치고 술청 앞에 나타났다.

“한잔 따뜻하게 데워 내오”하며 주모가 “어서 옵쇼” 하는 소리와 같이 내미는 일본 젓가락을 받아 들었다. 술청로 봉당 바닥에는 젓가락 부러진 것, 빨다버린 뼈다귀들이 발부리에서 이리저리 구르며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두 볼을 움직거리며 안주를 먹는 사람, 술잔을 손에 든 채로 배를 내밀고 부라질을 치는 사람, 문어발을 가로 들고 두 손으로 집어 다니는 사람, 김 치 깍두기를 부르는 사람들이 어깨를 부비며 술청 앞으로 들고 나고 하는 중에 안의관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선뜻 뜨인다. 안의관은 술국 대접을 손 에 든 채 그 얼굴을 따라서 저 편 도마 앞으로 가더니

“여보게 자네 웬일인가? 땅 흥정 붙이러 시골 갔다더니 언제 올라 왔 어?” 하며 안의관은 헌 두루마기가 회색빛이 되도록 더러운 옷을 입은 노 랑수염이 난 사람의 소매를 탁 친다.

“아, 나는 누구라고. 연통일세그려. 그래 요새 재미 좋은가?” 노랑수염자리는 두 볼을 우물거리며 안의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본다.

“연통이 다 무어야? 에라 버릇없이 굴지 마라.”

“버릇은 요모양에? 너 요새 물이 바짝 올랐구나. 어느 구멍을 또 찾아다 가 대령했니?”

“예라 실없는 소리 마라. 그런데 요전에 자네가 말하든 오씨가 왜 그렇게 딱정테야. 내가 아주 골치가 아파서 죽을 뻔했네. 아주 생노지데그려” 안의관의 말을 미처 못 알아듣는지 노랑수염자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오씨라니 누구 말이야?”

“아따 자네하고 어떻게 된다는 오과부 말일세.”

노랑 수염자리는 비로소 생각이 난 듯이

“으응 숙자의 어머니 말이야? 내가 요전에 숙자의 혼인 말을 했더니 요새 는 또 그 구멍을 파는구나. 아서라! 걔는 내 조카뻘이 되는 애다.” 노랑수염자리는 가볍게 놀라는 얼굴을 지었다. 안의관은 그것저것 상관 않 는 듯이

“고만은 무얼 고만이야. 돈 만 원이나 생기면 평생을 편하게 지낼 텐데 무엇이 걱정이야? 그렇지 않아도 자네 손을 빌려고 그랬더니 여기서 잘 만 났네. 하여간 하꾸라이하고 잘 맞춰 노면 자네도 해롭지는 아니하리.” 처음에는 놀라는 빛을 띄우든 노랑수염자리는 안의관의 해롭지 아니할 터 이라는 말에 솔깃하여진 듯이

“그렇지만 그런 숫보기를 하꾸라이에게 찍어다 드리는 것은 너무 불쌍한 데. 그리고 대관절 하꾸라이가 어디 돈이나 많이 쓰는가?”

“지금 자그만치 이것을 갖다주고 오는 길인데그래.”

하며 안의관은 다섯 손가락을 열어 보인다. 옆에 서서 술을 먹던 사람은 곁 눈질을 하며 안의관을 본다. 노랑수염자리는 안의관의 손을 보며

“오십 원을 벌써 약조금으로 걸었단 말이지?”

안의관은 입을 삐죽하며

“오백 원은 좀 못 쓰고?”

“오백 원? 정말이야?”

“그래 서슬이 시퍼런 십 원짜리 쉰 장이 겨우 세찬 대신이라네. 돈은 얼 마든지 내 가무려 내일게. 자네는 오씨만 잘 주무르게.”

노랑수염자리는 오백 원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그래 지금 자네가 막 갖다주고 오는 길이라는 말이지?”

노랑수염자리는 무언가 별안간에 생각하는지 입을 다물고 저편으로 얼굴을 향하였다. 그 노랑수염자리는 황숙자의 먼 촌 일가라고 다니는 황치삼이었 다.

53회 무서운 참모

한치각은 원래가 한편으로 기울어지면 헤어나올 줄을 모르고 열중하는 성 미를 가진 데다가 더구나 첫눈에 든 황숙자의 숫적은 태도가 말할 수 없이 마음에 당기어 선을 본 뒤에는 밤마다 오과부집 좁은 건넌방에서 체면도 돌 아보지 아니하고 보금자리를 치고 있으나 숙자는 내놓은 계집이 아니요, 상 당한 학교를 다니는 숫처녀이라 마음대로 주무를 수도 없고 또 너무 함부로 다루다가는 일이 성공 못되어 타박을 맞을 염려가 있으므로 다소간 주의를 하며 다니는 중이나 오과부의 눈에는 벌써 자기의 본성이 간파가 되었는지 요사이 며칠 동안은 숙자를 잘 보이지도 않고 오과부의 냉정한 태도가 나타 나게 된 까닭에 한치각은 연통 안의관을 참모를 삼고 돈으로 환심을 끌려고 세찬이라는 명목을 부치어 돈 오백 원을 보내고 마침 섣달 그믐날이라 오늘 은 자기 아버지의 이르는 대로 집에 몸을 붙이고 들어앉아 있다. 그러나 원 래가 밤이면 박쥐 모양으로 밖으로 떠돌던 사람이라 마음이 가라앉지 못하 여 갑갑증이 나는 판에 사랑 대문 소리가 나더니 안의관이

“에, 추워! 추워!”

하는 말소리가 드리며 들어온다. 한치각은 안의관이 채 들어오지도 아니하 여

“안인가? 무얼하게 입때 있었어?”

하며 오과부 집에 소식을 궁금하여 묻는다.

안의관이 미닫이를 열고 들어오더니 술내가 물큰 끼치며 연상 옆으로 한치 각을 향하여 털썩 앉는다.

“무얼 했느냐가 다 무어요? 내가 아주 골치가 아파서 못 견딜 뻔했소. 당 췌 돈을 받아야지. 이 핑계 저 핑계하고 돈을 아니 받는 것을 마치 어린 중 전국 먹이듯이 꾀어서 간신히 주고 왔어.”

“그래 주기는 정녕 주었나?”

“그럼 그 돈을 내가 먹었겠소? 하하.”

요사이 황숙자 바람에 한치각의 신용을 회복한 안의관은 가장 큰일이나 하 는 듯이 활기가 가득하여졌다.

“또 오다가 술 먹었구나.”

“세상 일이 다 먹자는 것인데 아니 먹고 무얼 한단 말이요”

“그런 쓸데없는 말은 고만 두고 대관절 돈은 분명히 주었단 말이지?” “그거야 내가 간 이상에야 범연히 하고 왔겠소. 돈은 오과부에게 전하고 굴레는 단단히 씌워 놓고 그리고 왔지요. 흐 ─.”

한치각은 술냄새에 얼굴을 얼른 저편으로 피하며

“아주 모주 내가 나는구나. 술주정만 말고 이야기를 좀 자세히 해요.” 한치각은 안의관의 횡설수설하는 주정의 말에 불쾌한 빛이 얼굴에 나타났 다. 안의관은 술이 취하여 고개를 늘이고 부라질을 치다가 힐끗 곁눈으로 한치각의 미간에 암상살이 잔뜩한 것을 보고 딴 정신이 생긴 듯이 고개를 번쩍 들며

“참 술이 너무 취하는데. 하여간 오백 원은 봉투에 넣은 채로 틀림없이 오과부에게 맡기고 왔소. 그런데 오과부가 무슨 명목으로 돈을 받느냐고 하 는데는 나도 그 대답에 좀 곤란하였었는데 그렇지만 내가 굴레를 만들어 가 지고 간 이상에야 범연히 알고 왔겠소.”

“그래 대관절 오과부의 눈치는 어떻든가?”

“원래가 숫보기라 매우 조심하는 모양입디다마는 일하기에야 손톱이 쑥 들어가지요.”

“그런 헛장담만 말고 힘을 써요.”

“그것은 염려 마시오. 우리 대장의 명령대로 틀림없이 황숙자를 씻어 바 치도록 만들 터이니 아무 말씀도 마시고 이 참모의 하는 대로만 맡기시오.

그리고 군자금만 넉넉히 대주어요.”

“돈이야 좀 들더라도 상관 없지만 나중에 돈만 물리고 뒤통수를 치게 되 면 그런 창피가 있나?”

“만일 성공을 못하거든 내 목을 바치리다. 염려마오. 그런데 내가 지금 오는 길에 또 술을 먹게 된 것도 다 까닭이 있는 술이요. 알고 보면.” “무슨 까닭?”

안의관이 취담을 하는 중에도 새말이 나온 데에 한치각은 귀가 번쩍 띄여 채쳐 물었다.

“우리 연극에 가장 중요한 활동을 할 협정을 초대하고 오는 길이야요.” “그것이 누구란 말이야?”

“황숙자의 일가 되는 사람인데 조그만치 군자금을 쓰면 다 이용할 수 가 있지요. 그저 모든 것을 내게만 맡기구려.”

한치각은 황숙자의 일가라는 말에 한편으로는 도리어 불안을 느끼었다.

54회 의심스러운 사람

황숙자의 집은 원래가 모녀 두 식구만 사는 집이라 정초가 오나 추석이 되 나 일찍이 명절을 명절답게 지낸 본 일은 없었다. 세상이 다 설 준비를 하 느라고 밤을 새워가며 앞집 뒷집에서는 사랑에 불을 켜놓고 도마 소리가 요 란하게 들리며 세찬을 장만하느라고 분망한 모양이나 황숙자의 집에는 그러 한 풍성풍성한 환경을 떠나서 지극히 고요하고도 쓸쓸한 밤이었다. 설빔이 라고 할까 황숙자의 입던 나들이 옷이나 고쳐 짓고 과부 어머니의 때 묻었 던 치마 저고리나 빨아 지으면 설빔은 손을 떼는 셈이요 초하룻날 끓여 먹 을 흰 떡가래나 하고 고기 근이나 사들이면 황숙자의 집 과세할 준비는 다 시 더 장만할 것은 없었다. 이렇게 간단한 숙자의 집 정경을 조용하게 본다 면 더 지낼 수 없는 한적한 집이라 할 수 있으나 일 년 한번씩 맞이하는 즐 거운 기분을 이 집에서만 빼앗긴 것 같은 쓸쓸하고 처량한 생각이 황숙자의 오과부의 마음을 해마다 얻게 하였다. 이웃집에서는 둥절둥절하는 사나이 말소리, 아이들의 재미있게 깔깔거리는 웃음, 이것이 다 새해의 즐거운 전 주곡이 되어 흘러나오나 숙자의 집 쓸쓸한 방안에는 마음이 공연히 서글퍼 지는 누가 보아 그늘에서 핀 가련한 꽃 같은 황숙자의 고아, 과부 두 여성 이 가벼운 한숨을 지으며 가는 해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것이 항이었다.

그러나 해마다 쓸쓸한 그믐날을 지내는 오과부의 서글픈 마음에도 한편으 로는 자기 딸 숙자가 점점 커가는 것을 신통하고 또 마음에 든든히 생각하 여 모든 희망을 거기에 붙이고 있었다. 금년에도 집안은 쓸쓸하나마 고요한 마음에 아무 거리낌 없이 그믐날 밤을 지내게 되었던 오과부의 집에는 생각 지도 아니하던 돈 오백 원이 들어오게 되어 그들의 해마다 맑고 고요하게 지나가던 그믐밤이 별안간에 이 집 평온하던 공기를 소란케 하였다. 돈으로 모든 즐거움을 사들이는 섣달그믐날 밤에 황숙자의 집에는 돈으로 하여 도 리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심상치 아니한 일이 생기었다. 오과부는 그 이튿 날이라도 연통 안의관이 오기만 하면 돈 오백 원을 그대로 한참봉에게 돌려 보내고 아주 숙자와 이야기되는 혼인 일판을 딱 거절을 하려고 생각하고 오 백 원을 봉투에 넣은 채로 벽장 속에 놓인 손궤 속에 깊이 감추고 밤을 지 내었으나 그 이튿날에도 연통 안의관은 오지 아니하였다. 궂은 고기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을 계속하며 오과부는 초하룻밤을 지내었다. 그러나 안의관의 행적은 도무지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생각지도 아니한 황치삼 이 전에 못 보던 새 양복에 존존한 외투를 입고 뛰어 들었다. 항상 때가 꾀 죄죄 흐르는 조선 옷을 입고 으스스하게 달겨들던 황치삼의 모양이 오늘은 생각지도 못할 만치 훌륭한 신사가 되어 들어왔다.

“금년에는 세배를 일찍이 왔습니다. 과세나 안녕히 하셨습니까?” 황치삼은 노랑 수염을 들썩거리며 매우 유쾌한 모양을 나타낸다. 오과부와 황숙자는 마음에는 탐탁치 아니하나 정초에 찾아온 사람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고 안방으로 인도를 하여 들인 다음에 숙자는 조카 항렬이라는 계단 이 있으니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세배를 아니 할 수도 없었다.

인사를 마친 뒤에 황치삼은 숙자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숙자가 작년 동안에 아주 훨씬 자랐는데? 그리고 얼굴이 아주 환하게 피 었어. 새해에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겠는걸? 하하. 그런데 소문을 들으니 숙자의 혼처가 좋은 곳이 있어서 언론이 돈다드니 아주 완정을 했나요?” 오과부와 숙자는 황치삼의 혼인 말을 미처 다 듣지도 아니하여 공연히 마 음에 선뜻하여진다. 어느 때인지 지나가는 말로 숙자의 혼처나 하나 구해 달라고 실없는 말을 한 일이 어렴풋하게 생각에 남아 있으나 원래가 탐탁하 게 믿을 사람이 못 되는 까닭에 물론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고 있었지만은 지금 황치삼의 입에서 나오는 혼인 이야기는 또 한참봉을 가리키는 것은 아 닌가 하고 오과부의 모녀는 마음이 선뜻하였다.

55회 속이기 내기 후

몇 달에 한번씩 잔돈푼이나 뜯어갈 일이 있어야 오던 황치삼이가 정월 초 이튿날 아침부터 뛰어들게 된 것도 예기치 아니한 일이나 그 중에 더구나 황치삼 입에서 숙자의 혼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들으니 원래가 사렴이 많 은 오과부는 불안과 의아한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와서 황치삼이 무슨 말 을 하나하고 주의스런 눈으로 그의 동정만 살피고 있다. 황치삼은 큰 발견 이나 한 듯이 얼굴에는 기쁜 빛이 나타나며 피죤갑을 꺼내어 궐련을 부친 다.

“아주머니께서는 오랫동안 홀어머니의 외손으로 숙자를 저만치 키우셨으 니 고생살이는 다 지나갔습니다. 인자는 숙자의 덕으로 편하게 지내실 때가 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문을 들으니 신랑편에서는 첫 눈에 꼭 들어서 곧 혼인을 지낼 의향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아주머니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고 계신지요?”

황치삼은 숙자의 혼인 이야기를 어지간히 자세히 아는 말눈치이나 말을 장 황히 늘어놓기만 하고 신랑이 누구라는 말은 종시 입에서 내지 아니한다.

오과부는 황치삼의 말눈치가 필경 한참봉을 가르쳐 하는 말로는 짐작이 되 었으나 당치 아니한 일에 또 말썽꾼이 뛰어 들었다는 생각도 있고 또 한편 으로는 한참봉을 아주 거절하려고 작정한 일이라 자기 입으로 경솔하게 한 참봉의 관계를 말할 까닭도 없다고 생각하여 어쨌든 황치삼의 입으로 혼인 의 상대자가 누구라고 파임을 내기까지 그대로 듣고만 있다. 황치삼은 무슨 연극을 꾸미려는지 누구라는 말은 아니하고 다만 혼인 이야기를 끌어내어 아무쪼록 오과부의 입으로 한참봉이라는 말이 쏟아져 나오도록 자아내고만 있다.

“그런 좋은 곳을 또 얻어 만나기는 쉽지 아니한데 아주머니께서는 무엇을 아니하시나요?”

황치삼은 오과부의 입이 열리도록 대답을 재촉하는 말을 부치고 있다. 오 과부는 여러 번 묻는 말을 어떻게든지 대답을 아니할 수는 없게 되어 간신 히 입을 열었다.

“어디 아직 그렇게 탐탁하게 언론이 있는 데도 없고요. 또 학교도 얼마 아니면 졸업을 시킬 터이니까 좋은 데가 있더라도 학교나 마치고 혼인을 완 정하려고 합니다.”

오과부의 말도 역시 희미하게 대답을 하였다. 황치삼은 오과부가 종씨 한 참봉과 언론이 있다는 것을 바로 토설치 아니하고 두리뭉수리로 대답을 하 는 것을 보고 한 방 콕 찔러보자는 생각이 나서

“탐탁한 곳이 없다시면 봉치돈을 왜 받으셨어요?”

황치삼은 입의 모양이 일그러지며 비웃는 빛을 보인다.

오과부는 봉치돈이라는 소리에 깜짝놀라서

“봉치라니뇨?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오과부는 마음에는 적지 아니한 놀라움을 느끼었으나 거짓 평심스런 태도 를 지으며, 황치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황치삼은 기가 막힌 듯이 천장을 쳐다보며 껄껄 웃더니

“그저 부인네라는 것은 참 말못할 이들이야. 그렇게 딴청을 하면 내가 모 릅니까? 그리고 왜 아주머니께서 나를 속이실 까닭이야 무엇 있습니까. 옛 적부터 이르기를 좋은 일에는 남이요 궂은 일에는 일가라 하지 않습니까?

댁이 다른 일가가 또 어디 있습니까? 넓은 장안에 댁붙이라고는 나 하나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아주머니 모녀분이 고적하게 사는 것을 얼마 쯤 보호 하여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다니지 않습니까?”

말품을 팔아먹는 황치삼의 번지르한 그 말에 오과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만 좋을는지 말문이 콱 막히었다. 황치삼은 오과부가 곤경에 빠진 듯이 앉 았는 모양을 곁눈으로 흘끔흘끔 건너다보며

“그러지 마시고 말씀을 자세히 하시지요. 내가 설마 아주머니를 위해서 힘을 쓰지 타처부지의 모르는 사람의 두둔이야 하겠습니까? 어려운 일이 있 거든 턱 믿으시고 내게 말씀을 하시지요. 더구나 혼인이라는 것은 인륜의 대사라는데 큰일이 아니오니까?”

오과부는 황치삼이 여러 번 말을 묻는 것을 종시 그대로 대답이 없이 지낼 수는 없게 되어

“아, 그렇지요. 혼인이 평생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과부는 겨우 입을 열었다. 황치삼은 오과부의 말문이 겨우 열리는 것을 보고 이 기회에 한참봉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도록 또 말을 계속한다.

56회 꽃 먹는 벌레들

오과부는 자기 입으로 말을 아니하려고 작정하였던 숙자의 혼인 상대자가 한참봉이라는 말을 참다 못하여 입 밖에 내이게 되었다. 황치삼의 입에서 나오는 말눈치가 어디서인지 내용을 자세히 듣고 와서 묻는 것이 분명하다 고 생각하여 오과부는 한참봉과의 관계를 자초지종까지 폭발을 하고 돈 오 백 원을 세찬거리라고 하여 억지로 두고 갔다는 것까지 황치삼에게 말하였 다. 황치삼은 한치각과의 관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요 연통 안의관에게 대개 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한치각에게까지 소개가 되어 오과부를 잘 무마하여 황숙자를 자기 손에 들어오도록 일을 만들라는 부탁을 받고 한치각에게서 적지 아니한 운동비까지 손에 쥐이게 되었으니 오과부에게 새삼스럽게 내용 을 물어볼 필요는 없지만은 자기 입으로 한치각이라고 먼저 말을 내이는 것 보다 아무쪼록 오과부의 입에서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일을 꾸미는 데에 손 이 쉽겠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황치삼은 우선 첫번 시험에 오과부를 손에 넣게 되어 마음에 만족을 느끼어

“나도 대강은 듣고 와서 말씀을 하는데 그렇게 모르쇠를 부르시면 어찌합 니까? 참 딱도 하시오. 아주머니도. 하하하!” 하며 너털웃음을 내놓는다.

오과부는 황치삼에게 꾀에 떨어져서 비밀을 말하게 된 것이 한편으로는 부 끄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황치삼이 중간에 뛰어 들어서 말썽스러운 일 이나 아니 생길까 염려한다.

“한참봉에게는 잠깐 선을 보였을 뿐이니 아직 정혼 여부가 있었나요? 그 리고 그이는 마음에 그리 당기지 아니해서 아주 그만두고 돈을 도로 보내려 하는 중인데 입때까지 중간에 들었든 사람이 아니 와서 그대로 있는 중이야 요.”

오과부는 일이 점점 터져가는 것처럼 생각이 되어 마음이 매우 불안 하여 졌다.

“고만 두다니요? 혼인을 아주 거절한단 말씀이야요?”

황치삼은 거짓 놀라는 빛을 띄며 묻는다. 오과부는 모든 것이 귀찮은 듯이 힘없는 어조로

“네. 그 자리는 고만 두겠어요.”

“왜 그러시오? 나는 자세히 모르나 듣기에는 아주 참한 곳으로 보이는데 요. 첫째 신랑이 얌전하고 재산이 조선서 몇째 아니가는 부자라는데 무엇이 마음에 맞지 아니하신가? 나는 한참봉이 부자라는 말만 들었지 자세히는 알 지 못하니까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큰 탈만 없으면 그대로 내 맡 기시지요.”

황치삼은 자기가 한참봉이라는 인물을 잘 아는 체를 하면 나중에 일이 거 북하게 될 염려가 있으므로 오과부의 앞에서는 모든 태도를 소문으로 들은 것처럼 꾸미고 있다.

“돈이 많으면 나를 다 줍니까? 그렇게 덜썩 큰 부자도 바라지는 아니해 요. 집이나 아니 굶고 신랑이나 똑똑하면 고만이지요.”

오과부는 한치각이 너무 난잡하게 구는 것이 아주 눈에 벗어나 보여서 다 시 한치각에게 관심을 두지는 아니하게 되었다. 황치삼은 이 자리에서 억지 로 한치각을 강권하는 것이 득책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오과부의 말하 는 태도에만 주의를 하고 있다.

“그도 그렇지요. 돈만 많다고 함부로 귀한 따님을 내어 줄 수는 없지요.

하여튼 내가 다시 한참봉이라는 신랑의 위인을 조사하여 볼 터이니 그리 아 시고 너무 급하게 도지는 마시지요. 아무 흠절도 없는 좋은 혼처라 하면 공 연히 급히 내어 박찼다가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될는지 누가 압니까? 모든 것 을 내게 맡기시고 좀 기다리게 하시오.”

“한참봉이라는 이는 돈은 많은지 모르나 너무 난잡하게 굴어서 장가를 들 사람 같지는 보이지 아니하던 걸요.”

“난잡하다니요? 어떻게 하였기에 그러셔요?”

“선을 보던 날부터 숙자를 주무르며 너무 실없이 굴더라고 애도 아주 싫 다고 하던 걸 어쩝니까?”

한치삼은 오과부의 말이 너무도 우습게 들리는 것처럼 너털웃음을 쏟아놓 으며

“그건 홀어머니로 오래 계시든 아주머니의 눈으로 보시니까 서툴러 보이 지요 재취 장가를 가려고 하는 사람이 어린 신랑 같이 그렇게 수줍은 사람 이 어디 있습니까? 참 딱하신 말씀이군 그래. 그것이 첫눈에 들지 않더란 말씀이지 하하하!”

황치삼은 문제거리도 안되는 것처럼 웃어버렸다. 그런 다음에 황치삼은 혼 인 이야기는 더 꺼내지 아니하고 세배를 하러 왔다가 우연히 말이 된 것처 럼 보이고 그대로 돌아갔다.

57회 선머슴의 장난들

황숙자의 집 맞은 편에는 영업패는 붙이지 아니하였으나 항상 오륙명의 학 생들이 기숙을 하고 있다. 딸 하나 과부 하나가 사는 숙자의 집은 때로는 그 맞은 편 집에서 학생들이 변화하게 떠드는 것이 고적한 가정에 든든한 믿음도 주지만은 얼마 아니하여 시집을 보내게 된 딸을 데리고 있는 오과부 는 쓸데없는 사렴을 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복잡한 성 중에서 집 처마들을 맞대고 살게 된 도회처이라 이웃집에 불편하다고 일일이 떠나다닐 수는 없 는 일이요, 또 숙자의 집 사정으로 말하더라도 집을 이리저리 좋은 데로 골 라다니며 이사를 할 수는 없는 사정이라 오과부는 은근히 자기 딸은 단속할 뿐이었다.

한참 혈기 방장한 그들의 학생은 숙자를 괴롭게 하는 장난이 때때로 생겨 나왔다. 어느 날은 아침에 오과부가 대문을 열러 나갔다가 분홍 봉투가 떨 어져 있는 것을 보고 어디서 긴한 편지나 왔나하고 숙자를 보이어 얼굴을 붉히게 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연애 편지를 한 주인이 과연 건너 집에 있 는 학생이라고 집어 내어 말할 수는 없지만은 하여튼 날마다 숙자가 그 집 창 앞으로 지낼 때마다 자케트 입은 학생들에게 시선의 총공격을 받으며 또 어떤 때는 숙자가 골목 어귀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학생이 소리를 치며 방안 학생들을 모두 추근하여 가지고 좁은 길목에 늘어서서 숙자의 통행을 희롱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기숙하는 학생들의 이러한 장난이 선머슴 때에 는 있는 그들의 단순한 희롱 기분에서 나오는 때가 많다 할지나 하필 숙자 가 지날 때에만 이러한 장난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작희가 보통 장 난 이외의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숙자는 어느 때이든 지 고개를 푹 숙이고 학생들의 틈으로 종종 걸음을 치며 싹 빠져 나가는 것 이 항례이었다. 뾰로통하게 내밀린 입과 아래로 내리뜬 눈에는 적은 불만이 나타날 뿐이었다. 이십 전후에 한참 혈기가 약동하는 그들이 힘있게 남성의 멜로디를 반사하는 데에도 숙자는 아무 감촉을 느끼지 않았다. 원래가 늦되 는 여성에다가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홀어머니만 있는 승방 같은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라 아직 이러한 젊은 남성들의 유도를 느끼지 못하였다. 이러 한 발육상 관계와 숙자의 환경을 이해치 못하는 장난꾼의 학생들은 가엾게 도 숙자에게 한수석(寒水石)이라는 별명을 붙였으니 과연 숙자가 어느 때까 지 이 별명에 만족할는지 모르나 하여튼 희롱에 부치게 된 학생은 숙자를 가르쳐 찬물에 돌이라고 또 불리게 되었다. 그들 학생은 숙자에게 할 수 없 이 이러한 별명을 붙이고 따뜻한 감촉은 아주 단념하게 되었지만 들창 앞으 로 하루 몇 번씩 지나다니는 젊은 여성을 그대로 잊어버리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마치 청요리집 앞을 지날 때 코에 맡히는 기름 냄새 같이 맞은 편 숙자의 집에서 나오는 담담한 여성의 냄새가 코에 어리어 그들은 이유 없이 맞은편 창을 열고 막연한 생각으로 숙자의 모양을 그리며 냄새를 맡고 있 다.

이러한 보초병이 숙자의 집 맞은 편에 있는 것을 모르는 한치각은 기탄없 이 숙자의 집을 드나들게 되어 부르주아의 기분을 발산하는 해룡피의 외투 가 말썽꾼인 그들 학생에게 극도로 악담을 사게 되었다. 원래 방약무인한 한치각의 태도가 어디서든지 거만한 느낌을 주지만은 세상에 뛰놀려 하는 혈기방장한 학생의 눈에 거칠게 보일 것은 물론이어니와 그 중에 더구나 밥 을 지키고 있는 호랑이처럼 건너보고 앉았는 숙자의 집에 돈을 겉에 바르고 거만한 걸음으로 드나드는 한치각을 심상히 지나칠 리는 없었다. 그 중에 짖궂은 두 학생은 한치각이 숙자의 집에서 다녀나오는 것을 지켜 섰다가 길 을 막고 희롱까지 한 일이 있었으나 다행히 활극은 없었다. 그러나 속담에 심리상에 자라는 새움으로 학생 사이에는 때때로 숙자를 중심으로 한 한치 각의 이야기가 벌어 졌다.

학생1 “밤이면 기어드는 그 놈이 대관절 원 놈이야! 참 건방진 놈이던데.

그 놈을 그저 방망이로 엉덩이가 가뿐하게 한번 때렸으면 좋겠더라.” 학생2 “나는 그 놈의 해룡피 외투가 욕지기가 나대. 엉덩이는 왜 그렇게 내두르는지 참 마뜩치 않던 걸. 그놈이 돈으로 숙자를 꾀이러 다니는·놈이 지, 아마.”

학생3 (활동사진 변사의 어조로 “아아! 가련하다. 벌레 먹는 꽃이여! 황 숙자여! 철권남아들아! 숙자를 구원해라! 악마를 물리쳐라!”

이러한 실없는 여운이 그들의 저녁을 마침 식탁가에서 연출이 되었다. 그 중에는 장난을 지나서 막연한 공분을 느끼는 학생도 몇 사람 있었다.

58회 결혼? 행복? 눈물?

황숙자는 세상 아이들이 모두 즐겁게 뛰노는 정초가 다 지나가도록 낮이면 학교에나 다녀오고 쓸쓸한 방에서 나이보다는 몹시 겉늙은 자기 어머니가 돋보기안경을 쓰고 버선짝을 꿰매는 그 옆에서 학과를 복습하는 외에는 정 초라고 말 한 마디 재미있게 붙이는 동무도 없다. 이웃집에서는 날마다 아 이들이 떠들며 윷노는 소리, 언 땅을 울리며 철썩철썩 널뛰는 소리, 깔깔거 리는 계집애들의 웃음소리, 정초 놀이의 번화한 멜로디다. 달 아래의 찬 공 기를 울리며 담을 넘어 들린다. 어린 시대를 거의 다 보내도록 한 번도 정 초답게 지내본 일이 없는 숙자는 이웃집에서 재미있게 정초 놀이를 하는 것 이 자기 집과는 멀리 떠난 딴 나라의 광경 같이 들리었다. 남이 같이 새 비 단을 턱턱 끊어다가 설빔을 해 입을 처지도 못 되려니와 설혹 그러한 유렴 이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 같이 설빔을 자랑하여 세배 다닐 곳도 없었 다. 해마다 똑같은 쓸쓸한 정월을 지내왔지만은 이 해의 정초는 숙자 모녀 에게 너무나 서글픈 느낌을 주었다. 오과부의 마음에는 숙자가 한 살을 더 먹게 되고 또 금년 봄에는 학교를 마치게 되어 한편으로는 든든한 생각도 있으나 이렁성저렁성한 혼인 문제도 있고 장차 자기 딸은 누구에게 줄지 금 년에는 매어 맡겨 버릴 남의 사람이다는 생각이 가까워 오는 까닭에 든든한 뒤에도 막연한 고적을 느끼게 되었다. 숙자가 아침에 학교를 갈 때에 일 가 는 것처럼 자기 어머니가 “오늘은 정월 대보름날이다. 내가 너 좋아하는 떡볶이나 하여 놓을 터이니 학교 파하는 데로 일찍이 돌아오너라” 하며 이 른 대로 숙자는 일찍 집에 돌아와서 이른 저녁상을 마주 받고 자기 어머니 가 마음먹고 해놓은 떡볶이를 달게 먹었으나 그 밖에는 특별히 대보름을 위 하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뒷집 담 아래서는 한참동안 젊은 여자들이 깔깔 대는 웃음소리가 벌어 졌더니 또다시 철썩거리는 널 소리가 난다.

써느런 공기가 떠도는 방 안에서 희미한 십촉 전등을 내리 달고 숙자와 그 어머니는 마주 앉았다. 숙자는 복습하던 책을 갖고 자기 어머니의 버선 깁 는 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새삼스럽게 생각이 난 듯이 “어머니 오늘도 바느 질을 하시오? 보름날이라면서 왜? 명일날에 바느질을 하면 가난해진다고 안 그러셨소?”

“참 그렇구나, 깜빡 잊었구나. 발뒷꿈치가 뚫어져서 성이 가시기에 막아 신으려고 했더니 참 오늘은 보름날이구나.”

하며 꿰매던 버선에 바늘을 꽂은 채 옆으로 치워 놓으며 뉘우치는 듯이 “참 깜빡 잊어버렸구나. 가난하다기로 다 산 나야 무슨 상관이 있냐마는 너나 시집을 잘 가야지. 그러나 저러나 자 원수의 돈은 어쩌면 좋으냐? 벌 써 보름이 넘도록 안의관이라는 이는 오지도 아니하니 웬일인지 모르겠 다.”

“그냥 내버려두구려. 자기들이 억지로 떠맡기고 간 것을 어쩐단 말이요.

언제든지 내주면 고만이지.”

세상의 유형을 아직 모르는 숙자는 한치각을 물론 마음에 당기지 않는 위 인이라고 생각하나 돈 문제에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언제든지 그 돈만 그대로 돌려보내면 한치각과의 혼인 이야기는 아주 사라져 버리려니 하는 단순한 생각 밖에 없었다.

“얘, 세상이 하도 무서우니까 또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는지 아니? 그것 으로 마음이 꺼림칙해서 못 견디겠다.”

“어머니는 걱정도 많소? 요새 세상에 남이 싫다는 것을 억지로 데려갈까?

돈은 왜 누가 돈 달랬나?”

“글쎄 말이다. 일이 하 이상스러우니까 걱정이지. 그런데 너는 그이 한테 로 시집가기는 싫지?”

오과부는 다시 눈을 찡그리며 숙자를 들여다본다.

숙자는 눈을 흘기는 것처럼 오과부를 쳐다보며

“어머니도 딱하시오. 벌써 몇 번째나 물어 보시오? 그리 늙은이한테 누가 간단 말이오?”

오과부는 자기 딸에게 가벼운 퉁명을 받고 힘없는 소리로

“글쎄 말이다.”

오과부는 얼마 있다가 팔을 대고 들어 눕더니 종일 일한 곤함이 많았는지 어느덧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린다. 숙자는 턱을 팔로 고이고 전등 앞에 홀로 앉았다. 흔히 남녀의 행복, 청춘에 한번 피는 꽃, 눈물, 이러한 결혼에 대 한 막연한 생각이 고요한 숙자의 머릿속에 떠올라 온다. 윗집 담 안에서는 널머리에서 깔깔거리는 계집애들의 웃음소리가 또 들린다.

59회 안나는 미쳐가나

안나는 자살인지 과실인지 의문 중에 독한 최면약 아루날 한 병을 한번에 다 먹고 혼수상태에 빠진 채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 한치각의 집 단골 의사이니만큼 원장이 성력을 하여 치료를 하는 중이었으나 입원한 지 삼주일이 지나도록 특별한 효과는 생기지 못하였다. 한치각은 입원하던 날 과 그 다음날 저녁 때 ××병원에 형적을 잠깐 나타낸 뒤에는 다시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없다. 며칠에 한 번씩 상노를 보내어 안나의 동정을 물어보던 것도 나중에는 별 동정이 없다고만 들리는 데에 한치각은 아주 염 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릴 뿐이요, 다시 안나를 적극적으로 치료를 시켜보겠 다는 생각도 없고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

안나의 치료를 장담하고 맡은 의사는 그 동안 별 수단을 다 하여 회생케 하도록 애를 써 보았으나 안나의 정신 상태는 아직까지 몽롱한 모양이었다.

입원하던 날부터 모든 고가의 약을 다 써서 심장을 보호하며 영양주사를 계 속 하기 까닭에 생명은 그대로 붙잡아 가는 모양이나 의식은 아직까지도 혼 미한 상태에 있다. 입원한 삼 주일에 효험이 났다고 할는지 또 악증이라고 할는지 안나는 혼수상태를 계속 하다가 때때로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소스라쳐 놀라는 새 증세가 생기게 되었다. 침대 옆에서 밤이나 낮이나 떠 나지 아니하고 간호를 하는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가 수일 전부터 이러한 증 세가 생기게 된 것을 보고 어두운 마음에 또다시 새로운 슬픔을 거듭하게 되었다. 안나는 핼쓱한 얼굴을 힘없이 베개 위에 던지고 있다가 별안간 손 을 번쩍 들고 혼자 눈자위만 활동하는 그 눈으로 물끄러미 천정을 쳐다보다 가 어린애가 마치 경기를 하는 듯이 몸을 떨며 소스라쳐 놀라는 그 모양을 볼 때에 안나의 어머니는 가슴이 덜썩 내려앉으며 머리끝이 쭈뼛하는 놀라 움을 느끼었다. 스무 날이 놈도록 입을 열지 아니하는 자기 딸이 눈을 뜨는 기회에 말이나 한 마디 들어 보려고 그러한 발작들이 일어날 때마다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의 어깨를 흔들며

“얘, 얘, 왜 그러니?”

하며 눈물이 어린 눈으로 안나를 들여다보며 일깨웠으나 안나의 두 눈은 감 각이 있는지 없는지 몽롱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요 말 한마디가 없다.

안나 어머니의 생각에는 이러한 새 증세가 미쳐가는 시초나 아닌가 하여 마 음이 새로 캄캄하여졌다. 그러나 의사는 알고 그러는지 또 환자의 친척을 위로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나 그 증세는 염려할 거 없다고 말한다. 약 기 운에 마비되었던 신경이 차차 활동을 시작하느라고 그러한 동작이 생긴 것 이라고 설명을 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안나의 어머니의 마음에는 종시 의사 의 말이 믿어지지 아니하였다. 하여간 심상치 않은 증세로 보여서 다시 마 음이 타들어가게 되었다. 안나의 아버지 군침이는 자기의 귀한 딸이 극약을 먹고 생사를 판단치 못할 지경에 있는 중에도 며칠씩 집을 벗어나서 비밀 중에서 옮기어 다니는 노름판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말 한 마디 의논을 하 여 볼 데가 없는 안나 어머니는 날마다 송장 같이 드러누운 자기 딸을 애타 는 마음으로 지키고 있다. 이따가나 좀 나을까 내일이나 무슨 공덕이 있을 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그 날을 보내고 있으나 안나의 증세는 덜리 어 가지는 아니하고 하루 이틀 지날수록 안나는 점점 죽음 길로 가까워만 가는 것처럼 보이어 두 눈에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기울어진 석양빛이 병실 한 모퉁이로 힘없는 누르께한 광선을 던질 때에 의사는 겨우 진찰을 하러 들어 왔다. 처음에는 하루에 몇 번씩 드나들던 의사가 요사이는 싫증 이 났는지 하루에 한 번씩 진찰도 해 다 넘어갈 때야 비로소 안나의 병실을 찾게 되었다. 포켓트에서 청진기를 꺼내어 안나의 가슴을 헤치고 진찰하는 모양이나 모든 것이 그저 형식 같이 보였다. 의사도 안나의 치료에는 흥미 를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간단한 치료로 곧 소생할 줄로 믿었던 것이 종시 돌리지를 아니하고 질질 끌고 있는 중에 더구나 며칠 전부터 정 신이상 증세 같은 것이 때때로 발작이 되어 의사는 적지 아니한 실망을 가 지게 되었다. 의사의 진찰하는 것을 들여다보던 안나의 어머니는 날마다 판 에 박은 듯이 나오는 말로 또 물어 보았다

“좀 어떻습니까? 아주 죽지는 않겠습니까?”

희망에 어린 눈으로 의사를 쳐다보았다.

의사도 날마다 묻는 말에 새로 대답을 하여줄 아무 재료도 없다.

“네, 별일은 없습니다. 차차 낫겠지요.”

힘없는 말을 던지고 의사는 나아갔다.

안나의 어머니는 또 실망에 쌓여 한숨을 쉬며 안나를 들여다본다.

60회 안나는 어찌되나

의사가 염려하는 안나의 증세는 관연 정신 이상의 발작을 확연히 드러내게 되었다.

“아니요.”

피골이 상접한 몸을 침대 위에 별안간 일으키어 두 손을 버티고 친정을 쳐 다보며 깔깔 웃다가 다시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함부로 집어 뜯으며 울 기도 한다. 어젯밤에 자정을 지내면서부터 별안간 이러한 별증이 생기어 침 상 옆에서 어렴풋하게 잠이 들었던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가 별안간에 외마 디 소리를 치며 침대 위에 벌떡 일어앉아서 머리를 풀어 삼발하고 동자가 똑바로 선 두 눈을 훅 뜨고 깔깔거려 웃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까무러치듯 이 놀랐다. 흰 이불 속에 착 까불어진 몸을 파묻고 핼쓱한 얼굴을 천정에 향하여 죽은 듯이 누웠던 것이 벌써 수십일이나 되어 안나의 동작을 거의 잊어버리게 되었던 그의 눈에는 침대 위에서 그러한 괴괴한 동작을 하는 것 이 도무지 안나 같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 순간에 안나 어머니의 눈에는 어떠한 귀신이 달려들어 춤을 추며 안나의 신변을 침노하는 것 같이 보여 깜짝 놀라는 바람에 부지중에 소리를 치며 몸을 벌벌 떨리었다.

병실 옆방에서 잠이 들었던 간호원은 안나 어머니의 고함치는 소리에 잠이 깨어 결국 의사까지 병실에 모이게 되었으나 의사 역시 그 광경을 보고 입 맛만 다스릴 뿐이요 별 방도는 없이 보였다. 간호원과 가이 침대 위에서 일 어앉은 안나를 다시 누이고 응급수단으로 최면제의 주사를 놓았을 뿐이다.

의사는 자기의 책임 상 그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곧 한치각의 집으 로 전화를 걸었으나 한치각은 어디인지 출타를 하고 역시 집에는 없었다.

의사가 다녀나간 뒤에 안나의 어머니는 마음이 떨리고 무서움증이 생겨서 자기 혼자는 병실에 있을 수가 없이 되어 간호원의 힘을 빌려 밤을 밝히었 다. 안나는 한참동안 쌕쌕 숨을 쉬며 자듯이 누웠다가는 때때로 벌떡 일어 나서 괴상한 동작을 계속하였다. 안나의 어젯밤부터 발생한 변태는 누가 보 든지 미친증이라고 아니할 수 없이 되었다. 안나의 이러한 병증이 발작될 때에는 그 파리한 몸을 가지고 어디서 그런 새 기운이 생겼나 의심이 될 만 치 동작이 기운차 보이었다. 그러나 손발을 비롯하여 모든 동작을 하는 중 에 다만 입을 열어서 말을 도무지 아니한다. 입술을 싸서 겹쳐 물고 무언중 에 그러한 기괴한 동작을 계속할 뿐이었다.

안나의 어머니는 밤새껏 안나의 놀라운 증세를 옆에서 보며 가슴을 어여내 는 슬픔을 느끼었다. 안나는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당초에 약을 먹은 것도 안나 한 사람 외에는 다시 알 길이 없는 큰 의문이요 또 의사가 장담하고 소생시키겠다고 모든 방법을 다하여 치료한 것이 도무지 효과는 없고 이러 한 별증이 생긴 것도 알 수 없는 큰 의문이다. 담당 의사는 자기가 치료를 맡은 책임상으로든지 또 의사의 항례 상 견해로 보아서라도 어떠한 원인으 로 그러한 병증이 생기었냐고 설명을 하여야만 될 문제이나 보통 사람이 최 면제를 먹은 데에 응급 치료를 하는 일반치료법은 물론이요 매일 머리를 짜 내어 연구한 모든 치료법이 도무지 한 가지도 맞지 아니하다가 나중에는 이 러한 별증을 보게 되었으니 그는 의사로서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 러나 의사가 병을 치료하다가 못 고친다고 일일이 책임을 질 수는 없지만은 원인이 단순하니만큼 의사의 처지로는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의사도 이리 저리 머리를 짜내어 가며 그 원인을 연구하다가 결국은 최면 제를 먹기 이전에 안나의 신경 상태를 추구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의학상 으로 보면 최면제를 먹은 환자가 그 분량에 따라서 사망하거나 또는 체내에 독소가 침체 아니하면 응급 치료에 소생할 수도 있고 만일 독기가 뇌수를 범하였다 하면 뇌수의 활동을 쇠약하게 하는 일은 있다 할지나 별안간 기괴 한 동작을 일으키게 된 안나의 변태는 보통으로 보아서 설명할 수 없는 의 외의 증상이다. 의사는 연구타 못하여 결국은 안나의 약 먹던 이전의 정신 상태가 다시 재현된 것이라고 설명을 붙일 수밖에 없이 되었으나 안나가 약 먹기 전에는 일찍이 그러한 정신 이상의 상태는 한 번도 없었다. 안나의 병 상에는 의사도 알 수 없는 병기가 또 생기어 의문 속에 의문을 싸고 있다.

61회 안나의 깔깔 웃음

××병원에서는 안나의 병세가 돌변한 까닭에 원장은 이른 아침부터 한치 각의 집으로 전화를 걸며 안나의 어머니는 계집아이를 보내어 한치각을 청 하였다. 한치각은 오정 때나 가까이 되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겨우 병원 을 찾게 되었다. 한치각은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원장이 있는 방에 들 어갔다

“별안간에 딴증이 생겼다니 대관절 어떠한가요?”

한치각은 말을 붙였다. 의사는 미안한 모양을 지으며

“뜻밖의 별증이 생겨 그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는데요.”

의사는 마음이 무거웠다.

“정신에 이상이 생긴 거라니 그게 웬 까닭인가요?”

“글쎄올시다. 그러한 듯하외다. 의학상으로는 그런 변칙이 별로 없는 데.”

의사는 대답에 매우 주저하는 빛이 보였다. 보통 환자 같으면 자기가 생각 한 대로 획획 설명하여 버릴 터이나 근래에 영업하는 의사의 처지로는 한치 각이 같은 두둑한 단골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할 수는 없었다. 한치각의 불 만족한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닥터가 모르신다면 그럼 누가 안단 말이요?”

한치각은 샐쭉한 두 눈초리에는 가벼운 멸시가 떠돈다.

“책임은 내가 질 수밖에 없지요마는 예측 못한 병증이 생겼습니다.” 의사는 얼굴을 숙이며 말에 힘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의사는 한치각을 안 내하여 안나의 병실로 들어갔다. 의사의 뒤에서 한치각의 형적이 나타나자 안나의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두 손을 벌리어 한치각의 외투 자락을 부여 잡고 목이 메인 소리로

“나으리, 안나가 아주 미쳤습니다. 저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안나 어머니 두 눈에서는 더운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한치각은 잔뜩 찌푸 린 양미간에 어두운 빛이 가득하였다. 안나는 조금 전에 침대 위에 벌떡 일 어서서 두 팔을 공증에 들고 의미 모르는 웃음을 한바탕 웃더니 다시 침식 이 되어 죽은 듯이 드러누웠다. 한치각은 모자를 손에 든 채로 무서운 물건 을 대하는 것처럼 서먹서먹하는 걸음으로 침대 옆 가까이 갔다. 한치각의 두 눈에는 놀라는 빛은 없고 다만 험악한 분위기만 들리어 있다. 약 냄새가 가득한 병실 안에는 한참동안 무거운 침묵에 잠기어 있다. 한치각은 서먹서 먹한 마음으로 안나의 핏기 없고 두 눈자위가 푹 꺼진 얼굴은 물끄러미 들 여다보고 있을 때 안나는 무엇을 생각 하였는지 별안간 외마디 소리를 치며 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정신없이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치각 은 몸을 움찔하도록 물러서며 정식이 아뜩하도록 놀래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안나는 헝클어진 머리털이 얼굴을 덮은 사이로 동자를 똑바로 세운 두 눈을 누이며 옆에 섰는 한치각을 쏘아본다. 한치각의 시선이 안나의 그 무서운 눈과 마주칠 순간에 마음이 서늘하여 지며 무서운 독기를 뿜는 것같 이 느끼었다. 안나의 똑바로 뜬 그 눈은 용이 다른 편으로 옮기지는 아니하 고 날카로운 끝으로 찌르는 듯한 시선을 계속 하다가 얼굴을 들어 다시 천 정을 쳐다보며 찬 기운이 뚝뚝 드는 소리를 내어 깔깔 웃는다.

한치각은 그 웃음소리가 머리 쭈삣하며 등에 찬물을 끼얹는 듯하였다. 이 러한 의외의 광경을 본 한치각은 놀라기도 어지간히 놀랐지만은 찬바람이 나게 껄껄대는 안나의 웃음에 평생에 당하여 보지 못한 자기의 자존심에 침 해를 당한 것같이 생각이 되어 마음이 가라앉음에 따라 한편으로는 가벼운 흥분을 느끼었다. 만일 안나의 정신 이상을 예기치 아니하고 그런 웃음을 당하였다면 한치각의 손은 번개 같이 안나의 뺨을 쳤을 것이다. 돈으로 모 든 여성을 정복하려는 한치각의 앞에서는 그러한 냉소가 도저히 용납될 수 가 없었다. 그것은 자기의 행동이 부자연하니만큼 이면에는 그러한 여성들 의 냉소가 있을 것을 항상 예측한 까닭이다. 안나의 웃음이 일종의 미친증 에서 나온 것이지만은 한치각에게는 미친증 이상의 어떤 자극을 준 것이다.

안나는 여러 사람에게 부축을 당하여 두 눈을 꽉 감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의사는 미안한 빛을 내며

“저러한 악증이 생겼으니 내 병원에서는 완전한 치료는 못하게 되었습니 다.”

의사는 손을 놓았다는 의미로 말한다. 한치각은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침 묵에 쌓여 있다.

62회 인정 없는 사람

한치각은 한 달을 멀다하고 새 계집을 갈아 들이는 성질을 가진 사람이라 안나에게 애착이 떨어지기는 벌써 오래 전부터요, 수년 전부터는 안나에게 대하여 아무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니 안나가 별안간에 실성을 하였다 할지 라도 그렇게 크게 놀라울 것은 없지만은 당장 자기 눈앞에서 불쌍해서 차마 볼 수 없는 그런 가련한 의식 없는 동작을 하는 것을 보게 되어 마음이 어 두워졌다. 그러나 한치각의 이러한 마음의 그림자는 극히 가벼운 그림자이 다. 쉽게 말하면 길가에서 간질병을 가진 행인이 쓰러져서 공중을 허위대면 불쌍한 동작을 하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이 보고 곁눈으로 보고 막연한 동정 을 느끼는 것 같은 충동, 더 깊은 느낌은 없었다.

안나가 그러한 가련한 상태에 빠진 원인이 말하고 보면 자기 무책임한 관 심에서 생긴 것이니 보통 인정을 가진 사람 같으면 자기 스스로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쓰릴 터이나 원래가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특종의 개인 주의를 가진 사람이라 마음에 한 구석에 다만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게 되었 으나 그것은 안나에 대한 따뜻한 동정감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돌발 사건이 쓸데없이 생겨나서 자기를 공연히 그 와중에 끌어넣게 되었다는 번루가 한치각의 마음을 어둡게 한 것이다. 한치각은 보 통 사람이 상상치 못할 만치 극도의 이기주의에 기울어진 사람이다. 세상에 는 감정에 세례를 받지 못한 자기 마음대로 자기 행동에 최대한 자유를 가 지고 사회를 등지려 사람도 있지만은 물질의 조건이나 개성에 냉정함이 한 치각과 같은 인물은 드물 것이다. 이러한 한치각의 개성과 태도를 어느 점 으로 보아서는 철저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의 반면에 나타난 행동으로 보 면 여성에게만 향하여 적극적이고 다른 방면에는 지극히 소극적이다. 다만 그의 풍부하게 가진 색마성이 극도로 한편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그 반동 을 받아서 다른 방면에는 무관심한 상태를 가지게 된 것이요, 따라서 극도 의 이기주의 같이 보이는 것이다. 한줄기 가련한 희망을 가지고 자기 딸을 살려 내려고 단잠을 못 자며 안나의 침대 옆에서 간호를 하던 안나의 어머 니는 별안간 안나가 미친증을 시작하게 되어 눈앞에서 끔찍끔찍한 동작을 하는 안나의 모양이 애처롭기도 할 뿐 아니라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는 자기 내외의 고독한 신세를 생각하면 앞길이 캄캄하여졌다. 안나의 어머니는 울 다 못하여 원망에 쌓인 포악이 복받쳐 올라올 때도 있었다. 의사의 입에서 결국은 자기 병원에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선고를 들은 안나의 어머니는 가 슴이 딱 막히어 한참 동안 벙벙히 섰다가

“병원에서 저 병을 못 고치면 어떡하나요?” 안나의 어머니는 말이 떨리 어 목이 메었다.

한치각은 말이 없이 양미간만 찌푸리고 섰다. 안나의 어머니는 다시 외투 에 손을 대이며

“나으리. 어떡하면 좋아요?”

한치각은 몸을 피하며 “낸들 어찌하란 말이요? 자기들이 주의를 아니하여 이러한 일을 만들어 놓고 나더러 어떠하란 말이야.” 한치각의 어조는 동정 의 그림자는 고사하고 짜증이 똑똑 든다.

안나 어머니는 기가 막힌 것처럼 한치각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두 눈에는 원망의 핏줄이 내솟았다.

“나으리는 안나가 저렇게 된 것도 불쌍하지 않소? 당초에 누구 때문에 약 을 먹었는데요? 아무리 인정이 없는 이이기로…….”

안나 어머니의 두 입술은 떨리었다. 눈동자는 날카롭게 곤두섰다. 옆에 섰 는 의사는 안나 어머니의 별안간 변한 심상치 않은 태도를 보고 한치각에게 눈짓을 하며

“내 방으로 가시지요” 하며 한치각을 동독하여 병실을 나아갔다.

안나의 어머니는 두 손을 안나의 몸 위에 펴서 던지고 목을 놓아 운다.

의사와 한치각은 원장실에 마주 앉아서 안나의 처치를 의논하게 되었다.

“저 증이 생기면 크게 요란해질 터인데 참 성가신 일도 많군. 저 지경이 되고 질질 끌게 되면 사람이 성이 나서 견딜 수가 있나.”

한치각의 말은 그대로 자기 감정의 그림자를 쏟아 놓았다.

“참 모든 것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인제는 별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댁으로 퇴원이나 하여 가지고 안정하게 자연요법이나 하여 보는 수 밖에는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의사는 두 손을 비비며 미안타는 표정을 한다.

63회 양심을 속이는 그들

의사와 한치각은 원장실에 마주 앉아서 안나의 병에 대한 치료보다도 장차 어찌하면 소문이 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그대로 지나갈까 하는 방법을 연구 하고 있다. 의사의 말은 자기의 처지를 현명히 하기 위하여 안나를 다시 한 번 대학 병원 정신과 같은 데서 입원을 시켜서 정신에 감정을 하여 보는 것 이 좋겠다고 말하였으나 한치각은 응낙치 아니하였다. 한치각의 생각에는 도무지 안나의 사건이 어두운 이면에서 밝은데로 폭로가 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었다. 원래 안나가 약을 먹은 원인에도 큰 의문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동기로 안나의 입에서 그 비밀이 나올는지도 모르기 까닭에 안나를 자기 손 밖에 내어놓기를 염려한다. 한치각의 인정 없는 태도에도 의사도 적지 않은 놀라움을 느끼었다. 한치각은 안나가 벌써 폐인이 된 이상 섣불 리 문제를 세상에 던져서 남의 의심을 끌게 하느니 보다 인정에는 차마 못 할 일이나 깊은 방이나 치우고 그 속에 감금해 두었다가 다행히 그 병이 완 쾌하면 좋고 그렇지 아니하면 안온하게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인정 에 벗어나는 타산적인 생각이 앞을 서기 때문이다. 성욕에 첫 욕심을 차리 고 불 같이 타오르는 한치각의 색마성은 자기 목적을 달한 다음에는 다시 차돌 같이 냉정하게 변하는 것이 그의 특수한 태도이다. 안나에 대한 이런 몰인정한 처치가 그다지 놀랠 것은 없거니와 설마하고 한치각의 마음을 믿 고 있는 안나의 부모가 한치각의 내심을 만일 들여다본다 하면 이를 갈고 한치각을 복수코자 할 터이다. 한치각의 이러한 몰인정한 태도가 결단코 그 대로 나타나올 리는 없다. 따뜻한 어떤 가면을 쓰고 나올 것이니 이것이 이 른바 세상 사람이 권모술수라 하는 일종의 눈가림이다. 한치각과 의사가 이 야기를 계속 하는 중에도 두어 번이나 안나의 섬뜻한 외마디 소리가 두 사 람의 귓가를 스치며 지나간다. 안나의 아버지는 어느 놀음판에 파묻혔는지 며칠이 지나도록 행적을 나타내지 아니한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계속하던 한치각은 손 사이에 끼어 있던 여송연을 재떨이에 던지며 일어난다.

“그러면 곧 죽첨정 집으로 퇴원을 하도록 주선을 하여주시오” 하며 한치 각은 옆에 놓였던 모자를 쓴다.

의사도 따라서 일어서며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주선을 하지요. 그러나 아직 같아서는 발작증이 그다지 맹렬치는 아니하니까 그대로 지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만일 증세가 폭발적으로 변한다면 밖으로 뛰어나갈 염려도 없지 아니합니다. 간호는 특 별히 주의를 하여야 될 터인데 그 댁에는 힘써 간호할이도 없는 듯하니 여 기서 당분간 간호원을 하나 준비해 보낼까요?”

의사는 자기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시키던 관계 상 미안한 책임을 느 끼며 이러한 말을 하였다.

“그러한 무엇이 보입니까? 밖으로 뛰어나가게 되어서는 큰일인데.” 한치각의 얼굴에는 양 미간에 또 불안한 주름살이 보였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런 증세가 나중에는 폭행까지 발작이 되는 데가 많이 있습니다.”

“참, 사람이 성이 가셔서, 언제든지 좋도록 주선을 하도록 하지요. 나는 머리가 아파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치각은 모든 것이 성이 가신 모양으로 한 시각이라도 빨리 병원을 벗어 나가는 태도로 서성이고 있다가 원장실을 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의사는 한 치각이 돌아간 뒤에 안나의 병실에 들어와서 무거운 어조로 안나의 어머니 에게 퇴원할 준비를 일렀다. 안나 어머니는 별안간 놀랬다.

“여기서는 아주 고칠 수 없게 되었습니까?”

안나 어머니는 낙망의 얼굴로 의사를 쳐다본다.

“아주 그런 것도 아니지마는 우선 댁으로 데리고 나서 조용한 방에서 편 안하게 치료를 하는 것이 도리어 나을 듯합니다. 그리고 한참봉께서 차차 동정을 보아서 다른 병원으로 입원을 시키시라 말씀하셨으니 다시 염려하실 것은 없소이다.”

의사는 한치각의 따뜻한 가면을 쓴 충실한 대언인이었다. 안나의 어머니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아니할 수는 없었다. 절망 중에도 한참봉이 잘 치료를 하 게 한다는 말에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그날 저녁에 가련하게 미쳐버린 자기 딸 안나를 운반하여 죽첨정 집으로 퇴원을 하였다.

64회 여점원에게 팔려서

한치각은 병원의 대문을 벗어난 것이 마치 고약한 술에 취하였다가 깨인 것 같은 시원함을 느끼었다. 쓸데없는 구중중한 번루가 자기 몸을 괴롭게 하던 그 구덩이를 벗어나게 되어 마음이 거뿐하여졌다. 한치각의 머리에는 병원 대문에서 발을 내어놓자 안나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는 어 찌 되었던지 안나의 일은 이것으로 한 단락을 지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 마음을 작정하여 버렸다. 한치각의 머릿속에는 요사이 황숙자의 숫적은 모양이 큰 선을 지어 꾸물 거리는 중이라 그는 병원을 떠 나며 또 숙자의 그림자가 머릿속에 떠돌았다. 병원에서 마음에 없는 성가심 을 받던 불유쾌한 흔적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중에 한 달이나 두고 침만 바 르고 목적을 달지 못한 숙자의 일이 슬그머니 심증이 나게 되어 중간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안의관에 대한 불만이 생기게 되었다. 한치각은 날마다 대령하라는 분부를 내린 안의관과 황치삼이 자기 집에 와서 있을 것을 짐작 하고 곧 집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종로 네거리에서 다시 생각하고 화신상회 로 들어가 전화를 걸게 되었다. 그럭저럭 저녁 네 시가 되어 그는 매일 밤 빛 따라서 여성이 웃음을 던지는 화류장으로 발을 향할 때가 가까워 오는 까닭에 안의관과 황치삼을 불러내어 오늘은 강경한 담판을 할 예정으로 전 화를 걸게 된 것이다. 해룡피 외투를 두 어깨에 턱 접어치우는 한치각의 태 도는 누가 보나 돈냥이나 있는 사람으로 아니 볼 수는 없었다. 화신상회 아 래 위층에 푸른 사무복을 입고 틈틈이 늘어선 여점원들은 한치각이 지날 때 마다 뽀얀 얼굴을 들어서 자기를 주시하는 것이 마음에 무상히 유쾌한 느낌 을 주어 어떠한 조그만 승리를 얻은 것처럼 스스로 만족하였다. 한치각은 이리저리 전화통을 찾다가 3층 한 모퉁이에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눈이 쌍꺼 풀진 여점원이 손으로 턱을 괴고 고객를 기다리고 섰는 자리미에 매달린 전 화통을 발견하였다. 구태여 여점원이 섰는 그 전화통을 빌어서 하는 목적은 아니지만은 여점원의 얼굴에 눈을 팔리게 된 한치각은 여점원의 얼굴과 동 시에 다행히 전화통까지 시선이 들어오게 되어 결국 그 전화를 빌리게 된 것이다. 한치각의 두 눈초리는 가늘게 좌우로 열리며 여점원 앞으로 뚜벅뚜 벅 걸어갔다. 입에는 의미 없는 미소가 나타나며

“전화 좀 빌리우?”

한치각의 입에서는 보통 사람이 사용하는 경어는 용이히 나오지 아니하였 다. 그러나 어조는 상대가 여성이니만큼 두렵기도 하려니와 끈적끈적하였 다.

여점원은 서비스의 웃음을 던지며 몸을 일으키어 “예, 어서 하십시오.” 한치각은 다시 여점원의 말하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전화통을 떼어 들고 자 기 집에 전화를 하였다. 안의관과 황치삼을 비롯하여 사랑에 모이는 소위 병정들은 여전히 늘어앉았는 모양이다. 한치각은 전화통을들고

“아, 누구야? 심인가? 안하고 좀 바꿔주게.”

“응, 안의관인가? 오늘은 무슨 새 동정이나 있나? 없어? 쓰잘데가 그렇게 없고 무얼 한단 말인가? 거기 황도 있지? 그러면 곧 황하고 진고개에 강호 천으로 오게. 알지? 내가 지금 그리 갈 터이니 곧들 나오게. 자네하고 둘이 만 강호천으로 와.”

한치각의 전화는 옆의 사람이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요, 내용을 아는 사람 은 없다. 한치각은 마치고 또 내용도 의미도 모르는 미소를 여점원에 던졌 다.

“전화를 잘한 대신에 그 값으로 물건이나 사가지고 갈까?”

하며 또 여점원을 쳐다본다. 한치각의 물건을 살 생각은 전화를 빌어 한 보 상인 것보다 솔직하게 말하면 어딘지 차밍을 가진 그 여점원의 냄새를 좀더 맡자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한치각은 여점원을 데리고 진열상에 시선을 던지며 돌아다니었으나 반드시 사야만 할 물건은 없었다. 결국은 양말 한 켤레를 사가지고 이리저리 그 옆을 거닐다가 진고개로 향하였다.

65회 일본 요릿집의 밀의

한치각은 고객을 부르는 여점원의 서비스 웃음에 마음에 끌려서 필요치도 아니한 양말을 사가지고 “안녕히 가십시오” 하는 여점원의 앳된 소리를 귓가에 남기며 화신상회를 나와 진고개로 향하였다. 그는 날마다 되풀이를 하는 여성 탐방이 마치 한 사업 같이 되어 하루라도 피할 수 없는 사무이 다. 양편에 늘어선 상점들의 높은 지붕이 머리 위에서 입을 맞추게 된 좁은 진고개 길에서 행인들의 어깨를 부비며 좁은 개천의 물 내려가듯이 몰리는 복잡한 사람의 틈으로 한치각은 포도나무 뿌리 단장을 두르며 완보를 던진 다. 많은 사람들은 다 각각 자기 일에 바쁜 듯이 또 추위에 물리는 듯이 고 개를 숙이고 종종 걸음을 치며 지나가는 중에 오직 한치각 한 사람은 추위 도 모르고 바쁜 일도 없는 사람 같이 거만한 시선을 무겁게 좌우편으로 던 지며 강호천으로 향한다. 한치각의 형체가 강호천에 나타나매 신발지기는 대끝으로 찌르는듯한 땡땡한 소리를 쳐서 하녀를 불렀다. 중년하녀는 소리 에 겉묻어서 종종 걸음으로 나오며 선웃음으로 한치각을 맞는다. 한치각이 비밀실 같이 정하고 다니는 요릿집이라 현관에 앉은 신발지기를 비롯하여 요리집 모든 하녀들은 한치각과 어지간히 두터운 안면이 있다. 하녀는 한치 각을 안내하여 이층으로 올라가다가 한치각의 등을 툭 치며 한손을 들어서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려 보인다. 하녀의 이런 암시는 물론, 오늘도 계집이 오느냐를 묻는 것이었다. 한치각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한치각은 이 요릿집의 가장 구석에 있는 휘모진 팔방을 거의 맡아 놓다시 피 하고 다니는 터이다. 하녀는 다시 묻지도 아니하고 우중충한 그방으로 안내를 하였다. 얼마 있다가 연통 안의관과 요새 새 방정으로 등장하게 된 황치삼이 중밥에 매와 같이 달려들었다. 그리하여 황숙자의 고기를 억지로 매매하려는 악마의 연극은 장차 개막하게 되었다.

한치각은 그들에게 위압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때는 반드시 고가 의 굵다란 여송연을 먼저 피어 무는 것이 항례이라 상좌에 앉아서 몸을 기 대었던 한치각이 은갑에서 여송연을 꺼내자 연통 안의관은 두 손을 분주하 게 활동을 하며 허둥지둥 성냥불을 켜 대었다. 한치각은 이 좌우 구비로 하 얀 연기를 솔솔 흘리며 비쭉한 여송연의 한 끝을 입술 새에 끼우고 말을 내 이기 시작한다.

“여보게, 안 그래, 아주 소식이 없다는 말이야? 이거 속담의 상말로 동네 새악시 믿고 장가 못 가는 격인가? 참, 우스운 일도 많군.”

한치각의 말은 약간 회담이 섞이었으나 보통 때와는 어조가 무거웠다. 안 의관은 신경이 움직이지 아니하는 웃음을 억지로 입가에 나타내며

“원, 조급하게도 구시오. 우물에 가서 숭늉 찾겠소.”

한치각은 안의관의 말이 채 끝나지 아니하여

“또 기다리라는 말이야? 벌써 이태나 걸쳤어. 그래도 나쁘단 말이지? 시 간이 모자라거든 숫제 항복을 하고 내놓지. 남의 헛애만 먹이지 말고.” 한치각과 안의관이 말이 두어 번 왕래하는 것을 듣다가 황치삼도 역시 그 모사 중에 극한 사람이라 잠잠히 앉았을 수는 없었다.

“숙자는 처지가 다르니까 그렇게는 쉽게 못 다룹니다.”

황치삼도 입을 열었다. 한치각은 안의관이 권고하는 대로 숙자를 자기 손 에 넣자면 일가가 된다는 황치삼의 손을 비는 것이 첩경이라 생각하고 모든 활동을 황치삼에게 맡긴 것이나 병정으로 부리게 된 일자가 아직 얕은지라 안의관 같이 마구 다루기는 좀 서먹서먹한 생각도 있기 때문에 맞은 편 꼬 집기로 안의관만 좁혀대는 중이나 실상은 황치삼에게 실권이 있는 것을 짐 작하는 까닭에 이 자리에서도 공연히 안의관을 족쳐서 한편으로는 황치삼의 행동을 동독하려는 것이다.

“숙자는 다르다니? 그럼 숫새악시는 시집도 아니 간단 말이오?” 한치각은 황치삼을 말을 비비꼬는 모양으로 이렇게 반문을 하고 황치삼의 얼굴을 보았다. 황치삼은 허둥지둥하며 “아니올시다. 그런 말씀이 아니라, 논다니 계집과는 다르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돈을 오백 원이나 봉치 싼 세음으로 보내지 않았소. 그리고 마 음에 합당만 하면 내가 장가를 들기라도 할 터인데 무슨 상관이 있소?” 황치삼은 한치각의 장가를 든다는 말의 의미를 미처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 으로 앉았다.

66회 눈을 어리는 뒷모습

우중충한 방 안에서 악마의 선웃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강호천 팔방에 는 술병과 유리 접시가 상에 가득히 늘여 놓였다. 두 눈이 풀려오는 안의관 이 여윈 뺨에 도화색이 질린 황치삼, 여송연을 입술 흔드는 한치각의 세삼 람이 정종, 왜전골 냄새가 한데 엉클어져서 담배 연기 위에서 춤을 추는 그 안에서 식탁을 식탁을 에워싸고 숙자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황은 우리 집에 다닌 지가 얼마 아니 되니까 자세히 모르겠지마는 내가 그렇게 박한 사람은 아니요. 설혹 숙자를 내게 맡긴다 하더라도 결단코 염 려할 것은 없소. 신식 살림을 하겠다면 양옥집도 있고 또 조선식으로 살겠 다면 큰 기와집에 긴 치마를 입혀서 사인조까지도 대어줄 터인데 무슨 걱정 이 있소? 여보게, 그렇지 않은가?”

한치각은 계집의 마음을 미혹케 하는 전래의 수단인 돈 자랑을 또 시작한 다. 안의관은 그저 지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암, 그렇고 말고. 지금 재산으로 하든지 인품으로 하든지 다시는 없지.

말을 해 무얼 해? 치삼이도 물론 짐작을 할 터이지만.”

황치삼은 천의 하나도 성공에 자신이 없는 토지 중개를 하느니보다 한치각 에게 이런 기회에 잘 매달리면 큰 수나 생길 것 같이 마음이 솔깃하였다.

“그야 다시 말씀할 것도 없지요마는 원체 과부살이를 오래 하던 이가 너 무 외곬스레 나가는데 아주 질색을 하겠어요. 그러나 한참봉께서 그렇게 마 음에 드신다면 전력을 다해서라도 숙자는 바치도록 하지요.”

황치삼은 장담한다는 뜻을 보인다. 한치각은 입가에 정욕을 연상하는 웃음 이 흐르며

“글쎄 말로들만 장담을 하면 뭘 하오? 얼른 성공을 해야지. 오과부가 종 시 안 들으면 낭패가 아니오.” 한치각은 말을 마치고 황치삼을 쳐다보며 대답을 계속한다.

황치삼은 마치 계획이 아니 생긴 것처럼 “글쎄요” 하며 이마에 손을 대 고 고개를 숙였다. 안의관은 대답에 몰리는 황치삼을 두고 하는 것처럼 “참봉도 딱하오. 그렇게 찬밥 먹듯이 쉽게 될 수야 어디 있소? 시집을 가 고 장가를 드는 일륜 대사인데. 하하.”

안의관은 말끝을 너털웃음으로 돌려서 좌중에 급박한 공기를 완화시키려 한다. 가는 주름살이 얼킨 중년 하녀는 술병을 가지고 들어오더니 세 사람 의 얼굴을 휘휘 둘러보며 웃음이 섞인 말로

“오늘은 왜 이렇게 얌전들 하신가? 사나이 냄새만 나고 하하.” 하녀가 던지고 나간 이러한 일본말의 의미를 다 알아 듣지 못하는 안의관 은 눈이 휘둥그래서 하녀의 나가는 뒷모양을 바라보고 있다.

한치각의 대답을 독촉하는 말은 또 황치삼의 가슴을 찔렀다.

“황, 여보, 그럼 이 자리에서 아주 작정해서 말을 하오. 어느 날 된다는 것을 최소 기한을 두고 아주 단정을 해서 말을 좀 해요.”

한치각은 웃음을 띠고 황치삼의 옆으로 가까이 당겨 앉으며 황치삼의 무릎 을 손으로 흔들었다. 황치삼은 눈을 깜빡거리며

“글쎄요, 날짜는 작정할 수 없는데요.”

한치각은 또 황치삼의 무릎을 손으로 흔들며 마치 어린애가 조르듯이 “그러지 말고 꼭 좀 되도록 해주어요. 내 운동비는 얼마든 쓸 터이니.” 한치각은 양복 뒷주머니에 앞 돈으로 집어넣었던 백 원짜리 지전 봉지를 꺼내어 황치삼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황치삼의 눈에는 별안간에 시뻘건 욕 심의 핏줄이 가로 질렀다. 안의관은 한치각의 주머니에 돈뭉치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그렇게 빛만 뵈지 말고 아주 두둑히 운동비를 맡기구료.”

한치각은 안의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쾌활한 어조로

“그야 물론이지. 속히 성공만 하면야 이백 원 삼백 원 같은 돈이야 어느 때든지 내놓지 하하.”

황치삼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계획이 생긴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끄덕 하더니

“한참봉께서 그렇게 마음을 쓰시는데 날마다 술만 얻어먹고 다니기만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숙자의 일은 일주일 안에 꼭 성공을 하도록 힘을 쓰 지요.”

황치삼은 대단한 결심을 한 듯이 말하였다. 한치각은 얼굴에 만족한 빛을 나타내며 소리를 쳐서 웃었다.

67회 괴이한 집알이

오과부의 큰 걱정거리던 안의관이 무리로 떠맡기고 간 오백 원 문제는 날 이 갈수록 심상히 내버려 두게 되었다. 날마다 안의관이라는 사람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오과부는 그 후에 한치각의 편에서는 무슨 까닭인지 발을 똑 끊게 되어 일종의 의문으로 지나는 중이다. 그 돈 오백 원은 과연 안의관이 말한 듯이 순전하게 세찬으로 보낸 것인가 하고 오과부는 세상에 후한 사람 도 있다 하는 생각으로 그대로 지나는 중이다. 돈에는 도무지 손을 대지 아 니하고 벽장 손궤 속에 깊이 간수하여 두었다. 비록 세상 일에는 단련이 적 은 오과부이나 그 돈을 함부로 썼다가는 나중에 거북한 일이 생길까 하는 의심이 마음에 생기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이다.

정월이 거의 다 지나가게 된 이때에 철 늦게 눈이 와서 좁은 마당이 나마 혼자 손에 쓸 새가 없어서 남겨 두었던 눈을 오과부는 모자라진 비로 쓸어 붙이는 중에 생각지도 아니한 황치삼이 뛰어 들었다. 황치삼의 모양은 어디 서나 수가 생긴 듯이 요사이 차리고 다니는 것이 전보다는 매우 깨끗하여 보인다. 오늘은 양속 두루마기에 노랑빛 새 구두를 신고 항상 궁기가 더럭 더럭하는 그의 얼굴은 어쩐 일인지 겁기가 걷고 매우 밝아 보인다. 황치삼 은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정이 뚝뚝 떨어지는 어조로 흥감을 떨며

“아이고, 아주머니께서 이 추위에 손수 마당을 쓰시네. 대체 부지런도 하 셔. 숙자도 잘 있고 다른 연고는 없습니까?”

황치삼은 마루 끝에 앉는다.

“네. 별일 없습니다. 아주버님 댁에도 다 무고하신가요?”

오과부는 수줍은 여인들이 간단히 치르는 인사의 말을 겨우 하였다.

“아주머니는 손도 안 시리시오? 눈을 내가 쓸어 드리리다” 하며 마루 끝 에서 황치삼은 다시 몸을 일으키어 오과부의 옆으로 가까이 가며 오과부의 옆으로 가까이 가며 오과부의 손에 든 비를 빼앗으려 한다.

오과부는 자기 혼자만 있는데 황치삼이 별안간 달려 들어서 자기 몸으로 가까이 붙는 것이 마음에 싫은 생각이 나서 몸을 피하며 “고만 두셔요. 다 쓸었는데요” 하며 사양을 한다.

“오늘은 아마 토요일이지요? 오래지 않아 숙자도 곧 돌아오겠군요.” 황치삼은 이상스럽게 오과부가 몸을 피하는 것을 보고 멀쓱하니 몸을 마루 끝에 앉으며 딴 이야기를 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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