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오늘은 학교에 무슨 기념 날이라나요? 공부는 안 한다니까 곧 오겠 지요.”
오과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쓸어붙이고 있다.
황치삼은 조끼주머니를 들썩하더니 시계를 꺼내어 보며
“아이고, 벌써 오정이나 되었네. 오늘은 오래간만에 숙자를 데리고 가서 집알이나 시키려고 했는데.”
오과부는 숙자를 데리고 간다는 황치삼의 말에 놀랐으려니와 집알이라는 것도 이상하게 들리어
“집알이라니요? 누구의 집알이에요?” 오과부는 마루 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 황치삼을 쳐다본다.
“네, 제가 작년 섣달에 이사를 했습니다.”
“어디로 떠나셨어요?”
“저 동소문 밖에요. 어떤 친구가 가지고 있던 정자인데 당분간 들어 있으 라고 해서, 그래, 이사를 했습니다. 내 집은 아니지마는 기와집이 사오십간 되고 정원이 좋은데요.”
황치삼의 말에 오과부는 놀라는 듯이
“네, 참 잘되었습니다그려. 그래서 요새는 살림이 좀 나셨지요?.” “그리고 작년 섣달에는 땅 흥정을 하나 붙였더니 돈 백 원이나 생겨서 정 초를 잘 지냈습니다.”
“아, 운수가 차차 틔시나 보외다. 어쩐지 신수가 전보다 아주 훨씬 나으 신 걸요.”
“나으면 뭐합니까? 손에 묻은 밥풀이지요.”
“그래도 차차 형편이 나아가시면 좋지요.”
“그런데 오늘은 막내 놈의 돌날이라나요? 집에 마누라는 숙자를 본지가 오래 돼서 한번 보고 싶다고 애를 쓰기에 겸두겸두해서 내가 왔습니다. 온 집안들이 어찌 고적한지 서로 찾아다닐 집도 없다고 마누라는 아주머니 댁 이야기뿐이지요. 오늘도 모처럼 왔으니 숙자를 하루 빌리시지요.” 황치삼은 말은 어두운 구석이 없이 술술 풀렸다. 오과부는 무엇을 생각하 는지
“글쎄요, 이따가 숙자가 오거든 의논해서 데리고 가시지요.”
황치삼은 너무나 사려가 많다는 듯이
“의논 여부가 무어 있습니까? 아주머니도 딱도 하시오. 일갓집에 가는 것 을 의논해 볼 건 무엇이 있습니까?”
황치삼과 오과부의 사이에 이야기가 벌어진 중에 숙자가 들어왔다.
68회 마음에 없는 방문
숙자는 뜻밖에 황치삼이 와서 앉았는 것을 보고 어쩐 일인지 마음에 선뜻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라고 집어내서 말할 수는 없는 일종의 막연한 느낌이었다. 깨나 자나 사나이의 형적이 없고 모녀 두 사람만 사는 가정에 별안간에 눈 서툴러 보이는 남자가 마루 끝에 걸터앉은 것을 보니 그러한 순간이 순간의 충동을 느끼게 된 것은 큰 의문은 아니었다. 숙자가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바꿔 입은 다음에 비로소 오과부는 황치삼을 안내하여 세 사 람이 안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추운 겨울에 자기 집으로 찾아온 사람을 곧 따뜻한 방으로 안내하는 것이 보통 인정이나 전형적 과부 생활을 해오던 오과부는 나이는 오십이 불원하였지마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남자와 마 주 앉아서 수작을 하는 것이 마치 무슨 죄나 짓는 것 같이 생각이 되어 황 치삼을 이때까지 마루에 앉힌 것이었다. 황치삼은 숙자와 마주 앉아서 궐련 을 피우며 숙자의 두 뺨에 불그스름하게 익어가는 것이 나타나는 것을 쳐다 보며
“숙자도 이제 아주 새악시 티가 딱 박혔는데. 내가 여기를 다녀가면 반드 시 숙자의 커 가는 이야기를 하니까 마누라는 하도 보고 싶어서 애를 쓰는 모양이야. 오늘은 아저씨가 마중을 왔으니 집알이 겸해서 한번 가지? 지금 어머니께도 청을 하였지만은 일갓집에 서로 찾아다니는 데에 무슨 상관이 있나? 그리고 우리 집 산정 사랑은 내다보는 경치도 좋거니와 공부를 하기 는 아주 맞춘 방이야. 종일 가야 사람의 소리 하나 아니 들리고 시험공부 같은 때에는 참 훌륭한 방이지. 그래, 한 번 가서 집 구경도 하고 마음에 들거든 그 방에서 시험공부도 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황치삼은 아무쪼록 숙자의 호기심을 끌려고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숙자는 별안간에 무슨 말인가 하고 듣고만 앉았는 중에 오과부는 처음에 황 치삼이 말하던 일장을 되풀이 하여 결국 숙자를 데릴러 왔다는 것을 설명하 였다. 자기 어머니에게 자세한 말을 들은 숙자는 가보고 싶은 호기심도 없 지 아니하나 또 한 편으로는 서먹서먹한 생각도 나서
“글쎄, 어머니 어떡할까?” 숙자는 주저하는 빛을 나타낸다.
황치삼은 아 기회에 바짝 채치자는 듯이
“내일이 공일이고 한데 시원한 바람도 쏘일 겸해서 나하고 같이 가자꾸 나. 요사이 학생들은 먼 데를 다 다니는데 일갓집 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 워? 참 숙자는 너무 옛날 새악시야. 저대로 부끄러워서 시집을 어떻게 가 노? 하하.”
황치삼은 의미 없는 너털웃음을 내놓았다. 숙자와 오과부는 아무 말 없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앉아 있다. 두 사람의 마음 가운데에 황치삼이 일부 러 와서 일가라고 하면서 한번 오라는 것을 까닭 없이 거절할 수 없고 또 함부로 내놓지 않던 자기 딸을 보내기도 마음에 놓이지 아니하였다. 오과부 는 얼른 말을 내지 않고 숙자 역시 황치삼이 같이 가자는 것이 어쩐 일인지 마음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 사람이 먹먹히 앉은 것이었다. 황치삼은 선선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조금 부족하게 생각하는 듯이 안색을 고치며 “아주머니도 퍽은 사려도 하시오. 숙자를 데리고 가서 내가 어디다가 팔 아를 먹는다 말씀이요? 참 너무 심하게 구시는구려. 넓은 서울서 서로 한 집안 일가라고 우리는 믿고 있는데 왜들 그리 서운하게 구신단 말씀이오?” 황치삼은 얼굴에 미흡한 표정을 나타낸다.
오과부는 황치삼이 성을 내며 권하는 바람에 차마 뗄 수가 없어서 “아저씨께서 모처럼 그러시니 그럼 잠깐 갔다가 오려무나. 집이 하도 좋 다니 집 구경도 하고.”
황숙자는 마음에는 당기지 아니하나 자기 어머니가 그렇게 허락을 한 이상 에 황치삼의 앞에서 차마 반대를 할 수는 없었다. 황치삼은 오과부의 허락 하는 말을 듣더니 다시 얼굴빛이 부드럽게 변하였다. 숙자는 나들이옷을 꺼 내어 가지고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숙자는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어 쩐 일인지 마음이 울렁거리며 자기 싫은 마음이 나서 건넌방에서 한참동안 주저하였다. 황치삼은 벌써 마루로 나오면서
“아주머니께서 기다리실 터이니까 얼른 다녀와야지. 그러나 만일 늦게 되 면 또 내가 데리고 올 테니까 아무 염려 마십시오.” 황치삼은 숙자를 재촉 하여 앞에 세우고 대문 밖을 나섰다. 오과부는 대문간에 서서 염려하는 마 음으로 숙자가 대문 밖으로 형적을 감추기까지 바라보고 섰다. 이 날은 황 치삼이 한치각에게 한을 한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다.
69회 귀신이 춤추는 마궁
황숙자는 마음에 그다지 당기지는 아니하나 황치삼의 앞에 서서 사동 큰 길로 나왔다. 나들이라고는 별로 다녀보지 못하던 숙자는 어쩐지 마음이 놓 이지 아니하는 가벼운 불안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치삼이 자랑에 말하 는 그의 집이 과연 얼마나 경치가 좋은가 하는 호기심이 없지도 아니하였 다. 황치삼은 당초에 의심하였던 숙자를 기어코 끌어 내어 계획한 연극이 거의 성공에 들어섰다는 믿음성이 생기었다. 숙자는 전찻길에 나서며 걸음 을 주저하였다. 황치삼의 집이 동소문 밖이라고 말을 들었지만은 전차를 타 야 할는지 또 버스를 타게 될는지 황치삼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이 된 숙자는 황치삼의 안내를 기다리게 된 까닭이다. 황치삼은 숙자가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숙자, 오늘은 아저씨가 자동차 한번 태워줄까?” 황치삼은 숙자의 옆으 로 가까이 다가서며 숙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숙자는 자동차라는 말에 얼 른 버스를 타자는 의미인 줄 알고 “그럼 공원 앞으로 가야 버스 정류장이 있지요.”
하며 걸음을 공원 편으로 옮겨 놓으려 한다. 황치삼은 급히 “아니야 버스 는 왜? 아저씨가 훌륭한 독 자동차를 태워 준다니까. 아마 숙자는 독 자동 차는 못 타보았을 걸? 그럼, 우리 요 위로 올라가서 택시를 불러 타고 가 지” 하며 황치삼은 숙자를 데리고 종로 편으로 향하여 올라가려 하는 즈음 에 마침 빈 자동차 한 채가 지나가는 것을 불러서 황치삼과 숙자는 올라 탔 다.
숙자는 황치삼이 말하듯이 택시를 타보기는 첨이다. 자동차 안에서 남자와 나란히 걸터앉아서 가는 것이 마음에 부끄럽기도 하고 또 서먹서먹한 생각 도 있어 고개를 숙이고 한편 옆에 몸을 감추어 앉았다 자동차는 전차 선로 를 옆에 끼고 동대문 편을 향하여 아스팔트 위로 바퀴를 구르며 달아난다.
숙자는 버스를 탔을 때 현기를 느꼈을 때에 자동차 속에서 또 그런 이상한 기분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나 택시를 타는 기분은 전연히 딴판이었 다. 얼음위에 팽이 돌아가듯이 바퀴는 소리조차 아니 들리고 좌우에 늘어선 시간은 물 흘러가듯이 지나친다. 숙자는 의외의 상쾌한 맛을 느끼었다. 자 동차는 통안병문을 지나서 한참 달아나더니 다시 성벽을 끼고 성북동 송림 새로 휘어 들었다.
숙자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여기도 자동차 같이 생겼어요? 참 퍽은 변했네. 뜰도 많아지고.” 숙자는 수년 전에 학교에서 원족을 왔을 때에 보던 것과는 많이 변한 것을 놀랬다.
황치삼은 무엇을 정신없이 생각하고 있다가 숙자의 말소리에 얼굴을 숙자 편으로 휙 돌리며
“숙자도 언제 여기 와 보았나? 아주 전과는 딴판이지. 해마다 양옥집들이 늘어가고.”
“아주 퍽 변했어요. 연전에 원족을 왔을 때와는 아주 딴 세상이 되었는데 요?”
“암 그렇고 말고 해마다 달라 가는데 학교에서 원족을 이리로 왔더란 말 이지?”
“네, 1학년 때 왔었어요.” 자동차 안에서 두 사람의 이러한 이야기가 계 속 되는 동안에 자동차는 성북동 장찬 골짜기를 다 지나여 청룡암 앞을 들 어가는 돌다리 앞에 이르자, 운전수는 불만이 섞인 어조로 “퍽은 들어왔 다. 이제는 더 못 갑니다. 이 차는 또 어떻게 돌려?” 하며 자동차를 멈추 고 운전대에서 내렸다.
황치삼과 숙자도 내렸다. 황치삼은 택시 값을 치는 다음에 숙자를 앞에 세 우고 돌다리를 건너서 송림이 우거진 새로 좁은 길을 따라 들어섰다. 눈 위 로 들어서는 바람은 아직까지 겨울 추위가 남아있으나 도회를 떠난 찬 사이 에서 흘러나오는 신선한 공기는 숙자의 머리를 가볍게 하였다. 성북동 초입 에는 어지간히 많은 집들이 늘어섰더니 깊이 들어올수록 집들이 희소하여 돌다리를 건너면서는 전에 보던 쓸쓸한 시골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숙 자는 산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마음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퍽은 먼데요? 이제 얼마나 더 남았어요?” 하며 숙자는 물었다.
황치삼은 비로소 깨달은 듯이
“왜? 왜 그래? 다리가 아픈가? 이제는 다 왔어. 저 골짜기에 나무 새로 보이는 기와집이 있지? 바로 그 집이야” 하며 황치삼은 손을 들어 건너편 에 산골을 가리켰다. 숙자의 눈엔 우중충한 골짜기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쇠락한 기와집이 마치 아귀들이 들썩거리는 마궁 같이 보여서 마음이 쭈뼛 하였다.
70회 이상한 휘파람 소리
숙자는 황치삼의 뒤를 따라서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걸어간다. 산기슭이 매달린 좁은 길을 지나 얼음위에 모진 돌이 쭉쭉 내밀은 시내를 건너서 두 다리가 힘이 풀리도록 얼마를 걸어왔다. 자동차를 내리던 곳에서 황치삼이 가리키던 그 정자는 빤히 보이면서도 어지간히 먼 거리에 있었다. 숙자는 시골길을 걸어본 경험이 없는 까닭에 좁은 산길에 울퉁불퉁 내밀은 돌부리 에 함부로 부딪혀서 새로 신은 구두는 앞부리가 모두 벗어졌다. 숙자는 중 간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마에 진땀이 흐르도록 힘을 다하여 황치삼의 뒤를 따라간다. 황치삼은 숙자가 헐떡거리는 것을 애처로워 하는 듯이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숙자를 위로한다.
성북동의 깊은 골짜기를 다 지나서 큰 산이 앞을 탁 막은 아주 막다를 골 까지 들어왔다. 시커먼 바위들이 정면을 둘러싼 그 위에 퇴락한 옛날 기와 집 한채가 나타났다. 이것이 황치삼이 말하던 자기가 빌어 들었다는 정자이 다. 숙자는 돌다리 목에서 거진 5리나 되는 거리를 걸어 들어오는 동안에 잡목 새로 납작한 초가집이 군데군데 끼어 있는 것은 눈에 띄었으나 사람의 형적은 도무지 보이지 아니하여 무시무시한 생각이 나던 중에 썩은 고목들 이 앞뒤로 둘러싼 우중충한 그 속에 퇴락한 집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니 더구나 마음이 서늘하고 머리끝이 쭈뼛하는 무서움을 느끼었다. 장승 같이 늘어선 바위 앞에서 황치삼은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는 것처럼 퇴락 한 정자 편을 향하여 긴 휘파람을 내불었다. 마치 산적들이 군호를 하듯이 두어 번이나 그런 휘파람을 불었다.
황치삼의 휘파람 소리에 놀랬는지 정자집 허름한 큰 대문 안에서는 바짝 마른 중강아지 한 마리가 짖으며 내닫는다. 뾰족한 입을 하늘로 쳐들고 컹 컹 짖는 개소리가 고요한 산골을 울리어 건너편 언덕에 마주친다. 숙자는 황치삼의 휘파람 소리가 나자 강아지가 내달음을 짖는 것을 보고 그것이 개 를 부르는 군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숙자의 이러한 간단한 해석은 결국 개 를 길러보지 못한 경험 없는 사람의 해석이었다. 숙자는 자기 집에서 먹이 는 개가 주인을 보고 짖지 아니하는 개의 지감은 도무지 모르는 해석이었 다. 황치삼의 이상한 휘파람은 그 이면에 어떠한 사건을 보고하는 한 군호 이었다. 황치삼의 이상한 휘파람은 그 이면에 어떠한 사건을 보고하는 한 군호이었다. 개가 짖더니 그 뒤를 따라서 열살 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대문짝에 몸을 감추고 숙자를 건너다보더니 다시 얼굴을 감추었다. 숙자는 그 어린애가 황치삼의 딸인가 생각하였더니 황치삼을 반가이 맞이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다시 이상한 생각도 없지 아니하나 오늘이 그 집 아이의 돌 지내는 날이라 하니 다른 집에서 손으로 온 아이 같이도 보여 서 별로 마음에 두지 아니 하였다. 얼마 동안 의미없이 걸음을 멈추고 서성 거리던 황치삼은 다시 바위 끝에 걸터 앉았던 숙자를 데리고 바위틈에서 시 내를 건너서 퇴락한 정자로 들어갔다. 큰 대문을 들어서니 집은 몇 백 년이 나 묵은 고옥 같이 보이나 집 전체는 어지간히 넓은 모양이다. 동남 편으로 돌린 행랑채를 지나서 다시 중대문 안에도 넓은 정원이 있고 두어 개가 넘 는 층계 위에는 우뚝한 사랑채가 있다. 좌편에는 안으로 통하는 안내문이 있어서 앞에서 황치삼이 안내를 하는 대로 숙자는 따라 들어간다. 집은 굉 장히 큰 모양이나 모두 비어서 마치 빈 집간을 들어가는 것 같이 쓸쓸하여 숙자는 다시 무서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이때까지 침묵을 계속하던 숙자는 겨우 입을 열어 “이렇게 큰 집에서 아저씨 댁 식구만 살으셔요?” 하며 숙 자는 이상스러운 듯이 물었다.
황치삼은 대답이 막힌 듯이
“으응, 아니 우리 집은 저 정자 뒤 산정채에서 살고 이 안채에는 또 딴 사람이 빌어 들었으나 그 사람은 정자지기야.” 황치삼은 허둥지둥 말대답 을 하며 허술한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서 점점 후미진 뒤 채로 들어간다.
숙자는 문짝이 떨어진 협문을 나와 다시 복도를 돌아서 마치 도깨비한테 홀린 사람 같이 끌려가는 중에 마음이 울렁거리며 머리끝이 쭈삣쭈삣하여 무서운 생각이 각각으로 깊어간다. 때는 그럭저럭 석양에 가까웠는지 산 밑 에 있는 퇴락한 정자집 속에는 밝은 태양빛도 벌써 지나갔다. 숙자의 마음 은 무서운 어둠에 쌓였다
71회 빈 집에서 나오는 남자
황치삼은 넓은 정자 안을 어떻게 돌아 들어가는지 숙자를 데리고 한참 걸 어 다니더니 정자의 맨 뒤에 따로 떨어져 있는 뒤로는 깎아 세운 듯한 병풍 바위가 둘러 있고 앞은 두어 길이나 넘어 층계 위에 매달린 그 집 앞에 오 더니 황치삼은 비로소 이 집이 자기가 들어있는 산정채라 가르치며 층계 아 래에 걸음을 멈추었다. 넓은 집안을 한참 동안 끌려 다니었으되 모다 덧문 을 척척 걸어 잠근 빈 채 뿐이더니 그 채 하나만은 문창호가 하얀 등 위로 발라 있고 덧문이 열리어 있다. 그러나 십여간이나 되어 보이는 그 채에도 사람이 거처하던 형적은 별로 보이지 아니한다. 숙자의 마음은 울음이 금방 쏟아져 나올 만치 무거움과 고적함을 느끼었다. 이곳에서 곧 다른 짓이라도 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황치삼은 앞에 서서 층계를 올라가며
“자 이제는 다 왔어 어서 저 방으로 들어가서 우선은 다리나 쉬지.” 하며 황치삼은 먼저 층대에 올라서서 양 미닫이를 좌우로 열어젖혔다.
숙자는 마치 귀신한테 홀린 것처럼 머리가 띵 하고 다만 무서운 생각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데로 도망을 할 수도 없고 황치삼이 인도하는 대로 또 층대를 올라왔다. 미닫이를 열어젖힌 방 안에는 사람도 없고 세간도 없고 중앙에 다만 똑 떨어진 질화로 한 개가 놓여 있을 뿐이다. 숙자는 마음에 또 새로운 의심이 생겼다. 살림을 한다는 집에 세간 하나가 없는 것이 다시 괴이하게 보였다.
황치삼은 먼저 방으로 들어가서 숙자를 청해 들였다.
“집이 넓고 쓸쓸해서 이상스럽지? 이 채는 내가 사랑을 겸해서 쓰는 집이 요. 요 뒤에 우리가 살림하는 채가 또 있으니 여기서 우선 다리를 쉬어가지 고 차차 내가 또 안내를 하지” 하며 황치삼은 뒤로 통한 복도면을 바라본 다.
숙자는 모든 것이 도무지 알 수 없고 다만 두려운 생각뿐이었다. 눈이 휘 둥그레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넓은 방안에는 찬바람만 서려 있을 뿐이다.
“그래 아주머니는 또 딴 채에 계세요? 그럼 나는 그리로 가겠어요.” 숙자는 인적 없는 빈 집에서 황치삼의 옆에 혼자 있는 것이 마음이 아니 놓 여서 몸을 피하려 하였다.
황치삼은 숙자를 보더니 얼른
“아니, 조금 있다 가지, 안에는 남모르는 남자도 왔을는지 모르니까 우선 내가 먼저 다녀오지. 그럼, 마누라는 곧 불러올 터이니 잠깐만 여기서 기다 리지. 숙자가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신도 못 신고 뛰어 올 것일세. 그럼 내 불러 오지” 하고 황치삼은 일어서서 나서며 열려 있는 미닫이를 다시 닫는 다. 숙자는 혼자 빈 방에 떨어져 있는 것이 더욱 무시무시해서 황치삼의 뒤 를 따라서 안채라는 데로 가고 싶었으나 남의 집에 손으로 온 사람이 체면 없이 쫓아갈 수도 없고 미닫이 앞에 웅크린 채로 앉아서 무서움이 가득한 눈으로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앉았다. 황치삼의 발자취는 귀신의 형적 같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금방 무엇이 나올 듯 나올 듯 하는 무서운 생각이 전신을 떨리게 하여 숙 자는 마음이 한줌치 만해서 앉았는 중에 별안간에 장지 밖 뒷방에 우르르하 는 소리가 들렸다. 숙자는 깜짝 놀라며 머리가 서늘하여졌다. 가슴은 두근 거리고 호흡은 급하여 정신없이 그편만 바라보고 무엇이 나왔는가 하여 놀 라 앉았는데 떨어진 반자 위에서 다시 찍찍거리는 쥐 소리가 들리었다. 곧 다녀 나온다던 황치삼도 아니 오고 뛰어올 터이라던 그의 마누라도 도무지 보이지 아니한다. 숙자는 황치삼의 하던 말이 정말인지 의심을 일으키게 되 었다. 대관절 이러한 깊은 골짜기에서 외따로 떨어져서 살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말이요 자기의 마누라가 보고 싶다고 청하여 온 사람을 오는 대로 대면을 시키지도 아니하고 이러한 빈 채로 안내를 하는 것이 도 무지 이상스럽게 생각이 되어 사면이 무시무시한 공포에 휩싸여 숙자는 더 욱더 무거운 불안을 거듭하게 되었다 황치삼의 모두 거짓말이라 하면 대관 절 무슨 까닭으로 자기를 꼬여서 이러한 시골에까지 끌고 왔는지 일을 이어 일어나는 의문이 점점 마음을 두렵게 하였다. 마음이 두릿두릿하여 사방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앉았는 중에 뒤로 통한 복도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사람의 자취가 들리더니 별안간 뒤장지가 와르륵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선다. 숙자는 깜짝 놀라며 몸을 피하려 하였다.
72회 통안에 든 새
황숙자는 황치삼의 흉악한 수단에 빠져서 악마가 시뻘건 입을 벌리고 달려 드는 성북동 마굴속에 들어왔다. 황치삼이 숙자의 집에 찾아와서 감언이설 로 숙자를 꾀이는 말은 모두 터무니도 없는 거짓말이었다. 자기가 성북동으 로 이사를 하였다는 것도 꾸며대는 말이거니와 또 자기 아들의 돌날이라는 것도 숙자를 꾀어내자는 한 계책이었다. 한치각이 당초에 연통 안의관을 참 모로 하고 돈 오백 원을 오과부에게 세찬으로 보내어 어디까지 돈의 힘으로 숙자를 농락코자 하였으나 원래 의심이 많은 오과부는 한치각의 이러한 불 순한 규제에 버쩍 의심이 들게 되어 한치각을 경계하게 된 까닭에 그 비밀 을 알게 된 연통 안의관은 오과부의 집에는 일절 발그림자를 끊어 버리고 다시 황치삼을 중간에 넣어 새로운 계책을 꺼내어 숙자를 성북동에 있는 한 치각의 정자까지 꾀어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황치삼은 한치각에 관한 냄 새는 조금도 내지 아니하고 별안간에 없던 정의가 생긴 것처럼 오과부의 집 을 방문하고 그와 같이 거짓말을 하여 숙자를 달고 나온 것이었다. 오과부 와 숙자는 황치삼을 그다지 탐탁한 일가로 믿지 아니하나 이면에 이러한 흉 악한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아니한 바이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숙자는 굶주린 맹수가 밥을 노리고 있는 그 앞 으로 걸어 들어가는 양처럼 정욕이 타오르는 한치각의 입에 처녀의 알몸뚱 이를 던지게 되었다. 숙자는 자기를 정자집 후미진 뒤채의 텅빈 방에 혼자 앉혀 놓고 황치삼이 나아간 뒤에 도깨비 굴속에 잡히어 앉은 것 같이 몸이 거뿐해지며 머리끝이 쭈삣쭈삣하여 금방 어느 구석에서 무서운 것이 튀어나 올 듯한 공기를 느끼고 있는 중에 별안간에 뒷장지가 드드륵 좌우로 열리며 악마 같이 나타난 것이 한치각이다. 숙자는 마음에 저릿저릿하며 앉았던 판 이라 “에그”하는 소리를 치며 문 밖으로 몸을 피하려고 미닫이에 손을 대 어 열어젖히려 할 즈음에 마치 기계의 고통을 튼 듯이 밖에서 좌우 덧문짝 이 덜컥하여 일시에 닫혀졌다. 숙자는 다시 몸을 피할 구멍도 없이 되어 소 스라치며 방구석으로 달아났다. 한치각은 방 가운데 우뚝 서서 입가로는 비 웃는 웃음이 흘르며 두 눈가에는 정욕의 불길이 타올라 오는 얼굴로 한참동 안 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오래간만이로군. 그렇게 놀랄 것은 없는데 왜 나를 몰라서 놀란단 말이 야? 숙자가 날마다 너무 공부만 한다는 소문을 듣고 오늘은 모처럼 밖에 신 선한 공기를 쏘이고 산보를 하라고 청해왔는데 그렇게 놀랄것이 무어 있나?
그렇지 않어?” 하며 설렁설렁 걸어서 숙자의 옆으로 온다. 숙자는 별안간 에 와르륵 장지를 열며 들어왔을 동작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아니 하였던 한치각이 귀신 같이 허술한 뒷방 구석에서 튀어나온 것을 보매 놀라 운 가슴에 다시 무거운 위험을 느끼었다. 숙자는 인사 여부도 없이 몸을 바 짝 오그리고 한편 구석에 서서 마음을 떨고 있을 뿐이다.
한치각은 숙자의 옆으로 바짝 달겨들며 손을 들어서 숙자의 어깨 위에 얹 는다.
“왜 사람이 그렇게 수줍어? 학교에 다닌다는 사람이 오늘은 나하고 여기 서 이야기나 하다가 놀다가 들어가지” 하며 숙이고 있는 숙자의 얼굴을 들 여다본다.
숙자는 한치각의 손을 어깨에서 물리치며 “저리 가세요, 남을 속여서 이 게 무슨 짓이에요?” 하며 숙자는 다시 몸을 피하려 한치각의 옆에서 빠져 나가려 한다.
한치각은 두 손을 벌려 숙자의 몸을 막으며 하하 웃는다.
“어디로 달아날 텐고? 누가 숙자를 어쩌나? 사람도 하하.”
한치각은 새장 안에 갇힌 새를 놀리듯이 숙자의 앞을 이리저리 막지르며 넓은 방을 돌아다닌다.
숙자는 처음에는 무서움과 위협을 느끼어 마음이 울렁거릴 뿐이었으나 한 치각이 자기를 이리저리 막지르며 놀라는 것을 당하니 어린 생각에도 한편 으로는 반항의 기분이 일어나게 되어 앳된 소리로 “왜 이러셔요? 나는 집 으로 갈 테예요. 사람을 속여서 이런 에로 끌고 나와서” 하며 한치각의 앞 을 홱 지나서 미닫이를 또 연다.
한치각은 얼굴에 비웃는 웃음을 나타내며 또 숙자의 옆으로 덤비어 든다.
숙자는 힘을 다하여 덧문을 내밀었으나 문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한다.
73회 숙자는 함정에 빠졌다
인가를 멀리 떨어진 성북동 퇴락한 정자 집 속에서는 숙자의 순결한 처녀 의 몸이 정욕에 날뛰는 색마 앞에서 최후의 가련한 무도를 계속하고 있다.
성북동 깊은 골에는 벌써 밤빛이 두 둘리어 온다. 한치각은 어두워 오는 빈 방안에서 솔개가 병아리를 쫓듯이 숙자의 몸을 쫓으며 밤빛을 따라서 춤을 추는 악마 같이 한치각의 두 눈에는 시뻘건 정욕의 핏줄이 서고 입에는 침 이 마르고 인간이 가진 모든 이지는 점점 사라져 간다. 한치각의 체내에는 다만 불길 같이 치미는 성욕의 충동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숙자는 숨을 헐떡이며 이 구석 저 구석으로 한치각의 무서운 손길을 피하 려 다닌다. 숙자의 운명은 어두워 오는 밤빛과 함께 앞이 캄캄해질 뿐이다.
숙자의 맘은 각각으로 타들어 울렁울렁 떨린다. 소리를 질러서 울고 싶었 다. 두 손을 벌리고 숙자의 앞을 막는 한치각은 점점 직접 행동을 하게 되 어 몸을 끼어 안고 숨을 헐떡거리며
“왜 그리 야단이야? 내 말을 잘 들으면 곧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니까 그 래” 하며 한치각의 얼굴은 숙자의 뺨에 맞대었다.
숙자는 고개를 흔들며 몸을 부비어 한치각의 몸에서 빠져나가려 하며 “에 그 왜 그러셔요. 나는 소리를 지를 테예요” 하며 숙자는 흥분과 반항이 섞 인 어조로 소리를 높인다.
방안에서는 이러한 활극이 일어나서 장지에 부딪히는 소리, 방고래가 울리 는 소리가 고요한 산골의 공기를 울리고 있으나 방 밖에는 사면이 다 죽은 것 같이 아무 소리가 없다.
“소리를 지르면 무어해? 이 산골에 누가 있나? 공연히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 이쁜 사람이 왜 그래? 자, 이리 오라고 응?” 한치각은 숙자를 끼어 안고 뒷방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숙자는 흥분에 취하여 “아저씨, 아저씨 이리 좀 오셔요” 하며 울음이 섞 인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숙자가 이렇게 부른 것은 황치삼에게 응원을 청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황치삼의 꾀임에 빠져서 이 지경을 당하는 것은 알지만은 다만 고함을 질러서 자기의 급한 경위를 알리자는 것이다. 어머니 를 부를 수도 없고 그저 얼떨결에 아저씨이었다. 그러나 힘을 다해서 부르 짖은 숙자의 소리는 사람 없는 산골의 맑은 공기를 울리어 흩어질 뿐이요, 아무 반향이 없다. 숙자는 또 찢는 듯한 쨍쨍한 소리로 “아이고, 사람 좀 살려 주셔요 아무도 없어요?” 하며 부르짖었다. 그러나 역시 아무 대답이 없다. 숙자는 마음이 탁 까부라지도록 몸이 지쳤다.
한치각은 숙자의 부르짖는 소리에 점점 흥분을 느끼는 듯이 씨근거리며 “글쎄, 왜 이리 야단이야? 누가 죽이나? 여기서 암만 떠들어야 소용이 없 어. 자, 좋은 사람이지?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봐요 응? 응?” 하며 숙자를 달랜다.
“무슨 말을 들어요? 나는 집으로 갈 테예요. 어서 보내 주셔요.” 숙자는 여러 번 고함을 쳐서 구원을 청하여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치각은 숙자가 잠시 반항을 쉰 틈을 타서 숙자를 껴안고 뒷방으로 얼른 들 어갔다.
숙자는 몸을 흔들며 때치고 나오려 하였으나 한치각의 전력을 다하여 두 팔로 끼어안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숙자를 안고 들어간 그 뒷방 에는 삼면이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한층 더 깊은 방이다. 어두운 방 아랫 목에는 누가 준비를 했는지 비단 이불이 펴 있었다. 한치각의 직접 행동은 더욱 더 맹렬하여졌다. 숙자의 두 손목을 당기어 이불 위로 끌었다. 숙자는 힘을 다하여 한치각의 손을 뿌리치려 하나 한치각의 열 손가락은 쇠테 같이 조여들어 용이히 벗어날 수 없었다. 한치각의 땀이 내솟은 미끈미끈한 얼굴 은 숙자의 뺨으로 숙자의 입가로 함부로 들어 덤빈다. 숙자는 얼마동안 맹 렬한 저항을 계속하는 중에 몸은 극도로 피로하였다. 나중에는 몸을 빼칠 수도 없고 한치각에게 안겨서 이불 위로 겨우 고개만 좌우로 두르며 한치각 의 맹렬한 키스의 공격을 피하고 있을 뿐이다. 숙자는 기력이 탈진하여 겨 우 이러한 소극적 반항을 지속하고 있는 동안에 한치각은 최후로 치미는 정 욕의 불길에 두 팔이 떨리며 숙자를 이불 속으로 끌어 들였다.
숙자는 최후의 함정에 빠졌다.
74회 흰 비단에 먹점 같이
숙자는 황치삼의 흉악한 계교에 빠져서 성북동에 있는 후미진 정자속에서 이 세상에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순결한 처녀의 자랑거리를 빼앗겨 버렸 다. 정욕이 타오르는 한치각의 그 순간에 나타난 무지한 행동은 도저히 숙 자의 힘으로는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 숙자는 고함을 질렀다. 또 어린애처럼 어머니를 불러서 소리를 쳐서 울었다. 그러나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 빈 정자 속에는 가련한 숙자의 피를 토하는 부르짖음에도 아무 반향이 없었다. 남녀의 관계를 깊이 이해치 못하는 숙자에게는 그 순간에 무어라고 형용하여 말할 수 없는 공포만 느낄 뿐이었다. 두억시니가 함부로 자기를 짓누르고 시뻘건 흰 겨를 내두르며 얼 굴을 핥는 것 같은 무서운 꿈속을 지난 것처럼 아득한 공포만 느낄 뿐이다.
숙자의 치마는 허리가 떨어지고 폭이 터지고 머리는 풀어져서 미친 계집 같이 이불 속에서 뛰어 나왔다. 한치각은 입가에 만족과 비웃음이 섞인 웃 음을 흘리며 따라서 일어났다. 숙자의 얼굴은 극도로 놀라서 핼쓱하여지고 터진 머릿속으로 번쩍거리는 두 눈에는 새파란 독기가 띠어 있다. 숙자는 매무새를 고치는 동안에도 분하고 원통한 생각이 치밀어서 머리를 쥐어뜯고 그저 울고만 싶었다. 자기의 순결한 몸에 박힌 흔적 ─ 뽀얀 비단결 위에 먹물이 떨어진 것처럼 시커멓게 박힌 그 흔적은 영원히 씻을 수는 없게 되 었다. 자기 어머니가 청춘에 과부가 되어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고독한 생 활을 계속하여 온 것도 결국은 정조를 지키려는 그 한가지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항상 자기 어머니는 자기의 굳게 지켜온 그 결심을 때때로 자랑 하며 자기를 경계하던 것이 일시에 다 허사가 되었다. 숙자는 이러한 생각 이 머릿속에 떠올라오며 원통에 복받치는 울음이 쏟아져 나와서 벽을 향하 여 흑흑거리며 울고 섰다. 밤빛은 이미 깊어져서 높은 들창으로 희미한 회 색 광선이 겨우 비칠 뿐이요. 방안은 캄캄하였다.
한치각은 어린애를 달래듯이 숙자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왜 울기는 이렇게 울어. 누가 어쨌나? 그러게 당초부터 내 말을 잘 들으 라니까 그래. 울지말어, 응?” 하며 숙자를 달래고 있다.
숙자는 한치각의 몸을 구석으로 와락 떼밀며 “저리 가요. 남을 속여도 분 수가 있지요.” 숙자의 말은 울음에 섞이어 나왔다.
한치각은 다시 숙자의 옆으로 달려가며 “속이기는 누가 속여? 우리가 여 기서 처음 만났나? 숙자의 어머니도 나를 잘 아는데 속이기는 누가 속여?” “그럼 이것이 속인 것이지 무어에요? 악마들 같으니.” 숙자의 목소리는 울음에서 반항으로 변하여 지르는 듯하였다.
한치각은 의미 모르는 웃음을 또 “하하” 웃으며 “그래, 그러지 말어.
그렇게 성을 내어 무어하나? 내가 인제 무엇이든지 숙자의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줄 걸. 비단 옷도, 양장도 무어든지 다 해줄 터이요. 또 돈도 쓰고 싶 은 대로.”
“그만 두어요. 나는 다 싫어요. 누가 그런 것 달랬나? 나는 집으로 갈테 에요” 하며 숙자는 문을 열고 나간다. 문을 열면서도 숙자는 세상이 부끄 러워서 자기 집을 갈 길이 캄캄하였다.
정욕을 채운 한치각은 비로소 숙자를 해방하며 그 뒤를 따라 나오며 “옷이나 좀 꿰매 입어야지” 하고 손바닥을 올렸다. 숙자가 힘을 다하여 고함을 외칠 때에는 아무 반응이 없던 것이 얼마 있더니 텁수룩한 정자지기 가 손에 촛대를 들고 복도로 들어왔다.
숙자는 황치삼이 오거든 야료를 치려고 벼르고 있었으나 황치삼의 형적은 어느 구석으로 사라졌는지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조금 있다가 숙자는 반짝거리는 초롱불을 앞에 세우고 힘없는 걸음으로 산길을 걸어 나온다. 그 뒤에는 해룡피 외투로 두 뺨을 푹 싼 한치각이 완보를 떼어 놓으며 따라 온 다. 숙자는 몸이 거뿐하고 발이 땅에 닿는 것 같지 아니하였다. 자기 몸에 엉키어 있던 모든 힘이 일시에 다 없어진 것 같은 느낌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가 자기 어머니를 대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려니와 어떻게 대답을 해 야 좋을는지 도무지 앞길이 캄캄하다. 분한 마음 같아서는 들어가는 동소문 턱에 파출소에서라도 곧 발설을 해서 한치각을 욕이라도 보이고 싶으나 자 기는 아직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요 앞길이 창창한 처녀인데 그 흉악한 소문 이 세상에 드러나면 그야말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는 치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편에 있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숙자는 다시 생각이 어지러워 졌다.
75회 순결한 어머니 사랑
오과부는 학교를 보내는 외에는 별로 내놓지 아니하는 숙자를 황치삼의 집 에 보내고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여 대문간을 몇 번이나 드나들며 별 별 사렴을 다 일으키어 마음을 졸이고 있는 중에 숙자가 돌아오게 되었다.
대문간에서 골목 밖을 향하고 기다리고 섰던 오과부는 어두운 골목 안에 숙 자의 형용이 잡아들자 반가운 소리로
“숙자냐? 왜 그렇게 늦었어? 그래, 돌은 잘 차렸든?” 하며 어린애를 사 랑하는 것처럼 숙자의 어깨에 손을 얹어져 맞아들인다.
숙자는 자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매 별안간에 가슴 속에 뭉치었던 원통 함과 설움이 일시에 치밀어 입술은 떨리고 서러워 울음이 금방 쏟아져 나올 것을 억지로 참고 그대로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오과부는 숙자의 대답이 없는 것을 고이하게 생각하며 뒤를 따라 들어왔다. 숙자는 전등불이 미닫이 밖으로 비치는 마루끝에 힘없는 몸을 걸치고 구두를 벗는다. 숙자는 자기 얼굴를 차마 밝은 빛에 내놓을 용기는 없었다.
오과부는 숙자의 동작이 이상히 보여서 연해 들여다보며 “왜 치삼이 아저 씨가 데려 온다더니 너 혼자 왔니?”
숙자는 말이 없다. 오과부는 점점 의심이 깊었다.
“왜 어디가 아파서 그러니? 오다가 무엇에 놀랐니?”
숙자는 또 대답이 없다. 오과부는 마음에 캄캄하여졌다. 모녀 단 두 식구 밖에 아니 사는 쓸쓸한 가정이라 숙자가 학교에 갔다가 저녁때 집에 돌아올 때는 항상 어린애 같이 어리광이 섞인 어조로 대문간서부터 어머니를 부르 며 들이닫던 것이 오늘은 웬일인지 말을 물어야 대답도 없고 고개를 축 늘 이고 들어오는 그 동작이 오과부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왜 대답도 아니 하고 그러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저녁은 벌써 해놓 은 지가 언제인데 다 식었겠다.”
오과부는 숙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숙자는 차마 전등 앞으로 얼굴을 내 놓을 수 없었다. 오과부의 시선은 숙자의 얼굴을 따라다니며 주시 한다. 숙 자의 얼굴은 핏기가 없이 핼쓱하여지고 두 눈가는 부숙부숙하였다.
“얘가 왜 이래? 왜 울었니? 머리가 헙수룩하고 어디서 무엇을 만났니?” 오과부는 점점 마음이 놀라서 대좇아 묻는다.
숙자는 한치각에게 흉악한 위협을 당하였다는 것을 차마 입에 낼 수는 없 었다. 그러나 두 눈에 근심한 빛이 가득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이라 대답 을 아니할 수는 없었다. 겨우 입을 열어 “별안간에 몸이 아퍼서 그 집에서 도 한참 누웠다 왔어요.” 숙자의 대답은 어린 생각에 이밖에 더 꾸며대일 말은 없었다.
“별안간에 어디가 그렇게 아프단 말이냐? 그저 내 마음에도 꺼림하던 것 을 보내더니 그예 탈이 났구나. 그래 대관절 어디가 아프단 말이냐?” 하며 오과부는 다시 숙자를 들여다보았다.
숙자는 또 얼떨결에 “배가 아파서 그랬어요.” 어린애 같은 거짓말로 자 기 어머니를 속이고 아랫목에 벽을 향하여 드러누웠다. 오과부는 얼굴에 쓸 쓸한 빛이 떠돌며 손으로 숙자의 이마를 만졌다. 숙자는 그저 자기 어머니 의 손길을 꽉 붙잡고 실컷 울고 싶었다.
“무엇이 체했나 보구나. 우선 환약이라도 좀 먹어 보자” 하며 오과부는 그릇에서 영신환을 꺼낸다. 숙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공연히 애를 태우는 자 기 어머니 어머니 모양이 측은하게 보여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고만 두세요. 이제 차차 나아가요. 아까는 몹시 아프더니 거진 났어요” 하며 약을 만류하였다.
“그래도 못 쓴다. 체증을 아주 풀어야 한다. 거기서 무얼 먹었길래 그랬 니?” 하며 오과부는 영신환을 숙자의 옆에 꺼내놓고 물을 뜨러 나갔다.
숙자는 아무 말도 없이 벽을 향한 채로 누워서 두 눈에는 더운 눈물이 흘 러 앞이 보이지 아니한다. 이때까지 한 번도 자기 어머니를 기인 일이 없는 숙자는 잠깐 동안이라도 얼토당토 아니한 거짓말을 해서 어머니를 속이는 것이 큰 죄악 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치각에게 당한 그 흉악한 사실을 차마 알릴 용기는 나지 아니한다.
76회 큰 죄악과 작은복수
한치각은 두 달 동안이나 두고 모든 흘개를 다 써가며 숙자를 손에 넣으려 하던 그 야심을 채우게 되어 마음에 큰 성공이나 한 것 같은 만족을 느끼며 인사동 어귀에서 자동차를 멈추고 숙자를 내려 들여보내고 자기 집으로 들 어 왔다.
황치삼은 숙자를 꾀어 내서 한치각에게 대면을 시키고 정자집 뒷채 부근에 서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방안에서 한치각이 최후의 행동을 한기미를 알자 곧 옆길로 빠져서 한치각의 집 사랑으로 들어와서 한치각이 돌아오기를 기 다리고 있던 중이다. 당초에 황치삼과 한치각 사이에 성립되었던 흘개는 여 하튼 숙자를 그 정자까지 꾀어내서 한치각과 대면을 시키는 것이 약속의 초 점이었고 그 다음에 한치각이 숙자를 어떻게 다루는지 거기까지는 황치삼의 책임이 없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사이의 약조를 말하면 황치삼은 숙자를 완전하게 한치각 의 앞에 꾀어내게 되었으니 약조한 일을 다 이행한 셈이나 당초부터 그러한 죄악의 중계자가 된 것도 다른 것이 아니라 강호천 일본 요릿집에서 한치각 이 꺼내어 광을 치던 뭉치에 정신이 끌려서 모든 이지를 잊어버리고 그러한 악마의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니 지금 황치삼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한 시각 이라도 속히, 또 한푼이라도 속히, 또 한푼이라도 많은 보수를 기다리고 한 치각의 집 사랑에 와서 기다리는 것이다. 돈이 사람을 살리고 돈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물론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황치삼이 행한 악착 같은 계책은 귀신이라도 오히려 주저할 참혹한 일막이었다. 만일 한치각에게서 건너올 보수가 얼마 아닌 금액에 지나지 못한다 하면 황치삼은 자기의 욕심 을 채이지도 못하고 다만 죄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한치각의 집 사랑에는 주인이 없는 까닭에 모이던 병정들도 오늘은 오지 아니하고 다만 황치삼 한 사람이 빈방에 우뚝하니 앉아있다. 한치각은 황치삼이 와서 있는 것을 알고 바로 사랑으로 들어왔다. 황치삼은 몸을 일으키어 마치 악당들이 비밀굴에 서 그 수두를 맞아들이듯이 반기며 그러나 무엇인지 무시무시한 기분에 눌 리는 듯이 맞아 들였다. 한치각의 얼굴에는 가벼운 기쁨이 띄어 있다.
“벌써 들어 왔소? 숙자는 잘 들여보냈지. 아주 어린앱디다그려” 하며 아 랫목으로 앉는다. 황치삼은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는지 대답할 말을 찾 지 못하였다.
“온 지 한참 되었어요” 하며 한치각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나는 키가 술명하고 나이가 열여덟 살이나 되었다고 하길래 어지간할 줄 알았더니 나중에는 울음을 내놓는데 한참 혼이 났는데? 하하” 하며 숙자에 게 가압한 일면을 서슴지 아니하고 말한다.
황치삼은 자기의 공로는 조금이라도 더 크게 하느라고 “그러게 앞에 일에 힘이 들었지요? 키는 엄부렁해도 아직 숫보기에요. 참 한참봉께서 그렇게 애를 쓰시기 까닭에 내가 힘을 썼지 그렇게 할 일이란 말씀이요. 더구나 일 가집 아이를…….”
황치삼의 말 속에는 자기의 행동을 뉘우치는 어조가 섞여있다. 그러나 이 것은 참된 뉘우침은 아니다. 자기가 장차 받을 보수의 값을 올리려 하는 한 시위운동이었다.
“일가면 어때? 못할 일을 하였나? 가난한 과부집 딸이 나 같은 사람과 접 촉이 된 것만 불행 중 다행이지.”
한치각은 어디까지 돈으로 토대를 지은 그 교만한 말이 또 나온다.
“그야 참봉께서 오래도록 사랑만 하신다면 아, 숙자도 셈이 펴이는 폭이 지만은.”
황치삼은 아무쪼록 한치각의 비위에 맞도록 하고 있다.
“오래가 될는지 얼마가 될는지 그것은 내 다 생각을 하여둔 뒤에야 할 말 이지.”
한치각은 그의 본성이 또 노골로 드러나게 되었다. 여성을 한 번 상관한 뒤에는 불이 꺼진 듯 하는 그 무책임한 색마성이 번뜩이어 이러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황치삼은 그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한치각은 다시
“황이 중간에 들었으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만은 철 모르는 것이 또 문제 라 아니 일으키도록 주의를 해주오.”
“그거야 내가 나중에 잘 무마를 하지요.”
“그러면 적을는지 모르나 우선 이거나 넣어두구려” 하며 한치각은 뒷주 머니에서 지전을 꺼내서 황치삼을 주었다.
77회 동무의 동정
한치각이 숙자에게 ××를 한 지 며칠이 지난 일이다. 한치각의 딸 복희가 그날은 학교에서 당번이 되어 숙자와 같이 학교에서 교실을 소제하고 집에 돌아와 안방에 벗어 내던진 자기 아비의 옷을 개이던 중에 조끼 주머니에 무슨 두터운 종이 같은 것이 들어 있어서 뻣뻣하게 손길이 맞히는 것이 있 었다. 어른의 주머니 속에 함부로 손을 치는 것이 불경한 짓인 줄 알지만 돈지갑 같이 보이지는 아니하고 사진 같은 감촉이 있으므로 복희는 일종의 호기심이 일어나서 그것을 꺼내 보았다. 과연 그것은 사진이었다. 복희는 그 사진을 펴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자기 눈에 그렇게 어리어 보이는 것 이나 아닌가 하고 다시 밝은 미닫이 앞으로 들고 가서 또 보았다. 사진에 나타난 인물은 틀림없는 황숙자의 얼굴이었다. 몇 십분 전에 자기와 같이 교실을 소제하던 그 숙자가 분명하다. 자기 아버지가 한 달에도 몇 사람씩 계집을 갈아들이고 종종 조끼 주머니에서 이상한 여자의 사진이 튕겨지지마 는 이번 사진은 전연히 의외의 것이었다.
복희는 그 사진을 손에 들고 한참 동안이나 놀람에 잠기어 있었다. 날마다 자기와 책상을 맞대이고 공부를 하는 숙자의 사진이 대관절 어쩐 원인으로 자기 아버지의 주머니에 들어 있을까? 숙자는 학교에서 품행이라든지 모든 동작이 담임 선생까지도 칭찬을 하는 터이요, 자기가 보기에도 아직 숫적은 동무로 보이는데 별안간 그 사진이 자기 아버지의 손에 들어 있다니 참, 뜻 밖의 일이다. 물론 자기 집과도 서로 내왕이 없을 터이니 자기 아버지가 숙 자의 집을 알 까닭도 없을 것은 사실이 없는 터이니 자기 아버지가 숙자의 집을 알 까닭도 없을 것은 사실일 터인데 하여튼 생각해 낼 수 없는 한 의 문이었다. 금년에 학교를 마치는 학교 동무끼리 사진을 한번 박이자는 공론 은 일전에 한 일이 있었지만은 숙자가 혼자 가서 사진을 박일 그런 용기도 없는 아이인데 좀 괴상한 일이다. 설혹 숙자가 자기 혼자 사진을 박였다 할 지라도 그 사진이 무슨 까닭으로 자기 아버지의 손에 들어와 있을까? 복희 의 머릿속에 지금 이러한 여러 가지의 의문이 뒤를 이어 일어나는 중에 방 문이 열리어 자기 어머니가 들어왔다.
복희는 손에 들었던 숙자의 사진을 얼른 옆으로 감추었다. 복희가 놀라며 사진을 감춘 것은 자기가 골똘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에 별안간 인기 가 나니까 놀라기도 하였으려니와 항상 자기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집안에 때 아닌 풍파가 일어나고 더구나 그러한 사진이 들춰난 때에는 자기 어머니의 눈살이 좋지 않아지고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와 말다툼이 일어나는 것이 항례이었기 까닭에 그 사진을 얼른 감춘 것이었다. 그래서 복희는 자 기 아버지의 옷을 차방으로 들어 가지고 가며 사진을 그 속에 한데 어물어 물 파묻었다. 그러나 복희의 의문은 해석을 얻을 길이 없었다. 자기 아버지 의 품행을 잘 아는 터이라 한편으로는 숙자에게 대한 동정의 마음이 일어나 게 되었다. 숙자의 사진이 어떠한 경로를 따라서 굴러왔는지, 자기 아버지 손에 들어온 이상 결국 좋은 일이 아닌 것은 짐작할 수 있다. 현재에 자기 의 서모라는 곳이 세 집이나 있으되 자기 아버지는 발길을 던지지 않고 마 치 옥 속에 갇힌 죄인처럼 날마다 밥이나 얻어먹고 사는 가련한 신세들의 사람이 아닌가. 숙자의 사진이 자기 아버지 손에 잡힌 이상 이미 그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요 처녀의 몸을 망친 다음에 다른 서모들처럼 눈물겨 운 생활에 빠질 터이니 참 가련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거미줄에 걸린 나비 운명에 있는 숙자의 운명을 어찌하면 구할까 하는 생각은 채떠돌 지 아니한다. 대관절 어느 방면으로든지 숙자의 사진이 과연 어떤 경로를 더듬어서 무슨 관계로 자기 아버지 손에 들어간 것을 먼저 알기 전에는 이 일을 생각해낼 터가 잡히지 않았다. 복희는 차방 한 구석에서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괴롭게 하고 있다. 자기 아버지에게 그 내용을 직접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또 숙자에게 그 사진 이야기를 할 수도 없으나 하여튼 숙자를 위해서 자기 아버지 손에서 벗어나도록 행동을 하여볼 생각은 간절 하였다. 복희의 동정은 물론 한 학교에서 몇 해 동안 같이 공부하던 그 정 의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새로 학문은 배운 신여성의 처지를 위해서 동정을 아니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78회 염격한 정조의 가면
복희는 자기 아버지 조끼 주머니에서 의외의 황숙자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 어 놀라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버지와 평일에 하던 품행을 하는 터 이라 숙자의 가엾은 운명이 눈 앞에 어른거려서 밤새도록 머리를 괴롭게 하 며 숙자를 자기 아버지 손에서 구하여 내려고 모든 생각을 다 하여 보았다.
자기 아버지에게는 걱정을 듣더라도 정면으로 쏘아볼까 하는 생각도 났었으 나 자기 아버지의 천성으로 타고난 방탕한 행동은 가정에서 그 중 위력을 가지고 있는 자기 조부도 금제치 못하고 그대로 방임하여 내버려 두게 될 터이니 지금 자기가 아무리 간곡히 말을 하더라도 도저히 그 말을 용납할 터라도 없고 도리어 걱정만 들을 것이니 아무 소용이 없겠다고 생각하였다.
복희는 혼자 자리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연구를 해 보았으나 결국 명안은 찾지 못하였다.
하여튼 숙자는 날마다 학교에서 만나는 터이니 숙자의 동정을 보아서 차차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경계를 하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 고 생각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학교를 갔다. 날마다 아침밥이 늦어서 학교 시간에 바쁘게 되는 복희는 그날도 학교 대문 앞을 막당도하자 상학 종소리 가 들려서 허둥지둥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한 줄을 걸러서 있는 책상에는 벌써 숙자가 먼저 와서 앉았다. 복희 눈에 는 누구보다도 숙자의 얼굴이 먼저 비췄다. 그럴싸해서 그렇게 보이는지 모 르나 숙자의 얼굴은 전보다 화기가 감한 것 같고 눈은 아래로 깔고 힘없이 앉았는 것이 무슨 근심에 빠진 사람 같이 보였다.
조금 있다 얼굴에 마마자국이 군데군데 있는 오십이 넘어 보이는 수신 선 생이 교과서를 들고 단 위에 나타났다. 이 수신 선생은 원래 동방윤리를 전 문으로 연구하는 교사이라 항상 수신 시간에도 동양 역사에서 수신 교과를 많이 인용하기 때문에 결국은 수신 시간이 동양 윤리의 연장 시간이 되는 때마다 선생은 교단 위에서 부드러운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강연을 시작한 다. 그의 강연은 어느 때나 활기가 없어서 뒤에 앉았는 학생들은 한풀이 지 나 책상에 머리에 이마를 부딪히며 졸고 있는 학생도 있었으나 오늘은 특별 히 졸업생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시간이라고 화두를 내고 환연한 빛이 선생의 얼굴에 돌자 감정이 예민한 여학생들은 가벼운 서글픔을 느끼며 교 실 안이 긴장하여졌다. 복희와 숙자도 눈가에 눈물이 어리었다.
선생은 “며칠 후에는 학교 대문을 나아가서 가정의 한 부인이 될 사람이 니 내가 오늘은 특별히 여러 학생들이 명심하여 둘 몇 가지를 말한다” 하 며 여자의 정조를 강연하게 되었다.
숙자는 선생의 정조라는 강제가 귀에 들어오자 가슴은 선뜻하여지고 고개 는 힘없이 수그러졌다. 복희는 강연을 듣는 중에도 때때로 곁눈질을 하여 숙자를 보았다. 그러나 숙자의 시선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아니하였다. 어 쩐 일인지 숙자의 얼굴은 사람을 피하는 것처럼 앞으로 숙이고만 있는 것이 복희에게는 심상치 아니하게 보였다. 선생의 강연은 전에 못 보던 긴장한 빛이 있었다. 조선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열녀와 효부의 실화를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선생은 나중에 큰 논제를 학생에게 던졌다.
“여러 학생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이 문제의 경중을 대답해 보오.” 하 며 칠판에 ‘열녀를 취하겠느냐? 효부를 취하겠느냐?’ 라는 문제를 써 놓 았다. 여러 학생들은 모두 칠판만 바라보며 아무 대답이 없다. 선생도 물론 그 자리에서 여러 학생에게 구태여 대답을 구코자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정 조에 대한 관념을 깊이 굳세게 지도하자는 성의에서 나온한 수단이었다. 선 생은 한참 있다가 “학생이 대답 안하면 내가 하겠소. 나는 효부보다 열녀 를 취하겠소. 왜 그러냐 하면 열녀에게는 사나이보다 한 가지 더 가지고 있 는 정조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오. 다른 조건은 물론이요. 정조까지도 완전 히 지켜야만이 열녀가 되는 것이니 참 어려운 일이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조는 여자의 생명이니 명심해 두도록 하오.” 동양 윤리에 머리가 젖은 선생의 강연은 이러한 교훈을 내리고 끝을 마쳤다.
숙자는 강연을 듣는 동안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려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두 눈에는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원통한 피눈물이 맺혔다.
79회 복희의 동정
수신 선생의 시간을 마치고 교실 문 밖으로 나가자 학생들은 와글와글 떠 들며
“예, 오늘 수신 시간은 퍽 재미있었지?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하던 효부보 다 열녀가 낫다는 것은 잘 알 수가 없어. 효부도 부모에게 진심을 다해서 효도를 해야만 효부가 되지 않니? 그럼 열녀도 마찬가지지. 남편한테 진심 을 다하여야만이 열녀가 되는 것이 아니야? 그러면 둘이다 마찬가지 아니 냐?”
“마찬가지는 마찬가지이지만 여자는 남편에게 극진히 하고도 또 그 외에 도 정조를 지켜야 열녀가 되는 것이니깐 한 가지가 더한 셈이 아니냐?” “오 ─ 오 남편에게 힘을 다해서 섬기고도 또 정조를 지켜야 해?” “옳지, 옳지, 참 한 가지가 더하구나. 그렇지만 요새 세상에 정말 열녀 노릇을 하려고 하는 여자도 있을까?”
“그야, 무슨, 또, 우리 학교에서도 수신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열녀 될 사람이 생길는지 누가 아니?”
교실 안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젊은 여학생 사이에 벌어져 있는 중에 숙자 는 어느 틈에 교실 밖으로 몸을 감추었다. 복희는 숙자에게 어떻게 사진 물 어 봐야 할까 하는 묘방은 못 생각하였지만은 시간이 파하거든 숙자를 데리 고 후미진 곳을 가서 말을 비춰 보려고 하던 차에 어느 틈에 숙자가 교실에 서 형적을 감추게 되어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운동장 한 편에 있는 걸상에 몸을 기대고 혼자 앉아서 있는 숙자를 발견 하였다. 복희는 그 곳으로 뛰어 갔다. 숙자는 두 눈에는 눈물이 어리어 힘없는 볕발을 향하고 앉아서 한치 각에게 당한 그 흉악한 꿈을 연상하며 앉았다가 복희가 오는 것을 보고 얼 른 눈물을 씻고 일어섰다.
복희는 숨을 헐떡거리며 “너 여기 있었구나. 나는 어디로 갔나 하고 한참 찾아 다녔다” 하며 복희는 숙자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숙자는 복희의 시선이 너무 정면으로 쏘이는 것이 좋지 않아서 얼굴의 반 면을 저편으로 돌렸다.
“왜 나를 찾았어?”
숙자는 복희가 그렇게 일부로 찾아온 것이 마음에 따뜻한 느낌을 주게 되 었다.
한치각에게 ××을 당한 후 학교에를 오기도 서먹서먹한 생각이 나서 며칠 동안은 결석을 하다가 학교 대문을 들어서니 모든 동무들이 이상히 보는 것 같아서 마음에 스스로 고독함을 느끼던 중이라 숙자는 그 반동으로 복희가 찾아온 것을 따뜻하게 받았다.
“오늘은 수신 시간은 참 재미가 있었어. 언제든지 졸음이 오던 최 선생의 시간이 오늘은 퍽 재미가 있었어. 너도 재미있든?” 하며 복희는 숙자의 옆 으로 앉아 숙자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복희는 무심히 한 말이라 숙자는 마 음이 떨렸다.
“글쎄, 나는 머리가 아파서 잘못 들었어.” 숙자는 간신히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왜 머리가 아퍼? 얘, 요새 못된 감기들이 돌아다닌다더라. 어디 머리 좀 만져보자.”
복희는 숙자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참 머리가 덥구나. 언제부터 아프냐?”
복희의 말은 인사치례가 아니라 참된 동정이 섞이어 있었다. 그 음성이 만 일 한치각과 피가 인한 그 딸의 것인 줄 알았다면 숙자는 복희의 손길을 여 지없이 물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복희가 한치각의 친딸인 것을 전연히 모르 는 숙자는 어두운 길에서 동무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든든하였다
“어쩐 일인지 요새는 날마다 머리가 아파서.”
숙자는 말끝은 채우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복희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왜 그리 아프냐? 무슨 걱정이 있어 그러니?”
“걱정도 있고 몸도 아프고.”
숙자의 말은 도무지 활기가 없었다. 복희는 한편으로는 이상스럽게도 보이 나 또 한편으로는 동정의 생각도 나서 위로를 해주려고 별안간에 하하 웃으 며
“무엇이 그렇게 걱정이 되니? 또 누구 모양으로 연애를 하는 게로구나?
하하.”
복희는 가볍게 숙자의 어깨를 쳤다. 숙자는 연애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80회 숙자의 번민
복희는 사람이 없는 운동장 걸상에 앉아서 숙자와 이야기를 하게 된 기회 에 사진의 출처를 물어 보려고 이리 저리 말끝을 끌어내게 되었다.
“숙자야. 너 언제 독사진 박은 것 있니? 우리가 이제 얼마 아니면 졸업을 하고 다 헤어질 터인데 기념으로 나 한 장만 주라. 내 사진도 한장 줄 터이 니. 우리 한 장씩 바꾸어 가지자.”
복희는 이렇게 사진 이야기를 끌어냈다.
숙자는 복희에게 이러한 이면의 조사가 있는 것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터 이라 무심히
“사진을 바꾸어?”
“그래 우리 한 장씩 나누어 갖자.”
“지난 동짓달에 혼자 받은 것이 있는데 잘 안 됐어. 내 얼굴보다 퍽 뚱뚱 하게 박여져서 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내일이라도 갖고 오마. 너 꼭 한 장 주어야 한다.”
“암, 주고 말고 내 것은 작년 봄에 박인 것이야. 그 때 그 사진은 무슨 옷을 입고 박인 것이냐?” 복희는 자기 아버지 조끼에서 발견한 사진이 숙 자의 얼굴이 분명하지만은 그래도 혹시나 딴 사람의 것이나 아닌가 해서 다 시 숙자의 옷을 물었다.
“그 때? 무엇 입었든가? 옳지, 널뜨랗게 대문(큰무늬) 돋은 회색 양복이 있지. 요새 유행하는…….”
“응, 응, 모직 같이 된 것 말이야?”
“그래, 그 저고리 하고 검정색 치마를 입고 박였지.”
숙자의 대답에 복희는 다시 의심을 낼 여지가 없다. 사진 속에 나타난 숙 자는 분명히 대문 돋힌 저고리였다. 그러나 그 사진이 무슨 까닭으로 자기 아버지 손에 들어와 있는가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복희는 “그런데 얘 숙자야. 그 사진은 왜 박였니?”
복희는 숙자의 사진 받은 동기를 물었다. 숙자는 픽 웃으며
“그건 왜 묻니?”
“글쎄, 말이야.”
복희는 말이 오락가락 하는 동안에 그 단서를 얻자는 것이었다. 숙자는 똣 웃으며
“그건 그렇게 왜 물어? 일을 하나 쓸 데가 있어서 박였단다.” “으음, 그럼 짐작하겠다. 혼인 준비하려고 박였구나? 신랑하고 먼저 사진 교환을 하고 그 다음에 정말 대면을 하려고. 참 요새들은 많이 그런다더니 너도 그 준비로 박였구나.”
복희는 어쨌든 숙자의 많은 말을 끌어내자는 것이 목적이므로 자기가 추측 한대로 서슴지 아니하고 말을 했다.
숙자는 또 웃으며 “그건 그렇게 알어 무얼하니?”
“오라, 오라, 그렇구나. 혼인 준비로 박였지? 그래, 집에 몇 장이나 남아 있니? 석 장이 다 그래도 있지는 아니할 터이지? 아마.”
“두 장은 그대로 있다.”
“그럼 한 장은 약혼처로 가져 갔구나.”
복희의 한 마디에 숙자의 얼굴은 붉어졌다. 그 중에서 한 장은 황치삼이가 혼처를 구해주마 하고 가지고 간 것을 짐작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 사진 이 다시 연통 안의관의 손을 거쳐서 한차각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전연 히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혼처를 구하기 위해 가져간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숙자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이다. 복희는 숙자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과연 그 사진이 혼처를 구하려고 나돌리다가 결국 자기 아버지 손에까 지 들어오게 된 것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는 숙자를 얼른 자기 아버지의 손에서 빼어 놓아야 할 터인데 그 일을 장차 어떻게 꾸미면 성공할 것인가 복희는 얼마 동안 묵묵 히 생각하고 있다. 자기 아버지가 여성을 속이는 데는 돈과 수단이 많은 터 인데 그 동안 어떠한 관계로 벌써 숙자에게 손을 대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의문도 나나 하여간 한시라도 속히 숙자를 빼어놓는 것이 상책이라고 복희 는 생각하였다.
“숙자야, 네가 아까 걱정이 있다고 하더니 그럼 혼인에 대한 걱정이로구 나.”
복희는 숙자의 얼굴빛을 살피며 물었다. 숙자는 심장을 찌르는 듯한 복희 의 말에 가슴이 선뜻하였다. 그러나 억지로 태연한 빛을 보이며
“아니란다. 또 딴 걱정이 있단다.”
“무슨 걱정이 있니? 우리가 한 학교에서 4년 동안이나 같이 있었으니 속 이야기를 좀 하려무나.”
복희는 숙자의 이야기를 자아내려고 이렇게 말하였다.
숙자는 한숨을 쉬며 아무 말이 없다. 별안간에 상학 종소리가 교실 머리에 서 울리어 나온다. 두 사람은 다시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81회 의외의 승리
한치각은 자기 체내의 특유한 변태 성욕의 충동을 받아서 황숙자를 한번 희롱한 다음에는 마음이 풀어져 버렸다. 계집을 많이 접촉한 한치각에게는 아무 정욕도 느끼지 아니하고 어린애 같이 울고만 있는 숙자에게는 아무 인 력이 않게 되어 요사이 며칠 동안은 진골에 있는 어떤 밀매음녀에게 또 흥 미를 가지게 되어 밤이면 그 계집을 데리고 일본 요릿집으로 청요릿집으로 달고 다니며 방탕한 시간을 보내다가 오늘도 오전이 지나서 겨우 아침잠을 깨어 막 일어 앉았는 판에 안내도 없이 리민영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리민영이라는 사람은 한치각의 신착립 때부터 교제가 있는 친구이나 한치 각과는 아주 딴 방면의 생활을 하고 있는 까닭에 근래 몇 해 동안은 서로 상종이 끊어진 사이다. 리민영도 한치각과 거의 비등하던 재산을 자기 아버 지에게 물리어 학교를 설립하느니 사회 운동을 하느니 하여 그 많던 재산을 다 패하고 지금은 광희문 밖에는 ××사립학교를 맡아가지고 그 부근의 가 난한 집 아이들을 모아서 보통학과를 가르치고 있는 교장 겸 선생이다. 리 민영은 오히려 한치각 보다는 두어 살 아래 되는 사람이다 당시의 머리에는 소위 양반의 집 재산이라는 것이 턱없이 모은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시 대가 다른 이때에 그 재산을 아무쪼록 유용하게 다 없애자는 것이 그의 주 견이었다. 당초부터 세상에 나아간 출발점이 이와 같이 한치각과는 정반대 의 방면에 섰기 때문에 서로 교제가 끊어질 것은 피치 못할 사실이다. 한치 각은 리민영이가 안내도 없이 방으로 썩 들어선 것을 보고 마음에 이상한 위압을 느꼈으나 몸을 피할 수도 없이 되어 어물어물하며 리민영은 팔꿈치 가 다 떨어진 양복을 입고 얼굴은 기름때가 다 빠져서 그 모양은 누가 보든 지 가난한 학교의 선생으로 얼른 알 수가 있을 만치 궁기가 띠었다. 리민영 은 눈을 비비면서 한치각과 모를 꺾어서 보료 위에 앉았다.
“여보게, 참 오랜 만일세. 나는 문 밖으로 이사를 한 후로는 별로 문 안 출입도 없고 해서 오래 못 찾았네” 하며 리민영은 인사의 말을 내었다.
한치각은 원래 자기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그의 교만심을 기르게 된 사람이라 누구를 보든지 별로 다정한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리민영에게 대하여도 그다지 탁탁한 인사는 아니 하였다.
“나도 별로 하는 건 없네만은 자연 오래 못 만났네” 하며 한치각은 궐련 갑을 리민영의 앞으로 내밀었다. 일찍부터 대령한 황치삼과 안의관은 윗목 에 동그마니 앉은 채로 리민영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오래간만에 자네도 찾아볼 겸 또…….” 리민영은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처럼 끝을 잘 아무르지 못하고 웃목에 앉은 안의관과 황 치삼을 흘끗 보았다. 한치각은 리민영의 입에서 무슨 좋지 못한 말이 나오 나 하고 경계의 눈으로 리민영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기어이 연맹에서 탈퇴를 하게 되는 모양이야. 뒷일이 어떻게 될는지.” 리민영은 자기가 목적하고 온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아니해서 쓸데없는 시사 문제를 꺼내 놓았다. 한치각은 평생에 신문 한 장 을 아니 들여다보는 사람이라 세상에 떠도는 연맹 문제도 실상은 어떻게 됐 는지 모르는 까닭에 그저 어물어물 해 넘기려고 “글쎄” 하며 흥미 없는 대답을 한다. 리민영은 또 윗목의 두 사람을 흘끔 보았다.
“벌써 2월이 반이나 지났는데 요새는 다시 추워가니 괴상한 일이로군.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는 얼른 온기가 더워져야할 터인데.” 리민영은 또 다른 화제를 꺼내어 혼잣말 같이 중얼거렸다.
한치각은 리민영의 얼른 갈 생각도 아니하고 쓸데없는 말을 꺼내놓는 것이 좋지 않아서
“자네는 늘상 바쁜 사람인데 오늘은 한가한가?” 하며 한치각은 정면으로 바라는 말은 아니지만은 자기의 말을 깨닫고 리민영이 얼른 일어섰으면 하 는 생각으로 이러한 말을 하였다.
82회 양반들의 조문
한치각은 먹고 싶지도 아니한 담배를 피우고 리민영의 가기만 기다리고 앉 았으나 리민영은 문칫문칫 하고 자리를 뜨지 아니한다. 얼마 있다가 리민영 은 결심을한 듯이
“여보게, 참봉. 오늘은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왔네. 어쩔 수 없는 사정 이 있어 자네에게 청을 하나 하러 왔네” 하며 리민영은 한치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치각은 리민영에게 돈을 빼앗겨본 일은 없지만은 가끔 돈을 얻으러 오는 사람을 만나는 터이라 리민영의 말씨가 그러한 청구를 하는 사람의 그것과 같이 들려서 즉각적으로 리민영이가 지기에게 돈을 얻으러 온 것을 알았다.
마음에 또 귀찮은 생각이 일어나며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청이라니? 자네가 내게 무슨 청이라는 말인가?” 한치각은 비웃는 것 비 스름하게 대답하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같은 훌륭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청할 것이 한두 가지이겠는가? 그런데 참 말하기는 미안하나 나 돈 오백 원만 취해 주 게.”
리민영은 얼굴이 빨개지며 노골적으로 자기가 온 목적을 말했다. 한치각은 이미 예측한 바이라 그다지 놀라지는 아니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속마음에 는 오백 원은 고사하고 단 돈 오십 원이라도 취해주지는 않겠다고 생각을 결정한 까닭에 아무런 충동도 받지 아니하였다.
“나보고 돈을 취해 달라고? 말은 좋은 말씀일세만은 내가 시하 사람이 무 슨 돈이 그렇게 있나? 돈 많은 우리 아버님께 하게.”
한치각은 어려운 친구를 거절하는 한 전례가 되어 있는 자기 아버지에게 또 미뤘다.
“암, 그야 대권은 춘부장께 있겠지. 그러나 오백 원, 천 원 같은 돈이야 자네가 언제든지 술 사먹는 돈이 아니가? 내가 돈 오백 원을 갖다가 옷을 해입자거나 밥을 지어먹자는 것이 아닐세. 내가 맡아하는 ××학교가 있지 아니한가. 그 학교에 가난한 어린 것들을 위해서 청하는 말일세.” 리민영의 기름기 쫙 빠진 얼굴에는 창연한 빛이 나타났다.
한치각은 리민영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것이 마음에 꺼려서 고개를 숙이 고
“글쎄, 일은 매우 좋은 일일세마는 어디 내가 돈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 나?”
한치.각은 리민영의 곡진한 말에 아무 감각도 없는 것처럼 겉으로 발린 인 사의 말을 내일 뿐이었다.
“아닐세, 그것은 자네의 겸사이지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문 밖에 있어도 가끔 자네 속식은 듣고 있네. 자네 요새도 더러 술을 사먹으러 다닌다네그 려? 그 주용에서 좀 빌려주게. 오백 원만 가지면 석탄을 사서 교실에 불을 피우고 우선 밥을 굶는 선생 몇 사람에게 쌀도 됫거리나 나누어 주면 차차 날도 더워질 터이니까 학교는 그대로 유지해 가겠네. 자네가 알다시피 내가 언제 남에게 구차한 소리 하던 사람인가? 그러나 이백 명이나 되는 어린 학 생들이 이 추위에 달달 떨고 있으니 그것을 차마 눈으로 보겠는가? 그래서 생각다 못해서 자네를 찾아 왔네.”
리민영은 성의가 얼굴에 가득하고 말을 마친 다음에 긴 한숨을 내쉰다.
한치각은 식은 무쇠 덩이처럼 냉정한 빛으로 앉아서
“자네가 아까부터 나의 술 사먹는 이야기를 하네만은 그거야 얼마 되는 금액도 아니요 나의 자유가 아닌가?”
한치각은 리민영의 입에서 술 사먹는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듣고 자기의 방탕한 것을 비웃는 것처럼 들려서 이렇게 말하였다.
리민영은 뉘우치는 듯이
“참 내 말에 어폐가 있어서 자네에게 이상하게 들렸네마는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네. 하여튼 오백 원쯤은 자네 용돈에서도 돌릴 수가 있겠다는 말일었네. 오해하지 말게” 하며 리민영은 사과의 말 비스름하게 하였다.
“오해가 아닐세마는.” 한치각은 어물어물한 대답을 한다.
“하여튼 이번에 돈 오백 원만 주게. 여기서 이야기할 말은 아니나 소위 우리 양반들이라는 것이 무얼 해 놓았나. 자네부터 어떻게 들을는지 모르나 돈푼이나 있는 양반의 집 자식들은 주색잡기에 재산을 탕폐하고 참 애달픈 일이 아닌가. 나도 아무 것도 해놓은 일은 없네만은 선인한테서 물려받은 재산을 그럭저럭 사회로 도로 돌려보낸 셈일세. 원래 조선 양반들의 재산이 라는 것이 아니니까 쓸 적에나 좀 유의하게 써야 보상이나 되지 않나. 나는 그러한 주변으로 재산을 파헤쳤지만은 결국 한 사업은 하나도 없네. 자네도 생각을 좀 다시 먹고 오백 원만 나를 주게”
리민영의 사리가 곡진한 권고에도 한치각은 아무 느낌이 없는 듯이 일을 핑계하고 그 자리를 일어섰다.
83회 술취한 청년패
한치각은 권농동 어떤 고등 밀매음녀의 집에서 밤이 으슥하도록 독한 술과 썩은 정욕 속에 몸을 적시었다가 사지가 느른한 신체를 일으켜 그 집 대문 을 나섰다. 마치 쓰레기통에서 썩은 고기쪽을 더듬어 먹고 배를 채운 야견 (野犬)처럼 붉은 혀를 내밀어 타들어 가는 아래 위 입술을 핥아가며 헛놓이 는 걸음으로 대문을 나왔다. 밤은 깊었다. 경칩이 지난 이때이언마는 행낙 뒷골로 불어오는 밤바람은 아직도 겨울 추위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술 이 아직 다 깨지 아니한 한치각의 화끈거리는 얼굴에 스치는 그 바람을 추 위보다는 오히려 선뜻선뜻한 상쾌함을 느끼었다. 권농동 돌다리를 건너서 한치각은 동구 안 네거리를 나오는 길이다. 보름에 가까운 달은 벌써 서편 으로 기울어지고 행낙뒷골의 울퉁불퉁한 기와지붕에는 서릿발만 번쩍거리며 사면은 죽은 것 같이 고요하다. 어디서인지 아득하게 야경 도는 딱딱이 소 리가 들린다. 한치각은 취한 발길을 이리저리 떼어놓다가는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몸을 전후로 흔들며 걸드란 침을 내뱉는다. 전등불이 희미하게 비치 는 들창 안에서는 태엽이 다 풀린 괘종이 둔한 소리를 울리며 두시를 친다.
한치각은 ‘벌써 두 시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가슴을 헤치고 금시계를 꺼내 보았다. 과연 자기 시계도 뻔쩍거리는 금테 안에서 검은 시침이 뽀얀 사기관 위에 가는 줄 위에 각도를 그리어 두 시를 가르키고 있다. 한치각은 취한 중에도 별안간에 가벼운 불안을 느끼었다. 좁은 행낙뒷골에는 달빛이 이미 지나서 우중충한 흑선이 길게 끼치고 사람의 흔적은 아주 끊었다. 시 꺼먼 굴뚝 뒤에 우뚝 서 있는 시멘트 연통이 사람의 형상 같이 보여서 한치 각은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다. 큰길로 나아가서 얼마 아니 걸어가면 택 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치각은 정신을 차려서 좌우를 둘러보며 곡 선의 골목을 돌아서 장차 큰길로 나서려 할 세음에 골목 밖에서 두런두런하 는 사람의 소리가 들리더니 검정 외투를 입은 사오인의 청년패가 자기의 앞 을 향하여 그 골목으로 잡어 들어온다. 한치각은 지금 호젓한 길에서 불안 을 느끼며 나오는 중이라 별안간에 사람의 소리가 들리매 처음에는 섬뜩했 으나 들어오는 사람의 자체가 하나가 아니요 여럿인 것 같이 들려서 적이 마음이 놓였다.
“여보게, 인제는 그 지긋지긋하던 학교도 아주 끝이 났네. 우리도 세비루 만 장만하면 훌륭한 신사일세. 그리고 또 이상적 연애결혼이나 하면 아주 쩍말없는 행복이라는 말이지.”
“얘. 그 값싼 현실주의에만 동경들을 하지 말고 너희 생활도 이제부터는 초월한 생활을 좀 해. 이건 밤낮.”
“아따 초월? 초월은 다 무어냐? 활동사진 광고 모양으로 초, 초, 초특작 의 유니버샬은 아니고 그 쓸데없은 소리는 그만두고 또 박 군이나 처먹으러 가자. 이 몸이 요새는 느른하더라. 신혼여행에 아주 뽕을 빼는지 얼른 가 지. 그 놈이나 우리 잡어내서 카페나 가세.”
사오인의 청년들은 어지간히 술이 취한 어조로 이렇게 떠들썩하며 점점 한 치각의 앞으로 닥쳐 들어온다. 한치각은 그 패들이 술 취한 말 소리와 활개 에 넘치는 발자취 소리에 다시 위압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이 어깨를 겨누고 방약무인하게 골목 안을 휩쓸며 들어오는 것이 괘씸하게도 생각이 들어서 앞에 탁 마주치자 눈을 흘기며 몸을 피하려 하는 즈음에 청년 중에 키가 그 중 우뚝하고 체격이 실팍한 한 사람이 물끄러미 한치각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몸을 한치각의 편으로 턱 막으며 다른 청년들을 들여다보고 “여보게들 만났네, 만났어, 바로 그 해룡피 외투일세.”
“아? 그놈이 그 놈이야? 앗다! 그 능글능글하던 그 놈 말이지?” “그래그래, 그 돈 냄새를 피우고 다니던 그 자일세.”
“어디 얼굴이나 자세히 볼까?” 하며 사오인의 청년들은 좁은 골목 안에 서 마치 길을 막 지르며 어린애를 놀리듯이 한치각의 몸을 에워싸며 들이덤 비었다.
84회 철권의 제재
한치각은 별안간에 좁은 골목 안에서 의외의 술취한 청년패에게 포위를 당 하여 도저히 저항할 힘은 없고 몸을 빼치려 하였으나 철통 같이 둘러싼 그 패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치각은 주저주저하며 “남의 앞을 어떻게 막아서야 사람이 다닐 수가 있 소?” 하며 한치각의 어조는 평일에 보지 못하던 부드러운 어조이었다. 그 러나 한치각의 태도는 그의 몸에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있는 남보기에 교만 한 그대로 나타났다.
그 중에 한 청년이 “뭬야? 길은 네가 막았지. 우리가 막았니?” 하며 힘 있는 주먹으로 한치각의 가슴을 내질렀다.
한치각은 여지없이 몸을 뒤척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아, 봉변이로군. 아무도 없나? 이거 큰일 났군” 하며 한치각은 얼굴이 핼쓱하여졌다.
그 중에 가장 실팍한 한 청년이 또 한치각의 멱살을 움켜쥐고
“이놈아, 봉변? 봉변이라는 말이 어디다가 쓰는 말이냐? 여보게 우리의 신성한 칠권을 한 번씩 내리세” 하는 소리가 들리자 사오인의 주먹이 벌떼 같이 덤비어 한치각의 머리로 옆구리로 가슴으로 함부로 들어 닥친다.
한치각은 두 손을 벌리며 이리저리 막으려 하나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몸은 벌벌 떨리고 가슴은 울렁거리며 “여보. 이게 무슨 난폭한 행동이오?
지나가는 사람도 없소? 사람 좀 살려주오” 하며 주검에 빠진 사람처럼 앞 길이 아득하고 정신이 없다. 최후의 한치각의 머리 위에서 번쩍하는 청년의 주먹이 한치각의 뒤통수에 번갯불 같이 떨이지자 한치각은 “응!” 하는 외 마디 소리를 치며 장대가 탁 뒤로 자빠졌다.
청년들은 한치각이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더니 “승리! 승리! 승리!” 하며 깊은 권농동 골목으로 일시에 형적을 감추어 버렸다. 골목 안에서 한 참동안 이렇게 활극이 일어났으나 청년패가 형적을 감춘 뒤에는 그부분은 폭풍우가 지나간 해변처럼 다시 죽은 세계 같이 고요하다.
좁은 개천에 허리를 걸치고 쓰러진 한치각은 얼마동안 지나도록 몸을 움직 이지 아니하고 꾸부러진 시체와 같이 언 땅 위에 축 늘어져 있다. 얼룩점이 박힌 도둑고양이는 새파란 눈을 혹 뜨고 건너편 수채 구멍에서 혹 튀어나와 서 한치각의 머리 위로 획 지나가며 밥을 찾는 소리를 친다. 한치각이 쓰러 진 부근에는 모자와 양복 단추, 외투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구두주걱, 담배 곽, 수건들이 희미한 달빛 밑에 어수선하게 늘어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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