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와사
1회 그 이튿날
시내 사직공원 옆에 천여 평의 넓은 지단을 차지한 고주대문이 높이 달리 고 좌우고 줄행랑이 늘어선 큰 집 한 채가 있다. 이 집은 크기로도 그 근처 에서 유명할 뿐 아니라 고래등 같이 즐비하게 양평으로 깨진 기와골에는 바 위 옷이 더덕더덕 늘어붙고 처마 끝은 여기저기가 축축 처져서 그 부근에 날마다 늘어가는 붉은 기와와 푸른 벽으로 산뜻하게 지은 문화주택이라든지 됫박 같은 간살로 뽀얀 양회칠을 한 소위 개량 가옥들과는 너무나 조화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원인에서 나온지는 모르나 그 동리 사람들은 이 집을 가리켜 골동가옥(骨董家屋)이라고 부른다.
요사이 유한 계급의 돈 많은 사람들은 서화골동을 한 소일거리로 삼아 케 케묵은 그릇조각 한 한 개에 몇백 원씩 소비하는 것도 유행하지마는 천정에 는 군데군데 앙토가 떨어지고 벽의 사자가지가 썩은 생선의 뼈가 드러나듯 엉성한 보기만 해도 머릿살이 아픈 가옥의 골동품은 좀처럼 손을 내밀어 사 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럴 뿐더러 이 집 늙은 주인 한승지는 자기가 그 집 안방에서 세상에 나 오던 첫소리를 지른 집이라고 이유 없이는 구태 팔아버릴 생각도 도무지 않 는다. 또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이력으로 보아서는 주택에 대한 개혁을 일으 킬 만한 그 집의 젊은 주인도 역시 그 집에 손을 대어 수리를 한다든가 제 집을 사서 이사를 하는 적극적인 생각은 도무지 없다.
그저 그럭저럭 지내는 동안에 행랑채는 한쪽으로 쏠리어 이 귀퉁이 저 귀 퉁이에 통나무를 버티어 겨우 현상을 유치할 뿐이다. 여름에 소낙비나 몹시 올 때는 그 동리 사람들이 집 앞으로 지날 때마다 지붕을 쳐다보며 달음박 질을 칠 만치 위험한 상태에 있지마는 그것이 행랑채인 까닭인지 그 집의 노소 두 주인은 그의 신경을 의심할 만치 태연무심하게 내버려 둔다.
이러한 사직골에서 골동가옥이라고 별명을 듣는 그 집 젊은 주인인 한치각 은 대문, 중문, 사랑문을 겹겹으로 닫친 깊은 작은 사랑채 방에서 오늘도 두 눈두덩이 보숙보숙 부어오른 눈을 좌우로 부비며 조반으로 먹는 속미음 대접을 손에 들 때에 방장을 둘러친 장지 밖에서는 태엽 풀린 시계가 힘없 이 오후 두시를 친다. 그는 자리 속에서 겨우 상체만 일으켜 속미음을 마시 고는 속미음 대접을 내던지듯이 쟁반 위에 버리고 또다시 이불 동정에 턱을 파묻으며 드러누웠다.
그는 머리밭에 손을 더듬어 해태표 갑에서 궐련을 꺼내어 붙여 물고 어젯 밤 명월관 뒷방에서 돌발한 일장 활극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상노가 들어와서 미음 그릇을 놓고 나간 뒤에는 우중충하든 방안이 다시 부자연한 밤이 되었다. 가슴이 쓰린 듯한, 사지가 쏙쏙 쑤시는, 헛구역이 날듯날듯한 여러 가지 감촉을 느끼며 기생, 장구, 웃음, 노래, 담배연기들 이 한데 일크러졌던 어젯밤의 기억을 몽롱하게 생각한다. 한두번이 아닌 요 릿집의 놀이가 그에게는 그다지 새삼스럽게 애착을 가질 필요는 없지마는 어젯밤에는 취중에도 기억에 남을 만한 두어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로 머릿속에 떠도는 것은 기생 일지매의 하부다이 치마를 과도로 발기발기 찢 어버린 것과 그 다음은 심참봉의 얼굴을 맥주병으로 매어친 그 두 가지 사 실만은 어렴풋하게 생각이 나나 그 밖에 모든 것은 도무지 기억에 나타나지 않는다. 대관절 무슨 원인으로 자기가 그러한 활극을 하게 되었는지 머릿속 에 텅 비인 것처럼 다른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가 취중에 난폭한 주정을 한 뒤에는 뉘우치는 것이 보 통이지마는 한치각이 지금 생각하는 것은 결단코 그러한 뉘우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젯밤에 생긴 활극이 보통 때보다 다소간 그 정 도가 좀 심하였다 할 뿐이요 그 뒷문제 해결은 극히 간단하게 생각하는 까 닭에 이것으로 마음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다.
일지매에게는 삼월오복점에서 왜비단 몇감만 사보내면 마감이 될 것이요 또 심참봉에게는 오 원짜리 지전 한 장이면 화해를 하고도 오히려 감사하다 는 치하는 거슬러 받을 터이니깐 그것은 결코 문제도 될 것이 없다고 생각 하였다. 이 생각 저 생각을 더듬으며 전날 밤 광경을 눈 앞에 그리는 동안 에 아침불을 늦게 땐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그는 다시 잠이 소르르 들었다.
2회 사직영문
한치각의 집 상노방의 마루 끝에는 벌써 두 시간 이전부터 일없이 시간을 보내는 중년무직자들이 모이어 마치 비 개인 여름저녁 때에 전선줄 위에 제 비들이 늘어앉듯이 걸터앉아서 쓸데없는 잡담을 지저거리고 있다가는 하나 씩 둘씩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또 그 중에는 햇빛을 따라서 사랑대문 앞에 서 서성거리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큰집 사랑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자들은 옛날에는 ‘문객’이라는 듣기 좋은 대명사로 불렀으나 요새는 그 대명사가 신식으로 변하여 날마다 댁 대령하는 그 패들은 ‘병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대명사가 그다지 새로운 말은 아니지마는 모든 것을 이전에 있던 대로 지내는 한치각의 집 사랑에서는 집 사랑에서는 문객을 병정이라고 부른 지가 얼마 아니된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새 말에 따라서 그들이 날마다 모이는 한치각의 사랑도 그 들 사이에는 사직영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까닭에 한치각의 집은 두 가지 별명을 듣게 되었다. 그 집 전체를 말할 때에는 역시 골동가옥이라고 하고 또 한치각이 쓰고 있는 사랑만을 표시할 때에는 사직영문이라고 부른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별명을 군대식으로 붙 여서 젊은 주인 한치각은 현역대장, 늙은 주인 한승지는 노대장이라는 별명 을 붙였다. 그러나 이 별명은 그 집 젊은 주인 앞에서만 통용하는 존칭어이 요. 소위 병정이라는 그들 사이에는 ‘현역’,‘노통’이라고만 부르는 것 이 상례이다.
매일 판에 박은 듯이 모이는 그들은 오늘도 날마다 표준이 되어 있는 오정 떼에 모두 모여있다. 현역대장이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한 까닭에 상 노의 방 뒷마루 끝에서 으스스한 추위를 느끼면서 한치각이 일어나기만 막 연히 기다리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사람들이 화롯불 하나 없는 마루 끝에 서 두시간 이상이나 떨고 있지마는 그 중에 감히 한치각을 깨어 일어나라고 거래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동짓달 해가 다 가기까지 한치각이 제풀에 잠이 깨기만 기다리고 있을 운명의 사람이다. 모인 사람중 에는 한치각의 퇴물인 장아찌빛이다 된 외투를 얻어입은 사람도 혹은 목에 대인 털이 다 모지라진 인바네쓰를 두른 사람도, 아직 그 은덕에도 참예치 못한 장병은 회색이 검정빛이 된 목단 두루마기 바람으로 ○장을 웅크리고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 가기만 기다린다.
“여보게 오늘은 대장의 기침이 너무 다방골인걸. 이래서야 일찍 등대한 병정들이 추워서 살수가 있나. 이것 만주 ○빙보다 더 심한데.” “이 사람 인제 겨우 세 신데 그러나, 그저께는 대장의 기침이 놀라지 말 지어다. 오후 여섯 시였어 자그만치…….”
“그럼 오늘도 여섯 시까지란 말야? 아이구 ─, 맙소사, 이 추위에 한데서 여섯 시까지야? 여보게 사람 죽겠네. 그럼 오늘은 초저녁에 ‘훈련원’을 하세…….”
“훈련원? 이 추위에 훈련원은 무얼 하러 가?"
“저럼 엄숭이, 훈련원도 몰라? 입때까지. ‘해산’하잔 말야. 햇기나 있 어서.”
“옳지. 영문을 해산하잔 말야? 좀 참아. 대장이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수 가 다 있네…….”
그들은 이러한 회담을 하는 중에 별안간에 대문이 삐 ─ 걱 씩 ─ 하고 좌 우로 열리면서 꽁무니에 찌른 마차꾼이 쑥 들어온다.
“강에서 장작 들어왔습니다. 세어서 받읍쇼.”
하며 큰대문안으로 마차를 들이끈다. 상노방 뒷마루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그들은 우뚝우뚝 일어서서 그편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중에 ‘약밥’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주사는
“여보게 우리들은 얼른 대문으로 들어가세, 장작 때문에 이집 노장이 또 출장하네. 도무지 말썽이야.”
눈으로 사람중문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씩 둘씩 중문안으로 몸을 감추 었다.
얼마 안 되자 우르르 꽝 하는 장작 부리는 소리가 언 땅을 울리며 사방으 로 진동한다. 중문안에 들어섰던 그들은 서로 옆구리를 꾹꾹 찌르며 “인제 는 됐네. 제가 소대성이의 잠인들 이 소리에야 아니 깨겠나” 하며 무슨 승 리나 얻은 듯이 수근거린다.
3회 부상병
한치각은 밤낮의 분간이 없는 캄캄한 방장 속에서 사지가 녹신하여 오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다시 잠이 들려고 몽롱한 상태에 오락가락하는 중에 별 안간에 머리가 무겁게 울리며 들리는 장작 부리는 소리에 잠이 번쩍 깨였 다. 소리는 들었으나 그 전체가 무엇인지, 머리를 들어 소리가 들리는 편으 로 귀를 기울여 살피려할 즈음에 사랑문밖에서 거친 목소리로
“하나라 하나, 둘이여 둘, 셋이라 셋, 넷이라” 하는 장작을 세는 소리가 들린다. 한치각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 뒤에는 다시 슬그머니 불유쾌 한 느낌이 떠올리며 마치 선잠을 깨인 어린애들이 찜부럭을 부리려고 얼굴 에 모든 불평을 나타내듯이 그는 얼굴을 우그리며 상체를 일으킨다. 그의 소르르 오던 잠은 다시 만회할 수 없이 멀리 떠나버리고 말았다.
방장 한편을 걸으며 불평이 쏟아져 나오는 어조로 “만돌아” 하고 불렀 다.
상노 만돌이는 무심히 장작 세는 것을 보고 섰다가 깜짝 놀라며 작은 사랑 으로 들어온다. 한치각은 상노가 마루에 올라서자 장지를 와르륵 밀어 열며 “이놈아 누가 장작을 거기다 내리라고 하더냐. 내가 자고 있는 것도 몰 라? 망할 자식들.”
“영감마님께서 장작이 소실된다고 대문 안에 부리라고 하셨어요.” 하고 상노는 기둥을 등지고 황송히 섰을 뿐이다.
치각은 모든 불평을 기침에 섞어서 타구에 빼앗으며
“어서 사랑이나 치워. 손님들은 다 오셨느냐?”
“네. 저 사랑 마당에들 계세요.”
하며 상노는 비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위 사랑병정들은 비로소 뜰 위로 올라들 선 다.
“잠들 잤나? 들어들 오게. 그런데 심참봉은 여태 아니 왔나? 나는 어젯밤 에도 위스키를 어떻게 먹었던지 여태까지 정신이 없는데.”
치각은 매일 그중 먼저 대령하던 심참봉이 여태껏 아니온 것을 알 때에 어 젯밤에 맥주병으로 후려친 그의 상처가 다시 마음에 걸리어진다.
약밥 정주사가 선두에 서서 방으로 들어오며
“그럼 어제저녁에도 대장이 또 녹었구려. 어저께 당번은 심참봉인데 여태 웬일이야? 또 술에 녹었나? 그러면 어저께 전쟁은 장졸이 모두 포로가 된 모양들인가.”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손은 슬그머니 내밀어 재떨이 옆에 놓인 해태표갑에서 얼른 궐련 한 개를 꺼내어 붙인다. 그들은 차례로 정주사가 하듯이 해태표갑을 번갈아 집어다가 담배를 붙인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제 일 긴급한 문제의 하나이다. 자기집에서는 ‘마코’ 한 개를 얻어보기가 쉽 지 아니한테 눈 앞에 말랑말랑하고 연기 잘 들어오는 해태갑이 개방된 것을 그대로 지낼 수 없다. 한치각이 허리띠를 잡아매며 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상노가 방을 치우는 비 끝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먼지 속에서 해태 연기만 피우고 앉았다.
한치각은 자기집 사랑에 십여 명이나 남은 병정들이 매일 같이 모여있으나 요릿집을 갈 때에는 그날 그 중에서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꼭 한사람씩 눈짓을 해서 데리고 가는 까닭에 그들 사이에는 이러한 당선에 드는 것을 당번날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한치각이가 그 전날 밤에는 어떤 행동을 하 였는지 그날 일은 당번에 참예치 못한 병정들은 알 기회가 없다. 따라서 오 늘 아니온 심참봉의 사고에 대해서도 한치각 외에는 어떤 사정이 생긴 것은 도무지 아는 이가 없다. 지금 모여 앉은 그들은 심참봉이 또 술에 녹은 것 이라고 막연한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는 심참봉의 문제가 한참 되풀이가 되더니 바둑판, 장기판, 마 작판이 출동하기 시작한다. 상노 만돌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걸레질을 치고 있다.
해태표갑은 한차례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강진사가 한 개를 가무려 두려 고 뒷손질로 갑을 떨 때에는 벌써 엉성한 ○○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쪽에서는 “장이야” 저쪽에서는 “패를 들어야지” 한편에서는 “펑일 세” 하며 공도박의 개장이 한참 흠잡한 중에 얼굴을 붕대로 칭칭 동인 심 참봉이 성큼 마루로 올라선다. 그들은 유희판에서 손을 놀리던 채로 “여 어, 부상병이 들어온다” 하며 심참봉을 쳐다본다.
4회 그들의 별명
심참봉은 전날 밤에 대장 한치각에게 몇 시간의 신임을 얻어서 명월관에 동행을 하게 된 것이 마치 만인계나 탄 것 같이 마음의 만족을 느끼며 명월 관 현관에서부터 한치각의 단장, 구두들을 별별히 신칙하는 등 충실한 당번 병정의 직무를 다하여 가며 들어갔다.
속담에 호랑이의 위엄을 자세하는 여우라드니 심참봉은 그야말로 한치각의 위엄을 혼자 맡아서 연해연방 보이를 부르며 우쭐대다가 새벽녘에는 심참봉 의 기고만장하는 그 머리위에 때 아닌 벽력불이 떨어져서 정신이 아득하였 다.
심참봉은 해가 저녁때가 다 되도록 따뜻한 국 한 모금을 못 얻어먹고 찬바 람이 내리치는 현저동 남쪽 초가집 속에서 찬 기운이 치밀어 올라오는 냉골 에 사지가 눅진한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드러누웠다.
입에는 침 한점 없이 마르고 혀는 깔깔하여 술꾼만이 느끼는 소위 해장의 생각이 각일각으로 간절하여 온다. 마치 아편중독자가 그 시간을 못 참듯이 심참봉의 체내의 모든 세포들은 아침에 생각하던 분노, 반성했던 이 모든 이성의 활동을 덮어 누르고 술술 해장술 하고 고함을 치며 머릿속으로 치밀 어온다. 이러한 체내의 반동을 받는 심참봉은 벌써 두어 시간 전부터 누웠 다 앉았다 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차이다.
두 뺨이 홀쭉하게 여읜 그의 마누라는 또 저녁거리가 없다고 쫑쫑거리기 시작한다. 심참봉은 이 기회에 벌떡 일어나며?
“또 동원령이 내린느군. 없는 걸 나는 어떡하란 말야?”
하며 불쑥 찔르는 어조로 무책임한 대답을 던지며 땀국에 젖은 중절모자를 띄어들고 쪽대문을 나간다. 그의 마누라는 심창봉의 뒷모양을 암상이 닥지 닥지한 눈으로 쏘아보며
“저 얼굴 꼴하고 또 어디를 가는 모양이야? 허구헌날 딱한 일도 많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심참봉은 듣는지 마는지 한치각의 집으로 향하였다.
한치각의 집사랑에는 한치각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 속담에 화빈이 작주라 듯이 약밥 정주사, 횃대 강진사, 채플린 박주사, 연통 안의관을 비롯하여 붕대 동인 심참봉까지 소위 사직영문이라고 일컫는 그의 집 사랑친구는 다 모이었다.
이와 같이 매일 모이는 십여 명 무직자 중에는 두어 사람을 제한 외에는 그 대부분이 모두 시대가 지난 양반의 퇴물이다.
그 이유는 유유상종이라는 옛날 말과 같이 이집 주인 한치각이 양반인 골 동품인 까닭이다. 그리고 동리 사람들이 이 집을 골동가옥이라고 부르는 것 도 이집의 쇠락한 외양을 물론 표시한 것이나, 그 내면으로는 양반의 퇴물 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한 원인이 된 것이다. 인간생활에서 탈선된 그들은 해가 지나 짧으나 아침부터 자리 위에 잠이 들 때까지 술, 계집, 잡담, 담 배 이것이 일상생활의 전부이다.
이와 같이 허구헌날을 판에 박은 듯이 권태, 부패, 방만한 생활을 계속하 고 있는 그들 사이에는 무엇이나 새로운 자극을 요구할 것은 물론이다. 이 러한 자극이 때로는 ○○질, 입씨름으로 변하여 졸음 오는 좌석에 의미 없 는 수○을 일으키는 것이 전례이나 그 중에서 가장 그 생명을 오래 계속하 는 것이 그들에게 붙어있는 ‘별명’이다.
약밥이란 별명을 가진 정주사는 얼굴이 쇠천빛 같이 거문 데다가 마마자국 이 군데군데 있어 마치 꾸드러진 약밥 같다고 어느때 요릿집에서 짓궂은 사 람이 좌흥으로 웃긴 것이 이내 정주사의 별명이 된 것이다. 그다음에 횃대 라는 별명을 가진 자는 키가 그 얼굴에 조화되지 않을 만큼 큰 데다가 두 팔을 벌리고 일없이 방안을 서성거리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요, 박주사의 ‘채플린’은 그의 떨어진 구두를 표시한 것이다. 전날밤에 머리를 상한 심 참봉은 ‘전문가’라고 부르니 이 별명은 그중에 가장 실용적인 별명이다.
그는 기생 소문을 잘 듣기 까닭이다. 그밖에 학자, 노동자 등의 별명이 있 거니와 가장 알기 어려운 별명을 가진 것이 안의관이다. 그의 별명은 ‘연 통’이라고 부르나 그 의미는 대수의 방정식처럼 여러 번 풀지 아니하면 알 수가 없다. 쉽게 말하자면 ‘뚜쟁이’이라는 의미이나 그중에 ‘뚜’하는 음을 떼어다가 공장 연통을 연상한 것이다.
5회 강화대사
한치각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 아무 재미도 없는 헛내기 바둑 마작에 차차 싫증이 나게 된 그들은 허연 붕대로 얼굴을 동이고 들어온 심참봉이 얼마쯤 새 흥미를 끌게 되었다.
이런 뭔 일으로 얼굴을 상하였든지 그것은 둘째 문제로 하더라도 여하간 날마다 이마를 한데 대이고 모여서 노는 친구의 한사람이 별안간에 얼굴에 상처가 뵈인다 하면 다소간 마음에 놀라운 생각도 날 것이요, 그러한 정의 가 없다하면 다만 반말로 동정이라도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보통 인사이다.
그러나 모든 성의와 인정감이 미비된 그들 사이에는 그러한 표정도 없으려 니와 동정의 말 한 마디가 없다. 만일 지위를 바꾸어 이집 주인 한치각이가 그러한 힁액을 당하였다하면 그들은 덤비며 만지며 모든 표정을 다해서라도 가엾다는 동정을 나타내었을 터이나 일 년 열두 달에 쓴 술 한잔 담배 한 개의 은택이 없는 심참봉에게는 구태여 자기의 신경을 긴장시켜가며 그런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 사이에는 눈앞에서 어른거리 는 돈푼이나 술잔이나 요리접시 외에는 아무 감촉이 없다. 만일 그들이 가 지고 있는 이러한 단순하고 저렴한 욕구를 없애버린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 들은 감정을 초월한 인간이라고 할만치 모든 신경이 마비되어 있다.
심참봉도 자기에 대한 어떠한 그들의 예도를 물론 섭섭하다거나 이상스럽 게는 생각지 않는다. 자기 자신부터 평시에 그러한 냉정한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도 느끼지 않는다. 그 중에 말썽꾼인 약밥 정주사 의 천인사가
“또 받았군. 전선대를 어디서 받았어? 이왕이면 종로 한가운데 섰는 쇠기 둥이나 한번 받아보지…….”
정주사의 말을 이어, “앗게, 이사람 아까운 전선대가 하나 또 조선에서 축이 나게” 하며 연통 안의관은 주독이 내솟은 코를 실룩거리고 비웃는다.
“아서, 그러지들 말아. 사람이 인사는 치러야지. 자네 매우 놀랐겠네 그 려. 대관절 생명엔 관계나 없나?” 하며 손을 내밀어 자기의 턱을 만지려 하는 강진사의 손을 탁 치며 심참봉은 “애라, 장난마라. 이 자식 아파 죽 겠다” 하고 고개를 돌린다.
“엊저녁 당번에 술을 작작 먹지. 술도 음식이야. 얼굴이 저 지경이 되도 록 어디서 또 굴렀어?” 마작패를 고르며 채플린 박주사는 곁눈으로 본다.
이와 같이 그들 사이에는 한참 심참봉의 얼굴 동인 것이 새 이야기거리는 되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심참봉의 부상한 진상은 아는 사람이 없다. 한 치각은 원래 성질이 활발한 헛선전은 잘하지만은 부랑생활을 하는 중에도 한 푼 돈에 때가 묻도록 다라운 사람이다. 그래서 어젯 밤에도 많이 모여있 는 사랑 사람들을 다 따돌리고 오직 심참봉 한 사람만 데리고 명월관에 가 서 그 풍파가 났던 까닭에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다만 막연한 추측 만 가지고 심참봉을 비웃는 것이다.
한참 심참봉이 억울하게 말썽거리가 되어 앉았는 중에 안으로 통한 복도문 이 열리더니 한치각이는 잇새를 쑤시며 사랑으로 나온다. 방 가운데에 불규 칙하게 모여 앉았던 그들은 별안간 물결 헤치듯이 좌우고 물러 앉는다. 한 치각은 아랫목 안석 옆에 비스듬히 앉으며 심참봉을 건너다보고
“과히 아프지는 않아?”
하며 동정도 아니요 사과도 아닌 의미 없는 웃음을 던지며 “나는 어저께 아주 녹았었어. 나중에 ‘위스키’를 어떻게 먹었는지 아주 정신이 아득했 는데 집에 돌아온 것도 생각이 안 나는 걸.”
그 말 끝에 심참봉은 앉아 기회를 만난 듯이
“나는 별안간에 난데없는 맥주 두 병이 깨뜨러 오는 바람에 취했던 술이 번쩍 깨서……” 하며 말이 쏟아져 나오려 할 때에 한치각이 눈짓을 하며 심참봉의 말문을 막으며 의미 깊은 어조로
“어젯밤 전장에 강화대사는 또 심창봉이 갈 특권이 있는데” 하며 심참봉 의 말을 갈로막았다. 심참봉의 눈앞에는 어젯밤에 보던 요리상이 어른거리 며 모든 불평이 흔적을 감추었다.
6회 저녁을 앞두고
한치각은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그 전날 밤에 심참봉 을 명월관에서 때린 사실이 드러나면 비록 술자리에서 생긴 일이라 할지라 도 하여간 자기에게는 그다지 명예스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심참봉이 입 을 열어 어젯밤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에 심참봉에게 눈짓을 하여 그 말 을 정지시킨 뒤에 심참봉의 마음을 끌도록 일부러 알아들으라는 어조로 심 참봉을 ‘강화대사’로 보낼 터이라고 말하였다. 한치각의 ‘강화대사’란 말은 물론 그 전날 밤에 자기가 일지매의 치마를 찢은 까닭에 그 사과로 심 참봉을 일지매의 집에 보내겠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심참봉은 시골서 처 음 잡아온 사람이 아니요, 자기 말마따라 수십년 동안을 화류계에서 시들었 다는 사람이 그말의 의미를 못 알아채일 리야 없다. 심참봉은 자기가 일지 매의 치마감까지 '사화물'로 가지고 가게 된 것도 짐작하였을 뿐 아니라 그 뒤에는 화해차로 받드시 요릿집에 갈 것까지 미리 추측하고 어서 한치각이 가 분부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눈짓과 ‘변’으로 한치각과 심참봉 사이에는 전후사건이 다 약조 가 되었으나 좌중의 다른 사람들은 막연하게 심참봉이 오늘도 또 당번을 보 게 되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동짓달의 짧은 해는 벌써 다 갔는지? 머리 위에는 어느 사이에 전등불이 들어왔다. 주인 한치각은 아침 겸 점심 겸 또 저녁 겸하여 밥상을 물리고 나온 지가 얼마 안되나 사랑에 모인 사람들은 오정이 얼마 지나지 아니한 때부터 사랑대문 밖에서 떨고 있다가 흥미없는 바둑 마작에 그럭저럭 해는 보내었으나 종일토록 더운물 한 모금을 못 얻어먹은 그들은 시장기를 느끼 게 되었다.
마작도 그럭저럭 끝이 나고 잡담재료도 없어지게 된 그들은 모두 으스스한 몸을 바짝 오그리고 떨어진 보료 위에 좌우로 늘어앉아서 파리똥과 담배연 기에 새까맣게 절은 천정 가운데에 매달리어 희미하게 안방만 비치고 있는 전등만 치어다 보고 있다. 보기만 하여도 궁상이 뚝뚝 떨어지는 그들의 머 릿속에는 형형색색이 값싼 공상이 떠들기 시작한다. 청요리집의 돼지 기름 냄새, 양식 테이블에 위스키, 일본 된장국에 사시미 안주, 요리상 위에서 떼굴떼굴 끓는 신선로, 아주 뚝 떨어져 앉은 ○침에 얼큰한 숭어지지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목전에 닥쳐오는 저녁밥 때를 앞으로 하고 이러한 모든 공상을 일으키고 있으나 이것은 다만 자기 한 몸만을 주제로 하는 생각이 다.
단칸짜리 사글세방에서 어린 자식들은 누더기 옷을 몸에 걸치고 으르를 떨 며 냉동 위에 앉아서 저녁밥 달라고 보채는 가련한 자기집 광경을 연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들의 날마다 바라는 것은 모든 성력을 다하여 서라도 자기 한 몸만 배부르도록 취하도록 그날 하루를 지내이면 최고의 성 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날마다 가지고 있는 이러한 희망은 용이 하게 채울 수 없다. 한치각은 자기의 재산으로나 또 그의 날마다 계속하는 부랑생활로 볼 것 같으면 자기의 하인 같이 부리는 그들에게 때때로 선선하 게 한번씩 풀어먹이는 것이 보통이라 할 터인데 그 집 사랑에 모인 사람들 은 벌써 몇 해 동안 지내었으나 일찌기 그러한 선선한 꼴은 용이히 보지 못 하였다. 은근짜집을 뒤질 때에는 그 헌물을 새로 발견하여 충실하게 보고한 그 사람 하나만 겨우 눈짓으로 따내어 데리고 가거나 또 요릿집을 갈 때에 는 한사람 아니면 두사람씩 뒷구멍으로 찍어내서 데리고 다니는 까닭에 다 른 부랑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병정들처럼 넉넉한 꼴을 보지 못한다.
오늘도 벌써 전등이 들어왔으나 한치각은 그들을 위하여 저녁을 준비하는 기색도 없고 또 그들을 데리고 어디로 나아갈 생각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인의 냉정한 태도가 한두 번이 아니요. 또 그들은 이 집 사랑을 떠났댔자 변변한 저녁 한 때가 없는 사람들이라 그대로 허기턱만 쳐들고 늘어앉았다.
한치각은 그들이 얼른 헤어지기만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나 용이히 헤어 질 기색이 없는 것을 보고 마지 못하여 상노를 불러서 겨우 저녁을 내오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랑손을 다 보내는 상용수단으로 “오늘 저녁은 조선 호텔에서 사람을 만날 시간이 있다” 고 예방선을 쳐놓고는 심참봉에게는 눈짓을 하여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오 원짜리 지전 한 장을 건네주고 먼저 삼월오복점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일렀다.
7회 순영국식
한치각이는 심참봉을 마루로 데리고 나가서 돈 오원을 지갑에서 꺼내서 주 며 삼월오복점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이른 뒤에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심 참봉도 그 뒤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오며 ‘오늘밤 하루는 하여간 또 유쾌히 지내게 되었다’고 생각하니만큼 그의 얼굴에는 기쁜빛이 나타났다.
심참봉은 별안간 급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모자를 빼어들며 황황히 다시 밖으로 나아간다.
영창 밖에서 한치각과 심참봉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던 방안 사람들은 별안간 심참봉이 모자를 가지고 나아가는 뒷모양을 쏘 아보며 좌중에는 모두 가벼운 질투의 빛이 나타났다.
그중에 가장 노골적으로 약밥 정주사는 “내일은 또 다리에 붕대를 동이고 출석할 모양이로군” 하며 좌중을 한번 의미 있게 둘러본다. 여러 사람들은 그 말에 동감을 나타내는 듯이 모두 비웃는 웃음이 입 끝에 떨어진다. 안석 에 비스듬히 앉았던 한치각도 여러 사람들의 웃음에 따라서 의미 없이 픽 웃는다. 그중에 얼른 정주사는 “대장이 요사이는 밀가루에게 아마 물린 게 야. 이 병정에게도 이따금 당번을 좀 명령하시구려. 너무 오래 굶었는 데…….”
한치각은 웃으며 “망할 자식! 밀가루가 뭐냐. 낫살이나 먹은 자식이 지각 이 나야지.”
채플린 박주사도 새까만 윗수염을 쫑긋거리며 “앗게. 이사람 그보다 더 지각이 나면 ‘신마찌’ 전문가가 또 되게” 하며 웃는다.
약밥 정주사의 ‘밀가루’란 말은 그들 총중에뿐 아니라 요사이 이러한 부 랑생활을 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말하는 밀매음녀, 은근짜들을 가리킨 말이다.
그들 사이에는 하고한 날을 잡담으로 보내는 터이라 보통 사회에서 쓰는 그 말을 그대로 사용하기는 너무나 변화도 없고 흥미를 끌지 못하는 까닭에 그들은 어느 때든지 보통 이야기를 자연스런 말로 하는 때는 적다. 억지로 새 말을 만들려고 하는 중에 기기괴괴한 어투가 다 생기어 나온다. 그들의 ‘밀가루’라 하는 말도 물론 이러한 시간의 낭비자들 입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 사이에는 언어의 주관 목적이 다만 무가치한 일시적 웃음을 자아내는 데에 그칠 뿐이요 말의 정체인 의사를 표시하는 데는 너무나 엄숙 함이 적다. 이 집 사랑에서 최근의 말 같은 말이 있어보기는 며칠 전에 주 인 한치각이가 자기삼촌의 복제를 당하였을 때에 인사말의 몇 마디뿐이었 다.
안으로 통한 복도에서 상노 만돌이의 “진지상 나옵니다” 하는 소리가 들 리더니 문이 좌우로 열리며 상노간 하인 수복이가 교자상 한 머리를 들고 상노와 같이 저녁밥상을 들어온다. 턱을 치어들고 희미한 십촉 전등만 바라 보고 앉았던 그들은 비로소 엉덩이를 움직거리며 재떨이 ‘바둑판’ 마작판 들을 한 면으로 치우며 그야말로 영문 병정들이 밥때를 준비하듯이 각각 분 업의 행동을 시작한다.
상을 들어다 놓자 주인 한치각은 어느 때나 하는 성의 없는 어조로 “반찬이 아무것도 없을 걸. 별안간에 여럿이 먹을 것이 준비되었을라 나?” 하며 핑계의 말을 한다. 나온 상은 한치각이가 이면치레를 한 그 이 상의 간단한 방상이었다.
이 집 조석밥상은 그야말로 춘향가에나 나오는 이도령의 밥상을 연상할 만 치 지노끈으로 다리를 동인 교자상과 도거리밥을 담은 때가 새까맣게 묻은 ○밥통, 상위의 중앙을 점령한 무쇠남비의 덤덤한 고추장 찌개가 가장 특색 을 내일 뿐이요, 그야말로 ‘엉성한 이도령의 밥상’ 이다. 그러나 그것은 날마다 당하는 그들에게는 별로 부족히 생각할 것도 없고 또 주인이 같이 동석을 아니한다고 노할 사람도 없다.
그들은 한치각의 “어서들 자시게” 하는 소리가 떨어지자 마치 식은 죽그 릇에 파리 덤비듯이 교자를 둘러싸고 늘어앉아서 시금털털한 모주를 서로 따라 돌리며 먹기 시작한다.
한치각은 이 기회에 일어서며 “나는 일전에 구라파에서 같이 있는 사람이 나와서 오늘 호텔로 약조한 까닭에 먼저 나가겠네. 많이들 자시게” 하며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물론 사람들을 따는 핑계이었고 사실은 삼 월오복점에서 일지매의 치마감 끊기가 바빠 오는 까닭이다.
한치각은 새로 지은 붉은 빛 스카치 양복에 해룡피를 내인 외투를 입고 고 주대문을 나섰다. 그의 순영국식으로 차린 양복스타일과 반이나 더 쏠린 대 문채와는 너무나 방갓쟁이가 사진관을 나오는 느낌을 준다.
8회 치마감
일지매는 어젯밤에 명월관에서 한치각의 모든 주정받이를 다해가며 밤을 반짝 새고 다옥정 자기집으로 돌아와서 보통 기생들이 하듯이 종일토록 이 불 속에 묻히었다가 오후 네 시라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어두운 세계에서 만 활동할 무대를 가진 그들은 마치 박쥐들이 해가 지면 움직이듯이 일지매 도 간단한 저녁 요기를 마친 뒤에 화류경대를 앞에 놓고 단장이라는 것보다 요새이 유행하는 말로 하는 영업전선에 나아갈 무장을 시작하였다.
기생이라는 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남자의 눈을 아무쪼록 황홀하게 하는 것이 전술의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단순한 분이나 살적붓, 기름 메밀기름통 등 몇가지만 가지면 충분하였으나 요사이는 그러한 단순한 화장술만으로는 도저히 시색에 어울릴 수가 없다. 일지매의 경대 앞에도 정 자옥이나 삼월오복점에서 사들인 별별 종류의 화장품이 다 늘어있다. 파랑, 노랑, 분홍빛 유리병을 비롯하여 크림, 향수, 마른분, 물분, 도화분, 연지, 또린, 순솔, 물솔, ‘콤팩드’, 가는 붓, 굵은 붓 등 수십 종의 화장제구가 난잡히 널려놓인 그 옆에는 양피배자를 입은 머리가 반백이 다 된 일지매의 모가 앉아서 화장시중에 분망하다. 일지매는 분을 발랐다가는 또 세수를 하 고 눈썹을 그렸다가는 다시 씻고 하는 동안에 벌써 두어 시간이나 실히 지 내었다.
한참 화장에 골몰하는 중에 대문 밖에서 “이리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 렸다.
일지매의 모는 요사이 새로 전라도에서 올라와서 돈을 잘 쓰고 다니는 남 주사가 또 왔나하고
“이야, 날래 하라! 남주사가 고대 들어오면 어드렇게 하니?” 하며 돈주머니가 또 굴러들어온다고 뻐드러진 잇새로 웃음이 몰려나오며 일 지매의 화장을 재촉한다.
조금 있더니 얼굴을 붕대로 동인 심참봉이 “나요 나. 일지매 있나?” 하 며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일지매의 모녀 두 사람은 좁은 유리창으로 내어다 보다가 기다리는 남주사가 아니므로 마음에는 다소간 긴장한 맛이 풀어졌으 나 심참봉도 오늘에 한하여는 공으로 담뱃개나 얻어만 먹으려고 오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히 짐작한지라 그다지 낙심은 아니하였다.
요릿집에서 기생이 치마를 찢기거나 담뱃불로 태이는 일이 종종 있으되 대 개는 기생의 체면상 그대로 손해를 보는 일이 많으나 어젯밤의 받은 하부다 이 치마의 손해는 상대자가 장안에서 유명한 부자의 자식이라 반드시 몇 벌 의 치마는 또 생기리라고 예측한 까닭이다.
그뿐 아니라 일지매의 모는 이러한 혼단을 기회로 하여 평시에 한자만 떼 이고 돈은 아니쓰는 한치각을 흠씬 울궈내이려 하고 그 뱃속에는 이미 어떠 한 계책이 벌써 준비되어 있던 터이다. 심참봉은 보랏빛 종이에 돌돌 만 것 을 옆에 끼고 뜰 아래에서 주춤주춤하고 섰을 때에 일지매의 모는 그 딸에 게 눈짓을 하여 일지매를 차방 안으로 숨기었다. 그리고 화장하던 제구를 얼른 밀어 한편으로 치워놓는다. 다음에 일지매의 모는 일부러 장지를 역정 스럽게 와르르 열어젖히며 다소 흥분된 어조를 지어서 “심참봉, 어드래 왔 소?”
“왜 나는 여기 못 올 사람이오. 오늘은 전과 같은 ‘병정’은 아니요, 적 어도 ‘강화대사’라는 큰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야.”
심참봉은 “하하하!” 하며 그의 특색인 너털웃음을 내놓으며 방으로 들어 간다.
“그런데 대관절 일지매는 집에 있어?”
“그럼 어디메를 가겠소. 입때껏 옆구리가 결린다고 누웠다가 고대 병원에 갔소. 어드러면 기생을 땅땅 때리고 초마를 발기발기 찢는 놀음이 있소.” “때리다니 누가 그랬단 말요?”
“뉘랄 것 있소. 어젯밤에 심참봉도 있었드랍디다.”
“글쎄? 나도 있었지만 일지매를 때린 것은 못 보았는데?”
“당신은 왜 얼굴을 동이었소?”
“나도 말하고 보면 어저께 일이지만 일지매를 때린 것은 도무지 생각이 아니 나는데 하여간 이것이나 맡아두구려. 한참봉(한치각)이 보내는 치마감 이요.”
하며 심참봉은 삼월오복집에서 산 새로 유행하는 ‘프린트하부다이’ 치마 감 두필을 내어 놓았다. 일지매의 모든 곁눈으로 슬쩍 보더니 “사람은 죽 어가는데 초마감은 어듸메 쓰겠소” 하며 냉정하게 비단 싼 것을 손으로 밀 친다.
9회 엉터리
다옥정 일지매의 집 안방에서는 장죽을 가로문 일지매의 모와 얼굴을 붕대 로 동인 심참봉이 마주 앉아서 어젯밤에 명월관에서 한치각이 일지매를 때 렸다는 문제로 서로 시비를 가리는 것도 아니요, 또 사실을 부인하는 것도 아닌 말씨름이 계속되어 있다. 일지매의 모는 일부러 흥분된 안색을 지어가 며
“여보, 우리가 서울 온 지 벌써 일년이나 넘어가지만 어젯밤 같은 노름은 처음 보았소. 아무리 기생이 돈에 팔린다 하드라도 사람을 함부로 치는 손 님이 어디 있단 말이요. 나는 이애를 기생으로는 내어놓았으나 입때까지 몸 에 손을 한번이라도 대어본 일이 없쇠다. 참, 수액이 사나우려니까 별별 일 다 생기어. 오늘도 벌써 식도원에서 두 번이나 일지매를 부르러왔으나 몸이 걸려서 어드렇게 갈 수 있소. 참 심난한 일이로소.”
일지매의 모는 다년 경험이 같은 수단을 가지고 그럴 듯하게 연극을 계속 한다. 찻방 안에 숨어앉은 일지매는 장지 밖에서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떨어진 ‘화투’를 소리없이 늘어놓고 ‘오관’을 떼이고 있다.
심참봉은 원래 사건의 직접 관계자도 아닐 뿐더러 자기 역시 술이 고주망 태가 되어 앉았던 터이라 일지매를 때리었다는 사실을 전연히 부인할 증거 도 가지지 못하였다.
“나도 술이 정신없이 취했었기 때문에 확실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마 는…….”
“그럼 심참봉이 저렇게 얼굴이 깨어지도록 맞은 것도 생각지 못하는게지?
당신이 그렇게 맞았을 때야 일지맨들 아니 맞았겠소. 그 양반은 돈은 아니 쓰며 어느 사람보다 줏짜만 떼이는 이지요.”
하며 심참봉의 얼굴을 의미있게 쳐다본다. 심참봉은 지금이야말로 보기만 해도 궁기가 뚝뚝 듣는 조방군이가 되었지만은 자기 손으로 수십만 원의 재 산을 화류계에 내버릴 때에 기생을 때린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 때 시절에는 돈 쓰는 소위 오입쟁이의 만능시대이라 기생집에서 세간을 치 거나 기생을 때리는 것이 오입쟁이의 한 호걸풍이었다.
그 대신 그 이튿날 아침에는 장전, 선전에 분부하여 득달 같이 방안 세간 이며 기생의 의차를 집으로 져 들이어선듯하게 하여만 주면 아무 문제가 없 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러한 기고만장한 횡포가 화류계의 큰 환영거리가 되 었지만은 요사이는 이러한 문제를 잘못 만나면 ‘기구파손’ ‘구타치상’ 이라는 거북살스런 법률문제가 일어나서 술 사먹다가 재판소에 다니게 되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심참봉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눈치꾼이라 일지매의 모가 컴컴한 그 뱃속에 어떠한 ○전이 숨겨 있는 것은 대강 짐작은 하는 터 이나 하여간 한치각을 위해서라도 일이 적게 되도록, 또 한치각이가 물리더 라도 그 상처가 과히 크지는 아니하도록 힘을 쓸 수밖에 없이 되었다. 그래 서 심참봉은 마음에 없는 사과와 비슷한 공손한 태도로
“여보 우리 장래 장모님. 그렇게 역정내실 것이야 무엇있소. 한참봉이 사 랑하는 일지매를 설마 때리기야 하였겠소. 만일 일지매가 옆구리가 결리는 것이 사실이라면 물론 취중에 좀 심히 건드린 것이 그러게된 모양이로구려.
내 얼굴 좀 보시오. 나도 맞은 것이 아니라 맥주병위에 쓰러진 것이 이렇게 상처가 되었오.”
하며 심참봉을 자기 얼굴을 한치각에게 맞았다는 불명예한 사실을 감추는 한편으로 얼토당아닌 실례를 만들어서 일지매의 모를 무마시키자는 생각이 었다.
그러나 일지매의 모는 담뱃대를 땅땅 떨며 점점 소리를 높인다.
“한참봉은 부자이니깐 당신까지 저렇게 역성을 하오. 남은 초마를 발기발 기 찢기며 죽도록 맞았는데 좀 찔렸다는 것이 다 무엇이요. 당신도 좀 민하 게 굴지 마소."
하며 심참봉의 얼굴을 흘려보며 혀를 쩍쩍 찬다. 심참봉은 차차 무마를 시 켜가자는 것이 상대가 점점 기성하게 날뛰는 것을 보고 ‘문제는 벌써 엉키 었다’고 생각하며
“하여간 우리가 이 자리에서 공연히 얼굴 붉혀가며 시비야 할 거 무어 있 소. 내가 때린 것도 아닌데, 좌우간 오늘 저녁에 일지매와 한참봉이 한자리 에 모이면 자연 판단이 날 문제이니 우선 이거나 좀 맡아두구려.” “이건 다 무어요. 남의 자식을 함부로 치고서 이까짓 것으로 될 줄 알고 그리오. 인제 그 언내가 죽고 사는 것은 아도 모르겠소. 한참봉더러 말이나 하소.”
하며 피륙을 밀친다. 심참봉은 의외에 사건이 발생하여 술고 늦어갈 뿐 아 니라 사건의 보고가 급하여 한치각이 기다리고 있는 명치정 ‘빌리어드판’ 으로 향하였다.
10회 백 원짜리
한치각은 담배연기와 난롯불 훈김에 실내가 자욱하도록 혼탁하여진 ‘빌리 어드’판 옆에서 공채를 일으켜 세우고 두 손으로 그 중간을 잡고 피로한 몸을 앞으로 실리어 의자에 걸터 앉았다. 한치각은 여성을 떠나서는 아무 취미를 느끼지 아니하는 사람이라 물론 ‘빌리어드’에도 어떤 흥미도 느끼 지 아니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심부름을 보낸 심참봉이 돌아올 때까지 잠시 시간을 보내자는 예정에 지나지 아니한다. 어디를 가든지 자기 재산을 등지고 나오는 ‘방약무인’ 한 그의 태도는 여러 사람들이 모이어 유쾌하게 놀자는 이 ‘빌리어드’판 의 공기를 어느덧 불유쾌하게 만들었다. 공중이 모인 자리에 조금도 겸손한 태도가 없이 남의 몸을 함부로 툭툭 치며 ‘큐’를 가로세로 들어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씨르는 등 장내의 공기는 조금하면 어떠한 폭발이 일어날 듯 한 매우 험악한 상태에 당면하여 있다.
그러나 한치각은 그러한 험악한 공기가 조금하면 자기 앞에 터질 것도 모 르는 듯이 그의 태도는 점전 황당하여 간다.
숙련치 못한 ‘빌리어드’의 기술이 그의 조급한 성미를 흥분시키는 중에 또 예정의 시간이 지나도록 심참봉이 돌아오지 아니하는 까닭에 그의 행동 은 ‘독살’ ‘찜부럭’이 한데 엉키어 탕탕 공채를 구르며 공연히 ‘게임 보이’를 꾸짖는 등, 옆에 사람으로 차마 눈허리가 시어서 볼 수 없는 행동 을 계속하고 있다. 맞은편 구석에서 얼마 전부터 도리우찌 모자를 삐딱하게 쓴 청년패들이 눈을 노리며
“나마찌 나마스다 나무짜웃가.”
하는 일본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한치각의 신변에는 각일각으 로 위험이 닥쳐올 즈음에 앞문이 와르륵 열리며 심참봉이 들어 왔다.
한치각은 치던 공채를 중지하며 불호령에 가까운 어조로
“여태 뭘했어! 다옥정이 그렇게 멀어? 그래, 대관절 집에 있던가?” 심참봉은 한치각의 옆으로 가까이 오며
“갸는 병원에 갔다고 해서 못보고 뻐드렁니(일지매의 모)만 만났는데 일 이 자배기만큼 벌어진 모양인데.”
한치각은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자세히 알지 못하여
“이야기를 벌여놓지만 말고 좀 자세히 해요.”
심참봉은 한치각의 귀에 입을 대이고 일지매의 모가 하던 일장 이야기를 수근거렸다. 의외의 사실을 들은 한치각은 깜짝 놀라며
“때리다니? 누가? 옆구리가 결려?” 하고 심참봉의 수근댄 말을 입에 받 아 옮기며
“하여간 여기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밖으로 나가세.” 두 사람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공을 치던 상대자들은 “하야꾸” 소리를 치며 공치기를 채촉한다. 한치각은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모자와 외 투를 떼어들고 심참봉을 데리고 문을 나섰다. 공을 치던 상대자들은 연하여 ‘싯게이나얏스’하며 중얼거린다.
한치각과 심참봉은 그 근처에 있는 일본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래 대관절 어떻게 결린단 말이야? 내가 때린 것은 생각지 못하겠는 가?”
하며 한치각은 의외에 놀라게 되었다. 한치각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첫째 로는 돈이 또 들 것과 둘째로는 일지매의 쌍까풀진 눈맵시와 포근포근한 뽀 얀 얼굴이 요사이는 매우 마음을 끄는 새 목적물인데 어젯밤 술주정으로 인 하여 아주 횃머리를 치게 되면 여태까지 쓴 돈이 다 허사가 될 터이므로 그 는 여기 이상의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심참봉은 우선 술을 재촉하며 “나도 어제 일은 도무지 캄캄하나 설마 자 네가 때리기야 했겠나.”
“내가 치마를 찢은 생각은 기억에 있으나 때렸다는 사실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데 그래 얼마나 아프단 말인가?”
심참봉의 어조는 사건을 보고한 뒤에는 또다시 회담으로 변하였다.
“대장은 무얼 그렇게 기절을 한단 말이요. 이건 처음 지내나. 한 밥 먹자 는 연극인데 이왕 쓰는 터이니 몇백 원만 더 쓰면 승전고를 울릴터인데 무 슨 걱정이야. 돈만 두둑히 내게 맡기면 내가 다 매만질 것이니…….” “돈은 얼마란 말이야?”
“얼마 할 것 있나. 다다익선이지.”
한치각은 고개를 기울여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얼마나 보낼까? 백 원이면 될까?”
“한 이백 원 선뜻 써서 아주 포로를 만들게나그려.”
한치각은 다소간 위협을 느끼며 백 원짜리 한 장과 십 원권 다섯 장을 양 봉투에 넣어 심참봉을 주었다.
11회 남주사
심창봉이 돌아간 뒤에 찻방 안에 몸을 피하였던 일지매는 다시 방안으로 나와서 미처 덜 마친 화장을 다스리고 자릿저고리를 바꾸어 입었다. 인제는 어떠한 호흡을 당하든지 무장의 준비는 거의 다 된 셈이다.
일지매는 겨우 경대를 치워놓고 내던지고 간 삼월오복점 봉지에 돌돌만 치 마감을 끌러본다. 일지매의 모는 욕심이 덕지덕지 내솟은 얼굴에 지렁이 같 은 주름살을 나타내며 치마감을 들여다 본다.
“대관절 어드런 것을 가져왔니? 엊저녁에 망치고 온 초마는 돈을 십오 원 이나 들여서 지어가지고 겨우 세 번밖에 아니 입은 것인데.”
하며 일지매가 손으로 풀고 있던 그 피륙 위에 눈을 찌푸려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이것도 하부다이로구먼. 그런데 무늬가 처음 보는 거야. 옳지 이것이 요 새 유행하는 무어라든가 푸 ─ 푸 ─, 옳지! ‘프린트’라는 무늬로구만.
그럼 오마니, 이걸 내일 아침에 바둑이집을 보내어 곧 지으라하소.” 일지매는 치마 한 벌을 찢긴 대신에 새로 보는 ‘프린트’하부다이 치마가 두 벌이 생기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는지 입에는 웃음이 열리었 다.
“그거이 무엇이냐? 또 왜비단이로구나 그 까짓것을 받고서 무엇이 좋아서 참 민한 것…….”
일지매의 모는 혀를 쩟쩟 차며 냉소를 뱉는다.
“그거이 돈낱으로 하면 몇 원이라 말이냐.”
“아니요. 아모래도 두필에 오십원은 들었겠소.”
“오십 원? 오십 원이 그다지 많구만, 이전에는 기생의 옷을 망치면 천냥 도 과요. 이천냥도 받쳤드랬다” 하며 그의 모든 종시 만족을 느끼지 아니 하는 듯이 냉소를 띠고 있다.
이즈음에 문밖에서 또 사람이 들어오는 구두소리가 활발하게 나더니 “일 지매 있소?” 하며 더블 버튼을 단 외투를 입고 알록알록한 모던 목도리를 두른 이십사오세 가량 되어 보이는 청년 한 사람이 안마당으로 선뜻 들어선 다.
일지매의 모녀는 한치각이가 보낸 치마감을 중간에 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급히 유리구멍으로 내어다보았다. 청년은 요사이 이집에서 누구보다 가장 많은 환영을 가지고 맞아들이게 된 전라도 남주사이었다.
일지매의 모녀는 고만 펼쳐놓았던 치마감을 한데 둘둘 말아서 벽장안으로 들어놓고 허둥지둥하며 마루로 나아간다.
일지매의 모는 마른 무껍질 같이 쭈글쭈글한 얼굴의 전 신경을 다 모아서 기쁜 빛을 나타내며 두손을 옆으로 내밀어 남주사의 손을 잡을 듯이 “아이, 남주사 어서 오르소. 사람이 어드러면 그렇게 군단 말이요…….” “왜 그러우…….”
남주사는 일지매의 모가 하는 말의 의미를 미처 못 알아들었는지 얼굴을 들어 일지매의 모를 쳐다본다.
일지매는 자기모가 앞을 질러나가며 먼저 내닫는 통에 말을 붙일 기회를 잃었다가
“왜 그러우가 다 무어요. 남은 눈이 빠지게 기다리게 하고 여섯 시에 온 다고 약조한 이가 지금 여덟시는 되겠소.”
하며 말끝에는 적은 원망이 섞이었으나 입에서는 달콤한 미소가 덮는다.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하며 일지매는 남주사의 손목을 잡아 마루 위 로 올린다. 남주사는 평시에 둥그런 눈의 형체가 좌우로 가늘게 평선을 지 으며 모녀 두 사람이 맞아들이는 대로 따라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주사가 아랫목에 자리를 정한 뒤에 겉묻어 들어왔는 일지매의 모는 “오래 노다 가소. 오늘은 남주사가 오기만 기다리고 권번에는 ‘탈’ 했 소이다.”
하고 담뱃대를 들고 건너방으로 피하여간다. 방안에는 젊은 남주사와 이십 이 겨우 넘은 일지매와 두 사람뿐이다. 이 두 사람의 청춘남녀를 둘러싼 방 안에는 약간의 담배연기와 일지매의 화장이 남긴 향긋 달콤한 가벼운 냄새 가 한데 얽히여 두 사람의 코앞으로 오락가락 한다.
남주사는 아랫목 따뜻한 온돌 위에 상체를 비스듬히 옆으로 누이고 맞은편 에 앉은 화장을 막 마치어 분서슬이 그대로 있는 일지매의 얼굴을 쳐다보며 누웠다. 일지매는 우선 담배를 붙여 남주사에게 권하며
“외투나 좀 벗구려.”
하며 남주사의 몸에 손을 대이기 시작한다. 일지매의 보드라운 손길은 남주 사의 외투를 벗기는 데만 그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12회 연애의 매매
일지매와 그의 포로가 된 남주사는 따뜻한 방속에 단 두 사람이 들어 앉아 서 아무 기탄이 없이 서로서로 감추었던 모든 수단을 다 꺼내어 시쳇문자로 말하면 소위 연애의 매매를 시작하고 있다.
일지매는 모든 아양을 다 떨어가며 남주사의 외투를 벗기어 벽에 건다음에 는 오동통하고 뭉실뭉실한 그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누운 남주사의 가슴 아 래에 실리어 남주사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쌍긋쌍긋 웃는 일지매의 입에서 는 서로 사투리가 도리어 귀인성 있게 말끝이 몽창몽창 떨어지며 꿀 같은 이야기가 꽃술에서 이슬방울이 떨어지듯이 가볍게 떨어진다.
“나는 아까 다섯 시부터 기다렸어요. 미친년 모양으로 네 번이나 골목 밖 까지 나갔다 들어갔다 했어요. 이 당신아. 남이 기다리는 것도 좀 생각해 요.”
하며 일지매의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 남주사의 턱을 짜듯이 눌러준다. 남주 사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안면신경을 움직이어 입술에 웃음이 저절로 나타나 며
“엊저녁 생각을 좀 하여. 남을 공연히 초저녁부터 식도원에 붙잡아놓고 밤새도록 전화만 하고 아니 와? 엊저녁에 화나던 생각을 하면 다시는 밤새 도록 전화만 하고 아니 와? 엊저녁에 화나던 생각을 하면 다시는 자네집에 발을 아니 들여 놓으려고 했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러면 왜 또 왔어?” 하며 일지매의 손은 다시 남주사의 허 벅다리를 꼬집는다.
남주사는 정말 아픈 것보다 엄살을 여러 갑절이나 에누리하며
“아, 아, 아, 아야, 햇○○○한 꼬집지 말아.”
남주사는 일지매의 그 손목을 가볍게 잡아 앞으로 당긴다.
“한참봉이란 자는 서울시 자란 양반이라지. 또 그리고 소위 서울 양반 중 에서 몇째 아니 가는 재산가라지. 우리 같은 시골뜨기야 마음에 있겠나.” 이 말끝에 일지매는 남주사의 손을 홱 뿌리치며 눈초리가 상큼하게 위로 올라갔다.
“그래요. 그래. 남의 속도 모르고 당신은 그런 소리만 하고 있소. 내가 얼마나 속을 태우고 있었길래. 그래, 배가 아프대도 안 놓아주지요. 머리가 아프대도 안 놓아주지요. 공연한 명신환만 먹기에 입이 다 깔깔해졌지요.
그리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다가 나중에는 한참봉이 개골을 내서 술상을 치 며 나에게 덤벼서 치마까지 갈갈이 다 찢었어요.”
하며 처방 장지를 열고 구석에 뭉쳐놓았던 찢긴 치마를 들고 나와서 남주사 의 턱밑에 들이밀며
“이걸 좀 봐요. 이 지경을 당하도록 몸을 빼쳐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어 요.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 죄될 말만 말아요” 하며 눈을 흘기어 남주사를 본다.
남주사는 일지매의 말 몇마디에 모든 감정이 일시에 풀어진 듯이 입을 벙 그레하며
“돈이 없나. 그럼 치마는 내가 사주지.”
“그거 왜 그래. 나는 찢은 사람한테 점 받아낼 걸.”
하며 일지매는 어떠한 신경에 걸렸는지 힐끔 치마감을 구겨 넣은 벽장문을 바라보았다.
“한참봉은 아주 구두쇠라는데.”
“구두쇠면 여간이야. 까다로운 체는 혼자하면서 이면치레만 살살하고 돈 쓰는 데는 서울말로 아주 깍쟁이야. 그렇지만 이번에 치마감은 어떡하든지 내가 좀 물려받을 것을.”
“그렇게 구두쇠라는데 치마감을 받아내려면 또 두서너 번 주정받이는 착 실히 해야 될 걸. 그러지 말고 내가 사주지.”
“그건 왜 그래.”
남주사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우리 산보나 나갈까? 지금 몇 시나 됐나?”
하며 금줄에 달린 시계를 조끼주머니에서 꺼내본다. 일지매는 벽구석에 걸 린 괘종을 쳐다보며
“아홉 시 밖에 아니됐는데. 요새는 양력설이 가까워서 진고개는 모두 야 단들이래.”
“응, 오늘이 양력으로는 벌써 섣달 스무사흘이야. 일본촌에서는 지금 한 창 바쁠 때지. 그럼 우리 그 구경이나 한 바퀴하고 명치제과에서 차나 사먹 고 올까?”
남주사는 일지매에게 동의를 청하는 듯이 얼굴을 쳐다본다.
“글쎄, 또 옷을 바꿔 입어야지.”
“아따, 그게 무엇이 어려워 그래.”
“귀찮으니까 그렇지.”
“그럼 어멈더러 택시나 한 채 부르라고 하지.”
“무얼 여기서 가까운데 그냥 걸어갑시다.”
“그럼 그럴까.”
두 사람은 산보할 의논이 결정이 되여 일지매는 회색의 외투를 입고 그 위 에 검은 지리맨 목도리를 턱에 걸쳐 감고 남주사를 따라서 골목 밖으로 나 간다. 캄캄한 골목 밖에서 거무스름한 인바네스를 입은 남자가 급한 걸음으 로 그들의 옆을 홱 지나며 들어온다.
13회 삼월오복점
남주사가 앞을 서고 일지매는 그 뒤를 따라서 다옥정의 여러 번 꼬부라지 는 골목을 돌아서 광교 남쪽 천변으로 나섰다.
이 두 사람에게는 자기네가 걸음을 띄어놓을 만치 광선 외에는 밝은 것이 필요가 없다. 장찬 다옥정 골목을 돌아나오는 동안에 일지매의 몸은 상체가 남주사의 오른편 어깨에 실리고 두 사람의 따뜻한 손길은 그 밑에서 서로 연결이 되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두 사람의 마주 쥐인 음양 손길이 앞으로 내밀리었다 또 뒤로 갔다하며 두 사람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그네를 뛴다.
남주사의 입술에는 불이 꺼져가는 반이나 탄 해태표가 말할 때마다 공중에 걸린 듯이 상하로 흔들린다.
“오늘밤엔 한치각 씨, 아니 한참봉 나으리 생각은 아니하다.” 남주사는 악수된 팔을 일지매의 옆구리에 지긋이 누르며 강짜 비스듬히 말 을 던진다. 일지매는 자기 옆에 와서 닿는 그 손을 획 밀치며 “한 씨의 말은 좀 그만두어요. 아까 다 내가 이야기하지 아니했어. 그이 술주정이라면 나는 천리만큼 달아날 테야. 참 지긋지긋해.”
“그래도 요릿집에서 불러만 보아. 숨이 턱에 닿아서 달음박질을 할텐 데.”
“무어? 내가 그렇게 쉽게 한 씨가 부른다고 달음박질을 해. 참, 잘 알았 소.”
하며 일지매는 흘긴 눈초리로 남주사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젊은 남녀의 신경을 자릿자릿하게 울리는 손과 손의 연결, 가슴 속이 간질간질하 여 오는 연애 매매의 달디단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에 두 사람의 걸음은 어느덧 전등이 찬란한 장자옥 앞에 닥쳤다.
콧날이 오똑하고 얼굴빛이 하얀 남주사는 청년으로 보통이라는 그 이상의 용모를 가진 데다 다소 운동에 단련된 그의 체격은 누가 보든지 미남자라고 할 수 있다. 키가 보통보다 다소 클듯해 보이는 몸에 새로지어 입은 양복이 말할 수 없이 조화가 되어 누가 보든지 근래 문자로 모던보이의 첨단이라 하겠다.
일지매는 그다지 행인의 눈을 끌만한 치장은 아니했으나 쌍꺼플이 약간 진 그의 눈맵시와 서도 기생의 한 특색인 엷은 살갗에 분이 똑 알맞치 오른 동 그스름한 얼굴이 검정목도리 위에 뚜렷하게 보인다. 이 두 사람의 몸이 밝 은 전등 앞으로 나타남을 따라서 복잡한 거리에 놀란 사람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다.
“정자옥부터 우리 구경하고 갈까?” 하며 일지매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 추려한다.
“그까짓 정자옥은 보아 뭘해. 동경서는 이따위 상점이야 얼마든지 있지.
참 조선서는 이것만 해도 굉장해 보이는 걸. 그래도 삼월오복점이라야 물건 같은 것이 있지. 여기는 그만두고 저 삼월오복점으로 가아.”
“참, 정자옥에는 맨 싼 물건뿐이라지. 그럼 삼월오복점으로 갑시다.” 정자옥 앞에서 걸음을 멈췄던 두 사람은 다시 발을 옮기어 삼월오복점으로 간다.
“엊저녁에 한씨한테 찢긴 치마는 내가 삼월오복점에서 사줄까?” 하며 남주사는 일지매의 손을 지긋이 잡아 걸었다.
“그건 왜, 치마는 찢은 사람이 따로 있는데. 나는 그 치마는 꼭 한씨에게 물릴 걸. 꼬락서니가 얄미워.”
일지매는 이렇게 반대를 하다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다시 말을 이어서 “남주사, 그럼, 그럼, 그, 대신에 나 하나 사고 싶은 것이 있으니 그거나 사주구료.”
“무엇? 처녀의 불알? 하하하.”
“아니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자세 들어요. 좀” 하며 일지매는 남주사의 손길을 잡아 지긋이 눌러쥐었다.
“그게 무어란 말이야? 그럼 우리 삼월오복점에 들어가서 점원더러 ‘그것 사러왔소’ 해볼까? 무얼 내놓나.”
“왜 딴청만 해? 남의 말은 아니 듣고” 하며 일지매는 다소 샐쭉하진 눈 으로 남주사를 본다.
남주사는 자기가 너무 실없는 말을 심히 하였나 하고 뉘우치며 말을 다시 정답게 붙이어
“글쎄 말을 해야지. 뭐든지 사주지.”
일지매는 뽀얀 얼굴을 남주사의 어깨에 부비며 “저, 전, 저것 하나 사고 싶어” 일지매는 차마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듯이 주저한다.
남주사는 재촉하며 “어서 말을 해야지 무언지 알지.”
“저, 그…….”
두 사람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삼월오복점 문으로 들어갔다.
14회 복잡한 사람
남주사와 일지매는 혼잡한 삼월오복점 문을 들어서서 여러 사람들이 어깨 를 서로 부비며 돌아다니는 상점 안을 한창 화장품 판매하는 데서부터 구경 하기 시작한다. 오복점 안에는 반드시 필요를 느끼어 들어오는 사람보다 구 경삼아 드나드는 사람이 평시에도 적지 아니한데다가, 요사이는 양력년종이 박두한 까닭에 평시와는 정반대로 설 준비로 물건을 사러 들어오는 일본사 람들이 올망졸망한 종이에 싼 보퉁이를 들고 밀고 들어서며 밀고 나서고 하 는 통에 남주사와 일지매는 그 혼잡한 사이에 끼어서 좀처럼 한테 붙어 다 닐 자유를 유지 못한다. 일껏 어깨를 한데 대이고 한 모퉁이를 돌아나오면 그중에서 어린 것을 업고 끌고 한 일본사람의 등쌀에 두 사람은 가끔 동서 로 갈리게 되어 짝을 기다리기에 한 모퉁이에 우뚝하니 나뉘어 섰기를 몇 번이나 하였다.
일지매는 남주사가 치마감을 사주마고 자청하는 말에 우연히 기회를 만나 게 되어 마침 사려고 생각하는 털목도리를 내 돈 아니 들이고 장만할 찬쓰 는 얻었으나 이왕 값이면 값싼 것은 사기 싫고 또 조금 우연만한 것을 사게 되면 요사이 괜한 돈에 적지 아니한 금액을 가져야 할 터인데 모처럼 사귀 어 장차 부자의 힘을 보게 된 남주사에게 별안간 큰돈을 씌웠다가는 그 뒤 가 또 어찌 될지 몰라서 차마 털목도리가 사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입 속에서 여러 번 주저하였으나 삼월오복점 안에까지 들어오게 된 이상에 또 이 기회를 놓치면 결국 자기 돈을 써야할 터이라, 일지매의 주저하는 생각 은 차차 변하여 나중은 어떻게 되든지 우선 목도리나 한 벌 굳히겠다는 생 각이 간절하게 든다.
남주사도 치마감을 사려고 생각하였든 차에 일지매의 의향이 딴 데 있는 것을 일지매의 말에 다소 짐작은 하였으나 그 중에 무엇을 사주어야 가장 일지매의 마음을 끌게 될까하고 점내에 진열한 물품에 이리저리 시선을 던 지며 돌아다니는 중이다.
한참동안 인ㅅ에 둘리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일지매는 “아이고 사람이 어떻게 덤비는지 정신이 다 없네.”
“이까짓 것을 가지고 그래? 동경은 요사이 은좌통만 나가도 큰 길에 사람 이 이보다 몇갑절이나 더욱 복잡한데.”
남주사는 자기가 동경을 잘 안다는 것을 자랑하듯이 말한다.
“인제 고만 두고 우리 윗층으로 올라갑시다.”
“그래 볼까?”
남주사와 일지매는 여러 사람들이 한데 덩어리가 되어 있는 ‘승강기’ 출 입구 옆에서 기다리고 섰을 때에 그 많이 모여 섰는 사람들 총중에 해룡피 를 좌우어깨가 푹 묻히도록 넓게 대인 외투를 입은 신사 하나이 저편을 향 하고 서서 승강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일지매는 그 신사의 뒷모양이 선듯 눈에 띄자 공연히 가슴이 울렁하며 한 치각이나 아닌가 하고 주춤하였다.
조금 있다가 ‘승강기’가 지하실에서 사람을 잔뜩 싣고 올라왔다. 승강기 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앞을 다투어 덤비는 사람들은 모여 섰던 사람의 삼 분의 일도 채 못 실어서 ‘만원’이라고 외이며 문을 닫게 되었다. 남주사 와 일지매는 다행히 승강기 맨 앞에 서있게 되어 윗층으로 올라가게 되었으 나 저편에 섰던 해룡피 외투 자리는 원체 사람들이 몹시 들이미는 통에 승 강기 밖으로 떠내밀리어 다음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일지매는 승강기 안에 그 해룡피 외투가 아니 보이는 것을 살핀 뒤에 겨우 마음을 놓았다.
두 사람은 삼층에서 내렸다. 일지매는 내리자마자 시선을 좌우로 돌리더니 오른편 구석에 진열한 털목도리가 눈에 띄었다.
“우리 저 목도리나 좀 구경하고 갑시다” 하며 일지매는 남주사를 그 편 으로 인도하였다. 남주사는 지금 머리 속에 무슨 물건을 사줄까 하며 생각 하고 있던 중에 일지매의 목도리라는 말을 듣더니 무엇이나 발견한 듯이 “글쎄, 그것 좋아 참, 목도리 하나 사줄까?” 하며 일지매가 인도하는 대 로 따라갔다.
눈앞에 벌려놓은 목도리는 별별 이상한 동물의 모피를 통째 벗긴 것, 또 조각조각 모아서 한 짐승의 모양을 만든 것들이 불규칙하게 걸려있다.
“목도리가 참 좋겠군. 목도리 하나 사지? 썩 좋은 걸로, 어서? 응, 목도 리가?”
남주사는 다시 일지매의 의향을 물었다. 일지매는 입술까지 치밀어 올라오 는 대답을 억지로 누르며 태연한 태도로 “글쎄, 사주면 좋지?” 하며 입을 연다. 쌍긋 웃으며 남주사를 쳐다보았다.
15회 은여우털
남주사는 원래 전라남도 순천에서 큰부자로 유명한 남의관의 아들로서 서 울로 동경으로 공부를 합네하고 돌아다니었으나 결국 마친 학교는 저기 지 방에 있을 때의 보통학교 하나뿐이었고 그 다음은 혹은 고등 보통학교 혹은 동경에서 어느 사립중학교 또 명치대학을 더듬어 다니기는 여럿을 하였으나 결국은 자기집의 돈만 수만원 축이 났을 뿐이요.
늘어가는 것은 돈 잘 쓰는 것뿐이었다.
자기 아버지는 순천에서 유명한 근면가로서 불과 얼마 아니되는 유산을 가 지고 아침이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개똥삼태기를 등에 메고 세코짚세기를 신 고 찬서리를 밟아가며 거름을 모아다가 농사를 지어 애면글면 모은 것이 나 중에는 수만석의 큰 부자가 되어 만년에는 의관이라는 초사까지 한 사람이 다. 그러한 굳은 심지를 가진 사람의 아들인 남청년은 자기의 부친이 그 애 를 써서 모아놓은 재산을 아까운 줄을 모르고 물 퍼내 버리듯이 헛돈을 쓰 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 야말로 짚신신고 모은 천량을 자동차 타고 다니며 버린다는 요사이 한 격언이 된 그 정도에 있는 사람이 남 청년이다.
남주사라고 부르는 것도 물론 그가 주사의 초사를 한 것이 아니요. 남서방 이라고 부르자니 어울리지도 않고 또 근래 유행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자니 남 청년의 나이가 너무 젊어서 화류계에서는 그저 수수하게 ‘주사’라는 얼토당토 아니한 직함을 붙인 것이다. 말하고 보면 남 청년의 주사 초시는 요릿집 ‘보아’들과 기생들이 시킨 셈이다.
하여간 남주사는 근래 서울화류계에서 새물 청어로 굉장한 돈을 쓰고 다니 는 한 부랑자이다. 그러나 그는 시골서 태어나기는 하였을망정 얼굴이○○ 이고 게다가 돈을 잘 쓰는 터이라 요사이 기생화류계에서는 큰 환영을 받게 된 한 사람이다.
남주사는 일지매의 털목도리가 사고 싶은 희망을 확실히 안 뒤에는 다른 물건에 눈을 던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목도리의 진열한 것을 쳐다보며 남 주사는
“그럼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골라잡지” 하며 일지매를 재 촉한다.
최신 유행의 양복을 입은 모던보이가 말쑥하게 차린 기생 같은 여자를 데 리고 진열장 앞에 걸음을 정지한 그들을 보고 그 옆에 섰는 조선 사람의 여 점원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온다.
“여보 저 털목도리를 좀 구경하십시다” 하며 남주사는 여점원에게 말한 다.
“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점원은 진열장위에 건 털목도리를 주섬주섬 내어 놓으며
“어떤 것을 쓰시렵니까? 남자의 것이오니까? 부인네가 쓰실 것입니까?” 하며 묻는다.
남주사는 일지매를 바라보며 “어떤 걸로 할까.”
“글쎄 여우털로 할까” 하며 앞에 놓인 여우몸통으로 벗긴 모피를 쳐들어 본다.
“이제 조선옷에도 어울릴까?”
“네 잘 어울립니다. 조선옷이나 양복이나 요새는 모두 여우털을 쓰십니 다.”
“눈이 왜 요래, 무서워 못 보겠네. 여우 눈은 빼박은 것이지!” “네 그렇습니다. 털목도리는 짐승의 ○○이나 눈이 산 것처럼 고대로 생 긴 것이래야 씁니다.”
여점원의 말이 그치기도 전에 남주사는 “그럼. 그 맛에 털목도리를 하는 것이지. 이런 바보!” 하며 픽 웃는다.
“여우털로 제일 좋은 것은 얼마하오?”
남주사는 여우발목에 담긴 정가표를 본다.
“네 보통여우는 사십 원짜리부터 일백이십 원짜리가 제일 좋습니다.” 일지매는 목도리를 뒤적거리며
“여우털은 빛이 좀 조선옷에는 어울리지 않아. 다른 빛은 없소?” “네 네 다른 것도 있습니다. 회색도 있고요. 또 은빛 나는 것도 있습니 다.”
“그럼 누렁보다 조선옷에는 회색이 나을 듯해.”
“그렇습니다. 단순한 조선옷빛에는 도리어 회색이 나으실 것이요. 회색은 나장 속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값이 좀 많습니다.”
하며 여점원은 아래에 놓인 유리창을 가리킨다. 일지매와 남주사는 여점원 의 손끝을 따라서 유리창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16회 육백 원짜리
여점원은 회색여우와 은여우털 목도리가 들어있는 유리창을 가리키고는 그 창문을 열고 목도리를 꺼낼 동작은 아직 아니하고 무엇을 주저 하는 모양인 지?
“이 장 안에 있는 것은 물건은 매우 좋습니다만은 값이 좀…….” 여점원은 그 고가의 물건을 사지는 못할 사람으로 추측했는지 주저하고 있 다. 여점원의 말씨와 동작이 다소 냉정한 것을 보고 남주사는 자기들을 업 수이 여기나하는 불쾌한 감정이 번쩍 머릿속에 일어나서 눈초리가 상큼하게 위로 올라가며 여점원의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값이 어떻단 말이요?”
여점원은 남주사의 똑바로 쏘는 시선에 다시 용기를 감한 듯이 고개를 아 래로 숙이며
“좀 값이 비쌉니다.”
“비싼 물건인 줄은 나도 아우. 여태 조선 사람에게는 비싼 물건을 팔아본 일이 없소?”
“아니올시다. 비싸다고 아니 꺼내보이는 것은 아니올시다. 은여우 같은 것은 털에 서슬이 조금만 다르면 팔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물건 만은 따로 장 속에 넣어 둔 것이올시다. 보시려면 꺼내지요. 값은 좀 다른 것과 틀립니다. 저 오른편에 걸린 회색 여우털은 삼색오십원이고 그 가운데 걸린 은빛 나는 털은 육백오십 원이올시다. 이 유리창 안에 있는 것은 최하 가 삼백오십 원입니다” 하며 종시 문을 열지 아니한다.
남주사는 여점원의 하는 태도나 너희들은 그 물건을 못 사리라하고 비웃는 것같이 보이어서 흥분될 만치 모욕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남주사는 힘있 는 어조로
“물건의 서슬이 다를까봐서 못 내놓는단 말이요?”
“천만에 아니올시다. 지금 꺼내지요.”
여점원은 부득이한 모양으로 고개를 돌이키어 중앙에 놓인 ‘테이블’을 향하여
“나까무라상 고고니 강이와?”
하며 주임 점원에게 열쇠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주임 점원은 대답을 하며 열쇠를 들고 와서 남주사에게 ‘꾸벅’하고 인사를 하며 그 유리장을 열었 다. 일지매는 육백오십 원이라는 소리에 가슴이 좀 섬뜩하였다. 그러나 ××가 입고 요사이 요릿집에 다니는 ‘잘’두루마기보다는 사백원이나 싸 다는 생각이 그 다음에 뒤미처 떠올라온다.
남주사는 은여우털이 비싼 것을 여기서 처음 그 설명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다지 놀라지 아니하였다. 장문이 열린 뒤에 여점원은 그중에서 가장 하얀 회색털과 가장 비싼 은빛털의 두가지 목도리를 꺼내어 놓았다.
“이것이 그 중 값이 싼 것인데 삼백오십 원이올시다. 그리고 이것이 은여 우털인데 이것은 한 벌에 육백오십 원이올시다.”
하며 여점원은 그 중에 제일 비싼 은빛 여우털을 번쩍 들어서 남주사의 코 밑에 쿡 찌르듯이 내밀었다.
여점원의 손 내미는 그대로가 “육백오십 원이라도 네가 이것을 능히 살 터이냐?” 하는 것같이 보이어 여점원의 태도가 말할 수 없이 불유쾌하다.
“남의 눈 앞에다가 부쩍 내밀면 어디 자세히 볼 수가 있소. 좀 그 장위에 내려놓구려.”
남주사는 그 목도리를 손으로 이리저리 뒤치며 자세히 보고 있다. 일지매 는 그 옆에서 한참 목도리에 눈이 팔려 섰다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무심히 고개를 홱 돌리어 자기의 뒤편을 보았다. 이 순간에 선뜻 해룡 피 목도리가 보이며 미처 피할 여지가 없이 그 시선과 정면 충돌을 하게 되 었다. 일지매는 등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선듯한 느낌을 일으키며 얼굴이 화끈하고 달아올랐다. 이런 감정이 착잡하게 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안 에 부지중에 일지매의 머리는 앞으로 수그러지며 ‘인사’의 뜻을 나타내었 다.
해룡피 댄 외투를 입은 사람은 조금 전에 일지매가 아래층에서 언뜻 보고 가슴을 놀래던 과연 한치각이었다.
한치각은 일본음식점에서 심참봉에게 백 원짜리와 십 원짜리를 합하야 일 백오십 원을 주어서 일지매의 치료비로 보내고 그 하회를 알기 위하야 심참 봉을 삼원오복점으로 오라고 약조하고 지금 심참봉이 오기를 기다리며 삼월 오복점에서 이리저리 거니는 중에 병원에 갔다가 심참봉이 전해온 일지매를 아래층에서 선뜻 보고 그 뒤를 따라서 삼층까지 온 것이었다. 한치각은 비 웃는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일부러 큰 목소리로 “훌륭한 것을 사네그려.
육백 원은 요새 돈에 좀처럼 어려운 걸.”
하며 한치각의 입가에는 냉소가 똑똑 덧는다. 남주사는 그 말소리에 그편으 로 얼굴을 홱 돌렸다.
17회 돈의 씨름
남주사와 일지매가 삼월오복점에 삼층에서 털목도리를 고르기에 정신이 팔 려있는 동안에 그 뒤를 따라서 올라온 한치각은 털목도리가 진열되어 있는 그 맞은편에서 양복부속품을 구경하는 체하고 남주사와 일지매의 두 사람의 행동을 엿보고 있다가 일지매와 서로 시선이 충돌되어 피할 수 없는 거북한 장면을 이루었으나 한치각의 생각은 당초에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올라올 때 부터 일지매와 정면충돌을 하려는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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