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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김정진 독와사 [3]

by 워낙3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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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각이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처음에는 그가 돈이 있고 또 하여간 외국에 서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오니만큼 여러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었 었다. 혹은 사회사업으로 무엇을 의논하여 볼까 혹은 식산 사업을 권하여 볼까 혹은 교육사업에 이용을 하여 볼까 하고 여러 방면의 뜻있는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가까이 하며 모든 의논을 하여 보았다. 그러나 한치각은 그러 한 데에는 도무지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철저한 색마성 외에는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터이라 여러 사람들은 혹은 2∼3개월 혹은 반년 또 그 중에 끊 기 있게 쫓아다니는 사람은 수년 동안을 두고 한치각을 권하였으나 결국을 하나도 성공한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한치각의 집 사랑에는 생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자취는 차차 없어져 가고 지금까지 남은 것은 은근짜 를 발견하기에 필요한 사람, 기생집 심부름에 필요한 사람 외에는 발을 들 여 놓는 친구가 없다.

강진사는 아들을 죽인 뒤로는 한치각의 사랑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한치 각의 사랑 병정으로는 가장 무용하였으나 자기로서는 아직까지 조금 생활 의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강진사까지 마지막으로 한치각의 집을 떠나게 되어 소위 사직영문에는 또 한 사람이 축이 났다. 노주인 한승지는 한 집에 있는 자기 아들이지만은 주야를 바꾸어 움직이는 한치각과는 하루에 한차례 로 변변히 대면할 기회가 없으나 모든 것을 제풀로 방관하는 까닭에 별로 섭섭하다든지 또는 자식의 도리를 아니 지킨다든가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 다. 벌써 터 밖에 벗어져 나간 자기 아들을 다시 자기 주먹 안으로 휘어 넣 기는 도저히 안 될 일이라고 아예 세음밖에 두고 아무쪼록 돈이나 적게 축 을 내도록 모든 예방선을 늘어놓아 그것을 방비할 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한 푼 돈에 치를 떠는 한승지 규모에 가슴이 털썩 내려 앉는 큰일을 당하였 다. 한승지는 오전께부터 안으로 바깥으로 들락날락 하다가 상노를 불러서 한치각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

“나으리는 그저 안 일어났니? 참 귀찮은 자식이다. 하고한 날 오정이 넘 도록 늦잠만 자고 그게 나중에는 무엇이 된단 말이야! 어서 좀 일어 나라고 그래.”

한승지는 화에 바쳐서 담뱃대를 놋재떨이에 땅땅 떨며 큰 사랑 아랫목의 떨어진 보료 위에 앉았다. 상노 만돌은 작은 사랑까지는 한승지의 분부대로 왔으니 한치각의 성미를 아는 터이라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덧문 밖에서 큰 사랑에서 부른다는 말을 전하였다. 한치각은 자기 잠을 깨는 상노를 마 음껏 쥐어박고 싶은 홧증이 복받치지만은 체면상 성미를 그대로 부릴 수는 없고 꽁꽁 안간힘을 쓰고 일어났다.

“왜 부르시더냐? 무슨 큰일이나 났니? 지금 올라갑니다라고 여쭈어, 응.

또 단잠을 깨이게.”

한치각은 독살이 머리끝에까지 올라서 옷을 입고 일어섰다. 한승지는 그동 안에도 마음이 초조한 것을 참지 못하고 또 상노를 부른다. 한치각은 술내 가 입에서 물큰물큰 나며 눈에는 핏줄이 서고 머리는 까치집 같이 어수선하 게 일어선 채로 한승지 앞에 나타났다. 한승지는 반백이 넘는 툭툭한 수염 끝이 위로 거슬러 오르며 한치각을 쳐다본다.

34회 오천 원 수형

한승지는 양 미간에 잔뜩 주름살이 잡힌 얼굴을 들어 한치각을 쳐다보며 “너는 무엇을 하길래 한 가(家) 안에 있으면서도 얼굴을 며칠째 볼 수 없 으니 그런 자식이 있더란 말이냐.”

한치각은 윗목에 서 있는 채로 주저주저 하며 말이 없다. 한승지는 계속하 여

“저기 좀 앉아라. 오늘은 네게 물어볼 말이 있다.”

“…….”

한치각은 아무 말도 아니하며 역시 미간에는 불평의 주름이 모이여 그 자 리에 웅크리고 앉는다.

“금년에 집의 형편이 어떻게 되었는지 네가 아느냐? 추수한 볏값이 작년 보다 거의 반이나 떨어져서 작정하였던 모든 일들이 다 틀려 버렸다. 너는 그것저것 상관치 아니하고 허구헌 날 돈만 퍼다 내버리니 어찌하잔 말이 냐.”

한치각은 비로소 입을 열어

“볏값이 떨어진 건 나도 알아요.”

한승지는 성을 버럭 내인다.

“그럼 정신을 왜 못 차려! 이 자식아. 집의 것이 다 네 것이냐? 그걸 정 신을 못 차린단 말이냐. 돈이라는 것이 한정이 있는 물건이다. 너처럼 함부 로 갖다 내버리면 그대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작년에 만 원을 썼으면 올해 는 집에 들어오는 돈이 줄었으니 그 반을 쓴다든가 해야지 집을 버팅기고 살지. 어떻게 하잔 말이야.”

한치각은 고개만 숙이고 앉았다.

“네가 미국 가 있네 하고 몇 해 동안 날라다 내어 버린 돈이 이십만원이 넘지 아니하냐? 그래도 다녀 나온 뒤에는 지각이 좀 났나 하였더니 그 후로 는 5∼6년 동안에 명색 없이 퍼버린 돈이 삼십만 원이 된다. 그 전은 고만 두고라도 불과 십 년 내외에 네가 버린 돈이 오십만 원이 넘어 된다. 그전 은 고만 두고라도 불과 십 년 내외에 네가 버린 돈이 오십만 원이 넘어 된 다. 그것을 예전 돈 풀이로 하면 가만히 있거라……, 이천오백만 냥이다.

듣기에도 끔찍한 돈이 아니냐 예전에는 조선서는 별로 들어보지 못한 소리 다. 그 돈을 지금까지 모아 두었더라면 조선에서 몇째안가는 부자 하나가 또 생겼을 것이다. 아무리 네가 모은 돈이 아니기로 돈을 귀한 것을 모르고 그렇게 함부로 내다버려? 글쎄, 이 지각없는 자식아! 네가 십여 년 동안을 두고 쓴 돈이 ○○○○○○○○○ 사랑에 모이는 친구란 것은 귀한 천 량을 다 까먹은 난봉자식들뿐이요 집에 식구가 늘은 것은 기생첩을 몰아다 넣고 늙은 아비에게 그 치다꺼리만 하라니 난들 살 수가 있느냐! 네게만 달린 첩 이 지금 세 집이 아니냐? 그 식구가 이십 명이나 된다. 그것들은 거저 사는 줄 아느냐? 다달이 한집에 아무리 적게 보내어도 백 원씩은 가져야 산다하 니 그것만 해도 삼 백 원, 그래도 날마다 무엇이 없네, 병이 낫네 하고 돈 을 가지러 오니 난들 어디서 그렇게 무한정으로 돈이 난단 말이냐. 매달고 있는 계집이 넷이나 있는데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밤마다 요릿집에서 기 생을 불러가며 방탕한 짓을 하니? 너는 대관절 어떻게 생긴 자식이기에 그 렇단 말이야?”

한치각은 점점 눈살을 찌푸려 가며 때때로 한승지의 얼굴만 엿본다. 한승 지는 벼르던 끝에 오늘은 무슨 끝을 내려는 것처럼 점점 언성을 높이며 “그건 다 그만 두고라도 작년부터는 네 마음대로 네게 맡긴 것이 아니 있 느냐? 수원서 받는 일천오백 석은 내가 아주 상관을 아니할 터이니 그것은 작전하여 네가 어떻게 내어 버리든지 다시는 내게 돈 달라 소리를 하지 말 라 하였지. 일천오백 석이면 지금 헐한 볏값으로도 이만 원에 가까운 돈이 다. 그 많은 돈을 불과 칠팔삭 동안에 다 내다버리고 그래도 모자라서 오천 원짜리 수형을 또 써서 돈을 얻어 써? 이 자식아, 오늘 은행에서 지불 통지 가 왔으니 저것을 장차 어떻게 한단 말이냐?”

한승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서 담뱃대를 재떨이에 땅땅 떤다. 한치각 은 수형 소리에 비로소 깨달은 듯이 정신이 번쩍 났다. 모든 것을 마음에 거둬두지 않는 그는 벌써 그 수형의 기일이 닥쳐 왔나 하고 놀래었다. 한승 지는 또 말을 계속하여

“그래, 그 수형은 또 얼마나 제하고 쓴 것이냐? 그래 내 도장은 어디서 갔다가 찍었단 말이냐? 참 집안을 결단 내일 자식이다. 늙은 아비가 한 푼 이라도 모으려고 열쇠 꾸러미를 차고 다니며 애를 쓰는 것도 모르고.” 한승지는 분노가 변하여 얼굴에는 다시 슬픈 빛이 나타나 긴 한숨을 내쉰 다.

제35회 마마님이 불러

한치각은 오래간만에 자기 아버지에게 또 골치가 아픈 걱정을 듣고 자기 사랑으로 돌아왔다. 상노 만돌이가 사랑을 치우는 중에 날마다 모이는 병정 들은 하나씩 둘씩 들어와서 어제아 같은 면면들이 늘어 앉았다. 한치각이 나오는 것을 보고 좌중 사람들은 일어서는 사람,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도 있어 인사를 마치었다. 약밥 정주사는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오늘은 주인 대장의 얼굴이 환한데그려. 오래간만에 구진이 어떻든가?”

심참봉은 옆에서 말깃을 달아

“무어니 무어니 해도 엊저녁은 다 ○○○의 덕일세. 오래간만에 번특주 마마님하고 운우지락을 이루게 된 경사의 제일 일등상은 이 심참봉 나으리 께서 타셔야 할 걸.”

한치각은 두 사람의 회담이 귀에 들어오지 아니하는 태도로 아무 말도 없 이 아랫말 안석에 몸을 턱 기대며 앉는다. 연통 안의관은 재떨이 옆에 놓인 해태표갑에서 궐련을 꺼내어

“대장이 엊저녁에는 오래간만에 아주 뽕을 빼셨나? 왜 오늘은 저렇게 후 줄근해?”

하며 한치각의 얼굴을 쳐다본다. 한치각은 조금 짜증이 들었는지

“쓸데없는 소리로 떠들지들 말어. 남의 입때 큰 졸경을 치르고 나왔는 데.”

채플린 박주사는 말끝을 채어

“왜? 큰 사랑 노대장이 또 설교를 해 계신가?”

한치각은 픽 웃는다.

“아따 노대장도 그만 체면은 아는 터인데 기생집에서 하루 잤다고 물색없 이야 굴었겠는가?”

약밥 정주사는 크게 실룩거리며 웃는다.

“그런데 요새 일지매는 아주 행적이 없어졌으니 전남이 아주 접어 삼켜 버렸나?”

채플린 박주사는 다른 화제를 꺼내인다.

“전남이라니?”

연동 안의관이 묻는다.

“아따, 저렇게 말귀가 어두운 건 처음 봤네. 전라도 남가 말이야” “으응 진흙 부랑자 말이로군.”

“또 진흙은 무어야?”

“자네도 이목이 몹시 어두워그려. 발뒤꿈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시골 부랑자란 말이야.”

“여보게 남가는 진흙커녕 향수 냄새만 물큰물큰 나네.”

“향수를 바르면 뭐해? 서울 사람 같이 오입맛을 알아야지.”

“여보게 그 말 말게. 전후 멋은 남쪽 사람들이 더 안다네.”

“그건 기생 말이지. 기생이야 남쪽 것이 구수하지. 웅숭깊은 맛이 있 고.”

“그런데 횃대는 오늘도 결석일세그려. 어린 것을 죽였다더니 아주 낙심이 되었나.”

“그 사람도 요새는 진대를 않는 모양인데.”

하루에도 몇 백 몇 천 마디의 쓸데 없는 회담을 하고 있는 그들 중에는 어 제와 마찬가지로 기생이야기가 끝이 나더니 강진사가 또 새로운 화제가 되 었다.

“이 사랑에는 주인 대장이 하꾸라이니까 관계치 않지만 큰 사랑 노대장은 책력만 뒤지보고 앉았는 땐데 참척을 보고 곧 올 수가 있나 달이나 가셔야 지.”

“여보게 노대장이 요새는 백인한테 사주 보러 아니 다니나? 작년 이맘때 는 연회 털중나무 지팽이를 두르며 대를 서더니.”

채플린 박주사의 말소리에 한치각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별안간 빙그 레 하며 웃는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진사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그 진상을 추측하는 사람이 없다. 강진사는 눈 오는 날 아침에 한치각의 집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아주 마지막이 된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한치각은 여러 사람들이 회담을 하는 중에 자기 아버지에게 들을 말을 다시 생각하며 잊었으나 그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그다지 새롭게 마음을 찌르는 것도 없거 니와 자기 집 재산 정도가 아직까지도 넉넉히 쓸 것이 남아 있을 터이라고 믿는 까닭에 마음에 박힐 일은 없다. 그저 몇십 분 동안 자기 아버지에게 듣기 싫은 걱정 몇 마디를 듣고 난 대신에 오천 원짜리 수형을 떠넘기게 된 것만 마음에 도리어 시원하게 생각할 뿐이다. 이 때 안으로 통한 복도문이 열리며 계집 하인이 나와서 급한 오조로 한치각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 한다. 한치각은 눈이 휘둥그래 해서 벌떡 일어서며 안으로 들어갔다.

앞마루 끝에는 죽첨정에 있는 한치각의 셋째 첩의 집 계집애 하인이 섰다 가 한치각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급한 일이 생긴 듯이

“곧 마마님 댁으로 오시라고 그래요.”

하며 하인은 불안에 싸인 얼굴로 한치각을 쳐다본다.

36회 투기가 시작

한치각은 원래 모든 것에 끊기가 없이 조금만하면 권태를 느끼는데다 더구 나 여성에 대하여는 더욱 심하다. 처음에는 불 같은 욕심을 가지고 덤비다 가도 그 계집에게 자기의 목적을 달한 다음에는 불과 며칠만 지내면 그만 염도가 식어지고 나중에는 얼굴을 대하는 것도 싫증이 나게 생각하는 성미 를 가진 극단의 사람이다. 죽첨정 마마라는 것도 치가를 벌써 5∼6년이나 되었지만은 급한 병이나 생겼다고 청하러 오면 마지 못하여 한번씩 들여다 볼 뿐이다. 이렇게 한치각의 코에서 냄새가 나게 된 죽첨정 마마라 하는 여 성은 원래 모 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하던 여자로서 한치각이 한참 동안을 엎으러져서 다니다가 겨우 금전의 힘으로 자기 것을 만들어 겨우 한달 동안 밖에 살림을 아니하고는 나중에 싫증이 나서 내박차는 것을 그의 친정에서 들고 일어나서 강경한 담판을 하는 통에 어찌할 수 없어 지각 있는 한승지 가 가로 맡아서 무마를 시킨 것이다. 그런 뒤에 한치각은 그의 집에 일 년 에 몇 번씩 발을 들여 놓을 뿐이고 시량범절을 다 한승지가 대어 살림을 시 키고 있다. 말하고 보면 막말 같지만은 자기 아들의 첩이라는 것보다 살림 살이에 관계해보면 한승지 첩이라는 것이 도리어 합당한 말이다.

그 여성은 아직 나이 25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슨 청승으로 빈 집을 지키 고 과부 같은 쓸쓸한 생활을 계속 하는가를 의심할 만치 정조를 지키고 있 다. 그는 사람 앞에 얼굴이 화끈화끈해서 못 나다닐 숫보기 처녀도 아니요.

전등불이 찬란한 무대 위에서 수백 명 수천 명 관중들의 시선받이가 되어 뛰놀던 여배우가 무슨 까닭으로 날마다 계집을 갈아 들이는 한치각을 바라 고 죽은 말 지키듯이 앉았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여성의 주위에는 그를 쓸쓸한 그 자리에 스스로 얽어 매일 몇 가 지 원인이 있다. 한치각은 계집하인이 하는 말을 듣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일이 별안간에 또 생겼니? 지금은 사랑에 손님이 많이 오셔서 못가 니 이따 저녁 때나 간다고 그래라.”

하인이 이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아니예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시나 봐요.”

“대관절 무슨 일이 생겼어? 급한 일이라는 것이 무슨 일이냐?” “마마님께서 별안간 병환이 대단하세요. 얼른 좀 올라가 보셔요” 하며 계집하인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돈다.

한치각의 마누라는 그 하인이 무슨 말을 전하나 하고 분합 안에 몸을 피하 여 듣고 섰다. 한치각은 병이라는 말을 듣고는 항상 자기를 불러 올리려는 수단을 또 쓰는구나하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집 하인이 눈물을 흘리 고 섰는데 일종의 불안이 생기어

“어디가 어떻게 아프단 말이냐? 왜 계집년이 쪽쪽 울고 섰어?” “아주 대단하신 모양이야요. 저는 방에도 아니 들어갔었으나 마마님 친정 마나님이 나으리께 급히 여쭈어 오라고 하셔서 그래서 왔어요.”

한치각은 계집 하인이 말하는 모양이 아무리 보아도 전에 하던 빛과는 다 르다 생각하며 주저주저 하는 중에 분합 안에 섰든 한치각의 마누라 썩 나 서며

“여보 얼른 올라가서 좀 보고 오구려.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보오.” 하며 한치각을 동독하다가 다시 계집하인에게

“그래 마마가 어데를 아프냐? 별안간에 병이 낫단 말이야?”

“웬일인지 몰라요. 아마 대단하신가 봐요.”

한치각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한참 동안을 그대로 섰다. 그의 마누라는 얼 굴에 약간 비웃는 빛이 나타나며

“글쎄 얼른 가보구려. 얻어 들일 때는 좋았지요?”

한치각은 홧증을 버럭 내며

“왜 내가 얻어들였나?”

“그럼 누가 얻어 들였길래?”

“쓸데없는 소리 좀 말어.”

한치각과 그의 마누라 사이에는 질투의 끝이 차차 풀리며 할 즈음에 한치 각은

“지금 올라간다 그래라” 하며 안방으로 들어가서 세수를 재촉한다.

상노는 자동차를 부르러 달음질을 치며 밖으로 나간다.

37회 안나의 자살

죽첨정에 있는 안나의 집은 그 근처에서 가장 산뜻한 집모양을 가지고 있 다. 크도 적도 아니한 십여간쯤 되는 조선 기와집이나 뒤로는 백여평의 과 목 밭이 있고 집의 좌처는 조금 높은데 있으나 좌우에 돌려 박인 납작한 초 가집들과는 훨씬 ○○○ 마치 화초 밭 가운데 만들어 놓은 비둘기장 같이 뽀얀 양회로 전면을 바르고 중앙에는 높도 얕도 아니한 평대문이 달리어 있 다. 이 집에는 식구가 조붓함으로 평시에는 드나드는 사람도 적고 또 번화 한 사회를 떠나서 숨어사는 주인 안나는 날마다 하는 일이 없기 까닭에 손 심부름하는 춘예를 데리고 봄과 여름에는 화초나 숭상하고 그 다음에는 날 마다 춘예를 시켜 앞뒤 뜰이나 쓸리는 것이 한 운동이요 겸하여 그의 일과 이다. 안잠자기가 날마다 조석 두 때에 티끌을 쓸리는 것 외에는 집의 안팎 이 언제나 티끌 하나 없이 정결하고 집안은 마치 산중에 있는 암자와 같이 조용하고 한가하다. 한치각은 자동차 속에서 여러 가지로 안나의 병이 났다 고 호출한 신상을 연구하며 안나의 집 골목밖에서 자동차를 내리어 안나의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나의 친정 어머니는 쫓아 나왔 다. 환갑이 가까워온 안나의 모친은 주름살이 거미줄 같이 얽힌 눈가에 눈 물이 글썽글썽하며 한치각을 맞았다.

“나으리 오십니까? 한 성중에서 그렇게 발그림자를 아니하신단 말이요 어 서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큰일이 났나 봅니다.”

하며 한편으로는 원망, 또 한편으로는 불안이 섞인 그의 말에 한치각은 어 떻게 대답을 하여야 옳을는지 몰라서 아무 말이 없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덧문을 닫힌 채로 병풍으로 문을 막아 두른 그 안에 안나는 들어 누웠다. 한치각은 병풍 한 켠을 밀어 치며

“어디 아파서 그래?”

하며 컴컴한 방에서 안나의 누워있는 것을 들여다본다. 안나는 자는지 깨었 는지 천정을 향하여 반듯하게 드러누워 얼굴을 이불 동정에 파묻고 죽은 듯 이 드러누워서 아무 대답이 없다. 안나의 친모가 한치각의 말을 가로 맡아 서

“지금은 잠이 좀 들었나봐요. 아까는 한참 동안 토하며 구역질하며 가슴 이 아프다고 자반뒤집기를 한창 하더니 조금 전에 진정이 되었어요. 그런데 대관절 이것이 무슨 약이어요? 이 약을 잠이 온다고 밤마다 먹었는데 어젯 밤에는 한 병 다 먹고.”

한치각은 약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나서 손을 내밀어 약병을 빼앗듯이 당기며

“약이라니? 무슨 약을 먹었어? 어디 좀 봅시다.”

한치각의 가슴은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수일 전에도 안나가 무어라고 그 리 길게 썼는지 닷발이나 되는 편지를 춘예에게 보낸 것을 수상히 여겨 보 지도 않고 버려두었는데 별안간 약이라니 ‘독약자살’ 이런 생각이 번개 같이 한치각의 머리를 쳤다. 안나의 친모는 한치각의 기색이 황황하게 나타 나는 것을 보며 지금까지 큰 의심 중에 있는 약이 확실히 독약인 줄을 알게 되어 별안간에 몸이 번민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놀라움을 느끼었다.

“그게 독약이지요? 많이 먹으면 죽지요? 저를 어찌하나. 요새는 웬일인지 날마다 죽고 싶다는 타령만 하는 때에 내가 듣기가 싫어서 못 견디겠더니 저런 짓을 하려고 네가 그런 것이구나. 불쌍해라! 저것이 아주 죽으면 어찌 하나.”

하며 안나의 친모는 새삼스럽게 놀라며 운다. 한치각은 약병을 창문 가까이 들고 가서 보았다. 조청빛 같은 갈색, 한 유리병에 붙어 있는 파란 딱지에 는 담배씨 같은 로마 글자로 ‘아루날’이라고 써 있다. 한치각은 안나에게 무관심하던 그 책임을 일시에 느끼게 되며 가슴이 섬뜩하였다. 아루날이라 는 약은 최면제이나 요사이 날마다 신문지상에 나타나는 자살기사 속에 이 아루날이 가장 독하다는 것을 안 한치각은 마음이 울렁거리며

“어서 의사를 불러와야겠군. 이 약을 먹었단 말이지. 그럼 안나는 잠을 자는 모양인가?”

하며 안나가 덮고 있는 이불자락을 치워 들며 한치각의 얼굴은 놀람에 핼쑥 하여졌다.

38회 애닯은 일생

한치각은 놀라는 마음으로 병풍 한 자락을 급히 밀치며 안나가 누워 있는 자리 옆으로 가까이 갔다. 안나는 착 짜부러진 몸을 천정을 향하여 반듯하 게 누워 핼쓱한 얼굴이 우중충한 병중 안에서 선뜻 한치각의 시선과 마주칠 때 한치각은 별안간에 등에 냉수를 끼얹는 듯한 섬뜻한 느낌이 일어나며 가 슴이 울렁거린다. 한치각은 이불 자락을 들치던 용기는 순간에 어디로 사라 졌는지 손을 내밀어 안나의 몸에 가까이 할 용기는 다시 없이 되었다. 안나 의 어머니는 한치각이 약병을 검사한 뒤에 태도가 황황하게 변한 것을 보고 따라서 놀라게 되어 한치각의 동정만 살피고 있다가 한치각이 안나 옆으로 가까이 가는 것을 보고 한데 겨우 묻어서 그 옆으로 다가 앉았다. 한치각의 눈에는 안나가 자고 있는지 아주 숨이 끊어졌는지 얼른 분간할 수 없이 안 나의 숨은 가늘게 계속되어 있다. 한치각은 한참 동안 안나의 얼굴을 정신 없이 들여다보고 있다. 얼마 있다가 안나는 비로소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며 가볍게 입맛을 다신다. 한치각은 송장 같이 누웠는 안나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나서 안나의 어깨에 손을 대어 가볍게 흔들며 “안나, 안나, 여보게 정신을 좀 차리게. 나야, 나일세. 이게 무슨 잠이 야?”

한치각의 어조는 부드러움과 애조사 섞여 나온다. 옆에 앉았는 안나의 어 머니는 몸을 일으키어 한치각의 등 뒤에서 안나를 내려다보며

“얘, 얘, 참봉이 오셨다. 얼른 일어나거라.”

안나는 두 입술을 움직이여 두어번 입맛을 다시더니 눈을 뜨지 아니하고 그대로 또 혼수 상태에 빠졌다. 한치각의 놀라는 마음은 안나의 입맛 다시 는 동작 한 번에 비로소 가라앉게 되었다. 안나와 한치각의 사이에는 세상 에 보기는 사랑에 쌓인 첩이라 할 터이나 실상은 안나의 친정 아버지가 한 치각의 재산에 애착이 있어서 한번 휘어잡고 그 언턱걸이를 기회 있으면 다 시 이용하자는 어떠한 책략에서 나온 것이다. 간단하게 이 두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말하자면 한치각의 돈을 한 몫 빼앗자는 첫 연극이 실패된 까닭에 마음이 컴컴한 안나의 아버지는 안나의 일생을 한치각에게 그대로 매달아 놓고 어떠한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있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하는 한치각은 끝에서 끝으로 옮기는 나비와 같이 안나의 입술에 담겼든 달디단 꿀은 다 빨아 먹은 다음에 또 다시 새 꽃으로 사랑을 옮겼으나 속담에 있는 말과 같이 내가 먹자니 싫고 남을 주자니 아 깝다는 세음으로 자기 아버지가 시량 범절을 대어주는 대로 그대로 첩이라 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터이다.

말하자면 한치각의 이러한 무책임한 태도와 또 안나의 아버지의 컴컴한 생 각이 애닮은 안나의 일생을 눈물겨운 운명에 억지로 매어 놓은 것이다. 만 일 안나가 혼몽 상태에 빠진 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면 안나 의 일생은 마치 바위 위에 피었던 이름 없는 꽃 한 송이가 심술궃은 왕벌에 게 여지 없이 침해를 당하여 소리 없이 그 자리에 사라져버리는 꽃과 똑같 은 비참한 운명의 여성이 될 것이다. 처음에 한치각의 마음을 놀라게 한 것 은 안나의 죽음에 대한 느낌이 아니었다. 안나의 자살로 말미암아 자기 신 변에 어떠한 불명예스러운 데가 생기지 아니할까하는 그 염려가 먼저 한치 각의 머리를 울리게 한 것이었다. 안나의 자살로 말미암아 자기 신변에 어 떠한 불명예스러운 데가 생기지 아니할까하는 그 염려가 먼저 한치각의 머 리를 울리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여간 안나의 아직 살아있는 것을 겨우 알게 됨에 한치각은 놀라던 마음이 차차 가라앉게 되며

혼몽 상태에 있는 안나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곧 의사를 부르 게 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 근처에 있는 뜨내기 의사가 왔다가는 안나가 약 먹은 것이 소문이 날 염려가 있으므로 한치각은 얼른 명함을 꺼내어 ××의 원이라고 쓰고 행랑 것을 불러서 광교 천변에 있는 ××의사 집으로 보내었 다. 이러는 동안에도 안나는 깨었는지 자는지 아무 소리가 없이 사방을 둘 러싼 병풍 속에 흔적 없이 누워있다. 안나가 이러한 상태에 빠진 그 원인은 다만 안나의 머리 맡에 놓여 있는 아루날의 약병이 막연한 추측을 일으키게 할 뿐이요그 진상을 아는 사람은 없다. 사람과 초목이 다 함께 깊은 잠 속 에 묻혀 있는 밤중에 새로 두시에 시작된 일종의 무언극이다. 밤마다 최면 약을 먹어야 잠을 이루게 된 안나에게는 함부로 추측을 내리기 어려운 큰 문제이다.

39회 의사의 진찰

한치각은 생각지 아니한 소동에 적지 아니한 놀라움을 느끼었다. 다행히 안나가 아주 죽지는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후련하게 되어 졌으나 대관절 안나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최면약을 함부로 먹었는지 그 원인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엇을 비관하고 혼자 마음으로 자살을 하려고 그렇 게 최면약을 많이 먹었나하면 이 세상을 아주 떠나는 사람이 유서 한 장 없 이 그렇게 싱겁게 죽을 리도 없고 또 설령 약의 분량을 할 듯하였다 하였더 라도 한두 번 먹는 약이 아니요, 그의 어머니 말을 들으면 밤마다 먹었다 하니 그렇게 대중없이 많이 먹을 터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하여도 추측으로 알아 내이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한치각은 의사를 부르러 보낸 뒤에 안나의 누워있는 머리맡을 비롯하여 유미까지 자세히 살피었으나 아무 별다른 흔적 이 없다. 한치각은 마음 속에 불행 중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하여튼 안나 의 행동이 자살을 표시한 흔적이 없으니 설령 안나가 자살을 할 뜻으로 이 러한 짓을 하였다 할지라도 이 자리에서 자살이라는 문제는 통이 입에 오르 내리기 아니하도록 하는 것이 예방을 하는 것이 가장 득책이라고 생각한 한 치각은 안나의 어머니에게 책망 비스름하게

“안나는 다행히 죽지는 아니한 모양이오만은 대관절 이 약은 어디서 나온 것이요? 이런 독한 약을 함부로 먹게 한단 말이요? 큰일날 뻔하였소. 사람 들이 무시한들 이런 위태한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둔단 말이오.”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가 죽지는 아니하였단 한치각의 말에 적이 안심이 되 었으나 한치각의 책망에는 다시 대답할 말이 없다.

“글쎄 누가 압니까? 그 약은 갸가 어디서인지 늘 사다가 두고 밤에는 잠 이 아니 와서 애를 쓰다가는 그것을 좀 먹고 잠이 들고 하였어요. 벌써 그 약을 시작한 지가 올 여름부터인데 입때 아무 탈이 없더니 어제는 얼마나 먹었는지 오늘 아침에는 이 소동이 일어났어요. 그럴 줄 알았더만 내가 그 약을 먹이겠습니까?”

안나의 어머니는 변명의 말이라는 것보다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게 무슨 위태한 것이란 말이요? 안나가 아직 나이 젊으니까 그만하지, 만일 원기 없는 늙은이가 먹었더라면 종내 깨이지 아니하고 그대로 죽었을 것이에요. 아루날이라는 약은 최면약 중에는 그 중 독한 약인데 참 큰일 날 뻔하였소. 요사이 신문에 나는 것도 못 보았소. 여자의 자살은 거의 이 약 을 먹고 죽는 사람이 많소.”

자살이라는 한치각의 말에 안나의 어머니는 무슨 기미를 보았는지

“갸가 그렇게 된 것도 누가 아나요. 나이 어린 젊으나 젊은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당췌 발 그림자를 아니 하시니 그것이 누구를 바라고 산단 말 씀이오? 금년 가을부터는 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숨만 쉬고 죽는단 말이 입에 아주 달리다시피 날마다 쳐들고 있었지요. 약을 부러 그렇게 많이 먹 었는지도 모르지요.”

안나의 어머니는 긴 한숨을 쉰다. 한치각은 깜짝 놀라며

“원 별말을 다하는구려. 무엇이 부족하며 그렇단 말이요. 먹고 사는 것이 걱정이 있어. 입는 것이 남만 못하오. 요새 같은 돈 귀한 세상에 이만큼 넉 넉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그러우? 그런 딴 말은 남이 듣기도 상스 럽지 못하니 입에 내지도 말우.”

한치각은 어조를 힘 있게 눌러서 안나 어머니 말 끝을 탁 질러 버리었다.

밖에서는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의사가 앞을 서고 인력거꾼이 가 방을 들고 앞마당으로 들어선다. 한치각은 마루로 나아가 의사를 맞으며 “여보게 수고하네그려. 얼른 올라오게.”

의사는 모자를 벗으며 “그런데 누가 병환이 나셨나?”

한치각은 의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치각은 의사에게 간단하게 최 면약의 분량을 잘못하여 많이 먹었다는 설명을 한 뒤에 의사는 청진기를 꺼 내들고 안나의 진찰을 시작한다.

40회 죽은 사람

의사는 안나가 혼수상태에 빠져서 정신없이 누운 몸에 청진기를 대어도 가 슴과 심장을 이리저리 자세히 진찰한 뒤에 말하였다

“아주 대단히 위험하였습니다그려. 지금은 맥과 심장의 활동이 겨우 회복 되어 가는 모양이올시다마는 약의 분량이 원체 많았던 까닭에 아직도 체내 에 약기운이 그대로 남아서 이렇게 혼수상태에서 방황하는 것이외다. 우선 심장이나 보호해야 할 테니 강심제 주사나 놓고 차차 치료를 할 수 밖에 없 습니다” 하며 의사는 청진기를 귀에서 떼이며 말하였다.

한치각과 안나의 어머니는 그 옆에서 의사의 눈치만 보고 있다가 안나의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어 “그래 죽지는 않겠습니까?” 양미간에 근심스러 운 빛이 가득하여지며 묻는다.

“글쎄올시다. 아직 같아서는 생명은 잘하면 붙잡겠습니다마는 원기가 점 점 약하여 가니까 만일 별안간에 심장마비가 일어나면 큰일이지요. 아루날 이라는 약은 다른 최면제와는 아주 심한 작용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주의하 지 않으면 안됩니다.”

의사의 말은 아직까지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한치각 은 어쨌든 아직 살아 있는 것만 다행으로 생각하며

“그러면 우선 강심제나 주사를 하도록 하여주시오. 지각들이 없이 그런 약을 함부로 먹고 이 소동을 일으키니 사람이 견딜 수가 있나?” 한치각은 어디까지 안나가 최면약의 분량을 잘못한 것을 표시하기에 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최면약을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최면약의 관계인지는 모르 나 신경이 극도로 쇠약하신 듯한데 하여간 운동이 부족하신 부인네들은 불 면증이 따라 다니는 예증이지요. 수면이 부족하면 자연 신경이 흥분되어 신 경쇠약증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루날을 오래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만큼이라 도 지속하고 계십니다. 만일 누구든지 처음으로 그약 한번만 다 먹었다하면 불과 두시간 안에 심장마비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여간 이번 일은 불행 중 다행이 되었습니다.”

“글쎄 그도 그랬는지 모르지요.”

한치각은 의사의 말을 그대로 듣고 앉았기로 너무 심심하다고 생각하였는 지 아무 긴장한 맛도 없는 오조로 말대답하였다. 의사는 가방에서 주사기와 강심제 주사할 준비를 하며

“그런데 아직까지도 약이 얼마쯤 위 속에 남아있는 모양인데 그대로 두웠 다간 아니 될 터이요. 어찌할까요? 아주 위세척을 하였으면 좋겠는데 기계 를 가져올 수도 없고.”

의사는 자기 병원에 입원을 시켰으면 하는 듯한 어조로 말한다.

한치각은 입맛을 다시고 있다가

“그러면 하여간 환자를 치료하기 적당하도록 하게 하시지요. 만일 입원을 하여야 할 필요가 있으면 곧 그렇게 하지요.”

“글쎄요. 오늘밤과 내일 하루는 혼수상태가 계속 될 듯하니 심장관계도 있고 어쨌든 내가 때때로 진찰을 해야만 될 터이니 그럼 입원을 하시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지금 환자가 저렇게 혼수 상태에 빠져 있는데 몸을 움직이어도 관계 없을까요? 만일 길에서 딴 변동이나 생기지 아니할까요?”

“아니올시다. 그 염려는 조금도 없습니다. 길이 그다지 험하지 않고 또 다소간 찬공기를 쏘이는 것이 얼마쯤은 환자에게 필요합니다.”

“그럼 곧 입원을 하도록 하여 주시지요.”

“그러나 요사이 하도 남의 말거리를 만들기 좋아하는 세상이니까 또 약을 먹었으니 어쨌느니하고 소문이나 나면 공연히 까닭 없이 창피하니 하여간 소문은 일절 아니나도록 하여 주시지요.”

“천만에 말씀이지요. 그거야 부탁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 염려 마시 지요.”

의사는 단연 한치각의 집에 드나드는 관계로 한치각의 성미와 그의 모든 행동을 아는 터이라 한치각의 비위에만 맞도록 얼러 맞췄다. 안나는 강심제 주사를 한 다음에 호송차에 담기어 광교 맞췄다. 안나는 강심제 주사를 한 다음에 호송차에 담기어 광교 천변 ××의원으로 몸을 옮기게 되었다. 안나 는 안방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데 덤비어 몸을 운반하는데도 조금도 감각이 없는 듯이 척 들어진 채로 죽은 사람 같이 옮기어 갔다.

41회 화려하던 무대

안나는 열입곱 살 먹던 해 봄에 동대문 안에 있는 어떤 종교학교를 졸업하 고 나서 작업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는 중 그 학교에 음악을 가 르치러 다니는 선생이 말하기를

“안나의 외양과 목소리가 보통사람보다 매우 뛰어나니 장래 오페라 여배 우가 되었으면 꼭 성공하겠다”고 안나의 아버지에게 많이 권하였다.

안나의 아버지는 원래 충청도 태생으로 젊었을 때는 서울로 과거를 보러 올라왔다가 과거에는 낙방을 하고 서울서 이집 사랑 저집 사랑으로 돌아다 니며 작객을 하다가 필경은 잡기판에 몸을 적시어 아주 노름꾼이 된 사람이 다. 원래 그는 이와 같이 절제 없는 생활을 계속하던 터이라 집안 살림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도 아니오, 안나를 학교에 보내어 졸업이라고 맡게 된 것도 전연히 안나 어머니의 힘으로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정에 대한 책임 을 도무지 느끼지 아니하는 안나의 아버지는 자기 딸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고 별안간 그 딸의 장래를 걱정할 정성이 생길 리는 없었다. 음악 선생이 몇 번 와서 권하는 바람에 그대로 맡기어 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안나는 그 때 새로운 조직되던 ××극단에 비로소 참가하게 되어 그해 여름부터 공개한 무대 위에 안나의 화려한 모양이 나타나게 되어 그해 여름부터 공개한 무대 위에 안나의 화려한 모양이 나타나게 되었다.

원래 외양이 반듯하고 또 나이가 여자의 황금시대인 열칠팔세 때이나 안나 의 이름은 여배우로서의 기술보다 미인이라는 것이 한층 더 높게 선전이 되 었다. 여러 신문사의 젊은 사회부 기자들은 다투어 안나의 사진을 얻어다 가. 신문에 드러내고 거기에 붙여서 달콤한 칭찬의 기사를 연속하여 나게 되었다. 심리생활에 주린 서울청년들은 밤이면 안나가 출연하는 ××극장으 로 떼를 지어 몰리고 날마다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에는 안나의 미안예 찬이 한 이야기거리가 되어 안나의 이름은 자못 높아졌다. 이때이다.

한치각은 미국서 돌아와서 며칠 동안은 사직골 자기 사랑에 근신을 하고 있었으나 원래가 남보다 몇 갑절이나 불한(不汗) 기분을 더 가진 사람이라 서울 천지가 뒤떠드는 안나를 한번 구경 아니 할 수는 없었다. 입으로는 조 선에 있는 배우가 허잘 것 있으랴고 냉소를 하였으나 어느날 저녁에 한번 안나의 화려한 모양을 무대 위에서 발견한 그는 병적에 가까운 색마싸움이 불 같이 일어나서 날마다 저녁이 되면 ××극장에 걸음을 옮겨 놓게 되었 다. 많은 관중들은 찬란하게 입은 안나의 의상과 선녀 같이 고운 화장에 안 계가 황홀하여 모두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몽롱하게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의 눈에는 안나의 입은 의상을 지내어 안나의 육체만 보인 다. 뽀얀 가슴에 오동통하게 솟긴 젖통이 대리석 인형처럼 미끈하게 빠진 그 대리석 허리 아래 둥글게 턱을 지은 그 방광이 눈에 어리며 가속도의 힘 을 가지고 한치각의 육감을 일으키었다. 한치각은 참다 못하여 결국 여러 방면으로 사람을 놓아서 안나의 몸을 사기에 적지 아니한 금전을 허비하고 자기의 소유를 만들게 되었으나 두어달 지낸 뒤에 한치각은 어느덧 그의 특 징인 싫증이 생기기 시작하여 열흘에 한번 오던 것이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도 안나의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되고 따라서 생활비조차 아니 줄 지 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안나의 아버지가 소송 문제를 꺼내는 바람에 지각 있는 한승지가 가로 맡아서 지금까지 표면의 관계를 그대로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안나의 전신은 누구나 다 배우생활을 하던 허영의 여자라 할 것이나 안나 의 성질이라든지 그의 행동으로 보면 안나도 여염집 규중에서 자라난 그 때 가 그대로 남아 있는 말하고 보면 변통성이 없는 여성이다. 그만한 외양을 가지고 또 그만한 젊은 여자가 한달에 얼마 아니되는 생활비에 몸이 얽매여 서 그림 같이 수절을 하고 있는 것을 누구나 다 고이하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이 막다른 험악한 생활에 몸을 던 진 그의 아버지는 안나의 몸을 자기 노름 밑천으로 알고 또 쌍뒤주로 생각 하는 이상에 그의 허락이 없어서는 자기의 몸을 빼쳐날 수가 없다. 안나의 이러한 생활의 이면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동정을 아니할 수 없을 것이 다. 안나가 지금 최면약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문이 만일 세상에 드러난다 하면 안나의 신세를 짐작하던 사람들은 서슴치 아니하고 자살이라 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안나는 과연 자살일까? 실수일까?

42회 푸른 달빛 아래

안나는 과연 자살일까? 실수일까? 큰 의문을 세상에 던지고 서려운 아침에 코스모스의 가련한 꽃가지와 같이 전신이 축 늘어진 몸을 환자 수송차 위에 담기어 ××의원으로 옮기어 왔다. 벌레 먹은 꽃, 찬 거리에 늘어진 거지, 이것은 자연계의 한 희롱이요 또 형벌이다. 그러나 안나는 그의 반생을 통 하여 이러한 희롱을 받을 만한 생활의 변화함도 없었다. 또 참혹한 형벌을 받을 어떠한 허물도 없다. 안나의 반생은 그의 피어나려는 얼굴에 쓸쓸하고 도 무거운 근심의 흔적을 떠날 때가 없었다. 학교에 다니든 학생 시대나 또 모든 여성들의 마음에 뛰놀며 이성의 품 속에 안기는 즐거운 결혼의 장면도 없었다. 노름 밑천에 몸이 달아서 시뻘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집안을 들뒤지는 그의 아버지가 안나의 책 보자기를 꺼내어 문밖으로 내던지며 난 폭을 부리던 학교시대를 겨우 벗어난 뒤에는 방년 여자의 아리따운 태도를 자랑할 만한 여유도 없이 무서운 색마의 손에 잡히게 되었다. 두 눈을 가리 운 맹목의 여자이면 세상이 그런 것이라고 단념을 할 수도 있을 터이나 사 회에 눈을 뜨게 된 안나는 자기 앞에 닥쳐오는 희생의 그림자를 그래도 운 명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애정, 체면, 염치 이 모든 사람사 회에서 다 같이 지키고 있는 그 체면을 아주 벗어나서 허욕의 나라로 정신 을 빼앗긴 아버지는 무서운 눈으로 인정없는 꾸지람으로 안나를 누르고 있 는 까닭에 안나의 머릿속에 떠도는 자유의 시계는 다만 이상의 나라에 멀리 보이는 한 그림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한참봉(치각)은 조선에 둘도 없는 부자의 아들이다” 하는 그의 아버지 말 한마디가 안나의 몸에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의 짐이었다. 세상에는 부자 의 사랑, 다시 노골적으로 말하면 돈에게 사랑을 팔려고 값싼 화장을 하고 신경이 움직이지 않는 헛웃음을 던지며 어두운 세계를 찾아다니는 여성도 많이 있지만은 안나의 사랑은 아직까지 한번도 사 본 사람은 없다. 한치각 과 안나의 사이는 첩과 주인이다. 그러나 한치각은 안나의 사랑을 산 것이 아니요, 아나의 아버지의 허욕이 흘러나오는 무서운 웃음을 산 것이다.

이와 같이 눈물겨운 청춘을 죽첨정 동산에서 보내는 안나는 봄이 와서 뒷 동산 과목밭의 꽃송이들이 분홍입술을 방긋방긋하며 안나를 맞을 때나 이슬 방울이 영롱한 유리알 같이 뜰 앞 잔디에 어렸을 여름 아침에도 안나의 입 에는 웃음이 없었다. 안나의 마음에는 상쾌한 흔적이 없었다. 뒷영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가을 달 맑고도 적막한 그 빛, 바람 속을 굴러오는 낙엽소 리, 다만 그것만이 안나의 쓸쓸한 마음의 그림자이다. 안나는 꽃이 피나 잎 이 지나 똑같은 적막하고 서글픈 세계가 계속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쓸쓸한 생활 속에서 안나는 한숨의 흔적이 가슴에 박히고 하염없는 눈물이 고개를 적시는 동안에 그의 신경은 여지 없이 쇠약하게 되어 밤이면 잠을 못 이루 게 된 지가 오래이다. 구식가정에서 더구나 시골서 생장한 그의 어머니는 안나의 깊어가는 신경쇠약증에도 아무 관심이 없이 젊은 애가 잠도 아니 잔 다는 책망을 듣는 때도 많았으나 안나는 자기 몸에 그러한 병이 왔다고 변 명도 아니하고 모든 것을 희생해 바치는 마음으로 말이 없이 지냈다.

안나가 약을 먹은 날 밤에 안나의 신변에 어떠한 사건이 있던 것도 물론 아는 사람은 없다. 안나는 밤이면 잠을 못자는 까닭에 한방에 거처하던 그 의 어머니를 건넌방으로 보내고 이 겨울부터는 안방 장지 안에서 안나가 혼 자서 자리에 들었었다. 스무날이 지난 밤중에 달이 서창에 비추었을 때 안 나는 가슴 속에 번민증이 또 일어나기 시작하여 자리속을 벗어나서 옷을 주 워 입고 문밖으로 나아갔다. 잎이 떨어진 과목가지에 찬 달빛이 걸리어 서 릿발이 번쩍거리는 동산가으로 안나는 한참동안 실신한 사람처럼 돌아다니 었다. 사람소리, 전차소리, 자동차소리가 한데 어울려져서 혼잡을 계속하는 서울 천지는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그치고 모든 것이 깊은 잠나라에 잠기어 있을 때이었다. 안나는 창백한 얼굴에 푸른 달빛을 쏘이어 마치 나 무 그늘에서 방황하는 귀신 같이 과목밭 속으로 이리저리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안나의 입에서는 뽀얀 입김이 옅게 흐르며 깊은 한숨이 때때로 나 왔다. 안나의 몸이 과목밭에서 떠난 지 몇분 아되어 안나의 손에는 아루날 의 약병이 쥐어 있었다.

43회 안나는 살려는가

광교 천변에 있는 ××의원은 비록 개인이 경영하는 작은 병원이나 얼양재 로 지은 가옥이 아직 깨끗한 채로 있고 의료기구라든지 입원실까지 있어 내 과 환자는 수용하기에 적당한 설비가 되어 있다. 안나는 그 중에 제일 좋은 일등실로 입원을 시키게 되었다. 어느 곳이나 돈이 제일 빛이 나는 것이나 더욱이 병원 같은 데는 더구나 돈의 유무가 헌수히 나타나는 곳이다. 안나 의 사정을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배후에 한치각이라는 재산에 주인이 있 기 때문에 다시 여러 말을 부탁할 것도 없이 안나는 일등 대우를 받게 되었 다. 안나의 힘없이 늘어진 몸은 혼수상태를 계속한 채로 하얀 침대 위에 누 워 있다. 한치각과 안나의 어머니는 그 옆에서 두 눈을 감은 채로 말없이 누워있는 안나의 창백색이 떠도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의사는 힘을 다 하여서라도 구해 내려는 듯이 두 팔을 부르걷고 능청능청 흔들리는 고무관 을 손에 들고 안나의 위세척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옆에는 뽀얀 옥양 목 족도리를 머리에 얹고 통통하게 반볼이 진 두 뺨에 붉은 사과 빛을 띤 간호원은 약물를 조제하고 있다. 안나의 어머니는 이상스런 기계들이 모아 지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저것은 다 무엇을 하는 기계인가요? 수술을 하게 되나요?” 하며 의심이 가득 찬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며 묻는다.

의사는 그 말에 픽 웃으며

“아니올시다. 수술은 아니합니다. 이 기계들은 위를 씻는데 사용하는 것 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밥통이라 할까요? 약이 아직 뱃속에 남아 있으니까 그 약기운을 다 씻어내려고 그러는 것이올시다. 수술은 아니합니다 아무 염 려 마시지요.”

“아, 저 굵은 줄을 배로 들여보내어? 저것이 아파서 견딜 수가 있나.” 배 안의 치료를 잘 모르는 안나의 어머니는 모든 것이 다 몸을 ○혀내는 기계와 같이 보여 마음이 쭈릿쭈릿 씌인다. 한치각은 너무나 주책없이 나오 는 것을 듣고 한편으로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밉살스러운 생각도 나 서 안나의 어머니를 윽박는 어조로

“조선 여편네들은 아무 병에든지 병원으로 데리고만 오면 모두 떼고 베이 고 하는 줄만 알어. 내과가 무언지 외과가 무언지 도무지 분간이 있어야지.

너무들 상식이 없어서 참 딱한 일이야.”

안나의 어머니는 말 한 마디를 모르고 했다가 창피하게 핀잔을 받고 멀쑥 하여져서 부끄러운 얼굴을 안나의 편으로 돌리었다. 안나의 입에는 고무관 이 목 속까지 깊이 들어가고 길다란 쇳대 위에 매달린 양수박 같은 유리병 에서는 약물이 고무관을 통하여 안나의 윗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안나는 정 신을 잃은 중에도 목구멍으로 고무관이 들어가며 약물이 윗속으로 점점 흐 르게 됨에 비로소 상체를 움직이며 구연만 몇 번 할 뿐이요, 눈은 감은 채 로 있고 때때로 힘없는 손을 들려 하다가는 그대로 풀없이 침대 위에 내어 뜨린다. 기다란 유리병에 담기었던 약물이 반이나 흘러 들어가더니 안나의 입두리와 두 코로는 노란 물이 넘치어 나온다. 안나의 어머니는 불안한 빛 이 얼굴에 가득하여 안나의 때때로 흔들리는 손을 붙잡고 있다. 의사는 고 무관의 허리를 조이고 약물을 조절하고 있다가 거의 다 되었는지

“이제 그만 하지. 뱃속에는 매우 많이 약이 남아 있는 모양인데 아주 아 루날 냄새가 코를 찌르는군.”

하며 고무관을 안나의 입에서 꺼내었다. 안나의 어머니는 겨우 안심이 된 모양으로

“이제는 낫겠지요?” 하며 의사의 얼굴빛을 살피어 보았다.

“네 이제 약기운이 다 씻겨 나왔으니까 차차 정신이 돌아올 터이죠. 염려 하실 것이 없습니다” 하며 의사는 안나의 힘없이 늘어진 손목을 주어 맥을 보다가

“아주 아까보다는 맥이 퍽 돌아왔습니다.”

의사는 자신이 생긴 듯이 한치각을 바라보고 힘있게 말한다.

한치각은 의사의 말에 양미간에 찌푸렸던 주름살이 다소 풀어지며

“이제는 확실히 돌렸나요? 공연한 짓들을 해가지고 남을 이렇게 놀라게 해.”

“이제 딴 증만 아니 생기면 차차 깨어나지요.”

한치각은 앉았던 걸상에서 비로소 몸을 일으켜

“그럼 나는 선생만 믿고 집으로 돌아가겠소이다”하며 모자를 쓴다.

44호 마누라의 폭백

안나의 아버지 군침이는 자기 집에서 귀한 딸이 독약을 먹고 거의 죽게 된 것도 도무지 알지 못하고 비밀 속에서 옮기어 다니는 노름판으로 돌아다니 고 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놀음판에서 불리든 군침이라는 자가 그대로 굳어서 영주라는 관명이 있지만은 이름은 부르는 사람이 없고 군침이라는 것이 아주 원이름 같이 되어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노름판에서는 물론이 요, 기타의 친구들까지도 도무 자만 부르게 되었다. 군침은 자기 몸을 담아 있는 데는 역시 죽첨정 자기 딸의 집이라 하겠으나 닷새에 한번 어떤 때는 열흘도 되고 한달이 되어도 집에를 찾아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집 의 사람들은 애당초에 식구로도 치지 아니할 만치 자기 집을 벗어난 사람이 다. 안나가 병원으로 담겨가서 하룻밤을 지낸 뒤에 군침이는 마침 노름판에 서 밑천을 아주 잘리게 되어 뒷통수를 지고 자기 집으로 노름 밑천을 변통 하러 왔다가 비로소 자기 딸이 그 모양이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안나의 어 머니는 병원에서 안나가 딴증이나 생기지 아니할까 염려하여 아침 내 옆에 서 뜬눈으로 염려하여 침대 옆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이고 집에 일이 궁금 하여 아침에 잠깐 돌아오자 마침 군침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마누라는 폭백를 퍼붓고 영감은 노름에 몸이 단 끝에 서로 어우러져서는 말다툼이 한 참 일어나는 중이다.

“여보,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집 생각을 아니한단 말이오. 나간 지가 벌 써 열흘이나 넘었는데 집에 사람이 궁금도 않더란 말이오? 잘 되었소. 밤낮 돈만 얻어오라고 성이 가시게 굴던 딸자식 하나는 아주 죽게되고 이제는 잘 되었소. 그게 다 무슨 까닭으로인 줄을 알고 있소?”

군침이는 안나가 독약을 먹었다는 통에 처음에는 가슴이 털썩 내려앉으며 몹시 놀랐으나 마누라의 폭백이 빠져나오는 통에 원래 곱지 못한 성미가 불 끈 일어나서 눈방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심술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나다니는 것이 그렇게 새삼스러워 이 야단이야? 한 집에서 밤낮 지키고 있는 것들이 독약 먹는 것도 모르고 무엇을 하고 있었어? 저희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왜 남의 탓은 해? 그년이 왜 나 때문에 그랬나? 돈 많은 부자 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낸 준 것도 잘못됐단 말이야?”

“잘했어, 잘했어, 참 시집을 잘 보내었소. 소위 양반의 딸자식을 남의 첩 으로 주고 세상에 부끄럽지도 않소?”

“첩? 먹을 것이 없으면 무엇 못할까? 다 망한 세상에 나만 그런가? 떠들 지 말어. 창피하게.”

“그래도 남 부끄러운 생각은 있나보구려.”

군침이는 성이 난 중에도 첩이라는 소리에 용기가 착 까부러졌다.

돈 천 원이나 손에 쥐어주는 통에 눈이 어두워 다만 딸 하나 있는 것을 한 치각의 첩으로 주고 나서 몇 사람의 가깝던 친구조차 비웃는 것 같아서 말 을 끊게 되고 노름판에서도 가끔 그 문제로 창피를 당하는 터이다. 마누라 의 그 말 한마디에 고만 군침이는 고개가 수그러졌다.

“그러한 쓸데없는 헛부리만 놀리지 말고 대관절 의사 말은 어떻다고 해?

죽지는 않겠단 말이지?”

군침이는 흥분되었던 마음이 차차 가라앉는데 따라서 뉘우치는 마음이 돌 아온다. 만일 죽으라고 약을 먹은 것이라 하면 그 책임은 자기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왜? 죽었으면 좋겠소?”

마누라는 군침이가 수그러지는 기색을 보더니 점점 더 기승하여지며 폭백 을 계속한다.

“어느 천지에 제 자식이 죽었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놈이 설마 있을라고?

차삯이나 있거는 내어 놓아. 병원이나 가보게. 그동안 정신이나 깨어났는 지.”

군침이는 다시 안나의 소식이 궁금하여 병원으로 얼른 갈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돈을 밤낮 벌러 다닌다면서 전차삯도 없소?”

하며 폭백을 쏟아놓던 험악한 얼굴은 어느 듯이 풀어지며 치맛자락을 들어 떨어진 귀주머니에서 십 전짜리 두 푼을 꺼내어 준다.

“나는 그럼 집안이니 치고 갈 터이니 먼저 가보구려. 광교 남쪽 천변으로 내려가면 큰 대문이 달린 병원입니다.”

“나도 자세히 알아요. ××병원이라지?”

군침은 노름 밑천을 변통할 생각은 아주 잊어버린 것처럼 마누라가 주는 이십전을 받아가지고 병원으로 향하였다.

45회 뉘우치는 마음

군침이는 애닯은 마음과 책임감을 느끼며 ××병원으로 왔다. 한 옆에 있 는 대합실에는 어린애를 앉은 여자, 목을 붕대로 감은 남자, 얼굴이 누렇게 뜬 사람들이 약병을 손에 들고 모여 들었다. 군침은 안면 신경이 굳어진 애 교 없는 간호원에게 안내를 받아서 안나가 입원한 방으로 들어왔다.

간호원은 도어를 열며 “환자가 아직 정신이 들지 아니하였으니 환자의 몸 에는 손을 대지 말도록 하시지요” 하며 밖으로 나아갔다.

군침은 흰 침대 위에 홑이불을 덮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안나의 모양을 얼 른 보매 마치 죽은 사람 같이 생각이 되어서 가슴이 덜썩 내려앉는다. 모자 를 손에 든 채로 침대 앞으로 가까이 갔다. 핏기가 다 빠진 안나의 얼굴은 두 눈을 감은 채 아무 동작이 없다. 군침은 손을 가만히 들어 안나의 코 밑 에 대어 보았다. 손등에 맞치는 안나의 숨은 있는지 마는지 하고 다만 입김 이 겨우 있을 뿐이다. 군침은 다시 손을 옮기어 안나의 맥을 짚어 보았다.

가늘고 자주 뛰는 맥박은 다행히 계속되어 있다. 군침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나의 머리를 만졌다. 병을 상징하는 열기는 조금도 없고 써느런 이마에 식은땀이 손에 끈적거린다. 군침은 고개를 축 늘이고 안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눈에는 더운 눈물이 떠오른다. 집에서 마누라에게 대개의 사정을 들었 으나 과연 안나가 잠을 자려고 약을 먹은 것인지, 아주 죽어버릴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였는지 도무지 판단을 할 수 없기에 마음이 어지러워 온다. 집 을 내던지고 처자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날마다 노름판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에 그러한 참혹한 일이 생겼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꾀이는 말 로 달래어 가며 한치각에게 내어 맡긴 것이 이러한 원인이나 되지 않았나하 는 생각도 일어난다. 안나가 점점 지각이 나면서는 자기를 때때로 원망하게 되었으나 딴 생각을 아주 먹지 못하도록 불평의 눈치가 보일 때마다 여기를 질러서 윽박질러 오던 것이 새로 마음에 걸린다.

군침이는 자기 딸에게 그러한 몹쓸 압박을 주어 얻은 것이 가지가지로 생 각이 나며 마치 예배당에서 모든 죄악을 참회하는 사람처럼 머리를 안나의 누운 앞에 숙이고 뉘우치며 있다. 이러한 불의의 참담한 일을 당하면 사람 마다 머릿속에 잠들어 있는 한 조각의 다른 마음이 움직이기 쉬운 것이나 군침이 같은 평생에 눈물을 모르고 지내어 오든 그 마비된 마음에도 가슴이 미어질 듯한 불쌍한 마음이 떠오른다. 물론 안나의 몸을 그와 같이 비참한 구멍으로 들이밀기는 자기의 바르지 못한 허욕에서 나온 것이나 자기의 마 음을 뉘우치는 한편으로는 한치각의 무책임한 태도가 다시 미워온다. 군침 이는 이러한 참회를 느끼며 우뚝한 이 걸상에 걸터 앉아서 핼쓱한 안나의 얼굴만 들여다 보고 있는 중에 도어가 열리며 흰 치료복을 입고 금테 안경 을 코허리에 걸은 의사가 쏙 들어온다. 군침이는 깜짝 놀라며 걸상에서 일 어섰다. 의사는 송충이 같은 웃수염을 움직거리며

“환자의 어르신네가 되신다지요? 별안간에 뜻밖의 일이 생기어 놀라셨겠 습니다. 아직은 큰 염려는 없습니다마는…….”

군침이는 의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렇습니다. 매우 놀랐습니다. 마침 내가 집에 없는 때여서 더욱 놀랐습 니다마는 그런데 또 선생님께 큰 수고를 끼치게 해서 미안합니다.” “별로 수고랄 것도 없지요. 의사란 원래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니까요.” 입에서 나오는 겸사의 말과는 조화되지 않는 냉정한 태도로 의사는 말한 다.

“그런데 갸가 먹은 약이 대관절 무슨 약이오리까?”

군침이는 집에서 마누라에게 대강은 들었으나 의사의 입에서 나오는 자세 한 말을 들으려고 다시 물었다.

“원래는 잠을 자게 하는 최면약이나 요사이는 자살 아니 매우 독한약이외 다.”

의사는 무심코 자살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한치각의 부탁한 말이 문뜩 머리 에 번쩍이기 때문에 말끝을 얼른 돌려 버렸다. 군침은 의사의 말뜻이 허둥 거리는 것을 보고 별안간 의심이 부쩍 생기어 의사의 얼굴을 주시하며 “그래 그 약은 잠자는 데만 먹는 것이오니까? 그런 독한 것을요?” “원래는 최면제로 쓰는 것이지요마는 분량을 잘못하면 죽기도 하지요.” “그러면 먹는 분량은 다 자세히 쓰여 있겠지요? 약병에.”

“물론 그렇지요.”

“그런데 그것을 죽도록 먹었어?”

군침이는 혼잣말 같이 중얼거리며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별안간 눈자위가 이상스럽게 변하였다.

45회 얽혀드는 여학생

안나는 입원을 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깨어나지는 아니하고 날마다 하루 몇 번씩 강심제를 주사하여 겨우 심장을 보호하고 있다. 한치각은 안나가 입원하던 그 날과 그 이튿날 저녁에 잠깐 병원을 들여다본 다음에는 날마다 한번씩 상노 만돌을 보내어 안나의 동정만 알아볼 뿐이었다. 한치각의 집 사랑에는 날마다 모이는 소위 사직병정들이 오늘도 그대로 모이어 회담과 계집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중에 빠졌던 연통 안의관이 저녁때 에 끼어들더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황황히 방으로 들어와 모자를 벗 을 사이도 없이 아랫목 안석에 기대어 앉은 한치각을 쳐다보며

“대장 오늘은 내가 큰 상을 타야할 일이 있는데 어떡하려우?”

입을 벙글거리며 희색이 가득하여 보인다. 좌중 사람들은 모두 어떤 영문 을 몰라서 물끄러미 안의관을 쳐다보는 중에 약밥 정주사가 먼저 입을 열어 “또 무슨 풍을 떨려고 저래. 내가 잘 알어. 연극의 내용을 다 알어.” “알기는 무엇을 알아? 초란이 코를 알어?”

“나는 그렇게 똑똑한 것은 처음 보았는데.”

연통 안의관은 아래턱을 손으로 문지르며 앉았다.

채플린 박주사는 장기를 두고 앉았다가 쑥 나며

“그렇지 또 풍 재료가 생긴 것이로군. 어디서 무엇을 보았단 말이야? 종 로 큰 길에서 전차가 가는 것을 보았단 말이야?”

“자네는 빠질 차롈세. 가만히 있게. 한번 보면 침이 개흐를 터이야. 대장 우리 한번 꼭 가봅시다.”

안의관이 풍을 치는 대상은 무엇이라고 말하기 전에 눈치 빠른 그들 사이 에는 벌써 짐작하게 되었다. 한치각은 비스듬이 기대 앉아서 입술 끝에 웃 음이 나타나며

“어디 그런 것이 있어? 아, 요전에 초전골서 보던 까마중이 같은 것을 말 이야? 이젤랑 그만큼 오래 하였으니 좀 똑똑한 것을 소개해. 밤낮 이류삼류 만 몰아오지 말고.”

연통은 한치각의 말에 항복치 아니한다는 태도를 보이며

“남의 흉만 보지 말고 이따가 가봅시다. 공연히 놀래지 말어요.” “이것은 제물목침(트레머리를 그들 사이에는 이렇게 말한다)인데 아주 손 때도 아니 묻은 새것이야.”

한치각은 두 눈이 가늘게 좌우고 풀리며

“아아 여학생이란 말이야? 뎀뿌라(뎀뿌라는 가짜 여학생이라는 말)란 말 이야?”

“아니 천만에 ××여학교의 4년생이라는데 이것은 참 새물 청어야. 두말 말고 있다가 탐험이나 하러 갑시다.”

한치각은 원래 새 계집이라는 말만 들으면 정신이 번쩍 하는 사람이라 지 금 연통에게 여학생이란 한 마디에 죽어가는 안나의 생각은 사라지고 거기 에 또 정신이 쏠렸다. 연통 안의관은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며 조끼 주 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인다.

“우선 선을 좀 보고 이야기 합시다. 이만하면 다시는 없지요. 사진하고 또 입을 맞추지 마오.”

한치각은 연통의 손에서 잡아 닥치듯이 사진을 빼앗아 보며 눈이 점점 풀 리어 온다.

“참 똑똑한데 그런데 집이 어디야? 대관절?”

“글쎄, 남만 앞장을 세워요. 별문제 없으니 내 뒤만 따라오구려. 그런데 이것은 좀 문제가 다르니까 연극을 잘 해야 할 것이오. 그렇게 드러내놓은 것이 아니라 재목을 고른다는데.”

연통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두커니 앉았던 약밥 정주사는

“제일 어려운 조건이로군. 처녀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사위를 고른 다? 참 수수께끼에 나올 말인데?”

약밥은 코를 실룩 거리며 비웃는다.

“남의 말을 좀 새겨 들어. 처녀의 어머니가 사위를 고른단 말이야. 참 그 래 그건 그렇다고 하고, 우리는 혼인술이나 어서 땡기도록 하여야 하겠 군.”

약밥과 연통이 말희롱질을 하는 동안에도 한치각은 사진을 이리저리 들여 다보며 빙그레 웃고 앉았다.

47회 악마의 손길

음력 그믐에 임박한 종로 네거리는 연등이 찬란하게 번쩍거리며 울긋불긋 한 깃발들이 상점 처마 끝에서 풀풀 날리고 돈이 마른 조선 시가에도 서울 경기가 와서 종종 걸음을 치는 사람의 때가 들어섰다. 해룡피의 외투 동정 을 귀 위까지 치켜올린 한치각이 종로네거리 정류장에서 전차를 내린 뒤에 는 후줄근한 임바네스를 입은 연통 안의관이 따라 내렸다. 두 사람은 공평 동 뒷골목으로 들어서서 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까도 말하였지만 이것은 현재 ××여학교를 다니는 것인데 아범은 없 고 과부의 그 모가 덕이나 좀 보려고 부자의 첩장가 곳을 찾던 것인데 너무 야단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처음에는 소곤소곤 달래야 할 걸.” 연통 안의관은 한치각에게 미리 주의를 시키다.

“또 울지는 아니할 것인가?”

한치각은 웃으며 말한다.

“나이 열여덟 살이라 하니까 설마 울기야 하겠소만. 어쨌든 초대니까 좀 달래야할 걸 하여간 잘 다뤄보구려 그러나 판에 박힌 밀가루 같이 한두 번 상관하고 내밀기는 좀 어려운데.”

“무어 돈 백 원이나 주면 그만이겠지.”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에 한치각과 연통은 이문을 넘어서 사동으 로 빠져 나왔다. 연통은 여기서부터 걸음을 재우쳐 한치각보다 앞을 서서 서동 어떤 골목으로 들어섰다. 한치각은 수십간이나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 고 뒤로 떨어져서 연통 안의관의 그림자만 주시하며 올라간다. 조금 있다가 연통 안의관은 골목 밖으로 나오더니 손짓을 하여 한치각을 부르더니 두 사 람은 골목 안에 대문이 납작한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불과 육칠간쯤 되는 모양이나 기둥이 쏠리고 마룻들이 내려앉아서 어지간히 오래된 집이 다. 컴컴한 안방 미닫이 안에서 중년 여자의 목소리로

“건너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하는 안내의 말이 들린다. 연통이 앞을 서고 한치각은 그 뒤를 따라서 방으 로 들어갔다. 단칸 방에는 윗목에 시꺼먼 옛장롱이 놓이고 아랫목 창밑에는 좁다란 책상이 놓여 그 위에는 여학교 교과서가 쌓여 있다. 두 사람이 들어 서마자 주인 마누라는 안의관을 불러내어 무어라고 하는지 수군수군하고 있 더니 연통의 목소리로

“아따 부사 한승지집 모르시오? 사직골 있는 그로 그의 아들 되는 한참봉 이예요. 염려 마시오. 내가 담보할 터이니.”

이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안의관이 건넌방으로 들어온다. 오래 얼마안 있다 가 문이 열리며

“들어가 뵈어라. 학교에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우냐?”

주인 마누라의 소리와 함께 검정 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은 날씬한 여학 생이 들어왔다. 한치각은 아랫목에 웅크리고 앉았다가 자리를 피하며 “이리로 들어오구려.”

하며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들어온 여학생의 키는 날씬하나 신체는 한치각 의 딸만치 발달이 되지 못하여 보인다. 앉지도 않고 문 옆에 섰는 여학생은 안의관은 치마를 잡어 다니며

“저 아랫목으로 내려가구려. 학생이라면서 저렇게 부끄럼타서 어떻게 선 생한테 글을 배운단 말이요?”

여학생은 한참 방색을 하다가 한치각의 옆으로 할 수 없이 걸어가서 앉았 다. 전등불은 마주대한 여학생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취하여 두 뺨에는 불그 레한 도화색이 떠올랐다. 한치각은 여학생의 흥분된 얼굴이 마주치매 말할 수 없는 육감이 일어난다. 한치각의 손은 여학생의 몸으로 차차 가까이 접 촉하기 시작한다. 여학생의 치마에 손을 대었다가 다시 옮기어 그 무릎으로 나중에는 뺨으로 그의 손길은 악마의 손톱 같이 여학생의 곱고 정한 육체로 점점 지어 들어간다.

한치각의 손이 몸에 닿을 적마다 여학생은 몸을 소스라치며 피한다. 몇십 명이나 몇백 명의 귀한 정조를 유린하던 한치각의 손은 또 악착하게 피어나 는 꽃봉오리를 꺾으려 한다. 한치각은 몸에 침이 마르도록 마음이 흥분되어 두 눈은 실낱 같이 가늘어진다.

“그래 어느 학교요? 다니는 데가? 공부 잘 하오?”

한치각은 말을 시켜보려고 여학생의 무릎을 툭툭 치며 묻는다. 그러나 여 학생은 쪼인 병아리처럼 구석으로 몸을 피하여 아무 말이 없다. 조금 있다 가 안통 안의관은 벌떡 일어서며

“담배나 한 갑 사와야겠군” 하며 밖으로 나간다.

여학생은 몸은 전신이 육감에 떨리는 한치각의 앞에 홀로 놓였다.

48회 가련한 과부의 딸

연통 안의관은 과연 큰 발견을 하였다. 한치각은 안의관에게 안내를 받아 서 여학생을 한번 본 뒤에는 원래가 여성이라면 눈에 황홀하여지는 사람이 라 한치각은 그 여학생이 첫눈에 들게 되어 그의 특성이라 할까 어쨌든 그 의 항상 여성에 대한 강렬한 충동이 또 여지없이 그의 정신 전부를 지배하 게 되었다. 키가 작고 얼굴은 조금 가름한 편이나 오똑한 코와 은행 껍질이 가로 놓인 듯한 두 눈과 가무스름하고 긴 속눈썹 사이에서 영채있게 구르는 눈맵시가 한치각의 마음을 여지 없이 빼앗게 되었다. 한치각은 기름 냄새를 맡은 고양이처럼 밤이면 자정이 넘도록 여학생의 신변을 노리며 좁고 구중 중한 그 건넌방에서 보금자리를 치고 있다. 이 여학생은 한치각의 사랑 사 람들의 입에서 떠도는 뎀뿌라 여학생은 아니다. ××여학교를 이 봄에 마치 고 장차 조선 여자계의 새로운 여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할 소질을 얻 게 된 여성의 한 사람이다. 한치각이 만일 가정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 같으 면 자기 딸이 다니는 학교의 학예회나 운동회 같은 데에서 자기의 딸과 같 이 어깨를 한데 대이고 학교 마당을 왕래하는 그 여학생의 모양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질의 교육은 고사하고 여성과 술의 냄새가 없는 곳 에는 도무지 인연이 끊어진 그는 일찍이 ××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 으므로 안의관이 소개하기 전에는 그 여학생을 볼 기회는 없었다. 한치각은 그 여학생이 자기 딸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철저한 색 마성을 가진 한치각에게는 그 우연치 아니한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에도 순 간적으로 마음에 어떠한 체면의 권리는 그림자가 슬쩍 지나갔을 뿐이요. 한 치각의 불 같은 욕정은 가속도로 진행을 하고 있을 뿐이다.

화류병의 모든 독균이 체내에서 춤을 추고 있는 한치각의 독한 손에 걸리 게 된 여학생은 세상에 둘도 없는 과부의 유복녀로 태어나서 그의 어머니가 이집 저집으로 어린 것을 끼고 돌아다니며 침모 노릇을 하여 키운 딸이다.

보통학교를 졸업시킨 다음에는 차차 처녀의 모양이 바뀌게 되어 잠자리도 불편한 남의 집으로만 데리고 다닐 수도 없게 되어 ××여학교에 입학을 시 키면서는 애면글면하여 모았던 밑천으로 집을 얻어 가지고 독립한 살림을 하게 된 것이나 원래가 밑천이 넉넉지 못한 과부이라 딸이 학교에 가면 그 의 어머니는 문을 잠그고 역시 남의 집 바느질로 품을 팔아서 학교의 모든 치다꺼리를 하여온 것이다.

이와 같이 유복녀를 약한 과부의 외손으로 키우는 동안에는 그의 어머니의 고독하고 가련한 생활 속에는 하염없는 눈물과 무거운 한숨이 어리었었다.

따라서 모든 촉망을 그 딸에게 바치어 세월을 보내어 왔다. 그러나 그 어머 니의 촉망은 그다지 크지는 못하였다. 다만 자기 늘그막에 몸을 편하게 쉴 만한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안온한 생활을 하자는 것이 그의 큰 목적이다.

그런 생각이 앞을 서서 자기 딸이 차차 학교를 졸업하게 됨에 사위 재목을 고르려고 이곳 저곳에 말을 던져 둔 것이다. 그의 어머니의 사위를 구하는 표준은 형색만 있으면 초혼은 물론이요 그렇게 않으면 천량이 덤썩 있는 남 의 재취로라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십여 년 동안을 두고 남의 집 침모로 돌아다니던 그의 생각은 이러한 단순한 욕망을 벗어나서 테 밖에 있는 사회를 생각할 여지는 없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사위를 고르는 중이나 연통 안의관이 소개한 한치각 은 물질의 조건만은 풍부하다 할지나 그의 어머니가 생각하는 혼인이라는 의미로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한치각은 물론 자기의 일시적 정욕을 채울 한 희롱거리로 생각하고 덤빈 터이라 혼인이나 재취장가니 하는 거북살스러 운 문제는 염두에도 두지 아니한다. 서로 혼인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 도 그것을 한치각의 넷째 첩이라는 명목으로 집이나 한 채 얻어가지면 큰 성공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 딸의 순결한 처녀 몸에 무서운 화류병의 독 균만 받아들인 다음에 돈 몇 백원에 다시 어쩔 수 없는 벌레 먹은 꽃이 되 고 말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일생 공 바치며 길러 낸 자기 딸이 한치각의 이러한 마수에 걸린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날마다 드나드는 안의관의 풍 치는 소리에 모든 정신이 돈 그림자를 따라서 황홀하게 비칠 뿐이다. 다른 신여성들을 타락의 구멍에 몰아놓던 돈의 환영이 세상을 모르는 가련한 과 부의 눈에 번해진다.

49회 돈으로 얼어매

무서운 색마인 한치각의 손에 잡히어 마치 배암에게 다리를 물린 개구리처 럼 순결한 처녀의 몸이 각각으로 녹아들어가며 날카로운 색마의 이빨에 나 긋나긋한 허리로 가슴으로 박혀 드는 참혹한 희생의 앞에서 춤추는 그 여학 생은 ××여학교의 사 년 동안을 다니게 되었기 때문에 황숙자라하면 일반 학생은 다 알 뿐 아니라 그 중에 책상을 나란히 하고 가까이 앉았는 한치각 의 딸인 한복희하고는 날마다 한 반에서 얼굴을 대하느니만큼 더욱 숙친한 사이다. 그러나 한치각의 집은 구식 가정을 그대로 계속하여 지내는 집이라 자녀들은 학교에는 보내도 같은 학교 동무끼리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는 한승지는 손녀의 신변에 아무쪼록 다른 여학생들과 상종 에 없도록 단속하고 있는 까닭에 황숙자와 한복희 사이에도 서로 가정의 왕 래가 없는 터이다. 따라서 황숙자는 요사이 자기 집에 오게 된 한참봉이 한 복희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전연히 알 기회가 없었다. 황숙자의 어머니 되 는 오과부는 일찍이 자기 남편을 이별한 뒤에는 가까운 친척도 없고 또 고 독한 고아 과부를 위하여 돌보아줄 친지도 적었다. 자기 남편의 먼 촌 일가 라고 가끔 찾아오는 황치삼이라는 중년 남자 하나가 있으나 상당한 직업도 없이 시골로 서울로 돌아다니며 토지중개나 하는 말하고 보면 천량 만량을 입으로 부르며 주머니에는 돈 한 푼 없이 탑골공원을 사랑삼아 늘어 앉았는 난봉패의 한 사람이나 고적을 느끼는 오과부는 탐탁하게는 생각지 아니하지 만은 발 널리 사방으로 다니는 것을 잘 아는 터이라 어느 날 지나는 말 같 이 자기 딸 숙자의 혼처 이야기를 한 것이 연줄을 따라 필경은 한치각을 연 통 안의관이 소개한 것이다. 오과부는 한치각이 한번 선을 본 뒤에 밤마다 찾아와서 너무나 난잡하게 자기 딸을 다루는 눈치를 보고 한편으로는 의심 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과부의 몸으로 정절을 지켜오던 오과부는 밤마다 한 치각이 와서 건넌방에서 잡담을 하며 보금자리를 치고 있는 것을 마음에 불 유쾌하게 생각하는 한편으로는 한참봉이라는 사람이 과연 장가들 사람인가 를 의심하게 되어 될 수 있는 대로 한치각의 옆에는 숙자를 가까이 하지 않 도록 주의를 하던 터에 어디서인지 술이 얼근히 취한 연통 안의관이 들어왔 다. 마당에서 기침소리를 내며

“우리 수양딸이 저녁을 먹었나? 오늘은 석달 그믐날 밤인데 왜 이렇게 불 도 안 켜놓고 캄캄해. 이 집은 제례를 하나? 수양따님 황숙자양. 하, 내가 오늘은 세찬을 많이 가지고 오는데.”

마당을 들어서며 부러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안방에서 마침 밥상을 받고 모녀 두 사람이 저녁밥을 먹다가 오과부가 미닫이를 열며

“마침 잘 오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오늘은 좀 보이려 하였는데요.

건넌방으로 들어가시지요.”

“마님이 나를 보시고 싶을 리야 있겠습니까마는 한참봉이 보고 싶으시겠 지요. 한참봉은 참 사위감으로는 이 세상에서 단벌이지요. 조선에서는 다시 없습니다. 첫째 돈이 많고요 또 성품이 곱고요 집채도 좋고요 외양이며 남 자가 아닙니까? 내가 딸이 없는 것이 큰 유감입니다. 그런 사위 재목은 또 다시 없지요. 해가 바뀌거든 아주 실행을 해버리지요.”

안의관은 혼잣말을 늘어놓고 건넌방으로 들어간다.

오과부는 먹던 밥을 마치고 건넌방으로 안의관을 찾게 되었다.

“날이 별안간에 또 추워집니다그려. 그런데 여러 번 말씀은 들었습니다마 는 한참봉께서 정말로 장가를 들 의향이 계신가요? 나 보기에는 그런 장래 의 생각은 아니하시는 것 같은데요.”

오과부는 마루로 통한 장짓문을 등지고 앉아서 치마 끝을 손으로 훑으며 말을 내인다. 연통 안의관의 의외의 말을 들은 듯이 시뻘건 얼굴을 내두르 며

“원 천만에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 사람은 여기서 공부를 한 사람도 아 니요, 서양서 학문을 닦아 체면을 지키는 사람인데 혼인할 생각이 만일 없 다하면 애당초에 이 집에를 두 번도 아니올 사람입니다. 그런 걱정은 두 번 도 마시고 이거나 좀 받으시오. 한참봉이 보내는 세찬이 올시다.” 하며 연통 안의관은 네모가 진 서양봉투를 내어 놓았다.

50회 무서운 세찬

오과부는 연통 안의관이 세찬이라고 하며 자기 앞에 내어놓는 흰봉투를 보 고 마음이 섬뜩하여졌다. 자세히는 세찬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 속에 든 것 이 돈일 터인데 돈과 자기 딸을 연결하여 생각하면 그 돈이 자기 딸을 잡어 메는 줄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번쩍 떠올라 왔다.

그래서 “그것이 무업니까?” 하며 오과부는 봉투에 시선을 던졌다.

“이거요? 세찬이지요. 왜 세찬은 먹는 것만 보내는 법인가요? 한참봉이 마음먹고 보내는 것이니 받아 두십시오그려. 세찬은 아는 사람 사이에는 다 주고 받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봉투 속에는 댁 같은 조붓한 식구로는 몇 해나 설을 쇨 돈이 들었습니다. 우리 같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큰 돈이지만은 한참봉의 돈쓰는 푼수로 말하면 그저 몇 푼에 지나지 않는 돈이지요.”

안의관은 어쨌든 한치각의 돈 많다는 자랑은 하여 돈에 평생을 주리던 오 과부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생각한다. 오과부는 정색을 하며

“돈이야요?”

“네 돈입니다.”

“더구나 돈 같은 것을 무슨 명목으로 지금 받습니까? 모처럼 보내신 것이 지만은 그대로 도로 갖다 전하시지요.”

하며 오과부의 말끝은 힘이 맺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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