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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김정진 독와사 [2]

by 워낙3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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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지매는 설마 한치각이가 삼월오복점에 와서 있기는 생각밖이었고 또 그뿐만 아니라 몇 시간 전에 자기 어머니가 사과를 하러 온 심참봉에게 자기가 한치각에게 맞아 옆구리가 결려 병원에까지 갔다고 불쾌한 말을 하 여 보냈는데 천만 의외에 이곳에서 한치각을 피치 못할 만치 가까운 거리에 서 만나게 되니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격으로 일지매는 한치각과 시선이 정면충돌할 때에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놀람을 느끼었 다.

그러나 일지매의 이러한 양심의 충동은 순간에 스러지고 그다음에는 다시 이러한 대담한 기분이 그의 머릿속으로 쏙 올라오며 “생각대로 하라지. 기 생의 행동이 그렇게 또박또박 정말만 있을 수야 있나!” 하며 한편으로는 한치각에 대한 생각이 한 자포에 비스름한 태도로 변하였다.

남주사는 한치각의 말소리에 고개를 돌이켜 보았으나 저편에 섰는 그 상대 자가 누구인지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일지매의 옆구리를 툭 치며 야진 목소리로

“그게 누구야? 꽤 하이칼란데.”

일지매는 얼굴을 남주사의 편으로 가까이 대어

“한치각, 한참봉…….”

“응. 저것이 유명한 하꾸라이 부랑자로군. 오라.”

남주사의 말소리가 차차 커가는 듯함을 염려하여

“여보, 다 들리우.”

“들리면 어때. 상관 있나. 세상이 다 하꾸라이 부랑자라는 걸, 내가 첨하 는 말인가.”

일지매는 남주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글쎄, 다 들린대도 그래요.”

“들리면 어때. 그런데 왜 형사모양으로 남의 뒤만 따라다녀. 일이 없거든 보석반지 진열한 것이나 들여다보고 섰지. 아래 입술을 축 쳐들이고 오천 원짜리 보석 반지나 들여다보고 있지.”

남주사의 오조와 그 태도는 어디까지 상대자인 한치각을 냉소하고 있다.

맞은편에서 점원과 같이 넥타이를 고르며 섰는 한치각은 때때로 얼굴을 들 어 남주사와 일지매의 행동을 엿보고 있다. 진열장과 진열장 사이에 고객이 다니는 한 간밖에 아니 되는 그 중간의 통로를 격하여 남주사의 기탄없는 말소리는 단속적으로 한치각의 귀에 들린다.

그러나 한치각이를 하꾸라이 부랑자라고 한 말은 다행히 그 당자의 귀에는 들리지 아니하였다. 한치각은 조금 전에 흥검을 떨어가며 심참봉이 이야기 하던 일지매의 사실이 하도 엉터리없는 거짓말임을 알게 된 후에는 어림없 이 치료하라고 일백오십 원이나 보낸 것이 아까운 생각이 날 뿐이 아니라 한 편으로는 심참봉을 의심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그러한 신용없는 일은 아 니하던 심참봉이지마는 요사이 같이 효박한 세상에 또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만일 심참봉이 중간에 서서 이러한 연극을 꾸미어 일백오십 원을 자 기가 먹자는 것이나 아닌가하고 한치각의 마음은 여러 방면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남주사라는 애송이 부랑자가 일지매를 데리고 있는 자리에서 다시 여러 번 일지매에게 말을 던지는 것이 정 아니꼬운 생각도 있어서 심참봉의 전하던 말과는 사뭇 틀리지마는 하여간 그 하회는 심참봉이 오기만 기다리 고 다만 남주사와 일지매가 장차 어떠한 목도리를 사나하고 냉소와 질투와 또 약간의 애착도 있는 여러 가지 충동에 한치각이를 그 맞은편에서 용이히 떠나지 않게 한다.

남주사와 일지매는 털목도리를 고르는 중에 생각지 아니한 한치각이 때문 에 흥정이 잠시 중지되었다. 여점원은 다시 육백오십 원짜리인 은여우털을 들어서 전등 앞으로 내밀며 “여우털 중에서는 이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서양서도 귀부인이나 부호부인들은 모두 이것을 살라고 합니다. 이왕 사시 면 이것을 쓰시지요.”

남주사는 처음부터 점원의 행동이 자기를 업수이 여기는 것처럼 보이어서 마음이 흥분되는 중에 또 맞은편에는 일지매를 중간에 두고 돈으로 승리를 다루게 된 한치각이가 비웃는 말을 던지고 있게 되어 남주사의 마음은 극도 로 긴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화류계에서는 놓치기 어려운 좋은 찬스의 하나 이다. 남주사의 마음은 지금 ○앞에서는 돈의 다소를 의논할 여지가 없도록 호활한 환경에 싸였다.

“이럼, 우리 이 은여우털로 하지.”

남주사는 대담하게 말하였다. 이 소리에 여점원은 깜짝 놀랐다.

18회 깡크단

심참봉은 한치각에게 돈 일백오십 원을 넣은 양봉투를 받아서 조끼 주머니 에 넣고 일본 음식점 눈을 나섰다. 자기 주머니 속에 든 돈은 불과 몇 분 동안이 지나면 일지매의 늙은 어머니의 주름살 잡힌 손으로 곧 건너갈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마는 여러 해 동안을 두고 십 원짜리 한 장이 자기 주머 니에 담겨본 일이 없는 심참봉은 공연히 마음이 든든한 것 같은 생각이 나 서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호주머니부리가 떨어진 인조견조끼에 가끔 손을 내어 만져본다. 서슬이 날카로운 양봉투 모서리가 손가락 끝에 까치하며 닿 을 때마다 가벼운 만족을 느낀다. ‘일백오십 원! 이것만 가졌으면 당분간 자기의 군색은 조금 피일 터인데, 우선 쌀이나 한가마니 팔고 날마다 억파 듯이 조르는 사글세 돈이나 몇 달치 주었으면. 또 외투나 한 벌 사 입었으 면…….’ 하는 여러 가지의 공상을 머릿속에 그리며 다옥정으로 걸음을 옮 기어 온다.

심참봉은 이러한 공상을 계속하다가 별안간 그 전날 신문에 굉장히 떠들어 낸 동경 ‘깡크단’ 사건이 머릿속에 떠올라온다. 수십 명 은행원들이 사무 들 보고 있는 그 은행은 백주에 들이쳐서 지전뭉치를 강탈한 그 현장의 광 경을 상상하여 또 손을 호주머니에 넣어 양봉투를 만져보았다.

“이 돈은 부자의 아들이 술주정 값으로 보내는 돈이다. 이것이 그에게 반 드시 필요한 돈일까? 말하고 보면 일지매의 순간적 호감을 사는 것 밖에는 다른 사명을 가지지 아니한 돈이다. 이것을 설령 내가 쓴다 하더라더 ‘깡 크’와 같은 대담한 강도는 아니될 터이지. 이 돈은 지금 내 호주머니에 들 어있는 돈, 지금 이 순간에는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돈이 아닌가. 중간 에서 잘라먹고 한치각의 집을 아주 하직해 버려? 그러나 아주 죄명을 쓰기 에는 너무나 금액이 적어. 이것이 만일 일천오백 원이나 된다면 한 몫 가지 고 정처 없이 도망이나 할 터인데.”

이러한 생각이 심참봉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계속 되는 동안에 그의 발씨 익은 걸음은 부자중에 황금정 네거리 전찻길에 당도하였다. 심참봉의 귀 옆 에서 별안간에 ‘땡땡땡’ 전차의 경적이 귀를 찌르며 “여보. 이건 취했 나?” 하는 운전수의 볼멘 호령이 들린다. 심참봉은 깜짝 놀라며 뒤로 흠칫 물러섰다. 승객을 가득히 실은 전차는 심참봉의 발뿌리를 삿칫하고 지났다.

그의 계속 하던 여러 가지 공상은 일시에 사라졌다.

심참봉은 전차소리에 정신이 번쩍 깨어 한치각의 급히 다녀오라는 부탁대 로 비로소 걸음을 재우치며 일지매의 집으로 들어왔다. 일지매의 집에는 사 람들이 벌써 다 자는지 기척이 없고 다만 안방 미닫이에서 비치는 전등불빛 이 희미하게 뜰 위에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심참봉은 크게 기침을 한번 하 고

“일지매가 병원에서 왔나?” 하면서 뜰로 올라섰다.

안방 아랫목에 장죽을 가로물고 누웠던 일지매의 모는 심참봉의 기침소리 에 번쩍 일어나서 유리구멍으로 내어다보며 “거기, 누구요.”

“심참봉이요.”

“오늘은 어드래 이렇게 재우 다니오” 하며 일지매의 모든 미닫이를 열었 다.

“일이 있으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다니지, 왜. 내가 오는 것은 못쓰겠 소?”

심참봉은 들어오라는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일지매는 병원에서 여태 아니 왔소.”

“나도 모르겠소.”

“모르다니. 아까 병원에 갔다고 그러지 않았소. 나는 그 소리를 듣고 한 참봉에게 가서 어젯밤 일은 어떻게 되든지 우선 치료비라도 보내라고 말하 였더니 한참봉은 깜짝 놀라며 매우 미안하다고…….”

심참봉의 말이 채 끝도 나기 전에 일지매의 모든 굵다란 주름이 한편으로 몰리는 눈초리를 실쭉 치올리며

“한참봉은 어떤 만 사람이게 남의 애를 지고도 말뿐이란 말이요” 하며 심참봉을 쏘아본다.

“아니요. 내 말을 좀 다 듣고 말을 하구려. 그래서 우선 이것은 치료비라 도 하라고 보냅니다.”

심참봉은 양봉투를 조끼에서 꺼냈다. 일지매의 모는 그 봉투를 보더니 치 달리었는 눈초리는 어느 사이에 나려 왔는지 가늘게 좌우로 수평선을 지으 며 양미간에 잔뜩 모였든 주름살까지 일시에 홱 풀어졌다.

“그렇게 심참봉을 우리 딸애도 조마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지? 하하.” 기다란 인중이 상하로 움직이며 일지매의 모는 너털웃음을 내놓는다.

19회 임시처변

심참봉은 조끼주머니에 들어있는 돈 일백오십 원을 양봉투 속에 넣은 채 그대로 꺼내어 일지매의 어머니 앞에 놓았다. 그는 일백오십 원을 잠시 맡 아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공상을 일으킨만큼 그의 마음에는 그 돈에 대한 관심이 없지 아니하였다. 물론 그 돈이 자기의 것이 아닌 것도 인식치 않는 바는 아니지마는 하여간 내 몸에 백 원이 넘는 돈이 지니어 있는 것은 사실 이었다.

심참봉은 그 봉투를 꺼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유 모르는 섭섭한 생각이 나 서 봉투의 한모퉁이를 손끝에 잡은 채로

“이 속에 백 원짜리 한 장과 십 원짜리 다섯 장이 들어 합하여 일백오십 원이니 자세히 받아두구려."

하며 심참봉은 겨우 그 봉투를 방바닥에 놓았다. 일지매의 모는 일백오십 원이라는 소리를 듣더니 담뱃대 옥물초리에 검흘러내리는 침방울이 장판위 에 뚝 떨어지며 뻐드러진 잇새로는 저절로 웃음 끝이 쏟아져 나온다.

“일백오십 원? 그럼 얼마동안 병원에 다니는 약값은 되겠고만. 그러나 얼 른 낫기나 하였으면 좋을 터인데.”

일지매의 어머니는 속으로는 우연히 한 연극이 차차 맞아들어 오는 구나하 는 생각을 하며 더욱이 뒤를 두어 나중에 또 계속적으로 연극을 연하여 꾸 려고 의미 있는 뒷말을 남겨 놓았다.

“그런데 대관절 일지매는 어느 병원으로 갔기에 여태까지 아니온단 말이 요.”

심참봉은 다소간 일지매의 행동이 이상스럽게 생각이 되어 또 그와 같이 물어본 것이다. 일지매의 모는 엉터리없는 거짓말을 하여 당장에 일백오십 원이라는 돈이 굴러들어왔기는 하였으나 만일 이 자리에 그 연극의 이면이 폭로가 되면 일시에 창피한 꼴을 당할 것은 고사하고 일껏 애를 써서 수중 에 휘어잡은 한치각의 돈줄을 놓칠까 염려하여 일지매의 행동을 자기의 입 으로 분명히 말하는 것이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글쎄, 나도 자세히 모르겠소. 늘 다니는 병원이 있지마는 오늘도 그 병 원으로 갔는지 또 다른 데로 보러갔는지 내가 모르겠소. 그런데 심참봉! 들 어올 때에 골목 밖에서 뉘라 만나지 않았소?”

일지매의 모는 자기딸과 남주사가 나간 지 얼마 아니되어 심참봉이 들어온 지라. 그 중간에서 서로 막질리지나 아니했나하는 염려가 나서 심참봉의 얼 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 그건 왜 묻소?”

“아니오. 애가 오래 돌아오지 않기에 행랑어멈을 골목밖에 내어보내어 오 는 것을 보라고 했더랬는데 그럼 못 만난 것이요”하며 일지매의 모는 또 엉터리없는 임시변통의 말을 꾸며 내며 심참봉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심참봉은 아무런 다른 표정도 없이 심상한 태도로

“아니 어멈도 못 보았는데, 요새 밤은 원체 어두우니까 누가 걷더라도 잘 알 수 있나. 그런데 일지매가 돌아오면 잠깐만 하고 갈 이야기가 있는데.” “글쎄, 어느 때 돌아올는지 모르겠수다.”

“그럼, 늘 다니는 병원은 어디요? 그리 전화나 하여 보게 병원 이름은 알 우?”

“아따. 그게 무슨 병원이라든가? 요새는 늙어서 한번 들은 것은 고대 잊 어버리게 되여.”

일지매의 모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어리숭하게 꾸며버렸다. 심참봉은 일 지매와 마치 숨박꼭질를 하듯이 나가자 들어가고 들어가자 나가고 하기 때 문에 일지매가 지금 삼월오복점에서 털목도리를 사다가 한치각과 정면충돌 이 된 것 그 기괴한 인연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가? 공연히 일지매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 “일지매는 조만해 안 돌아올 것이외다. 병원에서 바로 올는지도 모르 고…….”

“그럼, 나는 돌아가겠소. 하여간 아까 치마감은 물건이었으니까 그대로 두고 갔지만 이 돈은 무엇이라고 받은 표적을 해주구려. 일지매나 있었으면 같이 데리고 가서 인사나 하면 고만이 될 것인데.”

“무얼 그다지 구오. 설마 한참봉이 그것 의심하겠소. 심참봉을 항상 신용 하는데.”

“그렇지만 돈이라는 것은 분명히 해야지.”

“달게 구지 마소. 내가 어디매 글자 쓸 수 있게? 내 다음에 한참봉을 만 나거든 말하리다. 아모 일 없소이다.”

심참봉은 마음에 조금 미안하나 무식한 그의 사정을 도리어 동정하여 “그럼 돈이나 자세히 세어 보우.”

하며 노랑 장판 위에 하얀 저 네모진 흔적을 나타낸 양봉투를 심참봉은 다 시 들여다보았다.

20회 돈과 자애

한치각은 대관절 어떠한 인물인가? 그가 날마다 계속하는 생활의 전부를 보더라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 같이 분명한 생활의 의식을 가졌 다고는 보이지 아니하지만 하여간 하루이틀이 아니요, 벌써 그러한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여 온 지가 사오년 동안이 될 뿐더러 앞으로도 또 얼마나 길 게 그러한 생활을 계속할는지 추측키 어여울 만치 그의 자각은 보이지 않는 다. 철저하게 나가는 그의 요사이 방탕한 태도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정도를 따라서 좌우될 것이라고 볼만치 계속 적이다.

그는 돈 있는 양반의 아들들이 밟아오는 그 전례에 벗어나지 아니하고 어 렸을 때에는 집에 독선생을 두고 한문자나 읽다가 열세살 때에 장가를 들고 보니 나이는 아주 어린아이나 그의 아버지 되는 한승지는 자기의 아들을 초 립을 씌워놓고는 인제는 다 길렀거니하는 생각으로 방임하여 내버려두었고 한편으로 한치각도 어린 생각에 어른들과 같이 상투를 짜고 보고 세상을 만 난 것처럼 함부로 날뛰게 되어 그러는 동안에 사랑에 모였던 소위 객이라는 자들은 어느덧 철모르는 한치각을 꼬여가지고 기생집 출입을 하기 시작하였 다. 이러한 동지가 한치각을 드디어 그 방탕한 생활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그가 열다섯 살 되는 해부터 자기 아버지 돈궤에서 돈을 몰래 집어내기 시 작하여 스무 살 되던 때에는 서울 기생방에서는 젊은 돈덩이라고 환영을 하 였었다.

그러는 동안에 한치각의 자만스러운 태도는 점점 늘어가고 그의 주위에 따 라다니던 문객과 하인들은 한치각의 말이라면 누구하나 그것을 반대하는 사 람이 없었다. 그가 스물여덟 살이 되던 어떤 봄에 위력과 돈의 힘만 믿고 동대문 밖에 사는 어떤 행세하는 집 딸이 학교에서 오는 것을 붙잡아 가지 고 문객들과 같이 억지로 처녀를 침범한 것이 결국은 탄로가 나서 상대자인 여학생의 부친은 체면을 불고하고 큰 시비를 하여보려고 날뛰는 통에 돈으 로는 뒷갈망이 아니되어 한치각은 그만 하루저녁에 자기 아버지가 작전하여 둔 수만 원의 지전뭉치를 훔쳐 가지고 미국으로 도망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어떠한 일부에서도 알게 되었지마는 그의 집에서는 미 국으로 유학을 보내었다고 선전을 하여 한치각의 모든 죄악이다 파묻히는 미국유학생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치각은 원래가 자만과 호강 을 자라난 사람이라 어디를 간들 그의 관습에 젖은 행동은 용이히 고치기 어려웠다. 미국 있는 동안에도 그곳에서 약간 만나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는 어느덧 그의 태도가 건방지다고 하는 소문이 나서 자연 그 총중에도 못살게 되어 미국 어떠한 지방으로 도망질을 하다시피 하여 떨어져갔다. 그래서 몇 해 동안은 지내는 중에 그 지방에 있는 ××대학에 학적을 주었으나 몇해 동안을 있어도 미국말 한 마디를 성실히 연구하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학교엔들 성심이 있을 터가 없었다.

한달에 한번씩 학비를 보내라는 편지의 한 재료가 되었을 뿐이었다. 학교 에 다닙네하는 편지가 올 때마다 자기 아버지는 반가운 것보다 가슴이 턱턱 막히게 될 만한 천 원 이천 원씩 보내라는 통지가 왔다.

한푼에 치를 떠는 그의 아버지는 편지를 손에 쥐고 부르르 떨며 “이젠 돈 을 이천 원씩이나 보내라 해, 남의 자식은 유학을 해도 한달에 일백오십원 이면 족히 쓴다는데 참 철모르는 자식이로군” 하며 며칠씩 끙끙 앓고 있다 가는 부득이 보내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돈을 십만 원에 가까운 큰 액수가 소비되었고 결국 얻어가 지고 돌아온 것은 석판인쇄로 백인 꼬불꼬불한 글자가 가로 횡렬한 소위 졸 업장이라는 것을 들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조금도 필요가 없다. 실지에 있 어서 자기 아들을 사회에 내어보내어 그 졸업장으로 돈을 벌게 할 필요도 없고 다만 그 중에 한가지 마음에 기쁜 것은 다달이 수천 원씩 보내라는 편 지가 아니 오게 된 것만 마음에 퍽 시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한치각은 미국에 유학을 하였으니 인제는 사람이 좀 착실하여졌을 터이지 하는 다음에 바라고 있던 희망은 불과 며칠 동안에 끊 어버렸다. 한치각이가 돌아온 지 불과 몇 달이 아니되어 또 전 같은 방탕한 생활에 흘려서 일년에 수만 원씩 헛돈을 내어버리게 되여 또다시 입맛을 다 시게 되었다. 그러나 돈을 귀하게 아는 한편으로 더욱 한층 더 깊은 자애를 가진 한승지는 돈으로 하여 자기의 외아들인 한치각을 애정밖에 둘 수는 없 었다.

21회 자존심

삼월오복점 삼층에서 공교롭게 남주사와 한치각이가 서로 만나서 일지매를 중간에 두고 시기와 냉소가 말없는 중에 서로 왕래하는 이상한 장면을 이루 었었다. 이러한 장면을 보통으로 말하자면 삼각연애의 충돌이라고 하겠으나 이 세 사람 사이에는 ‘연애’라는 용어가 값이 없을 만치 물질에 기루도진 장면이었다.

남주사는 널따란 가죽 지갑에서 손이 베일 듯한 새 백 원짜리 지전을 꺼내 어 일곱 장을 세어 여점원에게 주었다. 여점원은 돈을 받으며 남주사를 다 시 한 번 쳐다보았다. 이러한 선선한 광경을 그 맞은편에서 보고 섰는 한치 각은 입가에 냉소가 가득한 웃음이 흐르면서도 마음에는 업신여기기 어려운 한 강적이라는 느낌을 일으키었다.

일지매는 사오십 원짜리되는 보통 여우털목도리나 하나 울궈내려 한 것이 의외의 육백오십 원이나 되는 상품을 사게 되어 마음에는 좋고 또 한편으로 는 무엇에나 놀란 것같이 가슴이 가볍게 울렁거렸다. 남주사가 그 많은 목 도리 중에서 일부러 가장 비싼 물건을 골라서 사주는 것은 자기의 환심을 끌려는 데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어니와 또 한편으로는 건너편에서 연해 냉 소를 던지고 있는 한치각에게 호기스러운 기색을 한번 보이자는 남주사의 청년 기분이 동기가 된 것도 일지매는 물론 짐작한다. 그러나 일지매는 어 느 편으로 보던지 그것을 굳이 말로 할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어머니가 항상 말하는 ‘기생은 한때란다’ 하는 그 ‘찬스’ 같은 것을 구태여 박찰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지매는 다만 이면치레로 “그런 비싼 것은 사서 무얼 하오. 보통 여우털도 좋은데” 하며 남주사에게 만류하는 말을 비추었으나 그 말에 남 주사가 정지할 리는 없겠다.

도리어 남주사는 푹 찌르는 어조로 “은여우털이길래 사지.”

얼굴을 돌이켜 한치각의 편을 보았다. 그러나 한치각은 어느 틈에 그자리를 떠나고 행적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일지매는 우선 육백오십 원짜리 털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남주사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듯이 바짝 대이고 호기 있게 본정통으로 행하였다. 한치각은 남 주사와 일지매가 호기스럽게 털목도리 사는 것을 보고 속마음에는 ‘미친 자식’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다소간 남주사의 돈 쓰는 호기에는 적지 아니한 위압을 느끼었다. 한치각이 육백 원이라는 돈머리에 눌린 것은 물론 아니 다. 수천 원이나 수만 원을 쓸 수 있지만은 원래 성질이 잘게 된 사람이라 그렇게 한몫에 쾌활하게 써본 때는 없었다. 일지매의 치료비로 일백오십 원 이라는 돈을 보낸 것도 소위 오입쟁이의 호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 다. 그 동기로 말하면 창피한 법률문제가 또 생길까 염려하여 보낸 것이다.

한치각은 그 자리를 피하여 사층으로 올라와서 식당 옆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심참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치각은 눈앞에 기고만장하게 날 뛰는 남주사의 태도와 그 옆에 붙어서서 아른대며 아양을 떨던 일지매의 꼴 이 얄밉기도 하고 괘씸하게 보이어 말할 수 없는 불유쾌한 느낌이 치미는 중에 한편으로는 일지매에게 어림없이 속아 떨어진 일이 그의 자존심을 어 지없이 상하게 하여 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상하게 하여 그의 때 없이 폭 발하는 독살스런 성미는 이 충동에 말미암아 횃불 같이 머리끝까지 치밀었 다.

두 눈꼬리는 샐쭉하게 치달리고 얼굴에는 독살이 다닥다닥 매달리어 심참 봉이 오기만 하면 장차 큰 호령이 쏟아져 나올 험악한 상태에 있다. 걸상 한구석에 상체를 기대고 앉았다가는 다시 몸을 일으키어 이리저리 거닐며 그의 조급한 성미는 각일각으로 초조하여간다. 시계는 벌써 영시가 가까워 온다. 점내에서 한뭉치가 되여 이리저리 몰리던 사람들은 한붓○이 지났는 지 점내의 공기는 매우 서늘하여졌다.

22회 오늘은 식도원

심참봉은 숨을 헐떡거리며 사층으로 올라와서 약조하였던 흡연실로 향하였 다.

한치각은 자기 앞에 심참봉의 형체가 나타나자 벌떡 일어서며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독살이 뚝뚝 듣는 어조로

“이건 무얼 하고 있었어. 일지매하고 숨바꼭질을 하는 모양인가?” 심참봉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서 주저주저하며 한치각의 앞에 섰다.

“숨바꼭질이라니?”

심참봉은 그 이상한 말의 의미를 몰라서 눈이 휘둥그레해지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아 대관절 누구에게를 갔다온 모양이야.”

“누구라니. 일지매의 집에 갔었지.”

“그래 돈은 어떡했어?”

“치료비하라고 주었지.”

“치료비는 어디가 아파서 치료비란 말이야.”

심참봉은 한치각의 말하는 것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 는 통에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대관절 나는 참봉의 말하는 의미는 통히 모르겠는데. 대관절 내가 없는 동안에 일지매를 만났단 말이야?”

“만나면 이만 저만하게 만나? 별 창피한 꼴을 다 보았는데. 자네도 이젤 랑은 좀 똑똑하게 굴어.”

심참봉은 깜짝 놀라며

“일지매가 여기를 오다니? 아, 병원에 갔다는 사람이 여기를 왔단 말이 야.”

“그러게 정신을 좀 채리란 말이지. 이게 무슨 까닭인가 자네 흥감 떠는 통에 물색없이 내 돈만 이백 원이 축이 났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 돈은 주고 왔단 말이야.”

“그럼 주고 오지 어떡하나?”

심참봉은 한치각의 말눈치에 대강 내용을 짐작하게 되는데 따라서 자기의 경솔하였던 것을 뉘우친 듯이 머리를 수그렸다. 한치각은 입맛을 다시며 “손재수가 들려니까 별 일이 다 생기요. 그 돈은 다시 찾을 수는 없나?” 심창봉은 힘없는 소리로

“글쎄. 한번 전한 것을…….”

“그럼 못 찾겠다는 말이야.”

“그것이야 기어이 찾으려면야 재판이라도 해서 찾을 수가 있지마는.” 한치각은 화증을 버럭 내며

“재판이라니 누가 그런 창피한 짓을 해, 대관절 돈 준 표…….” 한치각은 중간에 일이 하도 맹랑하게 되어 얼마쯤 심참봉을 의심하는 생각 도 없지 아니하여 영수증 같은 것이 있으면 하는 생각으로 말이 불쑥 나오 다가 차마 면구하여 말끝을 멈추었다. 그러나 눈치빠른 심참봉은 자기도 중 간에서 찜찜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이라 그 말 한 마디가 얼른 머릿속의 신 경을 찔렀다.

“영수증도 말했으나 기생모가 어디 글자를 쓰는 것이 있나. 하여간 두고 온 것은 분명하니 염려 말게. 그리고 좌우간 우리 일지매를 한번 만나도록 하세그려.”

“아, 또 생돈 이백 원이 날개가 가게. 그런 얌체 없는 년들을 치료는 무 슨 치료야! 하여간 중병은 다 자네게서 났느니…….”

“…….”

심참봉은 그 말에는 대답할 힘이 없었다.

“아, 이 화풀이를 어디다 한단 말인가.”

한치각의 대끝까지 올라 치밀었는 독살은 숭글숭글한 심참봉과 몇마디 대 화를 하는 중에 사라져 버렸다.

“기생이 그거 하나뿐인가? 오늘은 우리 구경을 한번 찾아가볼까?” “구정이라니 누구 말이야?”

“아따, 날마다 편지하는 변녹주 말이야.”

“그만 두게. 여보게 인제는 기생도 지긋지긋해.”

“그럼 오늘 밤은 오래간만에 전동 마마님댁이나 가지.”

“아니 그것도 다 성이 가셔. 그러나 아직 영시밖에 아니 되었는데 집으로 가면 잠이 와야지.”

“내친 걸음에 화풀이로 우리 한번 쭉으니 놀세그려.”

“글쎄 일지매의 집이 다니는 남주사는 자가 요새 어떤 요릿집으로 다니는 모양인가?”

“궐자는 아마 식도원 단골이지. 그건 왜 물어?”

“그럼 오늘 밤은 식도원에나 갈까?”

23회 돈이다, 돈!

식도원은 근래에 드물게 번창한 밤을 이루었다. 넓은 현관에는 번쩍번쩍 하는 구두들이 열을 지어 몇줄로 늘어놓이고 한편으로는 수코 외코 등의 기 생 마른신 고무신들이 마치 바람에 물리어 강가에 밀던 낚싯배처럼 늘여놓 았다. 담배연기와 술냄새가 쏟아져 나오는 큰방 작은방에서는 손뼉치는 소 리 장구치는 소리 꽹매기 징까지 울리며 집안을 벌근 뒤집어엎는 소동을 일 으키는 데도 있어 식도원 안은 돈 귀한 이 사회를 떠난 딴나라와 같이 큰 환락장을 이루었다.

구석 별방을 차지한 한치각의 술자리에도 그 안의 공기를 좋아하리 만큼 어지간히 술들이 취하였다. 좌객은 물론 한치각이 대장이요. 병정으로 대령 한 것은 심참봉을 비롯하여 한치각의 집사랑에 모이는 소위 사직영문병정들 인 채플린 박주사, 횃대 강진사, 연통 안의관들이 면면이 네모진 큰 요리상 을 중앙으로 둘러앉았다. 한치각이 이와 같이 자기 병정들을 한꺼번에 영솔 하고 출장하기는 일 년에 몇 번 아니 되는 노름이다. 오늘밤에 특별히 이렇 게 사람을 소집한 동기는 한치각이 조금 전에 삼월오복점에서 일지매와 남 주사들의 아니꼬운 장면을 보게 된 까닭에 총동원을 내려 식도원에 진을 쳐 놓고 만일 일지매와 남주사가 행적을 나타나기만 하면 무력으로 복수하자는 한치각의 안전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한치각은 벌써 눈이 개개 풀리도록 술이 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요리 상 머리에서 상체를 전후좌우로 흔들며 혀끝이 위스키에 오그라져서 때때로 혀를 내밀어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흐늘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이 여태 왜 아니와. 이런 죽일 놈! 육백오십 원짜리 은, 은, 은여우털이면 제일인가. 주제넘은 놈! 전라도 개똥쇠놈이 ‘실버폭스!’ 앗 다. 그놈이 그런 건 어디서 보았어. 파리를 좀 갔다왔더라면 벌떡 뒤로 자 빠지겠군, 놀라서. 파리의 하이칼라들은 좀 보고 와서 그래. 주제넘은 자식 같으니…….”

“대장이 벌써 술이 취했남? 남가가 육백 원을 쓰면 여기선 천 원은 못쓰 나. 돈이 누구만 못해서 걱정이야? 그렇지 않은가? 이사람 약밥. 여보게, 다 그만두어. 내가 담당할게. 얘 보이야! 술, 술, 가져와.” 심참봉도 어지간히 술이 취해서 허연 붕대로 동인 얼굴을 흔들며 끄덕거린 다.

“보이야, 이놈아! 여기 기생들의 이름 좀 적어오라니깐 무얼 해, 글쎄 일 지매 왔니?”

연통 안의관도 보이의 말을 홱 잡아당기며 호기를 부린다.

보이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네 곧 들어오겠습니다. 사무실에서 적는 중이올시다."

“이 자식 너 오늘 일지매를 못 불러오면 죽여버린다. 사무원 불러. 어서 내가 부른다고 그래 사, 사, 사, 사, 사무원놈 오라고 그래.” 한치각은 위스키잔을 들고 부라질을 한다. 잔에 담긴 술은 보료로 무릎으 로 함부로 흘러 떨어진다. 횃대 강진사는 벌써 술 다섯 잔에 얼굴이 주주광 대가 되어 그의 버릇인 ‘횃대’의 연극을 시작하고 있다. 두팔을 좌우로 벌리어 수평선을 지으며 흰 두루마기를 입은 키 대키리가 일어서서 의미 없 이 요리상 주위로 돌아다니며

“괘씸한 놈들! 괘씸한 놈들! 돈냥이나 있다고, 여보게 참봉! 우리 창피하 니 그만 가세. 사랑하는 기생을 전라도 남가한테 빼앗기고 여기서 또 술을 먹다니. 아무리 세상이 망했기로 양반의 자식이…….”

“아, 벌써 취했어? 양반타령이 나오게. 여보게. 그만 골치아픈 양반 타령 은 좀 그만 두게 돈이 제일이지, 횃대 바람에 먼지가 날려서 못견디겠네.

제발 서성거리지 말고 좀 앉게.”

채플린 박주사는 무엇보다도 술을 그만두라는 데에 정신이 아찔하도록 불 유쾌한 감정이 떠올라서 횃대 강진사의 두루마기 자락을 홱 잡아 당기었다.

요릿집 사무원은 장지를 열고 두손을 비비며 허리를 구부리고 반은 죽을 형 상을 지며 장지틀에 머리를 숙인다.

“일지매에게는 인력거를 다섯 번이나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방노 름을 달아놓고 도무지 어디로 갔는지 각 요릿집에 탐지하여 보아도 아니온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인력거만은 일지매의 집에 파수를 보내어 돌아오는 대로 곧 잡아 대령하도록 분부했습니다.……”

“이놈 일지매가 없어? 나는 왜 돈이 없는 줄 아니. 옛다, 이걸 보아 이 놈.”

하며 양복 뒷주머니에서 지전 한웅큼을 집어내어 사무원에게 던졌다.

방안에는 백 원짜리 십 원짜리가 수십 장이 사랑으로 흩어졌다.

24회 망창한 일

식도원의 술상은 어느 때나 되어야 끝이 날는지 열두시를 친 뒤에도 기생 이 들락날락하여 보이들은 술병 나르기에 분주하다. 한치각은 술이 고비가 넘은 지가 벌써 오래이다. 입에서는 좌우부리로 걸디건 거품침이 방울을 지 어 흘러내리며 한바탕의 주사가 시작이 되어 지진을 꺼내어 던진 뒤에는 정 신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며 술을 부르고 있다. 다른 병정들은 이때를 놓치면 다시 술맛을 못 얻어볼 듯이 맥주로 양주로 연하여 들이붓고 있다.

횃대 강진사는 원래 술을 먹지 못하는 까닭에 양에 넘치게 먹은 술이 한꺼 번에 취하여 가슴이 울렁거리며 구역이 날듯날듯하여 모처럼 고깃점이나 얻 어먹은 것이 뱃속에서 볶이어 적지 아니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원래 강진 사는 한치각의 집사랑에 모이는 여러 중에 아무 장기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다. 술도 못먹고 노래도 못할 뿐 아니라 성질이 순한데다가 남과 같이 약삭 빠른 행동을 못하는 까닭에 항상 그 총중에서는 물위의 기름방울 같이 겉으 로 떠돌고 있는 터이다. 오늘밤에도 다른 사람들은 꽤나 만난 듯이 술주정 을 하는 중에 오직 강진사 한 사람만 신선로 그릇을 독차지하다시피 국수와 전유어 나부랭이를 끓는 신선로 장국에 넣어 주린 배를 채운 다음에는 아무 재미를 느끼지 아니한다.

배가 부른 뒤에는 아무 취미를 느끼지 아니하는 강진사는 한치각의 지전을 던지는 주정이 벌어진 뒤에 슬그머니 모자를 떼어들고 현관을 나와 광희정 자기 집으로 향하였다.

널따란 빈 밭가에 썩은 비석 같이 납작하게 들러붙은 강진사의 초가집 들 창에는 희미한 불빛이 그저 비치어 있다.

강진사는 자기 집 들창에 불이 지금까지 비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가슴이 선듯하여지며 이상한 불안을 느끼었다. 전등값을 못내어서 석유등잔을 켜고 있는지가 벌써 몇 달째인데 자정이 넘은 지금까지 일없이는 불을 켜놓을 까 닭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문득 나는 동시에 머릿속에는 시커먼 불안이 떠올 라왔다.

강진사는 일그러진 쪽대문 안에 손을 넣어 문고리를 벗기고 큰 기침을 하 며 들어섰다 방안에서는 힘없는 중년여자의 목소리로

“인제 오시우. 날마다 무슨 일이 있어 그렇게 나다닌단 말이요. 어린애가 아까 저녁 때부터 경기를 시작해서 거진 다 죽게 됐소. 어서 좀 들어와서 보우.”

강진사의 흘개 늦은 신경은 일시에 그물코를 당기듯이 바짝 조여 들었다.

“우어? 어린애가 경기를…….”

강진사는 고무신짝을 함부로 벗어던지며 떨어진 지게문을 열었다. 방안에 는 석유 그을음이 자욱하게 서리고 시큼지릿한 기저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석유등잔불이 깜박깜박하는 그 옆에는 여윈 얼굴에 겉주름살이 쪼골쪼골하 게 잡힌 자기 마누라가 백일이 겨우 지낼락말락한 어린애를 무릎 위에 가로 안고 한숨을 쉬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경기를 한단 말이야? 어디 좀 봅시다.”

강진사는 옆으로 앉으며 어린애를 들여다 본다. 어린애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해쓱한 얼굴을 발딱 젖혀들고 가슴이 발랑발랑하며 열기에 몰리는 잦 은 숨을 쉬고 있다. 눈은 떴는지 감았는지 눈썹꼴이 위로 돌리어 속눈썹 밑 으로 내다보이는 희미한 눈동자는 신경의 활동을 쉬는 것 같이 조금도 움직 이지 아니한다. 흙빛 같이 탄 입술에는 침기가 하나도 없이 말라서 엷은 허 물이 일어났다.

“언제가 무어요. 애가 감기든 지는 벌써 여러 날이 되었소. 약 한 첩을 먹었소? 그대로 내버려두니깐 촉상이 됐어요. 이 머리를 좀 만져 봐요. 불 등걸 같으니.”

강진사는 마누라가 시키는 대로 두손을 합하여 쓱 부비어 더웁게 하며 어 린아이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어린애의 머리는 관자놀이가 쉬일사이 없이 뛰놀며 펄펄 끊고 희미한 등잔불에도 그 동작이 완연하게 보일 만치 정수리 의 숨구멍이 벌렁거린다.

“참 몹시 더운데. 집에 환약도 없나?”

“약이 다 무어요. 언제 그런 것 사다 주었소. 참 딱한 일이요. 아, 아 또 시작을 하네. 이걸 어쩌나. 응. 여보, 애 좀 보우. 이 팔을 좀 붙잡아 요…….”

한동안 쉬었던 어린애의 경기는 또 발작이 되어 눈을 하얗게 치뜨고 몸을 떨며 헛손질을 한다.

25회 창밖엔 눈바람

강진사는 백척간두의 턱없는 살림을 하여가는 중에도 막내로 낳은 그 어린 아들에게 마음을 붙이여서 들며나며 귀엽게 들여다보는 터이라 별안간에 경 기를 시작하여 말도 못하는 어린 것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홉뜨는 위급 한 광경을 보니 마음이 한줌만 하게 조여들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공중으로 내두르는 어린애의 손을 붙잡아 겨드랑이 밑에 눌러쥐고 목에 침이 말라서 어린애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다. 어린애는 얼굴을 뒤틀고 천장을 향한 채 로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때때로 흐크흐크 느끼다가는 또다시 긴 한숨을 내 어쉰다. 그와 마누라는 무릎 위에 뉘인 어린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두눈에 서는 더운 눈물이 방울을 지어 떨어진다.

“여보 돈 가졌소? 청심환이나 한 개 사다 먹여봅시다. 벌써 이런 지가 몇 차례인지 모르오.”

그의 마누라는 강진사를 쳐다보며 애원하듯이 말한다.

강진사는 입맛만 쩍쩍 다시며

“돈이 웬걸 있어야지. 참 큰일났군. 이를 어찌하나. 우선 참기름이라도 좀 끓여 먹여보지.”

“기름은 있답디까? 아까 하도 급해서 병 밑구멍에 처져 있는 찌꺼기 기름 을 좀 끓여 먹였으나 어디 무슨 동정이 있소? 우황포룡환 같은 거나 한 개 먹였으면 나을 터인데.”

“글쎄 돈이 한 푼도 없으니 어찌한단 말이요. 이 밤중에.”

“그래도 나는 그 편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허구헌 날 그렇게 주변이 없어가지고 어찌 산단 말이요. 오늘은 방에 볼도 못 넣었소.

준성(강진사의 아들)이 날 때는 저녁 달라고 조르다 못하여 그대로 쓰러져 자고 있소. 집안 식구들도 좀 생각을 해야지요. 백판 내게 맡기고 밖으로 돌아만 다니니 어떻게 하란 말이요.”

“집에 있으면 무슨 도리가 있나. 세상이 이지경인 걸 난들 어찌한단 말이 요.”

“집에 있으면 아이들이라도 돌봐주지요. 준성이놈은 벌써 열 살이나 됐는 데 학교도 못다니니 나중엔 무엇이 된단 말이요. 그래도 그 편이 집에 붙어 있으면 글자라도 가르쳐주고 하지 않소.”

“또 일없이 돌아다녀서는 무슨 소용이 있소. 아아! 또 일어나는구려.

어린애의 팔을 좀 붙잡아요. 이들 어째나…….”

잠시 동안 멈추었던 어린애의 경기는 또 시작되었다. 강진사는 또 어린애 의 손을 잡았다. 어린애의 손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부르르 떨리며 경련이 시작되었다.

“이러다가는 만경이 되겠소. 만경이 되면 어떡한단 말이요. 재작년에도 경기로 자식 하나를 낭패 보지 않았소. 이를 어떡하면 좋은가 날이나 밝아 야지.”

흐리었던 천기는 바람소리를 내며 폭풍으로 변하였다. 살이 군데군데 부러 진 뒷창에는 모진 바람이 몰리어 창호가 푹 들어 밀리며 찬바람이 방안으로 몰려들어온다.

그런 때마다 곶감씨 같이 길쭉한 등잔불은 좌우로 힘없이 흔들린다.

“원수의 또 바람이 일어나는구려. 밤이 드니깐 방이 더 추워오는데 이를 어떻게 하나. 불이나 좀 때어야 할 터인데 여보 저기 선반 위에 묵은 책이 서너군 있습디다. 그거라도 좀 뜯어 때입시다.”

“무어? 저것 그것 판서공의 행장록인데.”

“그럼 어떡한단 말이요 방에 불기운이나 좀 해야지 어린애가 살지 무어이 든지 휴지라도 좀 골라서 아궁이에 불기운을 합시다.”

강진사는 일어서서 김치 항아리 깍두기 항아리들이 늘어놓인 그 뒤에 쌓아 둔 시커먼 행담뭉치를 꺼냈다.

바람은 점점 소리를 치며 문창호를 벌렁거리고 대문을 덜컹거린다. 강진사 는 행담 속에서 간지철○들의 편지뭉치를 골라 안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대 문이 떨어진 부엌 안에는 벌써 발이 묻힐 만치 눈북덕이를 몰아다 부쳤다.

“아. 그새 눈이 이렇게 왔나?”

강진사는 으르르 떨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방안에서는 작은 목소리로 “눈이 와요?”

“응, 막 퍼붓는데.”

“날이나 좋아야지, 밝아서라도 무슨 변통이라도 하지. 참 촉촉이 딱한 일 도 많다.”

그의 마누라는 방안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강진사는 휴지뭉치를 끌러서 불을 댕기었다. 간지피봉에 ‘강판서택 입 납’이라고 또렷또렷하게 쓴 글자가 검붉은 불길 속에서 한자씩 타들어갔 다. 강진사는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조금 전에 식도원에서 한치각이 가 던지던 백 원짜리 지전이 눈앞에 선하게 보인다.

26회 어려운 사정

바람은 고요한 밤을 뒤집어 없듯이 우∼ 쐐∼ 하는 소리를 치며 눈발을 몰 아다 창문을 친다. 강진사집 방안에 깜박거리는 등잔불은 몇 번이나 꺼진 다. 강진사는 자기 마누라가 이르는 대로 휴지뭉치를 서너 개 때었으나 방 안은 아무 효력도 없이 살을 어여내이는 찬공기가 몰려들어온다.

어린애는 한 시간 동풍이 되던 것이 점점 심하여 십 분을 간격하여 눈을 홉뜨고 팔을 공중으로 내두르는 발작이 일어난다. 강진사와 그의 마누라는 이마를 한데 대이고 사경에서 방황하는 어린애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다.

준성의 남매는 방바닥이 얼음장 같이 뼈가 저려오는 중에 몰아치는 폭풍소 리에 곤한 잠까지 깨이게 되어 새카맣게 때가 묻은 장판쪽 같은 이불자락을 등에 뒤집어쓰고 일어앉았다.

“어머니. 애기가 그저 낫지 않으우?”

하며 열 살 먹은 그의 아들 준성이는 부석부석한 얼굴로 근심스런 눈동자를 두르며 자기 어머니 무릎 위에서 새근거리는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 다. 준성의 누이동생인 용희는 아직 여섯 살이라 그러한 분별도 없이 무슨 좋은 일이나 생겼나하고 얼굴을 들어 두리번거리고 있다.

강진사는 부스스 일어나서 늘어앉은 준성의 남매를 보며

“왜 어느새 일어들 나니. 여태 날이 밝지 않았다.”

준성이는 몸서리를 치며

“나는 배가 아파서 일어났어. 그런데 왜 이렇게 추우. 어머니.” “날이 또 추워 오느라고 그렇다.”

그의 마누라는 한손으로 방바닥을 만지며

“아주 얼음 같구나. 여기서 어디 잠이 오겠니? 무어? 배가 아파?” “아니 인제 나았어. 아까는 배가 아프드니.”

준성은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네가 저녁을 못 먹어서 속이 쓰린 거로구나.”

“어머니 나도 저녁 아니 먹었어. 그런데 나는 배가 고프다고 조르지 않았 지. 어머니.”

용희는 응석 비스름이 그의 어머니 등어름을 비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찌기 밥해 주우, 응, 어머니.”

준성이는 애원하듯이 청한다. 강진사는 기름기가 없이 누르께한 남매의 얼 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저편으로 고개를 돌이키어 눈물을 씻었다.

그의 마누라는 왼손으로 용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기가 몹시 앓으니 떠들지 말고 어서들 자거라. 내일 아침에는 일찍 밥 을 할께. 응…….”

마누라의 말끝은 목이 메어 다 나오지 못하고 눈에서는 더운 눈물이 쌍줄 로 흐른다. 무릎에 안긴 어린애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생끗하게 열린 마른 입술로 가는 숨을 내쉰다.

강진사는 두 눈에 검흐르는 눈물 흔적을 소매로 씻고 준성 남매를 달래어 자리에 뉘었다. 바람소리는 그저 끊이지 아니하고 들린다.

“여보 날이 밝거든 무슨 변통이라도 해서 의원을 좀 보게 합시다. 이게 아주 위태한 병이요. 우리가 왜 속아보이지 않았소. 조금 웬만하다고 그대 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또 낭패를 볼 터이니 아침에는 좀 설도를 하여 돈을 변통하도록 하시우.”

“글쎄, 그야 누가 모르나. 어디 가서 돈을 변통한단 말이오.” “그럼 어떡하우. 없다고 그대로 손끝 매어놓고 앉았을 수는 없지 아니하 우. 인제는 전당국에 갈 누더기옷도 없소. 좀 생각하여 보구려.” “어디 생각이 없어 그랬소. 요사이 같이○○○을는 세상에 맨주먹으로 어 디 가서 돈을 변통한단 말이요.”

“왜 날마다 놀러가는 데가 있지 않소.”

“아, 한치각 한참봉 집 말이야? 그 사람이 친구의 사정 아나?” “그게 무슨 말씀요. 한참봉은 첩을 셋씩이나 두고 그래도 부족하여 날마 다 기생집으로만 다닌답디다. 그런 허랑한 데 쓴 돈을 조금만 변통하였으면 될 것이 아니요. 어려서부터 한 사랑에서 동문수학을 하던 친구가 아니요.

어린 자식이 죽게 됐다고 사정을 말하면 돈 십원이야 설마 없다고 하겠 소.”

“글쎄, 그게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야. 그 사람은 그런 인정이 있는 사 람이 아니라우. 일전에도 그의 친구가 당고를 해서 수세를 못했다고 통지했 는데도 잔돈이 없다고 그냥 빈손으로 돌려 보내는 것을 내가 목도 하였 소.”

“어쨌든 부자의 아들이 마음을 그렇게 쓴단 말이요. 우리가 살 적엔 그렇 지 않았소.”

“그야 그랬지.”

“좌우간 날이 밝거든 한번 가서, 말이나 간곡히 하여 보구려.” 그의 마누라는 애원하듯이 청하였다.

27회 마음은 꺼리며

어린애는 자다가 깼다가 또 바람을 일으키었다하는 동안에 날은 밝아 버렸 다. 강진사와 그의 마누라는 어린애를 들여다보며 졸이는 마음으로 밤을 반 짝 새웠다.

무릎 위에 안긴 어린애는 밤새도록 여러 차례의 동풍이 일어나 폭 까무라 쳐서 두 뺨이 홀쭉하게 여위고 생사를 분간키 어려울 만치 몸이 축 늘어졌 다. 그의 어머니는 때때로 어린애의 입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이고 숨이 계 속하나 않는가를 살피고 있다.

“여보, 일찍 날이 밝았으니 좀 활동을 하여 보도록 하구려. 어린애는 거 의 죽어가오. 어서 좀 나가보시우.”

마누라는 다시 강진사를 동독한다.

“글쎄 어디를 가나?” 하며 강진사는 한치각의 집은 잊어버린 듯이 딴청 을 한다.

“왜 엊저녁에 내가 말하지 않았소, 한참봉집에나 가보구려.”

“글쎄 번연히 내가 그 사람의 성질을 다 아는데 공연히 말을 했다가 거절 을 당하면 창피만 하지, 무슨 소용이 있소. 그리고 그 사람은 친구가 어려 운 말을 하면 그 당장에는 그럴듯하게 대답을 하다가도 나중에는 못한다 한 단 말도 없이 그냥 지내버리고 그 다음에는 자기 집에 가더라도 따돌려 세 우는 사람인데 내가 번연히 그런 성미를 알면서 말귀양만 보내란 말이요.

“설마 인정을 가진 사람이 그럴 리가. 어린 것이 급하게 앓는다는 말을 자세히 하여 보구려. 앉아서 뱅패막이만 말고 좀 가서 봐요.” 강진사는 입맛만 다시고 있다. 그는 한치각이가 괄세 못한 친한 친구의 절 박한 사정을 그대로 거절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급한 사정을 말한댔자 역시 코로 대답할 것이요. 그대로 돌아오게 될 것은 확실히 짐작하는 터이라 도무지 마음에 갈 생각이 나지를 아니한다.

강진사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돈을 변통할 방도는 없고 생각이 막막하여 앉 았는 동안에 잠이 들어있던 어린애는 또 다시 바람기를 일으키었다. 그의 마누라는 또 놀라며 어린애의 팔을 눌러주고 강진사를 쳐다보며

“애가 또 이러는구려. 글쎄 우두커니 앉았으면 어찌하란 말이요. 참딱도 하우.”

강전사는 또 마음이 울렁거리며 어린애를 들여다본다.

“무얼 하고 있소. 어서 다녀와요.”

마누라는 놀란 중에도 강진사의 눅진거리는 태도에 중이 났는지 눈을 똑바 로 뜨고 강진사를 쳐다본다. 강진사는 번연히 거절을 당할 줄은 알지마는 어린 것이 또 바람을 시작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울렁거려서 그대로 앉았을 수는 없다.

“그런데 애가 또 이러니 내가 다녀올 때까지 괜찮을까?”

“속히 다녀오시구려. 돈이 없다거든 청심환이나 포령환이라도 좀 얻어가 지고 오시우. 그 집은 부자집이요 아이들도 기른다하니 아마 그런 약들도 다 있으리다.”

“그러나 어느새 그 사람이 일어났으리라고 어제 저녁에는 또 식도원에서 아마 밤을 새었을 터인데.”

“급한 일에 깨고 아니 깨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이요. 안 일어났거든 좀 깨 워서라도 말을 하구려. 어린 것이 지금 시각을 다투지 아니하오. 이 절박한 때에 어찌 그런 체면까지 볼 수 있소.”

“아니 체면보다도 그 사람은 자기 집에서 자기 아버지가 늦잠을 못깨이는 터인데 누가 깨울 사람이 있어야지. 지금 아마 일곱 시밖에 아니 되었지?” “조금 전에 ‘뚜’소리가 났소. 그게 아마 날마다 일곱 시에 부는 것인 갑디다.”

“그렇지 연초공장에서 부는 일곱시 ‘뚜’ 이지. 그러면 지금 정신 모르 고 한치각은 자고 있을 걸.”

“글쎄 좀 깨라고 그러구료. 친구 두었다 무얼 하우?”

“하여간 그럼, 가보기나 하지. 전차삯이 있어야지. 여기서 사직골이 십리 는 될 터인데.”

“추근추근하지 말고 빨리 갔다 와요.”

강진사는 할 수 없이 모자를 떼어들고 염려스런 얼굴로 어린애를 다시 들 여다보고 문 밖으로 나섰다. 바람은 그대로 쉬지 않고 눈을 몰아다 끼얹는 다.

28회 상노부터 냉소

강진사는 눈을 뜰 수 없이 몰려오는 눈발 속에서 외투도 못 입고 동두루마 기 바람으로 숨을 헐떡이며 걸음을 치며 사직골 막바지 한치각의 집을 향하 여 간다. ‘회우’하는 소리를 치며 앞으로부터 닥치는 눈발은 길을 턱턱 막는다.

강진사는 이러한 심한 풍설 속에 급한 걸음을 걸어보기는 생전에 처음이 다. 지금은 한 푼 근력이 없이 다 털어마친 궁교한 때이나 오륙 년 까지도 사오백 석 되는 유산을 물리어 재동 중턱에 있는 기와집 속에서 큰소리하며 살던 양반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가 이와 같이 곤궁하게 된 것은 보통 보는 양반계급의 허랑한 젊은 사람 들처럼 주색에 빠져서 가산을 없앤 것은 아니다. 다섯 식구를 거느리고 이 전만 여겨서 흔전흔전하던 살림을 그대로 계속하는 동안에 해마다 수지의 계산이 부족하여 백 석 이백 석 지기씩 있는 땅은 다 팔아족치고 나중에는 집까지 없이 되어 지금은 전연히 턱이 없는 살림을 계속한다는 것보다 죽지 못하는 까닭에 그대로 그날그날을 지내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적당한 말 이다. 원래 조선 양반계급의 몰락된 그 원인은 물론 그들의 만○이 된 권리 를 빼앗긴 까닭이지마는 이것을 물질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두 가지의 원 인이 있다. 한 가지는 철모르는 그들이 허랑한 구덩이에 빠져서 술, 기생에 많은 유산을 탕진한 것이 대부분이요. 또 한 가지는 숫자를 모르는 그들의 낭만한 생활이 그들을 몰락하게 한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몰락한 원인이 결 국은 다 같은 처참한 현재 생활에 몰아넣은 것이지마는 그 중에서 동정의 눈으로 보아줄 것은 강진사 같은 사람의 몰락한 경로이다. 숫자를 떠난 무 책임한 생활,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즉 무지에서 생긴 한 비극이다.

강진사로 말하면 평생을 두고 남에게 모진 말 한 마디를 못하여 본 사람이 다. 대끝에 오른 요새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말할 수 없는 바보이요, 또 어 리석은 자이다. 그러나 그의 집, 가정에서는 그가 어렸을 때에는 도리어 순 후한 양반의 풍도가 있다고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다.

강진사는 눈바람에 두 손이 오리발처럼 새빨갛게 얼고 귀와 뺨은 도무지 감각이 없을 만치 얼었다. 몇 번을 길에서 센 바람결에 불리어 쓰러져가며 겨우 한치각의 집 대문 앞에 당하였다. 한치각의 집 큰 대문은 한편 조금 열리고 행랑 구종은 비를 들고 안을 쓸고 있다. 강진사는 눈뭉치가 되어 우 르르 털고 대문 안을 선뜻 들어섰다. 행랑 구종은 비를 멈추고 강진사를 한 참동안 물끄럼이 쳐다보다가,

“아, 이 눈바람 속에 어디서 오세요.”

강진사는 자기가 자기 모양을 생각하여도 창피할 지경이다. 마치 추운 아 침에 큰대문집으로 잡이나 얻어먹으러 들어오는 거지 같이 생각이 되어 추 운 중에도 얼굴을 숙이고 저편을 향하여 눈을 털고 섰다.

“어린애가 밤중부터 경기를 해서 약을 좀 얻으러 왔네. 나으리는 아직 안 일어나셨겠지, 아마?”

“일어나시는 것이 다 무업니까? 언제는 이맘때 일어나십니까? 엊저녁엔 또 새로 네 시에 들어오신 걸이요. 애기가 아파서 안했습니다 그려.” “만돌이도 아니 일어났나?”

“네 그놈은 일어났습니다. 큰사랑 영감이 날마다 새벽이면 일어나시는 까 닭에 저희들은 다 벌써 일어났습니다. 이 댁에서 제일 편하시기는 참봉 나 으리지요. 우선 추우신데 만돌이 방으로라도 좀 들어가시지요. 이 눈바람에 어떻게 오셨어요.”

나이 늙은 구종은 눈을 쓸면서 강진사에게 동정하는 말로 붙인다. 강진사 는 추운 생각을 하면 곧 만돌이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고 주저거리고 섰다.

만돌이는 안마당에 눈을 쓸다가 비를 든 채 나왔다. 강진사는 번연히 한치 각이가 아니 일어났을 줄은 알지마는 마음이 졸이는 까닭에 상노 만돌이에 게

“나으리 안 일어나셨지?”

하며 또 묻는다. 만돌은 어이가 없는지 강진사를 쳐다보며

“웬일이셔요. 이 눈 속에 다 아시면서 물으십니까? 어느새 일어나셔요.” “오늘은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이렇게 일찌기 왔다. 사랑대문 좀 열어 라.”

강진사는 전에 없는 강청을 하였다.

“나으리께 걱정은 누가 듣게요. 아, 모르십니까? 댁 나으리 성미를. 참 딱하십니다.”

성노 만들은 냉소하였다.

29회 몰인정

강진사는 한치각의 대문 안에 들어서서 상노 만돌에게 작은 사랑대문을 열 라고 하다가 거절을 당하고 추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분간에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있다. 그의 눈앞에는 자기 집 추운 방에서 생사의 지경을 방 황하는 자기 막내아들의 모든 형용이 선하게 나타난다. 눈을 흡뜨고 팔을 공중으로 내두르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어린애의 차마 볼 수 없는 가슴이 저릿저릿한 액색한 광경이 눈앞에 떠돈다.

강진사는 마음이 초조하여 한 군데에 발을 부치어 우두커니 서있을 수는 없다. 추위도 심하려니와 시각을 다투고 있는 어린애의 생명이 그 동안에 또 어찌나 되었나하는 생각이 끊이지 아니하고 머릿속에서 번뜩이어 원래는 눅진한 그이지마는 발을 이리저리 옮겨놓으며 가슴 속을 더운 인두로 지지 는 듯한 초조한 충동을 받고 있다. 그러나 강진사의 이러한 마음이 타들어 가는 절박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없다. 상노가 “사랑문은 못 열어요” 하 며 다시 안으로 들어간 후에는 말 한 마디 붙여볼 데조차 없이 되었다. 강 진사는 하여튼 자기의 절박한 사정으로 말하면 일각이라도 주저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려 먹었다.

강진사는 안내문 앞으로 가서 소리를 쳐서 만돌을 불러내었다. 만돌은 곧 나왔다.

“얘,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왔다가 나으리께 여쭈올 말씀이 있으니 얼른 사랑대문을 좀 열어라” 하며 강진사는 애원 비스름이 청하였다.

만돌은 눈을 흘기어 강진사를 쳐다보며

“글쎄 번연히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나으리께 벼락은 누가 맞고요.” “걱정은 내가 아니 듣게 할 터이니 어서 대문을 좀 열어. 일이 좀 급하 다. 댁 어린애가 경기를 시작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

만돌은 못 연다고 방패막이를 하다가 어린애가 아프다는 말에 차마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지,

“그럼, 나중에 나으리께 걱정이나 안 듣게 해줍쇼” 하며 안문으로 돌아 서 사랑대문을 비로소 열었다.

강진사는 허둥허둥하며 사랑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마루로 올라섰다. 한치 각이가 잠이 들어있는 작은 사랑은 덧문이 첩첩이 닫쳐있다. 강진사는 급한 마음에 취하여 사랑마루까지는 올라 갔으나 다시 주저 하였다. 한치각은 원 래 자만심이 많은 데다가 성미가 발끈발끈 하는 사람이다. 만일 그의 성미 를 찔렀다가는 급한 일이 낭패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문을 열 고 들어온 이상에는 한시바삐 좌우간에 말이나 한 번 하여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다시 들어 강진사는 침방 덧문의 허리를 잡고 전후로 흔들며 소리를 조그맣게 내서

“여보게. 참봉. 좀 일어나게. 내가 급한 일이 있어 왔네. 참봉, 참봉.” 하며 강진사는 비참한 음성으로 한치각을 깨인다. 그러나 음성이 너무 작았 는지 방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다. 강진사는 귀를 기울이며 동정을 살피다 가 다시 덧문을 힘있게 흔들며 음성을 높이어

“참봉! 참봉! 좀 일어나게. 곤하더라도 잠을 좀 깨게.”

침방 영창이 별안간 쩌렁쩌렁 울리며 찌르는 듯한 한치각의 음성이 방안을 울린다.

“누구냣! 남 자는데 어떤 놈들이 이러니!" 하며 방안에서는 무엇을 던지 는지 ‘꺼렁’하는 소리가 들린다. 강진사는 그 서슬에 몸이 움찔하였다.

“날세, 나야! 강일세. 곤히 자는데 흔들어 깨서 미안하이.” 강진사의 말소리는 떨리어 나온다.

“나라니 누구란 말이야. 이 새벽에 왜 야단들이야.”

“강일세 현필(강진사의 이름)일세. 내가 급한 일이 있어 일찍이 왔네. 문 좀 열게.”

“응 강이야, 그런데 남 자는데 자네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구나.” 한치각의 짜증은 아직도 줄어지지 아니하였다.

강진사는 될 수 있는 대로 한치각의 성미를 가라앉히려고 작은 음성으로 “여보게 어젯밤부터 집의 어린놈이 동풍이 되어 밤새도록 그대로 지내고 밝기를 기다리어 자네게를 왔네. 어린 것은 그동안 또 죽지나 않았는지 모 르겠네. 미안하지만 돈 십 원만 돌려주게. 의사나 한번 보이겠네.” 강진사의 말소리는 막혀서 말끝이 힘없이 풀어진다.

“무어? 어린애가 아퍼? 그거 아니됐네그려. 그러나 내게 있던 돈은 엊저 녁에 다 없어졌네. 지금 이 양력 세밑에 집에 웬 돈이 있을라구. 좌우간 자 넬랑은 급하다니 어서 집을 돌아가게. 내 곧 변통하여 보낼 터이니.” 문밖에 썼는 강진사는 대답이 곤란하였다.

30회 소위 개인주의

강진사는 어린애를 살릴까 죽일까 하는 절박한 기로에서서 한줄기의 희망 을 가지고 덧문 밖에서 한치각에게 창자 속에서 울려나오는 어조로 무한히 애원을 하였으나 인정이 마비된 한치각에게는 한 점의 따뜻한 느낌이 없다.

한치각은 이상 말하기를 자기가 오랫동안 아메리카에서 교육을 받은 관계로 그곳 사람들의 개인주의가 자연히 몸에 젖어서 조선 사람의 관습으로 보면 매우 이상하게 보이지마는 자기는 그것을 좋게 생각하여 그것을 실행한다고 선전을 하는 터이나 한치각의 이러한 선전의 말은 지금 강진사가 와서 어려 운 사정을 하는 데에 거절하는 상용수단이다. 잔돈푼에 몹시 때가 묻은 한 치각은 이러한 무기로 그의 주위에 매달린 궁교대를 거절하여 왔었다.

그러나 한치각의 행동은 어느 점으로 보든지 미국에서 수입한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얼음장 같이 찬 한치각의 마음은 강진사의 목이 맺힌 사정의 말을 들으면서도 덧문도 열지 아니하고 강진사를 돌려보냈다.

강진사의 최후에는 돈이 없거든 청심환이나 우황포룡환 같은 것이라도 한 개만 달라 하였으나 그것 역시 없다는 말 한마디로 거절을 당하였다.

한치각은 강진사의 어린애가 죽거나 살거나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으로 다 만 달게 자고 있는 자기의 잠을 깨게 된 것만 불유쾌하게 느낄 뿐이다.

문밖에 우두커니 섰던 강진사는 한치각에게 사정없이 거절을 당하고 앞이 캄캄하도록 낙망하였다. 그러나 일이 틀린 이상에는 우두커니 섰을 수도 없 는 터이라 최후의 희망으로

“참봉, 여보게. 그럼 나는 먼저 돌아가겠네. 돈이 자네네 집에 그렇게 없 겠나. 아무쪼록 십 원만 곧 좀 보내주게. 그동안에 어린 것이 죽지나 않았 는지 모르겠네. 사람 하나 살리는 셈일세.”

또 강진사는 애걸하였다. 한치각은 방안에서 그대로 말소리만 들린다.

“염려 말게. 내가 곧 변통하여 보낼 터이니 얼른 내려가게.” 한치각은 모든 것이 귀찮아서 강진사를 보내기로만 힘을 쓴다. 강진사는 한 치각의 평일 행동을 짐작하는 터이라 확실히 믿지는 못하나 설마 이번에야 목석이 아닌 사람인데 거절을 할까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광희정 자기 집 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시간은 그럭저럭 열시나 가까이 되었다. 눈은 그저 개지 아니하고 인제는 바람은 자고 함박눈이 되어 하늘이 자욱하게 쏟아져 온다. 강진사는 아침도 못 먹고 눈보라 치는 손을 십리나 걸어와서 조이는 마음으로 돈 말을 하였 다가 결국 그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니 마음은 탕개가 탁 풀린 것처럼 힘이 없이 되고 전신은 추위와 눈바람에 부대끼어 걸음을 옮겨 놓을 힘이 없다. 그러나 강진사는 낙심이 된 중에도 집의 일이 궁금하여 아 니 걸리는 걸음을 감작하여 집으로 향하였다.

강진사집 어린애는 그동안 또 여러 차례나 동상이 되었으나 하여간 숨기는 그저 붙어있다. 대문소리가 찌걱 나며 강진사가 들어오는 기척이 나며 방안 에 있던 강의 마누라는 천사나 맞는 듯이 반기며

“대관절 어찌되었소? 돈은 얻어가지고 오시우?”

강진사는 자기 마누라의 묻는 대답은 아니하고

“어린애가 그저 관계치 않은가?”

하며 방문으로 들어갔다. 마누라는 어린애를 무릎에 뉘인 채로 강진사의 얼 굴을 쳐다보며

“돈 가져왔거든 얼른 의사를 부르도록 합시다. 애가 지금 아주 혼동해졌 소.”

강진사는 차마 돈을 못 얻었다는 대답을 내일 수는 없다 주저주저하며 어 린애를 들여다보고 섰다.

“어서 말좀 해요. 돈은 어딨소?”

“…….”

강진사는 차마 말이 나가지 아니한다. 마누라는 얼굴에 낙심빛이 떠돌며 원망스런 눈으로 강진사를 쳐다보며

“못 얻은 모양이로구려. 그럼 어떡하우?”

마누라의 눈에서는 더운 눈물이 핑 돈다. 강진사는 힘이 풀린 어조로 “돈은 곧 보내마 그랬어.”

“언제 그럴 때가 있소. 아주 얻어 가지고 오지요. 평생 헐개가 늦어서.” “없다는 걸 어쩌나.”

“환약도 안가지고 왔소?”

“그것도 없답디다.”

강진사는 한숨을 내쉬며 얼음장 같은 찬 방바닥에 몸을 던지듯이 드러누웠 다. 준성과 용희는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근심스런 눈으로 자기 아버지를 들여다본다.

31회 최후의 한숨

강진사는 추위와 허기에 몹시 피로한 중에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한치각에 게 돈을 얻으러 갔다가 그것조차 거절을 당하게 되어 집에 들어오자 정신을 잃은 것처럼 쓰러지고 다시 일어날 줄을 모른다. 경기에 탈진이 된 어린애 는 때때로 고사리 같은 손을 힘없이 내두르며 눈은 반만 뜨고 눈동자는 영 채가 없이 부유스름한 채로 움직이지도 아니한다. 그의 마누라는 두 눈의 눈물이 끊일 사이없이 흐르며 무릎 위에 축 늘어져 안기어 있는 어린애의 가늘고 힘없이 쉬는 숨소리만 듣고 있다. 새근새근하는 숨소리가 들리다가 는 때때로 숨이 막히는 것처럼 나오는 숨이 끊어졌다가는 두서너 번씩 몰아 치는 숨을 다시 길게 내쉰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어린애는 벌써 몰아치는 숨을 다시 길게 내쉰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어린애는 벌써 숨이 기운 모양 이나 그의 마누라는 마음이 점점 쓰리어 온다. 방안에는 찬바람이 휘돌며 아침도 못 얻어먹은 준성의 남매는 노란 얼굴을 쳐들고 달달 떨며 웅크리고 강진사집 방 안에는 죽음과 추위와 근심이 서리어 인간 사회의 가장 참담한 광경을 이루어 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이 극도로 피로하여 쓰러져 누워 있 는 강진사의 눈에는 몇시간 전에 백 원짜리 십 원짜리의 지전이 한치각의 손끝에 뭉치로 잡히어 마치 모래를 뿌리듯이 끼얹듯 그 풍성 광경도 목격하 였다. 그러나 불과 돈 몇 원이면 강진사집에는 광명의 한 줄기가 비출 것인 데 그것조차 그의 집에는 절망이다. 육백 원짜리 은여우털 목도리, 백 원짜 리 지전 약 한 첩 없이 닥쳐오는 어린애의 죽음 이것들이 이 사회에 있는 현실의 무도(舞蹈)이다. 그와 마누라의 마음은 시커먼 흔적을 내며 각각으 로 타들어 간다. 그의 심장에는 슬픔과 원망의 피가 가득하게 물리어 터질 듯이 팽창하였다. 눈은 멈추었다. 시키멓게 쩔은 창문에는 누르캐한 힘없는 저녁 때 볕이 비친다. 찬 공기를 울리며 눈위로 굴러오는 면측 공장의 기적 소리는 강진사의 집 방안을 울린다. 햇발은 벌써 기울어졌다. 지금 불고 있 는 기적은 오후 세 시를 알리는 것이다. 한치각이 말하던 돈은 입때까지 소 식이 없다. 그동안 몇차례나 준성이를 대문 밖에 내보내어 사람 오는 것을 기다렸으나 빈 무밭 모퉁이에 외따로 매달려 있는 강진사의 집 대문 근처에 는 사람의 자취가 아주 끊어진 듯이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마누라는 한숨 을 또 쉬었다.

“벌써 세 시 뚜∼를 부는데 이때껏 웬일인가 집을 못 찾는 것이 아닌 가.”

혼잣말로 응얼거리며 드러누운 강진사의 몸을 흔든다.

“여보 좀 일어나오. 무슨 잠이 온단 말이요. 이 심난 중에 아마 한참봉 집 하인이 집을 못 찾나 보구려.”

강진사는 “응, 응” 소리만 내며 일어나지 않는다. 강진사는 피로가 극도 에 이르러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것이다. 입에서는 거품침이 흘러내리고 눈자위는 쑥 들어갔다. 마누라는 또 강진사를 흔든다.

“글쎄 일어나요. 문 밖에나 좀 나가보오. 한참봉 집에서 사람이 입때 아 니오니 웬일이오. 어서 일어나오.”

마누라는 강진사가 이 참담한 중에 무책임하게 씩씩 자는 것을 한편으로 밉살머리스럽게 생각하여 나중에는 힘껏 흔들었다. 강진사는 그 바람에 놀 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며 외마디 소리로

“무어 죽었어?”

하며 어린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어떻게 됐어? 그저 한 모양인가?”

“한참봉 집에서는 사람이 아니 와서. 집을 못 찾아서 그런가, 웬일이 오.”

마누라는 강진사의 부숙부숙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입때 아니 왔지. 집을 모르기는 왜 몰라. 상놈 만돌이도 몇 번이나 왔다 가고 구종들도 아는데. 그 사람이 친구의 일에 무슨 성의가 있는 사람인가.

그래도 이번에야 설마하고 왔더니 역시 몰인정한 자식이군.”

강진사의 눈에는 핏줄이 섰다.

“어쩌면 천량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들이 없단 말이오. 모르는 터 이 아닌데.”

무릎 위에 누웠는 어린애는 별안간에 또 경련이 일어나며 최후의 슬픈 절 명이 닥쳤다. 강진사의 내외는 깜짝 놀라며 이마를 한 대 대이고, 어린애를 들여다본다. 어린애는 턱을 몇 번 상하로 흔들더니 잿불 꺼지 듯이 숨이 끊 어졌다. 마누라의 더운 눈물은 숨이 끊어진 어린애의 가슴 위에 떨어지며 어린애의 귀에 입을 대고 “아가, 아가” 하며 부른다. 강진사는 눈물 방울 이 얼굴에 굴러 내리며 입술이 떨린다. 준성의 남매는 물끄러미 자기 어머 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32회 헛생색

한치각은 강진사에게 곤히 자던 잠을 깨이게 되어 어린애가 죽느니 사느니 하고 한참동안 성이 가심을 받다가 성이 가신 그 자리만 피하려고 돈을 나 중에 변통하여 보낼 터이니 그대로 돌아가라고 강진사를 쫓고서는 그대로 잠을 계속하여 얼마동안을 잤는지 잠이 저절로 깨게 된 때는 오후 네 시가 훨씬 지난 저녁 때였다.

보통 사람의 인정 같으면 날마다 오는 친구의 그러한 급한 사정을 듣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잠이 들 사람은 없을 터이나 한치각은 자기 자신이 아프게 되었다면 모르거니와 그 밖에는 자기 주위에 어떤 처참한 사정이 일어났을 지라도 도무지 마음을 쓰는 일이 없다. 그러한 남의 사정을 살피지 못하는 것이 호화롭게 자라난 부유집 자식들이 가지고 있는한 항례이나 그 중에서 한치각은 자기 조부가 살아있을 때부터 늦게 본 외손자라 하여 모든 자유와 모든 호강을 다 하여 길러내인 까닭에 말 할 수 없는 자만심이 생기고 어렸 을 때부터 마음을 쓰는 일이라고는 하루에 몇 차례씩 한문을 읽는 것이 가 장 마음의 고통이었다.

이와 같이 세상을 떠나서 자유의 천지인 자기 가정에서 생긴 채로 자라난 그 성미가 그대로 관습이 되어 사십이 넘은 오늘까지도 마음을 괴롭게 무엇 을 생각한다든지 남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거기에 마음을 움직이려 하는 생 각은 조금도 없다. 그의 성질은 차다는 것보다 아무 감각이 없는 돌이나 나 무 등과 같이 마비되었다. 이 때 이와 같은 무관심한 성질을 가진 한치각이 가 강진사의 애원을 잊어버리고 잠을 계속 잔것이 그다지 놀랄 사실은 아니 다. 강진사가 덧문 밖에서 목에 침이 말라서 애원하던 때에도 돈이 없어서 거절한 것은 아니다. 양복 주머니에는 천 원에 가까운 현금이 있었지만은 십 원을 주자니 너무 많고 또 자다가 일어나 몸을 움직이자니 귀찮고 해서 도무지 성이 가신 생각으로 거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치각이 제풀에 일어 나서 생각하니 인정은 고사하고 체면상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 하였는지 상노를 불러 십 원짜리로 해태표 몇 갑을 사고 그 거슬러 온 돈에 서 삼 원을 집었다가 다시 일 원을 꺼내고 일 원짜리 두 장을 명함과 같이 봉투에 넣어 만돌을 강진사의 집으로 보내었다. 그 때는 벌써 해가 뉘엿뉘 였다. 만돌은 전등불이 들어온 뒤에 강진사 집을 다녀왔다. 그러나 한치각 이 보낸 돈 이 원을 넣은 그 봉투는 뜯지도 아니하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왔 다. 상노 만돌은 그 편지를 한치각에게 드리며 강진사 집안에서는 곡성이 들리고 강진사가 대문간에 나와 편지도 뜯어보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아가라 고 하던 말을 전한다. 만돌이 전하는 말씨를 들으면 어린애가 필시 죽은 것 은 사실 같다. 그러나 한치각은 역시 아무 말이 없이 그 편지를 도로 받아 앞에 놓으며 얼굴에는 도리어 비웃는 기색이 내보인다. 사랑에는 판에 박은 듯이 모이는 소위 병정들이 옹기종기 늘어앉았다. 한치각은 봉한 편지를 들 고 여러 사람들에게 자기의 한숨 비스듬이 말한다.

“여보게, 이런 맹랑한 일 좀 보게. 아까 강횃대가 와서 어린애가 앓느니 죽느니 하기에 일껏 돈을 보내었더니 편지도 뜯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려 보 냈으니 그 사람이 별안간에 무슨 수가 생겼단 말인가. 나 도무지 알 수 없 는 일인데.”

하며 사실의 일부만 들어 말한다.

좌중의 사람들은 한치각의 말을 그대로 통째 믿지는 아니하지만은 하여간 한치각의 앞에서는 자기들의 존재를 잊어버린 사람들이라 여러 사람의 입에 서는 주인 한치각의 비위에 맞도록 응대를 아니할 수는 없다.

“글쎄, 그것이 웬일이야.”

“그 사람이 미쳤나.”

“아닐세. 이따금 그 사람이 되잖케 못된 짓을 한다네.”

“그러게 여북해 별명이 횃대가 아닌가.”

“아주 싱거운 사람이 아닌가.”

이러한 무책임한 인정 없는 말을 함부로 떠들어 한치각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 한치각은 기고만장하여

“그 사람이 돈은 그대로 돌려보내고 나중에는 남의 허물을 할 테지. 참 이상한 사람이야. 제까짓 것이 틀리면 누가 무서워 하나. 제멋대로 놀라지.

참 별일이야.”

한치각은 상용 수단인 헛생색만 번지르하게 꾸며 놓는다.

그러나 그들은 한치각의 헛선전을 처음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사 람의 머릿속에는 다 각각 편지의 도로 온 원인을 생각하고 있다.

33호 수전노 한승지

한치각은 태양이 비치는 밝은 세상은 더웁게 볼 때인 침침한 침방 안에서 복잡한 세상과 인연을 끊고 늦잠으로 그 날을 다 보내고 검푸른 밤이 와서 전등불이 번쩍 거리기 시작하면 비로소 몸을 움직이어 쓰러져 가는 고주 대 문을 벗어 나간다. 마치 여름 날 땅거미 때에 우중충한 광구석에서 박쥐들 이 날라 나오듯이 기왓골의 바위 옷이 덕지덕지한 자기의 골동 가옥을 떠나 서 분바른 계집들이 값싼 웃음을 던지는 나라로 걸음을 옮긴다. 만일 이 세 상에 한치각과 같이 단순한 생활을 가진 사람들만 있다하면 구태여 머리를 짜내어 복잡한 시설을 하여 놓을 필요가 없다. 다만 여성이 있을 뿐인 쪽하 고 그 다음에는 여성을 매매하는 술이 약간 있으면 고만이다. 한치각의 이 러한 동물에 가까운 생활을 계속 하는 동안에 그의 주위에 있던 여러 사람 은 점차로 그의 생활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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