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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인직 치악산

by 워낙3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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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雉岳山)

강원도 원주 경내에 이름난 산은 치악산이라.

명랑한 빛도 없고, 기이한 봉우리도 없고 시꺼먼 산이 너무 우중충하게 되었더라.

중중첩첩하고 외외암암 하여 웅장하기는 대단히 웅장한 산이라. 그 산이 금강산 줄기로 내린 산이나 용두사미라. 금강산은 문명한 산이요, 치악산은 야만의 산이라고 이름지을 만한 터이라.

그 산 깊은 곳에는 백주에 호랑이가 덕시글덕시글하여 남의 고기 먹으려 는 사냥 포수가 제 고기로 호랑이 밥을 삼는 일이 종종 있더라.

하늘에 닿듯이 높이 솟아 동에서부터 남으로 달려 내려가는 그 산 형세를 원주 읍내서 보면 남편 하늘 밑에 푸른 병풍 친 것 같더라.

치악산은 병풍 삼고 사는 사람들은 그 산밑에서 논을 풀고 밭 일어서 오 곡심어 호구하고, 그 산의 솔을 베어다가 집을 짓고, 그 산의 고비고사리를 캐어다가 반찬하고, 그 산에서 흘러 내려가는 물을 먹고사는 터이라. 때 못 벗은 우중충한 산일지라도 사람의 생명이 그 산에 많이 달렸는데 그 산밑에 제일 크고 이름난 동네는 단구역마을이라.

치악산 높은 곡에서 서늘한 가을 바람이 일어나더니, 그 바람이 슬슬 돌 아서 개 짖고 다듬이 방망이소리 나는 단구역마을로 들어간다.

달 밝고 이슬 차고 베짱이 우는 청량한 밤이라. 소소한 바람이 홍참의 집 안 뒤꼍 오동나무 가지를 흔들었는데, 오동잎에서 두세 방울 찬이슬이 뚝뚝 떨어지며 오동 아래 단장 위에서 기와 한 장이 철썩 떨어진다.

달은 오동나무 그림자를 끌어다가 홍참의 집 건넌방 동창 미닫이에 들었 는데, 서늘한 바람이 오동 그림자로 활동사진을 놀리더라.

창밖에 눈썹같이 좁은 툇마루가 있는데, 어떤 부인이 혼자 앉았다가 머리 끝이 주뼛주뼛하고 겁나는 마음이 생겨서 미닫이를 열고 방으로 들어가는 데, 나이 이십이 될락말락하고 얼굴은 시골구석에도 이런 일색이 있던가 싶 을 만한 일색이라. 은조사 겹저고리에 세모시 대린 치마를 입고 서늘한 바 람에 추운// 기운이 있던지, 겁이 나서 소름이 끼쳤던지, 파사한 태도가 더 욱 어여쁘더라.

(부인)“ 이애, 금홍아 금홍아…….” 금홍이는 옷 입은 채로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가 본래 영리한 계집이라, 자던 목소리로 대답하여 벌떡 일어난다.

(부인)“금홍이 잠들었더냐?” (금홍)“어젯밤에 송편 빚느라고 늦게 잤더니…….” 하면서 동창에 달그림자를 보고 새 정신이 나는 모양이라.

(금홍)“아씨, 아씨께서 쇤네를 여러 번 부르셨습니까?” (부인)“이애, 달이 아깝지 아니하냐. 이런 달밤에 잠만 잔단 말이냐.” (금홍)“왜 어느새 들어오셨습니까. 또 달구경하러 나가시면 쇤네가 모시 고 구경하겠습니다.”

(부인)“글쎄, 좀더 구경하다가 잘까. 내가 혼자 툇마루에 앉았다가 오동 나무 밑에서 인기척이 있는 듯하여 무서워서 들어왔다.”// (금홍)“아직 초저녁인데 설마 도둑놈 들어올라구요.” 하면서 미닫이를 열고 나서는데, 나이 열다섯이나 열어섯쯤 되고,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어여쁜 얼굴이라. 만일 서울 돌구멍속에 있었던들 남의 종노 릇 아니하고 잘 되러 가고 싶은 마음이 벌써 생겼을 만하더라.

부인이 다시 툇마루로 나가 금홍이를 데리고 달구경을 하는데, 오동 가지 는 의구히 흔드리고 달은 더욱 밝았더라.

부인이 나무 그림자를 피하여 앉아서 달을 쳐다보다가 혼잣말이라.

“저 달은 우리 어머니를 보겠지……. 우리 어머니를 보겠지……. 우리 어머니는 지금 무엇을 하시누. 아마 달 쳐다보며 내 말 하시렷다.” (금홍)“아씨, 달밤에 친정댁에나 가시지요.” (부인)“그렇게 가까우면 작히나 좋겠느냐. 교군을 타고 사흘에 왔으니, 우리가 걸어가려 하면 아마 한 달은 가지.” (금홍)“저 달은 오늘밤에 서해 바다까지 갈 터이니, 아씨께서는 저 달만 쫓아가시면 오늘밤에 서울이야 못 가겠습니까.”// (부인)“하하하, 너는 주둥이를 빵긋하면 고따위 소리만 나오느냐. 내가 친정에 있을 때는 그런 소리를 듣기 좋아하여서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 도록 하였으나, 이 댁에 와서는 누구 듣는 때에 그런 소리를 하면 너를 버 릇없는 것으로 알 터이니, 내 모양이 수통치 아니하냐. 오냐, 아무도 없을 때는 아무 소리를 하여도 계관없다. 내가 근심이 있을 때에 네 말을 들으면 근심을 잊는다.”

(금)“상전부모라 하니, 쇤네가 아씨를 부모와 같이 믿는 고로 버릇없이 응석도 많이 하였으니, 이후에는 그런 일이 있거든 꾸짖으시든지 때리시든 지 하여줍시오.”

(부)“하하하, 옆 찔러 절을 받는다더라마는, 꾸짖어달라 때려달라 하는 년은 너밖에 없겠다. 오냐, 네가 나를 부모같이 믿는다 하니 그 마음 변치 말고 있거라.// 나는 이 댁에 와서 고생을 하든지 호강을 하든지 내 팔자이 어니와, 너는 팔자에 없는 고생을 하니 불쌍하다.” (금)“쇤네같이 펄펄 나다니는 년이야 근심이 되는지 고생이 되는지 무엇 을 지내겠습니까마는, 아씨께서는 근심이 있든지 고생을 하시든지 홍참의 댁 건넌방 한 간 속에만 들어앉으셨으니 오죽 갑갑하시겠습니까.” 부인이 귀로 금홍의 말을 들으며 눈으로 달을 쳐다보며 말 없이 앉았다가 치마끈을 들어 눈을 씻으니, 금홍이가 하던 말을 그치고 마주 낙루하다가 부인 앞으로 다가앉으며 부인을 위로한다.

(금홍)“아씨, 그렇게 설워하지 맙시오. 이 앞에 좋은 때가 많습니다.” (부인) “언제가 좋은 때란 말이냐.” (금)“이애, 꿈 같은 말도 한다. 사십이 못 된 마님이 늙어 돌아가시려면 나는 그 동//안에 늙지 아니하느냐.” (금)“젊으신 때에 고생을 좀 하시다가 노래에 팔자 좋게 지내시면 좋지 요.”

(부)“이 고생을 하면서 늙도록 살아 무엇하게. 나는 마님도 마님이어니 와 제일 작은아씨는 얄미워 못 살겠다.” (금) “글쎄 말씀이올시다. 이 댁 작은아씨는 아마 여우가 되다가 사람이 되었지, 나이 열한 살에 눈치는 어찌 그리 빠르던지. 귀신이 무엇을 먹고 사누. 고런 것을 아니 잡아가니…….” (부)“요년, 목소리 좀 나직나직 하여라. 안방에 들릴라.” (금)“그 소리 들리면 맞아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쇤네도 여기서 볶여 말라죽지 말고 진작 맞아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인과 금홍이가 서로 사정을 말하면 서로 위로를 하느라고 밤 가는 줄을 모르고 앉았는데, 안방 뒷마당에서 건넌방 뒤로 돌아오는 모퉁이에 달빛 없 는 지붕 처마 그림자 밑에서 개가 컹컹 짖는다.// “이 개 이 개, 이 빌어먹을 개 들어가거라. 왜 따라나와서 짖느냐.” 하면서 은근히 개 쫓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는 그 집 작은아씨의 목소리 라. 부인과 금홍이가 깜짝 놀라 벌벌 떨며 수군수군하다가 방으로 들어가더 니 미닫이도 아니 닫고 숨도 크게 쉬지 아니하고 앉았더라.

별안간에 안방에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야단이 난다.

“이애, 서울 재상의 딸은 시어미도 모르고 시뉘도 모른다더냐. 그런 변 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애 네 오라비인가 무엇인가 그 빙충맞은 놈은 재상 집 사위가 되어 부모·동생에게 욕을 먹이면서 그것을 아내라고 집에 둔단 말이냐. 아망위는 부마가 되었어도 기를 펴고 지냈단다. 오장육부가 남과 같이 있는 자식 같으면 그런 아내는 당장 교군을 거꾸로 태워서 쫓아보내고 사당에 고유하고 다시 장가를 들겠다. 너의 오라비 댁인가 태상노군의 딸인 가 그것은 서울 재상의 딸이나 되는 고로// 시어미와 시뉘를 몰라보려니와, 금홍이란 년은 재상집 종년이라고 시골 양반은 제 발샅의 때만치도 몰라 본 단 말이냐. 이애, 사랑에 나가서 너의 아버지 여쭈어라. 금홍이란 년을 때 려죽이겠다. 원주 사는 홍참의가 아무리 대단치 아니하여도 며느리 종년에 게 그까짓 욕은 아니 먹을 터이다.” 하며 악을 쓰는 소리가 나더니 안마당에서 징 박은 신을 신고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나는데, 홍참의 딸이 홍참의를 부르러 나가는 모양이라.

금홍이가 발바닥으로 살짝 나가더니 사랑방 옆에 숨어 서서 귀를 기울이 고 듣는다.

“아버지, 아버지.”

부르는 것은 홍참의 딸이라.

“남순이, 왜 나왔느냐?”

하는 것은 홍참의 목소리라.

(남순)“어머니가 금홍이란 년을 때려 죽인댔어요.”// (홍참의)“금홍이를 왜 때려 죽인단더냐.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때려죽이 나!”

(남)“그년이 어머니더러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 하고, 날더러 여우 되러 가다가 사람 되었다 하며 별소리를 다하여요.” (홍)“그럴 리가 있느냐. 어서 들어가서 자거라.” (남)“에그, 아버지두 참……. 내 귀로 들었는데…….” (홍)“그래, 금홍이가 너의 어머니더러 어서 죽으라 하고, 너더러 여우 같다 하더냐?”

(남)“언니가 금홍이를 데리고 건넌방 툇마루에 앉아서 말하는 것을 내가 뒤꼍 모퉁이에서 들었소. 더 오래 서서 들었더면 별소리가 많았을 터인데, 그 못된 개가 딸라 나와서 오동나무를 쳐다보고 짖기 때문에 내가 개 쫓는 소리를 듣고 언니와 금홍이가 방으로 뛰어들어갔어요.” (홍)“아서라, 이후에 다시는 남의 말 엿들으러 다니지 마라. 계집아이가 그리하면 사람 못 되느니라.// 오냐, 금홍이란 년, 그년 고약한 년이다. 내 가 내일 아침에 그년 불러 꽤 꾸짖겠다. 어서 들어가서 잠이나 자거라.” (남)“어머니가 아버지 여쭈라셔요.” (홍)“오냐, 밤들었다. 네나 들어가 자거라.” (남)“아버지도 들어가셔요.” (홍)“에고 고년, 들어가라 하면 얼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왜 바득바득 조르고 섰느냐. 나이 열한 살이나 먹은 것이 저렇게 미거하여 무엇에 쓴단 말이냐.”

하면서 달그림자가 은은한 방 속에서 남창 미닫이를 열어놓고 가만히 앉아 서 담배만 먹는다.

남순이가 핀잔을 보고 홀짝홀짝 울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 어머니 되는 김씨부인더러 홍참의 하던 말을 낱낱이 말하니, 김씨부인이 그 말을 듣고 손뼉을 치며 야단을 친다.

(김)“이애, 만만한 년은 며느리에게 욕을 먹고 며느리 종년에게 악담을 들어도 하소연할 곳도 없구나. 오냐, 그만두어라. 우리 모녀 다 없어지면 홍씨댁이 잘될 터이다. 팔자가 오죽 사나운 년이 남의 후취댁이 되었겠느 냐. 남순아, 너도 진작 뒈지거라. 너도 여북 팔자가 사나와서 남의 후실의 딸이 되었겠느냐. 네가 복을 많이 타고났을 것 같으면 남의 전설 마누라의 며느리 종님이 되었을 터이다. 너의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의좋은 초취댁 죽 을 때에 왜 돌아가시지 아니하였다더냐. 그래 역성을 하더라도 분수가 있 지. 초취댁 며느리 종년까지 역성을 들고, 나 같은 년은 전실 며느리에게 소리 없는 총을 맞아죽어도 알은 체하여 줄 사람도 없을 터이로구나. 우리 모녀만 죽으면 이 집안에서 몇 사람이 춤을 출지 모를 것이다. 남순아, 너 주고 나 죽자. 그런 인생들이 살아서 무엇한단 말이냐. 오냐, 그만두어라.

오늘밤 내로 너를 쳐 죽이고 나까지 죽어서 여러 사람의 소원이나 풀어주겠 다.”//

하더니 남순이를 쾅쾅 두드리며 독살풀이를 하니 온 집안 사람들이 안방으 로 구름같이 모여드는데, 홍참의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안으로 들어오다 가 보니 금홍이가 안마당 섬돌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손 이 발이 되도록 빈다.

(금) “마님, 작은아씨를 때리시지 말고 쇤네를 죽여줍시오. 쇤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죄를 지었습니다. 철모르는 쇤네는 말을 함부로 하였거니와, 건넌방 아씨에게는 아무 말도 아니하셨으니 죄 있는 쇤네만 죽이시고 아씨 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두시지 맙시오.” 하면서 빌고, 건넌방에서는 모기 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나는데, 그 우는 사 람은 홍참의 며느리라.

본래 홍참의 초취부인의 성은 박씨니, 소생 아들 하나가 있고, 후취부인 의 성은 김씨니 소생 딸이 하나가 있는지라.

초취부인 소생 아들의 아명은 백돌이요 관명은 철식이니, 일곱 살에 그 어머니가 죽고 여덟 살에 계모가 들어오고, 열네 살에 장가를 드니 신랑 신 부가 나이// 동갑이데, 그 신부는 서울 사는 이판서의 딸이라.

백돌이가 자랄 때에는 계모 솜씨에 고생도 많이 하였으나, 장난 몹시 하 기로 유명한 아이라. 고생이 되는지 무엇이 되는지 모르고 자라나는 중에 도리어 그 계모가 성이 가시어 못 견딜 때도 많이 있었더라. 백돌이 자랄 때에 계모가 백돌이를 미워하던 마음이 일년 삼백육십 일에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모인 것이 치악산같이 쌓였을 터이나, 무형무적한 사람의 마음이라 남의 눈에 보이지는 아니하였더라.

백돌이 장가든 후에는 그 계모가 백돌이를 미워하던 마음으로 백돌의 아 내에게 예물 주듯 옮겨주었더라.

금홍이는 이씨부인이 친정에서 데리고 온 종인데, 열 살부터 부인을 따라 와서 일곱 해가 되었는데, 이씨부인이 받는 미움을 같이 받고 있는 터이라.

이씨부인과 금홍이와 둘이 앉으면 안방 식구의 이야기를 하고, 안방 식구는 건넌방 식구의 흉만 하던 터이라.

그 날은 금홍이가 절명일이던지 말을 함부로 하다가 남순의 귀에 들어가 서 그 야단이 났더라. 금홍이는 죽기를 결심하고 김씨부인에게 대죄하나 김 씨 부인이 금홍이는 본체도 아니하고 남순이만 때리다가 홍참의를 보더니 별푸념을 다 하며 독살을 부린다.

홍참의가 두 볼이 축 처지도록 성이 나서 들어오더니 안방 한가운데에 장 승같이 우뚝 서서 김씨부인을 물끄러미 보는 모양이 벼락이나 내릴 듯하더 니 무슨 생각을 하고 눙치는지, (홍)“허허허, 마누라는 종작이 없는 사람이자, 남순이가 무엇을 잘못하 였다고 저렇게 때려…… 며느리가 잘못하거든 며느리를 꾸짖고, 금홍이가 잘못하거든 금홍이를 꾸짖든지 때리든지 할 일이지, 어린 남순에게 분풀이 를 하니 참 이상한 일이요. 남순아, 매맞지 말고 이리 오너라.” 하며 남순이를 부른다.

김씨부인이 남순이를 미워서 쳤던지 귀애서 쳤던지 아프기는 일반이라.

남//순이가 홍참의 앞으로 달려들며 아버지를 부른다.

홍참의가 남순이를 데리고 안방 미닫이 앞으로 가서 앉더니 남순의 머리 를 쓰다듬으며,

(홍)“남순아, 울지 마라. 너의 어머니에게 맞은 매는 아프지 아니하니 라. 허허허.”

하면서 실없는 소리만 하는데, 김씨부인이 그 소리를 듣고 독살이 한층 더 나는 모양이라.

하면서 실없는 소리만 하는데, 김씨부인이 그 소리를 듣고 독살이 한층 더 나는 모양이라.

(김씨부인) “ 여보, 그러지를 말으시오. 그래, 어미에게 뒈지도록 매맞 은 남순이는 아프지 아니하고, 시어미더러 욕하고 악담하던 며느리가 내 소 리이에 속이 아플까 염려가 되나 보구려. 내가 며느리에게 무엇을 그리 심 히 굴어서 그런 소리를 하시오? 그래, 내 속으로 나온 자식은 매를 맞아도 애처로운 마음이 조금도 없이 그 어린 남순이더러 악담을 하고 있단 말이 요.// 남순이가 시집을 가서 며느리 볶는 시어미를 만나서 매보다 더 아프 로 쓰린 꾸지람만 듣고 고생을 하면 영감 속이 시원하겠소. 나는 우리 남순 이를 시집보낼 때에 계모 시어머니 있는 전실댁 며느리 될 곳으로 시집보내 겠소. 남의 전실댁 며느리만 되면 계모 시어미더러 욕을 하기로 계관이 있 소……. 요년 금홍아, 너는 무슨 요약으로 뜰 아래서 빌고 있느냐. 너의 아 씨 같은 상전을 두고 아무 짓을 하기로 겁이 무슨 겁이냐.” 하면서 야단을 치는데, 홍참의는 본래 실없는 쇠 잘하는 사람이라. 김씨부 인의 하는 말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남순이를 데리고 허허 웃으면서 실없는 소리만 하다가 다시는 금홍이를 꾸짖는데 호령이 서리 같다.

“요년 금홍아, 네가 무엇이라, 하였누. 너 같이 요망한 년이 언감생 코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단 말이냐.// 내일 밝은 날은 조년을 대매에 쳐죽 일 터이나, 조년 어디로 달아나지 못하게 꼭 붙들어 두어라.” 하면서 윗목에 그뜩 들어선 계집종들에게 말을 이르다가 다시 그 종들까지 생핀잔을 주며 호령을 한다.

(홍)“이년들, 너희들은 무엇하러 다 이렇게 들어왔느냐, 무슨 구경났느 냐. 냉큼 나가거라.”

하며 종들을 내어쫓더니, 그 부인 김씨를 돌아다보며 가만히 하는 말아, “여보, 남의 눈가림을 좀 하오. 며느리가 그런 일이 있거든 못 들은 체 하고 있다가 나더러만 말할 일이지, 밤중에 야단을 치며 나더러 들어오라 하니 어찌하잔 말이요. 이후에는 금홍이를 쳐 죽이든지 며느리를 쫓든지 하 더라도, 이번에도 며느리와 금홍이를 불러서 대강 꾸짖고 그만 용서하여 주 오.”

하며 허허허 웃고 하는 말이 솜씨도 있고 풍치도 있는지라. 부인의 성이 풀 어졌던지, 그 밤은 다시 아무 일없이 지냈더라.

이씨부인이 그러한 시집에서 날을 보내고 해를 보내는데, 하루 열두 시로 때 // 마다 죽고 싶으나 살아 있는 것은 남편 하나만 믿고 세월을 보내더 라.

김씨부인은 그 며느리를 달달 볶는 솜씨가 날로 늘고, 남순이는 그 어머 니 귀에 오라비댁 흉보느라고 속살거리는 솜씨가 날로 늘고, 이씨부인은 고 생을 할수록 내외 금슬이 깊어가는데, 그 남편 백돌이가 그 아내를 돌아다 보는 체도 아니하면서 마음에만 간절히 불쌍히 여기더라.

하루는 백돌이가 그 부인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이씨부인을 물끄러미 보고 말없이 앉았으니,

(부인)“무슨 걱정이 있소? 왜 잠자코 앉으셨소. 에그, 나도 할 말이 많 더니, 대하여 보니 말이 깍 막혀서 한 마디도 아니 나오구려.” (백) “말을 들으면 젊은 놈이 마음만 상하지 유익한 곳 있소.”// (부인)“에그, 그렇게 마음이 상해서 어찌한단 말이요. 날 생각 마시고 서울이나 가시구려.”

(백)“내가 참 집에 있다가는 점점 마음만 좀스러지고 또 속이 상하여 견 딜수가 없어……어디든지 멀찍이 집안 일을 모르고 지낼 작정이요. 이왕 집 을 떠날 터이면 아주 멀찍이 가지 서울은 아니 가서 있겠소.” (부)“우리 집에 가서 계시면 우리 어머니가 범연히 대접하실 리가 있소.

우리 어머니는 아들도 없이 양자를 하시고,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 뿐인데 밤 낮으로 나만 생각하시던 터에 사위를 만나보시면 오죽 반가와 하시겠 소.”

(백)“허허허, 장모도 딸만 아시면 양자 들어온 처남은 고생낱이라 하겠 수.”

(부)“우리 어머니께서는 양자한 아들이라도 대단히 귀애하시고 며느리까 지도 의뜻이 맞아서 귀애하신다오. 우리 어머니를 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다 그러하지, 누가 양자라고 푸대접하고 전실 소생이라고 미워하는 사람이 세상에 그리 흔하겠소.”// 하면서 눈이 눈물이 가랑가랑하니 백돌이가 그 눈치를 보고 다시 부인을 위 로한다.

“여보, 과히 근심말고 지내오. 사람이 살아 있으면 한때를 봅니다.” 부인이 아무 소리 없이 앉았다가 그 남편의 처음 하던 말을 듣고자 하여 다시 웃는 낯으로 말을 묻는다.

(부인)“여보, 내 걱정은 마시오. 대장부 몸이 되어 처자에게만 구구한 마음이 있으면 무슨 사업을 하시겠소.” (백)“허허허, 개화군의 딸이 다른 것이로구. 무슨 사업을 하는니 못하느 니 하는 소리가 참 제법인걸. 나도 어서 신학문 공부나 좀 하여야 마누라에 게 업신여김을 아니 보겠구.” (부)“여보, 여편네라고 업신여겨서 놀림감으로 말씀하시지 마오.” (백)“허허허,// 놀리기는 누구를 놀려. 두메 구석에서 자라난 사람이 서 울 사람을 놀려, 허허허”

웃으면서 부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니, 부인이 마주 방긋이 웃으면서, (주)“에그, 아무렇게 말씀을 하시던지 듣기 좋소. 내가 시집에 온 후에 오늘같이 마음에 근심 없이 지내본 날이 없었소. 날마다 오늘같이만 세월을 보냈으면 다만 일 년을 살다 죽더라도 소원이 없겠소.” 백돌이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소리 없이 앉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백)“여보 마누라, 마누라는 집에서 고생을 참고 있어 보오. 나는 타궁 에 가서 공부나 하고 있다가 고국에 돌아오거든 그때는 어찌하든지. 미리 말할 것은 아니나 마누라도 차차 기를 펴고 살살이 있을 터이니 부디 과히 근심마오.”//

부인이 그 남편이 타국으로 공부하러 가겠다 하는 말을 듣고 얼굴에 근심 하던 빛을 감추고,

(부)“여보시오, 그런 마음 있거든 하루바삐 서울 올라가서 우리 아버지 께 말씀만 하면 아버지께서는 당장이라도 치행도 하여 주실 것이요. 몇 해 든지 공부하실 동안에 학비도 넉넉히 대어주실 터이니 하루 바삐 떠나시오.

그러나 여기 아버님께서 허락을 하실라구…….” (백)“허허허, 마누라는 개화한 친정 아버지를 자랑하는 말이오그려. 우 리 아버지는 완고의 마음이시니 아들더러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말로만 하 실 일이 아니오. 아버님께서는 머리만 깎는 것도 대기를 하시는 터에 그 아 드님이 머리 깎고 타국 간다는 말을 들으시면 변으로 아실 듯하여 하는 말 이요. 그 하루 삼시로 조석 먹으러 들어오는 것만 보셔도 보기가 싫어 못 견디시는 모양인데…….”

하면서 그 남편의 얼굴을 건너다보니 백돌이가 부인의 얼굴을 마주 건너다 보다 서로 기색이 좋지 못하여 마주보며 말이 없다가 백돌이가 먼저 천연한 기색으로,

(백) “여보 마누라, 우리가 젊은 터에 구구한 생각을 둘 것이 아니라, 마누라는 내가 죽고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나는 마누라가 죽고 없는 사람 으로 여겨서, 내가 몇 해 만에 고국에 돌아오는지 다시 만나는 날에는 죽었 던 사람을 만나보거니 여겼으면 더욱 반가울 터이니 부디 서로 잊고 지냅시 다. 내가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더라도 오늘같이 마누라를 생각하면 허다한 염려되는 마음으로 공부에 착심이 되지 아니할 터이니, 나는 내일 우리 집 에서 떠나는 길로 부모도 없고 동생도 없고 아내도 없고 미실미가한 단독 일신 같이 마음을 먹고 나설 터이니, 내가 외국에 가서 몇 해가 되든지 편 지 한 장 아니 부칠 터이닌 그리 알고 마누라도 내게 편지 부칠 생각을 마 오. 옛적에 오기란 // 사람은 노 나라에 가서 증자의 가르침을 받아서 공부 를 하다가 그 모친이 죽어도 분상도 아니하고 공부만 하오니 증자가 오기를 끊으셨고, 그 후에 노나라에 벼슬할 때에 노나라에서 제나라를 치고자 하여 오기로 장수를 삼고 싶으나 오기의 아내는 제나라 여편네라, 노나라 사람이 오기를 의심하니 오기가 그 아내를 죽이고 장수되기를 구하여 제나라를 쳐 서 크게 공을 이루었으니, 어진 도덕으로 말할진대 오기를 옳다 할 수가 없 으나, 나는 오기를 배울지언정 증자는 배울 마음이 없소. 우리나라 사람들 이 제 몸과 제 부모, 제 처자, 제 집, 제 재물만 중히 여기고 제 나라는 망 하든지 모르는 사람들이라. 제 손으로 제 발등 찍듯이, 우리나라 사람이 우 리나라를 망하여 놓고 분하니, 절통하니, 남에게 천대받기가 싫으니, 먹고 살 도리가 없느니 하면서 저물도록 하는 것은 나라 망할 짓만 하니, 그렇게 미련한 일이 있소. 나는 하늘같이 중한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바다같이 깊이 정든 아내를 잊고 만리 타국에 가서 공부하려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 는 생각에서 나온 마음이요.// 내가 타국에 간다 하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필경 변으로 여기시고 못 가게 하실 터이니 나는 아버지 모르게 도망질하겠 소. 날만 새면 갈 터이니 나 없는 동안에 부디 몸조심하여 잘 지내오.” 남편이 큰 뜻이 있어서 만리타국에로 공부하러 간다 하는 말을 듣고 좋은 마음도 한량없고, 자기는 남편 떠난 후에 계모 시어머니에게 무슨 설움을 받든지 그 설움을 알아줄 사람도 없는 것이 더욱 가련한 노릇이라. 그러나 남편에게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아니할 작정으로 남편의 위로될 말만 한다.

(부)“말씀은 다 좋은 말씀이오마는, 사람이 말과 일이 같기가 쉽지 못합 니다. 오기 같은 영웅이 세상에 또 있기가 쉽소. 지금 하시던 말씀에는 집 을 잊고 나라를 위하겠다 하시면서 나더러 조심하여 잘 지내라 하시니, 오 기 같은 영웅이야 노나라에 공부하러 갈 때에 그 아내를 그렇게 못 잊어 하 였을 리가 있소. 대장부가 일구이언은 못하는 것이니, 부디 날 생각 마시고 공부 성 취한 후//에 고국에 돌아오시오. 나는 집안에는 여간 고생되는 일 이 있더라도 고생을 낙으로 알고 있을 터이니, 내 걱정은 조금도 마시오.” 그렇게 서로 위로하며 작별을 하는데, 초저녁부터 시작한 말이 닭이 두세 홰를 울도록 그칠 줄을 모르더라.

금홍이는 건넌방 웃간에서 헛잠을 자고 드러누워서 소리 없는 눈물이 베 개에 젖었으니, 그 눈물은 제 설움이 아니라 저의 아씨를 불쌍하여 우는 눈 물 이러라. 그때 백돌의 내외는 달빛 없는 그믐밤에 불도 아니 켜고 앞뒷문 열어놓고 단 둘이 앉아서 내일 할 이별을 오늘밤에 미리 하느라고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데, 백돌이가 말로는 그 아내를 조금도 생각지 아니할 듯이 큰 소리를 하나 마음에서 솟아나는 인정이야 어디로 갔을 것이 아니라, 연연한 생각이 한량없다.

부인은 그 남편이 집에 있어서 마음을 상하기보다 활발한 마음으로 외국 에 공부하러 간다 하는 것이 실상 좋아서 간절히 권하였으나, 새는 날은 남 편을 이별하는 날이라. 이별의 회포는 오장이 녹는 듯 스는 듯하여 이 밤이 새지 말고 백년 같이 길었으면 좋을 듯이 여기나, 세상 만사가 사람의 소원 대로 되는 것 // 이 아니라. 그날 밤은 다른 날 밤보다 별로 짧은 것 같다.

적적한 깊은 밤에 안방 식구는 잠이 깊이 들었건마는 이씨부인은 안방 식구 가 말이나 엿들으러 나왔을까 의심이 나서 한시 동안에 몇 번씩이나 마당을 내다 본다.

가을 밤 길다 하던 옛글도 거짓말이라. 어느 틈에 이 밤에 새었던지 주먹 같은 샛별은 동편 하늘에 높이 올랐는데, 하늘에 총총하던 자디잔 별들이 하나씩 둘씩 숨바꼭질하듯이 숨어 없어지고 밝은 기운이 차차 생기는데 그 빛은 오늘날 태양빛이라. 백돌이가 먼동 트는 것을 보더니, (백)“여보, 날이 새었소. 나는 사랑으로 나가 있다가 아침 식후에 어디 로 놀러 간다 하고 그 길로 떠날 터이니 그리 알고 잘 있으오.” 하면서 일어나서 사랑으로 나가는데, 부인이 그 남편 나가는 것을 보며 아 무 소리 없이 앉았다가 쌍창 미닫이 문지방 위에 고개를 푹 수그려 엎드리 더니 소리 없이 우는데, 정신을 잃었던지 날이 활짝 밝도록 모르고 있더 라.//

“아씨 아씨, 일어납시오. 앞뒷문을 열어 놓고 여기 이렇게 계시면 못씁 니다. 안방 마님이 일어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일어납시오. 문 닫겠습 니다.

하면서 부인을 부르는 것은 금홍이라.

부인이 머리를 들어 금홍이를 보다가 앉은 채로 아랫목을 향하여 툭 쓰러 지는데, 금홍이는 다 밝은 날 새로이 앞뒷문을 소리 없이 닫고 부인 앞으로 와서 앉더니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니하고 눈물을 떨어뜨린다.

부인이 누운 채로 고개를 둘러 금홍이를 보면서, (부인)“이애 금홍아, 서방님은 타국으로 공부하러 가신단다. 서방님도 아니 계시면 우리가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이냐.” (금홍)“쇤네도 새벽에 잠이 잠깐 깨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서방님께서 타국에 가시면 아씨께서 섭섭하신 마음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마는 아씨께서는 부디 근심말고 계십시오. 서방님이 이런 시골구석에 계시 면 아씨께서 이 고생을 면하실 날이 없습니다. 뜻밖에 서방님께서 만리타국 에 가서 공부를 하신다 하니 서방님 내외분은 좋은 운수가 돌아올 때가 되 었습니다. 아씨께서 눈 끔쩍 몇 해 동안만 고생을 참고 계시면 이후에는 좋 은 일만 있을 터이올시다. 서방님께서 귀히 되시면 세상 사람이 아씨를 쳐 다볼 터이니, 그때는 마님께서도 아씨에게 그렇게 몹시 구시지 못합니다.” (부)“오냐, 말은 좋다마는 나중 일이 어찌될지 아느냐. 지금 내 처지에 근심을 마자 한들 아니할 수가 있느냐. 이에 금홍아, 늦도록 잔다고 마님께 걱정을 들을라. 어서 일어나서 세수도 하고 일이나 하자.” 하면서 일어나서니, 근심할 새도 없이 분주하더라.

그날 아침에 홍참의 부자가 아침밥을 먹으러 들어왔는데 본래 홍참의 집 가 // 규가 그러하던지, 홍참의가 밥을 먹으려면 김씨부인의 고부와 백돌의 남매가 안방에 모여 있어서 홍참의 밥 먹는 것을 보다가 홍참의가 밥을 먹 고 나간 후에 다른 사람들이 밥을 먹는데, 홍참의는 말이 드문 사람이나 밥 상을 받으면 잔소리를 하는 위인이라.

(홍)“이애 백돌아, 너는 요새 글 한 자 아니 읽고 왜 편편히 노느냐?” (백)“요새는 좀 보는 책이 있습니다.” (홍)“응, 보는 책이 무엇이란 말이냐. 쓸데없는 책 보지 말고 다만 한 자를 보더라도 경서를 읽어라. 그래, 네 소위 본다는 책은 무엇이냐?” (백)“해국도지를 얻어다가 봅니다.” (홍)“해국도지, 해국도지, 해국도지가 무엇이냐, 책을 보려 하면 우리 집에도 볼 만한 책이 그득한데, 해국도지를 빌려다가 본단 말이냐. 이애, 너도 개화하고 싶으냐. 어, 저 자식이 서울 몇 번을 갔다오더니 사람 버리 겠구.” //하면서 그 부인 김씨를 건너다보니 김씨부인이 홍참의를 마주보 며,

(김)“서울로 장가들었다가 그만한 처가덕도 못 보아서 쓰겠소.” (홍)“서울 가서 장가들었다고 난봉이 되려면 서울 사는 사람들은 다 난 봉이 되게……. 이애 백돌아, 집안에 못된 책 얻어들이지 말고 오늘부터 맹 자를 읽든지 논어를 읽든지 하여라. 사람이 제 마음만 단단하면 어디를 가 기로 계관이 있겠느냐마는, 너같이 중무소주한 것이 서울이나 자주 가면 마 음이 들떠서 못 쓰는 법이니, 다시 서울 가지 마라. 아비의 말을 아니 들으 면 집이 망하는 법이라. 조심하여라.” (김)“에그, 영감은 별말씀을 다 하시구려. 집이 망하기는 왜 망해요. 개 화한 아들 있겄다, 개화한 며느리 있것다, 집이 잘되지 망할 리가 있소. // 나는 벌써 개화한 며느리 덕을 많이 보았소. 욕을 아니 먹을까, 악담을 아 니 들었을까……여보, 개화한 며느리가 아니면 무슨 인기에 시어머니더러 욕하고 악담하겠소?”

하면서 입은 동으로 내리 실그러지고 눈은 서로 모두 떠 홍참의를 보는데, 검은 동자가 반은 웃눈까풀 속으로 들어갔다.

홍참의 잔소리가 좀더 나올 터이나, 김씨부인의 며느리 말을 내는 것을 듣고 민망한 마음이 생겨서 다시 말 없이 사랑에 나가더라.

아랫목에는 김씨부인이 남순이와 겸상밥이요, 그 옆에는 백돌의 밥상이 요, 윗목에는 이씨부인이 밥상을 받고 앉았는데, 아무도 숟가락을 아니 들 었으나 백돌이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범 본 놈이 창구멍 틀어막듯이 황황히 밥을 먹으니, 그렇게 급한 것은 어서 먹고 서울 길 떠나려는 마음이라. 그 마음 집작할 사람은 윗목에서 밥상 받고 앉은 이씨부인과 마루에서 왔다갔 다 하는 금홍이라.

백돌잉가 숟가락을 치우고 선뜻 일어나더니 이씨부인을 언뜻 건너다보며 밖으//로 나아가니, 이씨부인이 구슬 같은 눈물이 똑똑 떨어지며 고개를 윗 목으로 돌이키고 앉았다가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여 일어나 나가더니 건넌방으로 건너가며 스르 죽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이애 금홍아, 내가 별안간에 가슴이 아파서 밥 먹을 수가 없다. 네가 들어가서 내 밥상 좀 치워라.” 하면서 건넌방으로 들어가다가 안중문간으로 나가는 백돌이를 돌아다보는 데, 그 소식을 귀신이 전하였든지 백돌의 마음이 켕겨서 그러하든지, 백돌 이가 선뜻 돌아다보다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 가면 언제 볼지 모르는 이별이라. 그러한 이별이었으나 이별도 기를 펴고 할 수 없는 사정이라. 백돌이가 주저주저하다가 헛기침을 두 번을 하 며 쑥 나아가니, 이씨부인이 건넌방 지게문고리를 붙들고 정신 없이 중문간 만 바라보고 섰는데, 그 남편은 보이지 아니하고, 안방에서 수군거리는 소 리 잠깐 들리거늘, 이씨부인이 돌아다보니 안방 미닫이에 붙인 유리에 시어 머니 이마가 꼭 붙어서 내다본다.// 며느리가 제 남편에게 미쳤느니, 아들이 그 아내에게 허기를 졌느니 하며 신이 나서 흉보는 시어머니 목소리가 귀에 펄펄 들어오나, 이씨부인이 그날 은 그보다 더한 소리를 듣더라도 그까짓 소리로 근심이 될 것은 조금도 없 고 정신이 그 남편에게만 있더라. 빈방에 혼자 있어 얼빠진 사람같이 우두 커니 앉았다가 혼잣말이라.

“날개가 돋쳤으면 활활 날아 좇아가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몇 백 리 가는 길에 동행 없이 가느라면 고생인들 오죽 될꼬. 원주에서 서울만 가 려 하여도 그렇게 고생이 될 터인데, 만리타국을 가려 하면 그 고생이 어떠 할꼬. 남편이 큰 뜻을 먹고 만리타국으로 공부를 하러 간다 하니 아내 된 이 내 마음에 좋기도 한량없건마는, 며느리를 원수같이 달달 볶는 계모 시 어머니 솜씨에 내 목숨이 살아 있다가 남편의 얼굴을 다시 볼까.” 이씨부인은 그 남편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백돌이는 남자의 마음이 라. 안중문간에서 그 부인을 돌아다볼 때까지는 발길이 차마 돌아서지 못하 였으나 문밖으로 나서면서부터 그 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없고 외국으로 가려는 경륜에만 골똘하더라.

떠난 지 수일만에 서울로 올라가서 그 처가로 들어가는데 그 처가는 집도 큼직하고, 문간에 하인 낱이나 있는 터이라. 앞뒤 모양새만 보는 사람 같으 면 그런 집에 들어갈 때에 길목이나 빼고 새 버선이나 가아 신고 들어갔을 터이나, 활바랗고 숫기좋은 백돌이는 황토 묻은 길 짚세기 신은 채로 서슴 비 아니하고 대문간으로 들어가는데, 비록 짚세기는 신었으나 그 집에는 별 상 행차나 들어노는 듯이 온 집안이 떠들더라.

계집종들은 달음박질하여 안중문간으로 들어가며, “마님 마님, 원주 새서방님 오십니다.” 하는 소리가 백돌의 귀에까지 들린다. 하인청에 있던 하인들은 백돌의 앞을 질러서 절을 꾸벅꾸벅하며,

“소인 문안드립니다.”//

하더니, 일변으로 큰사랑 마당으로 앞서 들어가며 원주서방님 오신다고 노 문을 놓는다. 백돌이가 큰사랑 마루 끝에 짚신을 벗어 놓고 황토가 뚝뚝 떨 어지는 발로 큰 사랑으로 들어가서 주인 이판서에 절을 하니 주인 이판서가 그 사위를 그렇게 대단히 귀애하던지, 그 사위가 앉기도 전에 데리고 안으 로 들어가더니, 그 부인 박씨와 느런히 앉아서 사위를 데리고 이판서 내외 가 돌려가며 말을 묻는다.

(이)“이애 홍철식아, 너의 아버지께서도 나같이 백발이 나셨느냐?” (홍)“…….”

(박씨부인)“여보게, 자네도 딱한 사람일세. 자네가 오겠다고 편지만 하 면 서울서 교군을 보냈지. 그 먼데를 걸어왔단 말인가. 그래 내 딸도 잘 있 나. 자네가 하인도 아니 데리고 왔으니 내 딸이 편지도 못 부쳤겠네그려.

이 사람, 자네가 편지 좀 가지고 오기로 어떠할 것 무엇 있나. 아무리 없으 니 말일세마는, 요새는 내 딸이 자네 안부모에게 귀염을 좀 받//나” 하면서 눈물을 씻는다.

이판서가 그 부인의 모양을 보더니 또한 그 딸의 고생사는 생각을 하고 마음이 좋지 못하여 남창 미닫이를 열고 안석을 문지방 앞으로 바싹 다가놓 더니 머리를 들어 남산을 내다보며 말없이 담배만 먹고 앉았으니, 홍철식이 는 그 장인 장모의 모양을 보고 일변으로 무안한 생각도 있고, 일변으로 장 인 장모가 불쌍한 생각도 있고, 일변으로는 자기 집 가간사가 남에게 부끄 러울 만한 일이니 홍철식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터이라. 더구나 그 어머 니가 며느리에게 심히 구는 일로 며느리의 친정 부모가 가슴이 쓰려 하는 모양을 보고 무엇이라 말하리요.

그러나 그 어머니는 홍철식이도 원망이 철천하던 계모요, 그 아내는 홍철 식이가 정이 찰떡같이 들었던 아내라. 원주서 서울로 떠나올 때는 외국으로 유학하러 가려는 생각만 골똘한 중에 아내를 불쌍히 여기는 생각이 오히려 적더니, 그 처가에 와서 장인 장모의 모양을 보고 홀연히 없던 생//각이 새 록새록 난다.

그 어머니가 기를 버럭버럭 쓰며 극성을 부리던 모양도 눈에 선하고, 남 순이가 살살 돌아다니면서 말전주만 하던 일도 눈에 선하고, 그 아내가 밤 낮 없이 수심이 첩첩하여 세상에 살아 있는 낙이 없이 지내는 모양도 눈에 선하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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