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抗議[ 항의] 시장에서 돌아온 부인과 함께 강교수가 혜화동 아들네 집을 찾은 것은 이럭저럭 한 시간후가 되었다.
오후 네 시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경숙이는 동생 셋을 데리고 건넌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안방에 있는 어머니의 동정만 조용히 살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경숙의 말을 곧잘 들었다.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고 놀음에 팔려 떠들어 대다가도 경숙이가 시선만 조금 추켜도 금방 조용히 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허수로이 취급하기 시작한 이 가정의 보호와 옹립을 위한 책임과 사명을 열 일곱 살인 경숙이가 무언 중에 짊어진 형식이 되어 있었다.
그때, 옥영은 안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남편이 돌아오면 볼 수 있도록 현재에 있어서의 자기의 심경을 솔직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경숙이와 정릉 시부에게도 간단한 편지를 써 놓고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집을 나갈 작정을 하고 있는데 시부모가 들어선 것이다.
옥영은 얼른 편지를 서랍 속에 집어 넣고 시부모를 맞이하였다. 기가 차서 들어서는 시부모의 기색에서 옥영은 이미 남편의 사건 때문에 온 것을 알고있었다.
시부모는 얼떨김에 순서 없이 남편의 이야기를 단도직입으로 물어오는 데 대해서 옥영은 극히 침착한 태도와 어조로 지나간 일을 조리 있게 쭉 설명 하였다.
『원 이런 변이 어디 있노? 다른 사람이면 모르지만 네 남편이 설마 이럴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니……?』 시부모는 이야기를 들어가는 도중에도 이 말을 수 없이 되풀이했다. 적어도 자기 남편 강학선 교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남편을 믿듯이 아들의 굳건 한 인간성을 믿고 있던 시모인만큼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내린 것처럼 늙은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음, 네 고생스런 마음이나 또 네 거북스런 처지를 잘 알았다.』
오랜 침묵 후에 강교수는 신음하듯이 말 하며, 『 너를 대할 낯이 내게는 이제 없다. 적어도 내 아들만은, 인간의 성실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고, 내가 그처럼 고창하면서 길러낸 내 아들만은 믿었었는데…… 뭐라고 너를 위로할 말이 없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 침통한 표정이 늙은 강교수의 주름진 얼굴을 무겁게 덮어 왔다.
『그렇지만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시모가 위로를 하며, 『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충신이 나는 것처럼 집안이 평안치 못할 때 열녀가 나는 법란다. 애 아범이 과히 미련하지 않은 위인이니 이제 모든 것을 청산 해 버리고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정을 지켜야지.』 『어머니 말씀이 지당하신 줄을 잘 알고 있어요.』
옥영은 고개를 소그듬히 숙이고 조용히 대답했다.
『암, 그렇고 말고! 네가 엔간한 사람이라고 내 말을 못 알아 들으련 만도…… 』『 그렇지만 어머니.』 옥영은 시선을 들어 시모를 바라보고 나서, 『 미련하고 못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아무리 기를 써도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가 없어요. 저로 하여금 마음을 단단히 가지도록 한 원인이 남편의 애정에 있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오늘, 무엇을 가지고 마음의 기둥을 삼으라는 말씀이신지…… 원인 없는 행동을 저는 취할 수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열녀도 되고 싶지 않고 현모 양처도 되고 싶지 않아요.』 강교수 내외는 적이 놀라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너…… 』 시 모는 마음의 놀람을 억제 하며, 『 널더러 열녀가 되라는 건 아니지만 너는 네 남편의 아내인 동시에 네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냐……?』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어쩌니?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이전처럼 못 받게 된 자식들을 위해서 이런 때 일수록 아버지의 몫까지 어머니 가도 맡아야만 할 텐데… 』『 도 맡을 기력을 저는 잃어버리고 있어요.』 『안될 말이다.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지. 집안이 이처럼 어지러워진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처리해 왔는지, 너도 잘 알 것이 아니냐? 모두가 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가정을 지켜 왔단다. 그것이 소위 모성애라 는건데…… 』『 어머니의 말씀 잘 알아 모시고 있지만, 그리고 부모님 앞에서 너무도 당돌한 말 같지만 그리고 또 제게도 그만한 모성애는 있지만, 그렇지만 세상의 아내들이 모두가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저도 따라 할 수는 없어요.』 『무슨 말인지, 도시 알 수가 없구나. 너처럼 얌전하고 똑똑한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옥영은 고개를 숙이고, 『 제가 그이와 결혼한 것은 단지 밥이나 벌어다 주는 경제적 보호를 받기 위해서 한 것도 아니고, 또 자식을 낳아서 모성애를 발휘하고 그 모성애 속에서 행복을 구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어요. 오직 한 가지 영원히 변함이 없는 남편의 애정이 소중해서 결혼을 한 것이었어요.』 『그야 그렇겠지만…… 』 논리의 궁핍을 느끼고 시모는 시부의 표정을 언뜻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 교수는 시종 여일하게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가정을 지킨다든가 자식들을 보호하고 양육한다든가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제 결혼 목적이나 결혼 의식 속에는 없었어요. 있다면 그것은 다만 남편의 애정을 차지하기 위한 하나의 부수적인 결과로서 밖에는 없었어요. 이런 말은 아이들이 들으면 저를 냉혈동물이라고 원망할 런지 모르지만…… 그것도 하는 수 없는 일이예요. 저는 지금 한 여자로서의 숨김 없는 결혼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예요. 진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예요.』 사실 건넌방에서는 경숙이가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던 것이다.
『네 생각을 잘 알겠다.』
오랜 침묵 끝에 강교수가 비로소 말을 받아 왔다.
『네 생각을 잘 알지만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싶읍니다.』
옥영은 고개를 들었다.
『인간에게는 인류의사(人類意思)라는 것이 있다. 자기의 연장을 바라는 종족 보지( 種族保持) 의 의사가 그 하나요, 인간의 번영을 바라는 문화 보지( 文化保持) 의 의사가 그 둘이다. 그것은 인류의사인 동시에 우주의 의사요, 신의 의사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결혼은 목적이 아니고 인류의 수단인 셈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고생이 이루 말 할 수 없을지 금의 너에게 이러한 우원한 이야기가 보탬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생각의 키 를 조금이라도 돌려야만 할 너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면 하고 말이다.』 『저 역시 제 마음의 키를 돌릴 수만 있다면 돌려 보고 싶읍니다.』
『그렇다면 좋아. 역시 너는 너 자신을 다룰 줄 아는 총명을 가진 사람이 다.』
이 며느리의 똑똑함과 얌전함을 강교수 내외는 다시 한 번 발견하고 있는것이다.
『결혼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수단일진대, 오늘의 네 남편의 불미로운 행실에서 받는 네 마음의 타격을 다소라도 무마할 수 있을까 해서 하는 말인데…… 그러한 인류의사를 존중하여 너의 연장을 의미하는 아이들의 양육을 위하여 삶의 힘을 얻어야 하겠고 가정을 지킨다는 문화적 사명을 느껴야만 한다는 말이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뜻을 알아 들을 것 같읍니다.』
『고마운 말이야. 옛날부터 방탕한 남편을 지닌 뭇 아내들이 곧잘 고 규를 지켜 왔지만, 그리고 요새 사람들은 그것을 오로지 봉건 사랑의 희 생물처럼 여기고 아내들의 굴욕적인 노예생활로서 간주하고 있지만…… 아니, 그것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그렇게만 단정해 버리 기에는 좀더 숭고한 정신이 그들에게 깃들어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좀더 커다란 인류의식, 좀더 엄숙한 인간애의 사도(使徒)로서의 사명을 절실 히 느끼고 자식과 가정을 지키는 데 엄숙한 긍지를 갖고 살아 왔다고 믿고싶다. 남편의 애정을 잃었다는 데서 오는 허무와 비굴의 감정보다도 가정을 지키고 어떤 생명들을 보호 양육하는 문화사적(文化史的)인 사명과 숭고한 모성애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극히 높이 평가하면서 살아 왔다고 생각하고 싶다는 말이다. 결국 그들은 인류의사의 실천자들이었다. 인생의 수단인 소아적인 결혼 의식을 지양(止揚)하고 그의 목적인 좀 더 커다란 대아적인 사명을 다해 온 것이다.』 거기서 강교수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현재의 네 다급한 감정으로서는 이런 말이 잘 들리지 않을런지 모르지만 네 마음의 키를 조금이라도 돌리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일 뿐이다.』 『아버님 말씀 감사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지는 않아요.』
옥영은 방바닥을 손가락으로 빡빡 문지르면서, 『 그렇지만 제가 그런 심경에 도달하기에는 많은 노력과 오랜 시일이 필요할 것 같아요. 또한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될런지도 의문이예요. 제 남편이이래서 는 안되겠다 안되겠다 하면서도 결국은 영림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저 역시 아버님의 말씀이 지당하신 줄을 알면서도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 하는데 인간의 약점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예요.』 『물론 노력을 해야지. 당장 되는 일이 아니니까…… 』 『 그러나 저는 그렇게 까지 노력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버님은 인류 의사니 신의 의사니 하는 말씀을 하셨지만 따지고 보면 저는 신을 생각하기 전에 인간을 생각하고 싶고 인류를 생각하기 전에 김옥영이라는 개인을 생각 하고싶을 따름이예요. 신이 있고 인류가 있었기 때문에 김옥영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김옥영이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있고 인류가 있는 거니까요.』 『어서 말을 해 봐라.』
강교수는 점점 난처함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총명한 여성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마는 그 총명이 이러한 종류의 논거(論據)를 지니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강교수 내외였기 때문이다.
『당돌하다고 꾸지람하실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아버님께 하나만 여쭙겠읍니다.』 『좋아.』
『아버님께서는 어머님과 결혼하실 때, 인류의사의 실천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셨는지, 그것이 알고 싶읍니다.』 『음………』
강교수는 불현 듯 옆에 앉은 부인을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을 사랑하시면서 결혼을 하셨다고 들었읍니다. 그러한 결혼에 있어서 아버님은 과연 어머님을 귀애하신 애정이 한낱 수단 이었고 종족보지와 문화사적인 사명을 목적으로 의식하셨는지, 그것이 알고 싶 읍니다. 이 말은 또한 어머니에게도 하는 물음이예요.』 『글쎄 나야 뭐 아느냐만…… 결혼을 하여 애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가지겠다고 생각하는 건 인정이 아니겠느냐?』 시모의 대답이었다.
『아냐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처음부터 애정 없는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냐요. 어머님과 아버님의 경우나 또는 저희들의 경우처럼 애정을 토대로 하고 이루어진 결혼에서 말이예요. 이러한 애정 결혼에서 과연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룩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생각하시고 애정을 다만 그 수단으로서의 식하셨는지, 그 말이예요. 제 솔직한 경험을 말씀 드리면 저는 남편의 애정 그 자체가 목적이었어요. 그 애정의 결과로서 오는 결혼이라든가 출산이라든가 가정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결코 목적이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그러한 결과로서 오는 결혼, 출산, 가정이라는 것이 남편의 애정을 독점하는 좋은 유대(有待)가 되고 울타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구태여 거부 하지 않고 허용했을 뿐이었어요.』 『음,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기의 대를 이어 나가고 싶 어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잠재해 있는 것인데…… 』『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생물에게 부여된 하나의 잠재의식일 뿐, 인간 의식 위에는 그것이 주목적으로 나타나 주지를 않는다는 말씀이예요. 제 생각이나 성품으로서는 더우기나 그래요.』 강교수는 마침내 대답을 잃고 말았다.
『모르기는 하지만 아버님과 어머님도 저희들과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믿고싶어요. 다만 아버님께서는 어른되신 입장에서나 전공하신 학문적 입장에서가 정의 평화와 인류의 친화를 위해서 인간의 감각을 신의 심리에 맞추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실까요……?』 강교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 나는 네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강교수는 놀라는 시선을 며느리에게 조용히 던지며, 『 오늘날 사십대의 주부들이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네 어머니의 사십대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러기에 말이요. 내가 네 나이에는 생각도 못하던 소리다. 세상에는 도덕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서운 하늘도 있고…… 』 시 모가 적지 않게 나무라는 소리였다.
『아냐요, 어머니. 저희들에게도 도덕은 있어요. 남만 못지 않은 모성애도 있구요. 다만 저희들은 그 도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알고 싶을 따름이예요. 옛날 사람들은 모성애만으로서 가정을 지켜 왔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도 그럴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말(本末)이 전도된 삶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이예요. 남편의 애정을 잃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모성애라도 붙들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아내들의 참된 삶의 자태라든가 숭고한 인간애의 발로이기 때문에 자진 좋아서 하는것은 아니지요.』 『어쩌면 요즈음 애들은?』
시모의 나무람은 점점 더 커갔다.
『어머님께 실망만 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제 생각을 솔직히 말씀 드려 아버님의 충고와 고견을 듣고 싶을 따름이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다, 솔직히 말해 다오. 내가 듣겠다.』
오늘 밤으로 집을 나가야만 한다는 옥영의 결심은 조금도 풀릴 줄을 몰랐다. 옥영이가 지금 시부인, 강교수에게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심경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데는 숨은 이유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슬픈 감정에서 나오는 넋두리가 아니고 집을 나가지 않아도 좋을만한 무슨 신통한 교훈의 말이라든가 또는 자기가 미처 생각하지 못 한 논리의 모순 같은 것을 지적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구태여 집을 나가지 않아도 좋았다. 문제는 집을 나가지 않고도 이 굴욕적인 감정과 상처 받은 인격이 무마되고 보상된다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옥영은 다시 말했다.
『모성애는 위대할런지 모르지만 뭇 아내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부부 애라고 제게는 생각되어요. 부부애를 상실한 아내들이 모성애의 위대하고 숭고함을 떠메고 나오는 것은 일종의 허세일 거예요. 그렇게라도 해야만 자세가 서니까요. 뿐만 아니라, 남성들이 소리를 높여 가면서 여성들의 모성애를 극구 찬미하고들 있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아내들을 일종의 보모 로서 가정에 동여매 두고 싶은 생각에서 억지로 떠맡긴 대의명분에서 지나지못하지요. 아내들은 또 아내들로서 그러한 대의명분이라도 떠메고 나서야만 체면이나 자세도 설 뿐더러 고규를 지킴으로써 경제적 무능으로 말미 암은 생활 난을 모면할 수가 있기 때문이예요. 경제적 자립을 피할 수 있는 사람치고 남편의 방탕을 눈감아가며 위대하다는 모성애만으로써 가정을 지키는데 만족해 할 아내가 있을 것 같지는 정녕 않아요.』 시모는 또 새침한 표정으로 며느리를 바라보았고, 시부는 덤덤히 앉아서 며느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자들에게는 가정 생활 이외에 사업이라는 게 있다지만 여자들에게는 가정 생활 그것이 인생의 전부예요. 제 남편은 여자들의 그러한 입장을 잘 이해하고 가정이 곧 낙원이라고 까지 말하며 충실한 결혼 생활을 쭉 계속 해온 사람이지요.』 『그렇고 말고. 그 애가 어쩌다가 이번에 한 번 걸려 들었지, 내 아들이라고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죽 신통했느냐! 그러니까 애 어미도 좀 너그럽게 생각해야하지 않겠니? 남자들이란 모두 그렇다는데…… 』 시 모의 말이 이번에는 애원조로 나왔다.
『참, 아버님. 한 가지 진심으로 여쭈워 볼 말씀이 있읍니다.』
옥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냐, 어서 말을 하렴.』
시부는 고개를 들면서 대답 했다.
『이제 어머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제 남편이 본시부터 헤실픈 사람 이었다면 모르지만 그만큼 자각이 있고 굳건하고 이해심이 풍부한 사람이 이번 일을 저지른 데는 무슨…… 저희들 여성이 엿볼 수 없는 무슨 뿌리 깊은 이유 같은 것이 꼭 있을 것만 같아요. 이제 어머님도 말씀하셨지만 남자란 모두가 다 그런가요……?』 옥영은 빤히 고개를 들었다.
『모두라고?』
강교수는 얼른 외면을 했다. 며느리의 시선을 근엄한 강교수로서는 정면으로 받아 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연애결혼이었읍니다. 그이는 저를 아내로서 귀여워 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대해 주었고 참답게 자기를 알아 주는 지기로서 대하여 주었읍니다. 어느 모로 따져 보나 빈 틈이 없는 가정이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이는 마침내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저 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예요. 그것이 제게 대한 애정의 결핍에서 오는 것인지, 또는 그 밖의 무슨 다른 이유에서 오는 것인지, 어머님의 말씀대로 남자란 다 그렇다는 데서 오는 것인지……? 아버님, 제게 진실을 알리 켜 주세요.』 강교수는 힘이 들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며느리에게서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일 이기에 과거 대학 총장까지를 거쳐 온 윤리학 대가인 이 늙은 교육자는 다만 며느리의 입으로 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된 시대의 변천만을 뼈아프게 느끼고있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추종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아니, 인간의 이성이다. 이성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보배로운 재산이다. 인간 이이 보배로운 재산을 포기할 때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는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초극하고 있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상태를 목표 삼아 노력하며 걸어나가는 데 인간의 이상은 있는 것이다.』 명확한 대답을 피하고 강교수는 그렇게 말하여 완곡한 답변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면 아버님, 있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상태를 목표 삼아 걸어 나가기 위해 서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 읍니까? 현재를 모르고 장래를 무턱대고 꿈꾸기는 싫읍니다. 남편을 모시고 일생, 이생, 삼생을 살아도 겨웁지 않을 제 욕망인데 남편은 겨우 십 팔 년간을 한도로 이 가정을 버렸읍니다. 왜 그렇까요? 역시 제게 대해서 싫증을 느낀 탓이 아닐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다. 네 남편은 너를 가리켜 일생에 단 하나 뿐인 여성이요. 친구요 동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 『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버리고 딴 여자에게로 갔을까요?』 『사랑이란 가다가 마음이 비이는 순간이 있는데 그러한 순간이 나쁜 환경과 우연히 겹쳐질 때, 자칫하면 후회를 가져올 행동을 저지를 수도 없지 않아 있는 건데……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그런 종류의 탈선이 아닌가 생각 한다.』 『당돌한 말씀이지만 아버님도 과거에 그러한 순간을 느낀 적이 계신가요?』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 강 교수는 다소 무안한 듯이 마누라를 힐끗 바라보고 나서, 『 그러나 그러한 순간은 인간의 노력으로써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옥영은 머리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 제 친구의 남편 한 분이 어떤 연회 석상에서 돌아왔을 때, 친구인 그 아내는 적지 않게 불안한 마음으로 그 연회 석상에 와 있던 젊은 기생들을 걱정 하는 말을 했었다고요. 그랬더니 그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은 무슨 그런 걱정을 하느냐고, 자기의 눈에는 그 기생들이 마치 요릿상에 놓인 술 도 꾸리와도 같은 하나의 무생물로 밖에는 비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내의 신경과민을 일소에 붙이더라는 말을 저에게 한 적이 있어요. 이런 말을 저희들 아내는 어떻게 들어야만 하는가요……?』 『남의 일은 내가 알 수 없고…… 』『 남의 일이 아니예요. 인간인 남성들의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그 인간을 연구하시는 철학자이신 데…… 』 강 교수는 정말 딱했다. 며느리와 한 자리에서 남성들의 쎅스를 토론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이 거북스런 입장이 숨막힐 것 같이 괴로왔다.
『나의 전공은 실천철학인 윤리학이다. 마음의 풍경보다도 행동에 치중하고 있는 건데… 다시 말하면 마음의 소재(所在)를 인류 의사에 맞도록 초극 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곧 내 학문에 주목적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모든 문화는 지리멸렬, 있는 것은 다만 질서와 균형을 상실한 양 육강식의 정글 시대일 것이요, 본능적인 에고(自我)만이 중뿔나게 날뛰는 암흑시대로 변했을 것이다.』 『아버님 말씀 잘 알겠어요. 그렇지만 현제의 제 관심은 인간의 행동이 아니고 마음의 풍경이예요. 인류의 문화가 지리멸렬이 되건 약육강식의 암흑시대가 오건, 저는 지금 제 남편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고 싶었을 따름이예요. 그리고 인제 그것을 알았어요. 젊은 기생들을 도꾸리 병 쯤으로 여기고있었다는 제 친구 남편의 말이 진실과는 얼마나 동떨어진 말인지도 알았고 동시에 아내의 마음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한 지극한 사랑의 말인줄도 알았어요. 그렇지만…… 』 옥영의 표정이 일순간 허탈한 사람처럼 몽롱해졌다.
고영림이라는 한 젊은 여성에게 남편을 빼앗겼다는 데서 오는 허무보다도 좀 더 뿌리 깊은 인류적이요, 우주적인 커다란 허무감 앞에 한 사람의 성실한 아내 김옥영 여사는 우뚝 서 있었다.
강석운 대 김옥영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 대 아내의 문제요, 남성 대 여성의 문제였다.
결혼 생활의 허무, 따라서 뭇 여성들의 불행한 운명을 옥영은 생각했다.
한 사람의 남편을 위하여 일생을 바칠 수 있는 여성들의 애정의 자세와 한 사람의 아내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데 노력을 필요로 하는 남성들의 애정의 자세를 옥영은 생각했다.
남녀의 이 운명적인 영원한 비극 앞에 김옥영 여사는 삶의 희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아버님,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편이 도리어 행복했었읍니다. 안다는 건 불행한 일이지요. 세상의 모든 아내는 부처님이라고 부처님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사는데 아내들은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는, 어떤 외국 작품을 읽은 적이 있지만 그때도 저는 제 남편만을 믿고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버님을 새삼스레 존경하고 싶읍니다.』 『어쨌든 네 남편을 빨리 만나야겠는데…… 』『 만나셨 댓 자 소용이 없을 거예요. 또 만나지도 못하실 거구요. 아까 신문사 송기자가 와서 하는 말이, 남대문 밖 태양호텔에 있었다는데 송 기자에게 들킨 줄을 알고는 호텔을 곧 뜬다니까요.』 『남대문 밖 태양호텔?』
강교수는 훌쩍 일어서며, 『 여보, 당신도 같이 갑시다.』
『호텔이 어딘지…… 』『 남대문 밖에 가서 찾으면 알 수 있오. 신문사로 가서 송기자를 데리 고가도 좋고…… 』 강 교수 내외는 창황한 걸음으로 방을 나서며 옥영을 향 하여, 『 내 어떡하든 데리고 올 테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해야 한다.』 옥영은 따라 나가서 현관까지 늙은 시부모를 전송했다.
그리고는 곧 되돌아 와서 아까 쓰던 편지를 다시금 끄집어내서 펜을 들었다.
식모는 부엌에서 저녁 불을 때고 있었고 아이들은 건넌방에서 짹 소리도 없었다.
아들을 찾아 남대문 밖을 한 시간이나 헤메다가 태양호텔을 발견한 것은 아홉 시가 넘었을 때였다.
그러나 석운과 영림은 아까 낯에 벌써 호텔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떴는지는 물론 알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강교수 내외가 혜화동으로 피곤한 몸을 택시에 싣고 돌아온 것은 열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저녁 후 외출했다는 며느리 옥영은 그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잠깐 저자를 보아 가지고 온다던 아머니였다고 하면서 모두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박두해 옴을 따라 강교수 내외도 차차 불안해졌다. 강 교수는 무슨 생각이 불쑥 들어 이층 서재로 올라갔다. 책상 위에는 없었다.
서랍을 열었다.
『아, 역시…… 』 낯 익은 며느리의 글씨로 봉투 둘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남편에게, 하나는 강교수와 경숙에게 한 편지였다. 강교수는 부리나케 봉투 둘을 한꺼 번에 찢었다.
《남편이였던 당신에게.
당신을 만나기가 무섭고 싫어서 나는 당분간 마음의 키를 돌릴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옆을 떠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마음의 자세를 잡아야만 이 가정에 물러 있을 수가 있을 것 같고 또한 네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질 수도 있을 것 같기에 이런 행동을 마침내 취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그때가 뜻 밖으로 속히 올런지, 또는 영원히 오지 않을런지는 나 자신도 알수 없읍니다.
현재에 있어서 나의 심정을 솔직히 말하면, 남편에게 버림을 받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비애와 허무의 감정을 견디어 낼 기력이 없는 동시에 그보다 못지 않은 정도로 허무의 열매 밖에 가져올 수 없는 전체 여성들의 서글픈 숙명적 애정의 자세 앞에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읍니다.
내가 지금 눈물을 거두고 이만큼이라도 조용한 심경을 가질 수 있게끔 된것을 자기 스스로 감사히 생각합니다.
당신의 아내였던 여인 》《 아버님과 어머님 앞에.
불효 소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부의 심경은 새삼 다시 말씀드리지 않아도 헤아리실 줄 아오며 경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행동을 감히 취함에 있어서 다만 아버님과 어머님을 믿사옵니다.
네 아이의 어머니보다 한 사람의 남편을 좀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온 소부 이오나 앞으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서만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이루어지 기를 노력해 보겠읍니다.
오십만환의 예금 통장의 소재는 경숙이가 알고 있읍니다.
불효 소부 상서 》《 경 숙이 보아라.
이런 경우에 있어서 너희들이 원할 수 있는 어머니가 끝끝내 되어 주지 못하고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고만 이 미련한 어머니를 나무라 달라는 한 마디밖에 더 남길 말이 없는 것을 슬퍼한다. 동생들과 함께 할아버님과 할머님의 말씀 잘 순종하기 바란다.
미련한 어머니 》 편지를 움켜 쥔 강교수의 손길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즈음 어두운 광야를 남쪽으로 달리는 경부선 열차 이등 객실 속에서 강석 운과 고영림의 애욕의 도피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久遠[구원]의 幸福[ 행복] 칠월 상순, 검푸른 녹음이 삼청공원 일대를 구름처럼 뭉개며 뒤덮고 있었다. 대낮에는 이글이글 끓고 있던 햇볕도 아침 저녁으로는 살풋이 누 구러지곤 했다.
어떻게 된 셈인지, 한혜련의 병세가 요즈음에 와서는 한결 차도가 있어 보였다. 잔 기침도 덜 나고 각혈의 돗수도 훨씬 줄어졌다. 알린알린, 유리처럼 샛말갛게 들여다 보이던 창백한 얼굴에는 보오얀 화기까지 발기스레 감돌고 있었다.
약은 김박사가 권하는 대로 꾸준히 썼다. 정제로는 파스 나 이드라 짓드를 복용 했고 주사로는 스트랩터마이신을 맞았다. 주사는 어머니도 놀 줄 알아서 편했으나 가벼운 운동을 겸하는 의미에서 안국동에 있는 김냇과까지 몸소 가서 진찰을 받아 가면서 맞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번번히 김 박사를 차로 모셔 오는 비용을 절약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달포 전, 남편이 찾아와서 혜련의 마음의 불륜을 분개하여 지랄발광을 하며 영림을 데리고 간지 얼마 안되어 혜련 모녀는 생각 끝에 금후 시집의 경 제적 원조를 일체 거절하겠다는 편지를 남편에게 띄웠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 대한 간단한 회답이 날아왔다.
《딴 사나이에게 음란한 마음을 품은 아내가 남편의 원조를 받기 힘들어하는 심정을 가히 이해하겠기에 요청하는 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남편 이오.》 이것이 그 회답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혜련의 어머니는 부랴부랴 쟁봉틀에 올라 앉아서 삯바느질을 시작 했다. 그리고 딸의 조용한 정양을 위하여 지난 정월부터 비워 두었던 뜰 아랫방에 다시금 사람을 넣기로 결정을 하고 아이들이나 과히 많지 않은 단촐한 식구를 물색하기 위하여 여기 저기 부탁을 해 놓고 있었다.
오늘도 어머니는 일찌감치 조반을 치르고 아는 사람을 통하여 여기 저기서 맡았던 일감이 다 되어 그 여름 옷가지들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나눠 주러 나갔다. 김박사 부인의 옷가지도 있었다.
혜련은 요즈음 마음이 가볍고 편했다. 그것은 남편의 회답을 받은 그 순간부터의 일이었다. 무슨 커다란 짐을 하나 어깨에서 내려 놓은 것처럼 혜련은 심신이 다 같이 날 것만 같았다.
『가늘게 먹고 가늘게 살지.』
어머니에게는 한 없이 미안한 말이지만 시집의 원조를 거부하는데 있어서 이 이해성 깊은 어머니는 딸에 못지 않게 서둘러 댔다. 본시부터 바느질 솜씨도 고왔던 어머니였다.
딸의 얼굴에 화기가 돌고 병세가 도리어 누구러진 것도 그러한 마음의 부담이 없어진 때문일 것이라고, 어머니는 도리어 이번 기회가 좋은 약재가 된 것처럼 기뻐하는 것이었다.
사실도 그러했다. 혜련은 이제 정말 아무런 데도 마음을 쓰지 않아도 좋았다. 병세가 악화되면 조용히 죽는 날을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죽움을 기다리는데 혜련은 일종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영림도 오지 않았다. 와 주지 않는 시누이를 처음에는 적지 않게 서운히 여기고 있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와 주지 않은 편이 도리어 좋았다. 영림을 만나면 시집 식구들 이 자연히 연상될 테고 이야기 끝에라도 알 필요가 전혀 없는 강석운 선생님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 혜련에게는 도리어 감정의 짐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짐 저런 짐을 죄 벗어 버린 한혜련의 오늘의 심경은 검 푸른 호수처럼 깊고도 조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깊고 조용한 심정으로 혜련은 지금 화단 앞에 꾸부정하고 서서 줄기차게 피어나는 봉선화 잎사귀에서 누에 같은 봉선화 벌레를 잡아 주고 있는 것이다.
『아이, 여기 또 한 마리…… 』 매일 처럼 잡아 주는 벌레지마는 어디서 생기는지, 혜련은 벌써 다섯 놈이나 잡아서 땅에 묻었다. 회색 바탕에 검은 반점이 얼룩진 놈, 싯멀뚝 하도록 새 파란 놈들이 잎사귀를 색색 갉아 먹고 있는 양을 볼 때마다 혜련은 마치 자기의 살이라도 갉히우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소름이 쭉 끼친 때도 있었다.
『그런데 소설은 왜 안날까……?』
K신문에 연재되던 「유혹의 강」은 벌써 한 주일 동안이나 「 금일 휴재 」 를 계속하고 있었다. 거기 대한 무슨 사고(社告)같은 것도 없었다.
『몸이 편찮아서 쉬시는지도 모르지.』
현재의 한혜련이가 마음을 쓰는 곳이란 그저 그런 정도의 것 밖에는 없었다.
『생각하면 사람의 운명이란 참 우스꽝스런 거야.』
연꽃을 좋아하던 한 여성이 일생을 두고 봉선화 꽃을 좋아하면서 죽어야만하는, 그 숙명적인 감정의 경사를 혜련은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고유의 의욕과 취미를 송두리째 버리고 자기 아닌 그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한 의욕과 취미 속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을 혜련은 하나의 수수께끼, 하나의 신비로서 돌리고 있었다.
『하나의 생명이 자기 고유의 희로애락 속에서만은 절대로 살아 나갈 수 없는 고독을 느끼는 것이 인간일런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혼자 살다가 죽어가지는 않았다. 누구나가 다 자기 아닌 그 어떤 다른 이들을 위하다가 죽어 갔다. 부모는 자식을 위했고 자식은 부모를 위하다가 죽었다. 남편은 아내를 위했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다가 죽었다. 형제를 위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친구를 위해 죽은 사람도 있다.
나라와 사회와 인류를 위하다가 죽어간 충신과 성현들도 있었다. 애인을 위 하다가 죽은 이도 있었다.
『모두가 다 자기 혼자를 위하다가 죽은 사람은 없다. 나는 그럼 누구를 위하 다가 죽어가는 몸인고……?』 어머니 밖에는 없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다. 굴곡 없는 삶이었기에 그 삶속에서 일순간 이나마 감정의 파동을 아름답게 일으켜 준 오직 한 사람의 인간이 십 구년 전의 돌구름 일 따름이었다.
주마등같이 어수선하고 다채로운 일생이었던들 단 며칠 동안에 걸쳐서 움 터진 돌구름의 기억은 이끼 끼고 녹슬은 아득한 망각의 피안에서 까물거렸을 것이었다.
인생의 극히 조그만 물결에 지나지 않은 돌구름이 강석운이라는 한 사람의 작 가로서 매일처럼 잡지나 신문 지상에 나타나면서 부터 그에 대한 기억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불행한 결혼 생활과 기복 없는 단조로운 감정에 돌구름의 기억을 애인처럼 소중히 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이라도 붙잡고 죽어야만 죽어가는 혜련의 영혼은 최소한도의 안정을 얻을 것 같았다. 모두가 다 그 누구를 위해서 살다가 죽는다면 자기는 돌구름을 위하다가 죽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죽고싶었고 그렇게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저녁 무렵에 어머니는 새 일감들을 주워 모아 가지고 돌아갔다. 점심은 김 박사 댁에서 먹었노라고 하면서, 『 때 마침 한 사람이 오게 됐단다.』 『마침한 사람이라뇨?』
『뜯 아랫방에 들 사람 말이지.』
『어마, 어떤 사람인데요? 식구는 몇인데요?』
살림의 보탬이 여간 될 것 같지가 않아서 혜련도 기뻤다.
『식구는 없고, 여자 혼잔데…… 한 주일 전부터 김박사 댁에 와서 묵고있는 사람인데… 그저께 갔을 때도 그런 말이 통 없더니 갑자기 어디 조용한 방을 얻어 가지고 나와야 하겠다구 의논하고 있는데 마침 내가 들어가지 않았겠니?』 『늙은이예요?』
『어디가…… 서른 여섯이라고 하지만 서른 두세 밖에 보이지 않더라. 김 박사 부인의 동창이라는데 얌전한 사람이야.』 『혼자몸이래요?』
『아니야. 집은 돈암동에 있는데 신병으로 앓다가 어디 조용한 데로 나와서 당분간 수양을 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부인은 너처럼 폐를 앓는 모양이 더라. 김박사 병원에 입원을 하려고 왔던 모양인데 조용하지가 않아서 나오는 거겠지.』 『말동무가 되어서 좋겠어요. 언제 와요?』
『이따 저녁 먹고 온단다, 김박사 부인과 함께…… 』 한 주일 전 그날 밤, 옥영은 편지를 써 놓고 아침거리를 사러 나간다는 말 을 남겨 놓은 후에 집을 나왔다. 시부모가 혹시나 남편을 데리고 돌아오기전에 나가야 한다고 부랴부랴 뛰쳐 나오기는 했으나 친척 하나 없는 이 서울 바닥에서 옥영이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갈 곳도 없지마는 갈 곳이 있어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죽고만 싶었다.
저자 바구니 속에 핸드백이 들어 있었으나 몇 천환의 돈이었다. 어두운 밤길을 무턱대고 걷노라니까 창경원 앞이 되었다. 창경원 돌담을 끼고 또 자꾸만 걷노라니까 원남동이 되고 돈화문 굴다리 밑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다.
걷다가 문득 애들 생각이 나면 갑자기 애처롭고 처량한 마음이 들어, 『 통행금지 시간 전에는 들어갈 테니 걱정들 말아.』 그렇게 마음으로 속삭이었고 그러다가도 남편 생각이 불쑥 나면, 『 아이, 보기 싫어!』 그러기도 했고 『 아이, 무서워 』 그러 기도 했다.
걸으면서 옥영은 지난날,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 이런 경우에 처해 있는여 주인공의 모습을 하나 둘 골라 보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자기보다는 나이 어린 연대의 여성들이었다.
『내 나이가 벌써 사십을 바라보는데…… 』 그러니까 좀 더 세속적으로 자기의 감정을 처리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처리해야만 하지 않겠느냐고 이십대의 여성들과 똑 같이 돌아가고 있는 자기의 감정의 어림을 뒤채 보기도 옥영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로 짜낸 생각일 뿐, 옥영의 어린 감정이 따라가 주지를 않았다.
『나이는 사십을 바라보지만…… 』 이 십년 가까운 행복된 결혼생활이 자기의 감정을 이처럼 어리게 만들고 젊게 만든 것이라고, 온실처럼 감정의 풍파를 모르고 지낸 이십년의 세속적 공백( 空白) 이 도리어 오늘에 와서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처음부터 좀 더 해실픈 남편 이었던들…… 』 오늘의 허무가 이렇듯 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돈화문에서 원남동까지를 옥영은 세 번이나 오락가락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옥영의 발길은 그냥 안국동 쪽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내 남편만이 유독 나쁜 남편 이었던들…… 』 옥 영은 허무가 이처럼 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내 남편만을 나쁜 남편이라고 나무라면 되었기 때문이었고 인간 생활 전체에 대한 암흑과 절망과 공 허를 느끼지 않아도 무방했을 것이다.
이건 우주적이요 전 인류전인 고독과 허탈 속에서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어떤 약방 하나를 시야 속에 발견하고 꿈결처럼 옥영은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재동 어귀에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약방 주인은 옥영이가 요구하는 수량 대로의 〈세로나알〉은 팔지 않고 두 알만 주었다. 극약인 수면제 판매에는 제한이 있었던 것이다.
통행금지 시간까지는 사십 분이나 남아 있었는데 옥영은 종시 되돌아 갈줄을 모르고 안국동 김내과로 찾아 들어가고 말았다.
김내과 원장 김박사 부인은 옥영보다 삼년 위인 여학교 동창이다. 친언니처럼 따르던 사이였다.
내일은 정말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아이들 생각이 간절해지면 옥영은 금세 어머니가 되지마는 그러나 동시에 남편을 대할 생각을 하면 죽어도 들어가고 싶지 않고 아내의 감정으로 돌변하곤 했다. 아내의 자리와 어머니의 위치를 저울질하며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한주일을 옥영은 지냈다.
옥영이가 집을 나온 이틀날 어머니가 혹시 그리로 가지 않았느냐고 경숙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옥영의 지시대로 김박사 부인 오신정(吳信貞) 여사는 오지 않았다고 대답을 했다.
『아이구 옥영이도 참 딱하지. 여지껏 팔자가 늘어진 탓인 줄이나 알아요.
남편이 바람쯤 핀대서 아내가 죽어야 한다면 서울 장안의 아내들은 모두가 다미 아리 공동 묘지나 녹번리 화장터로 송장 떼가 돼 나가겠다 얘.』 오신정 여사는 옥영의 심로를 일소에 붙이면서, 『 날 좀 봐요, 날! 남편이 하루 이틀쯤 나가 잔다고 죽어야 한다면, 내 참 목숨이 열개가 있어도 못 당하겠다 얘.』 오신정 여사의 남편 김박사는 오십 고개의 위인이지마는 젊어서 부터 많은 바람을 피워 온 사람이었다. 두 집 살림을 차려 놓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요즘에는 약간 정신이 들었는지 노상 착실한 남편 노릇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 김박사가 어제 저녁, 내실과 병원을 연결하는 어둠컴컴한 복도에서 지나치는 옥영의 손목을 잡았다가 놓쳐 버린 것이다. 부끄럼과 모욕을 한꺼 번에 느끼면서 옥영은 밤새껏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남편이라는 기둥을 잃어버린 한 사람의 아내의 비애가 너무도 빨리 옥영에게 왔다. 남편이 가정 안에 건재하여 있을 무렵에는 좀처럼 거들떠 보지도 못하던 김박사가 아니었더냐고, 남편의 애정만을 문제로 삼아 씨름해 오던 옥영이에게 남편의 위치가 갑자기 중대 성을 띠어 왔다.
『남편만 저 모양이 아니었던들…… 』 오늘의 이러한 모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고, 남편의 애정을 잃어버린 뭇 아내들이 참을성 있게 가정을 지켜 온 또 하나의 원인 같은 것을 옥 영은 발견했다. 비무장으로 적탄 앞에 나선 병사처럼 옥영은 갑자기 마음이 허전했고 세상이 무서워졌다. 우물쭉물 하다가는 어느 맹수에게 잡혀 먹히는지 모르는 한 마리의 들토끼를 옥영은 상상했다.
이튼날, 그러니까 그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굳이 만류하는 오신정 여사의 말을 완곡히 사양하고 조용한 방 하나를 얻어 가지고 나가겠다고 했다.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언제까지나 덧붙여 살 수도 없는 일이 아니냐고 이부자리나 한 벌 빌려 주면 방을 얻어 가지고 나가겠다고 했다.
『정히 그렇다면 마침 참한 방이 있기는 하지만…… 』 오 신정 여사는 옥영을 위하여 삼청동 환자의 방 하나를 생각했다. 바느질 감을 맡아 가는 환자의 어머니는 얼마 전부터 단출한 식구를 물색하고 있는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혜련의 어머니가 여름 옷가지를 지어 가지고 들어섰던 것이다.
속앓이 병을 가진 환자라고 소개를 하고 혼자 니니 딴 솥을 걸 필요도 없지 않느냐고 옥영의 식사까지를 오신정 여사는 부탁해 주었고, 혜련의 어머니도 다년간 신세를 지고 있는 김박사 부인인만큼 그러한 조건을 쾌히 승락해 주었다.
저녁을 먹은 후, 이부자리와 함께 자질구레한 간단한 도구를 택시에 실 고오 신정 여사를 따라서 옥영은 병원을 나왔다.
이 이삼일 이래 한혜련의 호수처럼 맑고도 조용한 심경에 파동 하나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뜰 아래 방에 이사 온 여인에 대한 관심이었다.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돈암동에 집이 있다는 이 여인, 김박사 부인의 여학교 동창이며 속앓이 병을 앓는다는 이 여인, 식사를 부탁해 놓았다면서도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의 손 도움을 부지런히 해 주는 이 여인의 모습이 어쩌면 꼭 잡지 같은 데서 많이 보아오던 강석운 선생의 부인만 같았다.
희미하고 아득했었지만 십 구년 전, 원산 해수욕장에서의 기억도 더듬어 보았고 스크랩 부크에 정성들여 따붙여 둔 강선생님의 가족 사진도 여러 차례 꺼내 보았다.
『틀림 없어.』
강선생의 사모님에 틀림이 없건만 그 사모님이 오늘날 어찌 된 연고로 가정을 떠나야만 했는지를 알 도리가 혜련에게는 없었다.
더우기나 의심적은 것은 강선생님의 「유혹의 강」이 중단된 것이 벌써 열흘, 그와 비슷한 무렵에 사모님은 집을 나와 김박사 댁에 묵은 계산이 된다는 것이었다.
『속앓이 병이라고, 폐가 나쁘세요?』
조반이 끝나기가 바쁘게 어머니는 재봉틀 앞에 올라 앉았고 혜련은 옥영과 함께 꽃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네, 그저 좀…… 』 옥 영은 말꼬리가 여전히 흐렸다.
『무슨 약을 쓰세요?』
『무슨 약이라고…… 환약을 좀 써 봤어요.』
『병은 오래 됐어요?』
『한 일년 됐어요.』
『그럼 초기로군요. 나는 사기랍니다.』
옥영은 물끄러미 혜련을 바라보며, 『 김 박사는 뭐래요?』
『요즈음은 무척 좋아졌대요.』
『시댁이 서울이라죠?』
『네.』
꽃밭에 물을 다 주고 나서, 『 제 방에 좀 놀러 오세요.』
『고맙습니다.』
『자아, 어서 좀 들어오세요. 아무 것도 없지만…… 』 혜련은 옥영의 손을 잡아 끌었다.
『좀 들어가서 노시우. 말동무가 생겼다고, 재가 어떻게나 좋아하는지 모른다오.』
건너방 재봉틀 앞에서 어머니도 권했다.
혜련은 부엌으로 들어가서 손수 도마도를 썰어 접시에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한 쪽 드세요.』
『네.』
혜련과 옥영은 조용한 안방에 마주 앉아서 도마도를 들었다.
『잡지도 있고 신문도 있으니까 심심하시면 얼마든지 갖다 보세요.』
『고맙습니다.』
책상 위에 잡지와 소설 책이 여러 권 꽃혀 있었다. 남편의 소설도 몇 권 끼어 있었다.
옥영은 가슴이 아팠다. 그 작품들이 씌어진 무렵의 평온과 행복이 아득한 꿈결만 같았다.
『소설 좋아하세요?』
혜련은 물었다.
『네, 그저…… 』『 강석 운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셨어요?』
혜련이가 조심성을 지닌 어조로 재차 물어 왔을 때 옥영의 표정에는 다소 서글픈 미소만이 한 줄기 가볍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 서글픈 미소에서 혜련은 강선생님의 가정에 움터 있는 불행의 그림자 같은 것을 금새 느겼다. 무슨 깊은 사정이 있기는 확실히 있는 것이라고, 그동안 쭉 얼굴 한 번 나타내지 않는 시누이 고영림을 불현듯 생각였다. 칸나의 그 강인한 의욕과 불타는 정열을 생각했다.
『그런데 K신문에 나던 강선생의 「유혹의 강」이 왜 갑자기 중단 됐는지 모르겠어요.』 『아, 글…… 글쎄요.』
실로 형언할 수 없이 복잡 미묘한 이그러진 표정이 옥영의 모습을 극 도로 어지럽히고 있었다.
혜련은 순간, 사모님의 불행의 원인이 칸나의 정열에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며 솔직하게 물었다.
『사모님! 사모님이 바로…… 바로 강선생님의 사모님이시죠?』
『어머나?』
옥영은 나자빠질 듯이 놀랐다.
『사모님, 저는 벌써부터 강선생님의 사모님이신 줄을 알아 보았어요.』
『아니, 어떻게 그런 줄을…… 』『 잡지 같은 데서 늘 보아 왔었으니까요.』
『어쩌면?』
옥영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생각하면 그럴 성도 싶었다.
『저는 이 이삼 일 동안 사모님이 왜 집을 나오셨을까 하고 무척 생각 해보았어요.』 『강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셨나요?』
마음을 약간 가라앉히며 옥영은 조용히 물었다.
『네, 무척…… 』 그러다가 혜련은 문득 마음의 비밀이 탄로날 것만 같아서, 『 그렇지만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게 어디 저 뿐인가요? 모두들 좋아하는 데요 뭐.』 그러나 이렇게 막상 덧붙여 말을 하고 나서 보니 도리어 마음 속을 감추려는 변명같이 들릴까도 두려워 혜련은 오히려 안한 것만 같지 못했다고 뉘우쳤졌다.
그래서 앞날의 인상을 얼른 뭉개버릴 셈으로, 『 근데 「유혹의 강」은 왜 끊어졌어요? 선생님이 요즘 편찮으신가요?』 『네 요즈음 얼마동안 신경통으로 누워 계세요.』
『네에, 그러시군요.』
그러나 병상에 누운 남편을 내버려 두고까지 가정을 떠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사모님의 심정이 혜련에게는 안타깝도록 알고 싶어서, 『 선생님이 그처럼 병환이 계신데 사모님까지 나오셔서 얼마나 불편하실까 요?』 『…………』
옥영은 시선 둘 곳이 없어 언뜻 외면을 하며 잠자코 화단을 내다보았다.
대답을 못하는 사모님의 심정이 서글퍼 혜련도 얼른 입을 다물고 꽃밭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화를 잃은 두 여인 앞에 봉선화의 무더기가 검푸른 녹음 속에서 활짝 꽃 구름을 피우고 있었다.
오랫동안 두 여인은 그렇게 고즈넉히 앉아 있었다. 흰 나비가 한 쌍 꽃밭위에서 까불어대고 있었다. 뒷산에서 희미하게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은 옥영이보다 혜련의 입에서 먼저 흘러 나왔다.
『처음 보는 저에게 사모님이 마음을 털어 놓을 수는 없으시겠지만…… 』 혜련은 꽃밭을 말끔히 내다보는 그대로의 자세로, 『 제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것 같지만 저 과히 헤실픈 사람 아냐요. 사모님의 말동무가 될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어요.』 『고마운 이야기예요. 그렇지만 할 이야기가 뭐 있어야지요?』
꽃밭 위에서 까불어 대던 나비 한 쌍이 나불나불 사쁜 사쁜 고독한 두 여인의 시야로 부터 사라져 갔다.
『선생님이 착실하신 분이어서 듣기에는 사모님이 무척 행복하신 줄 알았어요.』
옥영은 조용히 웃으며, 『 불행해 보여요?』
『사모님의 얼굴이 지나치게 어두워요.』
『건강이 늘 나쁘니까 그렇겠지요.』
『건강보다도 마음이…… 마음 고생이 계시는 것 같아요. 혹시 선생님이 요즈음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시지나 않으세요?』 옥영은 얼른 혜련을 돌아다 보며, 『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생각되세요?』
혜련은 빤히 옥영을 바라보며, 『 생각 키우는 것이 한 가지 있어서 그래요.』
『무언데요?』
가벼운 긴장이 옥영의 시선 속에서 머리를 들었다.
『이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제 추측이지만요.』
『무언데요?』
『혹시 문학 공부를 한다는 여대생이 선생님을 방문한 적이, 고 영림이라는…… 』『 어마……?』 『있죠?』
『………?』
역시 자기의 추측이 정확했다고, 총소리에 놀란 참새 모양 오들오들 떨고있는 사모님의 눈동자를 혜련은 서글피 바라보며, 『 그 학생이 선생님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어 드리고 있는 거죠?』 『………?』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 오들오들 떨고 있던 사모님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으려고 달려붙어 왔다.
『요 며칠 동안 그렇지나 않는가 하고 무척 걱정했어요.』
『아니, 그 고영림이라는 학생을 어떻게 아세요?』
가쁜 숨결을 몰아 쉬며 옥영은 우선 다급한 것부터 물어 왔다.
『제 시누이예요.』
『어머나?』
소스라치게 놀라는 옥영을 혜련은 미소를 지으며 잠시 바라보다가, 『 그렇지만 사모님, 과히 걱정은 마세요. 사정이 있어서 시댁과는 통 왕래가 없으니까요.』 거기서 혜련은 별거 생활을 하게 된 전후 사연을 쭉 이야기하여 사모님의 편이 되면 되었지, 결코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어 상대편을 안심시켰다.
『아, 그러시었군요.』
그렇다면 혜련의 위치로 보나 호의로 보나 자기를 해할 것 같지가 않아 옥 영은 적이 마음을 늦추며, 『 고 선생이 어머님과 함께 저의 집을 찾아오신 적이 있답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혜련의 편에서 놀랐다.
『무엇 때문에 갔었어요? 언제 갔었어요?』
짐작은 이미 가고 있었으나 확실한 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 영림이라는 학생 때문에…… 벌써 열흘 전 이야기예요.』
『아이, 역시 아가씨가…… 』 혜련의 추측은 한 오라기도 어긋남이 없이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사모님,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저는 사모님의 편이 될 수가 있는 사람이에요. 아가씨에 대해서는 다소나마 알고 있는 대목도 있고요.』 『고마워요, 그렇지만…… 』『 사모님,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정말 한 사람의 애독자로서 선생님과 사모님을 존경해 왔고, 선생님의 단란한 가정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제 힘이 자라는 데까지는 이건 정말 헤실픈 소리가 아냐요. 신명에 맹세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혜련은 진심으로 사모님의 불행이 곧 자기의 불행처럼 느겼지고 있었다.
돌구름을 위하고 돌구름의 가정을 위해서라면 없는 힘이나마 짜낼 수 있는 신비롭고도 숭고한 감정이 혜련이 썩어가는 가슴 속을 파동치며 돌았다.
『어찌 된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고마운 분을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아, 참… 』 옥 영은 문득 생각이 나는 바가 있어, 『 알았어요. 이제 생각나요. 한혜련씨, 그러시죠? 그리고 옛날, 저 원산 해수욕장에서 만난 적이 있는 미스 헬렌…… 』『 어머, 어떻게 그런 걸 아세요?』 죄 지은 사람처럼 혜련은 가슴이 뜨끔 했다.
『영림에게서 들었노라고 강선생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에 관한 이야기는 통 꺼내지 않았노라던 시누이의 말을 생각하며 혜련은 호닥닥호닥닥 놀라고 있었으나 태도만은 태연해야겠다고 기를 쓰고 표정을 가다듬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차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에 대한 사모님의 지식은 극히 단순한 것 이었다. 소녀 시절에 잠시 만난 적이 있는 돌구름이 후일 작가가 되었기에 그의 작품을 호기심에서 애독한다는 정도의 것 밖에는 없었다.
더구나 영림과 강선생의 관계를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사모님의 태도나 표정으로 보아서 자기의 마음 속 비밀 같은 것에는 추호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모님을 혜련은 알고 적이 안심을 하며, 『 알았어요, 그래서 아가씨가 그동안 한 번도 얼굴을 나타내지 않었군요.』 혜련의 고즈넉하던 감정이 영림의 그 불미로운 행동을 무섭게 가책하고 있었다.
『영림은 나빠요. 불량 학생야요.』
헤련의 입으로 부터 돌팔매 같은 가책의 말이 무심 중에 튀어 나왔다.
그것은 사모님을 위해서 하는 분노이기 전에 미스 헬렌의 감정의 폭발 이었다. 미스 헬렌이 그처럼도 소중히 모셔 온 돌구름의 평화로운 가정을 칸나는 끝끝내 파괴하고야 말았다.
혜련은 매서운 얼굴이 되며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십 구년 전, 원산 송도원 이래 처음 보는 다급한 감정의 발언이었다. 조개 알을 바스러지도록 깨물다가 입술을 다쳐 피를 흘리던 순간의 감정이 그대로 되 살아 나오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망막에 삼삼하다. 파라솔을 나눠 쓰고 돌구름과 함께 멀리 송학관쪽으로 사라져 가던 김옥영이라는 이름의 여인! 그 여인에게 향 하던 것과 꼭 같은 종류의 감정의 발악이 이십년을 껑충 넘어선 오늘 이 순간에 있어서 강선생님을 뺏앗아 간 고영림에게 대해서도 고스란히 그대로 폭발 하리라고는 혜련 자신도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어떡하면 영림의 손으로부터 강선생님을 도로 찾아다가 사모님에게 모셔다 드릴 수가 있을 까를 혜련은 골돌히 생각 하며, 『 사모님, 실은 강선생님을 찾아 뵙겠다는 아가씨를 제가 여러 번 말렸어요.』 『아, 그런 말을 항상 혜련씨에게 했었나요?』
『네, 아주 개방적인 성격이에요. 숨기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고 모든 것 이 적극적이고, 그야말로 칸나처럼 자기 의욕에 충실하려는 학생이예요.』 『그건 나도 짐작은 했었어요.』
『그렇지만 사모님, 자기 의욕에만 충실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요?
모두가 다 자기 의욕만 중쁠나게 내세우면 삼십억의 인류가 죄다 좌충우돌을 면치 못할 거예요.』 『정말이예요. 혜련씨야 말로 정말 얌전한 분이예요.』
『아이, 사모님도…… 』 그러나 얌전하다는 찬사 위에 안주해 있기에는 혜련의 감정이 너무도 서둘러 댔다.
그 순간 말을 이룰 수 없는 혜련의 감정이 젖부둥 밑에서 또 한번 발악을 했다.
『나쁜 돌구름! 돌구름은 나빠, 나빠!』
일년에 두 차례씩, 꽃 봉투를 띄움으로써 구원의 행복을 소녀들처럼 희구 했던 혜련의 아름다운 꿈은 조각조각 흩어져 버리고 남은 것은 오직 폐허처럼 삭막한 감정의 오열 뿐이다 무명의 꽃봉투조차 이미 보낼 곳을 잃어버린 혜련의 허무와 현실적으로 남편을 잃어버린 옥영의 허무가 조용히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무심 중 혜련은 고개를 들며, 『 그렇지만 사모님,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저는 아직 사모님보다 나이 어려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지금 얼른 생각한 일이지만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을 것 같아요.』 『영원한 행복이라고요?』
『네, 영원한 행복!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행복의 길이 있어요. 인간 악도 사회악도 그리고 자연악까지도 그 행복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 거예요.』 『그게 뭔데요?』
혜련은 쓸쓸히 웃으며, 『 사모님은 사랑하는 행복을 느껴보신 적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행복이라고요?』
『네, 사랑을 받는 행복이 아니고 사랑하는 행복! 인간이 차지할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은 거기서 밖에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돌구름이 영림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 데서 느낀 허무의 감정을 혜련은 그렇게 해서 도로 메꾸고 있는 것이다.
『혜련씨의 말을 잘 알겠어요.』
한혜련이라는 한 여성의 심정이 그러한 깊이에 까지 파들어 가고 있었던가하고 옥영은 비로소 혜련이가 지닌 삶의 방도와 애정의 자세를 발견한 것 같았다.
『주제 넘은 말이라고 책망하시겠지만 사모님이 지금 지니고 있는 허무 감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행복의 길 밖에는 없지 않을 까요?』 『말 뜻만은 알 수가 있겠어요.』
『그렇게 느끼시진 못 하실까요?』
옥영은 그것을 느껴 보려는 듯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자기의 감정의 물결을 정밀 공( 精密工) 의 감각을 가지고 자진정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느낄 수 있다면 사모님의 불행은 구제를 받을 수가 있을 거예요.』
거기서 옥영은 눈을 뜨며, 『 이번에 내가 묻겠어요. 혜련씨는 그것을 느낄 수가 있는가요?』 『네,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아니, 현재도 그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요.』
『실례의 말 같지만 실연의 경험이 있는가보군요.』
『네, 그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용하십니다.』
『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라고요? 그럴까요?』
혜련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초인간적인 영원한 것을 바라는 마음이 아마도 혜련씨에게 그러한 심경을 복돋아 주었겠지요. 사랑이 신앙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뿐만 아니라 위대하다고 생각하지요.』 혜련은 답변을 잃고 덤덤히 옥영을 바라만 보았다.
『실연은 과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혜련씨가 사랑을 신앙에까지 끌어 올리고 있는 데는 허약한 건강에서 오는 체념 때문일 거예요. 신앙은 체념의 철학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사모님의 말이 우선 논리적으로 가슴에 왔다. 그러나 그 썩어 가는 가슴으로서는 그러한 논리를 받아 들이기에는 숨이 가빴다. 그 모자라는 호흡이 한 혜련으로 하여금 체념의 철학이나마 붙들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열 네살의 소녀의 호흡으로서는 지나치게 숨가빠 조개알을 깨물어 터지면 체념과 같은 계통의 철학이었다.
『사랑하는 행복 속에서 영원을 찾기 전에 사랑받는 행복 속에서 순간을 찾고 싶은 것이 현재의 나의 기원이에요. 머리의 사랑보다도 가슴의 사랑, 생각 하는 애정보다도 느끼는 애정이 내게는 필요해요.』 『사모님,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사모님의 오늘의 허무감을 무엇으로 구 제 합니까?』
『고마워요, 혜련씨. 그렇지만 구제 받을 수 없는 것을 구제 받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따름이예요.』 『안돼요, 사모님.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절망 밖에는 없을 거예요.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실는지도 모를 테니까 어서 댁으로 돌아가셔야겠어요. 그 뿐인가요 어린 애기들을 생각해서라도 돌아가셔야 해요.』 혜련은 무심 중 손을 뻗쳐 사모님의 손을 잡아 쥐었다. 정에 격하여 한 두 번 꼭 쥐어 보았다.
사모님도 같이 쥐어 왔으나 자기보다 힘은 덜 들어 있었다. 덜 들어 있는 그만큼 사모님의 정신적 허탄은 자기보다도 더 크고 더 깊은 것 같았다.
『사모님, 제가 아가씨를 꼭 만나 볼 테니 사모님은 어서 댁으로 돌아가세요.』
『고마운 말이지만 아예 만날 생각은 마세요. 외부의 압력으로써 돌아올 남편이 아닐 거예요.』 사모님의 조그만 손을 만지작거리며 혜련은 얼른 생각했다.
『아이, 이 손은 돌구름이 애무하던 손! 그리고 사모님의 손을 잡고 있는내 손은 돌구름이 봉사를 들여 준 손이고…… 』 혜련은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아서 얼른 외면을 했다.
愛慾[애욕]의 行路[ 행로] 하루 저녁에 폐허처럼 황량해진 혜화동 집이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튿날 아버지에게서 편지 한 장이 날아 들어왔다.
《옥영이 보시오.
나는 이미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요. 이 세상을 제일 즐겁게 해 주던 내가 당신을 이처럼 슬프게 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오.
정녕 당신에게 있어서는 제일 나쁜 인간이 되고만 강석운이요. 무한히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오.
나는 당분간 서울 땅을 떠나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고 당신이 무서운 때문이오. 혜화동 일대가 무섭고 아이들이 무섭소. 당신의 비애와 허무가 무섭고 아이의 저주가 무섭소.
언제 돌아올 수가 있을 는지 나는 모르오. 모르지마는 다만 한 가지 예감은 내가 만일 죽을 때가 와서 죽는다면 오로지 옥영의 옆에서만 눈을 감을수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요.
옥영이, 그러면 안녕히…… 내 입으로 어찌 당신의 안녕을 빌 수 있겠오만, 모든 염치를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빌고 싶은 마음에 허위는 없오.
아이들에게는 따로이 쓰지 않겠오. 아버지와 어머님에게도 따로이 쓰지 않겠오. 쓸 것도 없지마는 쓸 수가 없오.
하늘을 무서워 하면서도 하늘에 순종하지 못하는 비겁하고도 약한 사나이로 부터 》 아이들은 어리둥절 했고 강교수는 깊은 신음을 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날이 갈수록 강교수 내외는 차차 끈을 늦추고 시간의 흐름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어 가고 있었고, 혜숙과 도선이는 점점 더 풀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경숙과 도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츰 더 나무라고있었다.
『뭐예요? 이게 아버지예요? 이게 어머니예요?』
경숙의 열 일곱살과 도현이의 열 다섯살이 부모의 애정을 규탄하기 시작 하였다.
『부성애는 다 어디 가고 모성애는 다 어디 갔어요?』
경숙은 눈자위가 새빨갛게 충혈을 하도록 울고 난 눈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쏘아보았다.
『오냐, 인제 다 돌아오느니라.』
강교수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돌아와도 난 싫어요! 이제 다 알았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줄은 정말 몰랐어요 』 경숙은 옥영이가 쓰던 안방 책상에 와락 엎디면서 무섭게 흐느껴 운다.
네 아이가 빙 둘러 앉은 한 가운데서 강교수는 푹푹 담배만 피웠고, 할머니는 혜숙이와 도선이에게 사과를 깎아 주고 있었다.
『싫으면 어떡하느냐? 싫어도 부모고 좋아도 부모란다.』
할머니가 그러면서 경숙의 분노를 조용히 꾸짖고 있었다.
『그건 할머니, 말이 안 돼요. 싫어도 부모라면 싫어도 자식이 아니겠어요? 자식이 싫어지면 저희들은 마음대로 아이들을 팽개지고 나가 버리는데 우리들은 뭣 때문에 싫어도 부모를 섬겨야 한다는 말이예요?』 흐느끼는 얼굴을 홱 들면서 경숙은 대들 듯이 말했다.
『아버지는 나빠! 어머니도 나빠!』
도현이도 경숙의 편이 벌써부터 되어 있었다.
그러는데 열 한살짜리 도선이가 냉큼 나서며, 『 그래도 누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으면 어떻게 사니?』 『왜 못 살아!』
경숙이가 밴하니 소리를 쳤다.
『돈은 누가 벌고 일은 누가 하니?』
『그럼, 그렇고 말고.』
혜숙에게 사과를 깎아 쥐어 주며 할머니가 도선을 응원했다.
『싫어요! 난 그런 아버지가 벌어다 주는 돈 안써도 좋아요. 그런 어머니가 일 안해 줘도 좋아요.』 『흥, 그럼 누나는 학교 어떻게 다닐테야?』
『학교 안 다녀도 좋아! 아이, 창피해! 남 부끄러워서 어떻게 학교를 다녀?』
자기 아버지만은 그렇지 않은 아버지라고, 그런 종류의 불량한 아버지를 가진 동무들 앞에서 언제나 떴떴했고 마음 든든했던 경숙이기에 그의 서글픈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경숙은 눈물을 씻으며 새침한 표정으로 불렀다.
『오냐.』
『나 아버지와 어머니한테 편지를 쓸 테예요.』
『편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편지를 쓰지 않느냐?』
『편지를 써서 신문에다 낼 테예요. K신문 문화부에 있는 송선생에게 부탁 하면 내 줄 거예요.』 『뭐라고 쓰느냐?』
『할 말이 있어요. 안 돌아와도 좋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 돌아 온대도 우리 네 식구는 죽지 않는다고, 기어코 살아 볼 테라고, 막 해댈 테예요.』 경숙의 입술이 정에 격하여 다시금 비쭉비쭉 이그러지고 있었다.
『음, 그것도 무방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이 죄 알게 될 텐데…… 네 동무들도 알게 되고…… 』『 알아도 좋아요. 이제 학교는 안 다닐 테예요. 피아노도 안 살 테예요.
살 돈도 없어요. 신문사 송선생의 말을 들으면 아버지는 S출판사에서 피아노 살 돈으로 남겨 둔 인세를 이십만환인가 삼십만환인가를 찾아 가지고 갔다니까 요. 나보다도 아버지는 그 여자가 좋은 거예요.』 경숙은 또 다시 무섭게 흐느끼며, 『 예금 통장에 있는 오십만환까지 가지고 가지 않았어요? 이 집까지 왜 안 팔아 갔어요?』 부모를 나무라는 경숙의 이 다급한 감정 앞에 강교수는 언뜻 외면을 하며뭉클 하고 뜨거워지는 눈꼬리를 손으로 씻었고, 도현이와 도선이는 훌쩍 훌쩍 콧물을 들여 마셨다. 할머니도 목메인 소리로, 『 그래도 부모는 부모지, 그러면 못 쓴단다.』 『우리에게는 부모가 없어요. 우리는 고아예요. 고아지만 죽지는 않아요.
기어코 살아 보일 테에요.』
『누나가 학교에 그만 두면 나도 안 갈 테야.』
도현이가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말했다.
『나는 신문장수 할 테야.』
도선이도 한몫 들어왔다.
『누가 너희들 보고 학교 그만두랬어!』
경숙이가 홱 얼굴을 돌리며 뺑하니 소리를 쳤다. 부모가 집을 나간 이 후경 숙은 완전히 이 가정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있고 내가 있는데 너희들이 무슨 걱정이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내 죽는다.』
도선이가 아는 체하고 경고를 했다.
『할머니, 죽음 싫어이!』
혜숙이가 할머니의 목을 껴안으며 무릎 위로 올라왔다.
『죽긴 내가 왜 죽느냐.』
할머니가 혜숙을 끌어안는다.
『오냐, 그만들 하고 이제 자거라. 너희들의 생각도 잘 알았다. 기특한 생각들이지만 내가 있는데 무슨 쓸 데 없는 걱정들이냐.』 강교수의 한 마디가 무연히 흘러 나오는데 도선이가, 『 할머니, 인제 달걀 먹지 말고 모았다 팔아요.』 『오냐 오냐, 참 애들도…… 』 강 교수 부인은 눈시울을 손가락으로 조용히 눌렀다.
고영해는 그 동안 수차 혜화동을 찾았으나 서울 땅을 떠났다는 강석 운의 소식을 강교수에게서 얻어 듣고는 될대로 될 수 밖에 없다는 단념을 하고, 사업 욕과 애욕에 이끌려서 밤낮으로 바쁘기만 했다.
고사장 내외도 이제는 하는 수 없이 먼 하늘을 우러러 보며 과실히 제물에 익어 떨어지듯이 제발로 영림이가 걸어 들어올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고사장 부인만은 딸의 걱정을 끈기 있게 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끈 기가 고사장에게는 없었다. 관철동 윤마담과 황산옥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 서애 리에 대한 욕망을 가끔 확대시켜 보는데서 황혼의 인생을 서글피 체념하는 것이었다.
아들 고영해의 손에 이미 떨어졌을 는지도 알 수 없는 애리였기에 그런 종류의 부도덕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자기의 그러한 마음의 자세를 고 사장은 노상 어른다운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땐스홀 「애리자」는 언제든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마담인 애리 자신이 직접 홀에 나섰다. 마담의 일은 애리 어머니가 도맡고 있었다.
단골 손님이 나날이 늘어갔다. 애리의 개방적인 명랑성과 적당한 불량성 이 꿀 물이 되어 있었고 그러한 꿈결에 손님들은 머리를 싸매고들 들러붙었다.
그래서 애리는 매일처럼 예약이 있었고 삼 사일씩 기다려야만 차례가 돌아왔다.
『사나이는 움직이는 금고야.』
『무슨 소린데?』
『금고란 본시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특징 아냐?』
『그래서?』
『금고의 용도란 돈을 넣어 두고 굳게 자물쇠를 잠가 두는 데 있지 않어?』
『그래서?』
『그렇지만 열쇠만 적당함 언제든지 열어서 돈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는말이야.』
『그 적당한 열쇠를 쥐고 있는게 애리라는 말이지?』
『물어서 뭘해요.』
『음, 움직이는 금고라.』
『고전무도 말하잠 움직이는 금고예요. 금고치고는 대형(大型)이고.』
『음, 대형 금고라.』
『그 금고 속에서 이 커다란 홀이 나왔으니까요. 그만함 대형이죠?』
녹음기에 테이프 레코드에서 감미로운 불루스가 완만히 흘러 나오는 대낮의 홀이다. 그 텅 빈 드넓은 홀 한가운데서 고영해는 애리를 품안에 깊숙히 넣고 봄바다의 물결처럼 흐느적 흐느적 움직이고 있었다.
볼과 볼은 벌써부터 겹쳐져 있었다. 걸어만 다녔다. 〈록크〉만 대고 했다. 다른 거추장스런 〈휘거어〉는 하나도 없다. 〈휘거어〉가 찾으면 볼과 볼이, 가슴과 가슴이 떨어져야만 했기에…… 『 애리, 그렇지만 걱정이야.』 『뭐가요?』
『특대형 금고가 나타나면 큰일인 걸.』
『네버 마인! 애리는 이미 당신 것인데 뭘.』
『변심하지 말아요.』
『당신이나 말아요.』
『특대형 열쇠를 갖고 있어도 그것만은 사용하지 말아요.』
『남자들은 저희들이 그러니까 여자들도 온통 그러는 줄 아나베?』
『애리가 연애 장사니까 하는 말이지.』
『이제 그 장사는 집어 쳤어.』
『송준오도?』
『메시꼬운 말 그만 해요. 애리의 순정에는 한도가 있어. 거지 발싸개 같은 것이 노상 중쁠만 나 가지구…… 』 애리의 육체권과 고영해의 금권이 마침내 교환된 것은 사흘 전의 일 이었다.
애리는 볼을 바싹 비벼 오며, 『 내 걱정은 작작 하고 당신 걱정이나 똑똑히 해요. 유현자를 낚고 있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고영해의 가슴 속은 따끔도 않다.
『다 아는 걸 가지고 숨길 필요는 없잖어?』
『알긴 애리가 뭘 알아?』
『이 눈치 저 눈치를 다 채고 있어. 적어도 연애 장산 데…… 』『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센스가 다소 오버한 것 아니야.』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시계처럼 펑츄얼(正確[정확])한 정밀 생리( 精密生理) 를 나는 갖고 있죠.』 『시계도 태엽을 안 틀면 늘어지는 법이고 잘 못 맞추면 빨라도 지지.』
『증거가 있어.』
『무슨 증거?』
『고전무의 결재 도장!』
『무슨 소린데?』
『손등에 찍는 도장은 무엇을 결재하는 거죠?』
『아, 그걸 보았나?』
『보지 않고서 어떻게 알아요?』
『그건 장난이고…… 』 『 능치지 않아도 괜찮아, 문제는 낚었는지 못 낚었는지 그것만 알면 된다니까 글쎄.』 『그런 시골뜨기는 낚어 볼 생각조차 없어.』
『잘 낚어지지가 않는 모양인가?』
『요것이!』
애리의 보조개에서 쭉 소리가 났다.
『거 무슨 소리야?』
『애리의 보조개가 웃는 소리지.』
『아, 하하하…… 』 애리는 유쾌해졌다.
『술장사나 해 먹긴 아까운 유모어야.』
『연애장사나 해 먹긴 아까운 보조개처럼.』
『부인 병환 좀 어때요?』
『송장 치르기 전에 집어쳐야겠어.』
『아이, 불쌍해. 당신은 잔인해요.』
『잔인한 게 현대적 성격이야. 주위를 돌아다 봐요. 모두가 다 잔인한 에고 이스트들이야. 그 누가 남을 위해서 겸손하느냐 말이야. 송준오는 자기를 위해서 애리를 박찼고 영림은 자기를 위해서 송준오를 박찼다. 강석운은 자기를 위해서 부인을 버렸고 부인은 자기를 위해서 아이들을 버렸다. 고 사장은 자기를 위해서 내 어머니를 버렸고 황산옥은 자기를 위해서 본 남편을 버렸다. 애리는 자기를 위해서 고영해를 안았고 고영해는 자기를 위해서 송장을 치르기 전에 애리를 이처럼 안는 것이다.』 춤은 이미 아니었다. 고영해와 이애리는 지금 각기 자기들을 위해서 정열에 불타고 있는 것이다. 보조개의 지분이 얼룩이 갔고 루쥬가 차차 희 뿌옇게 퇴색해 갔다.
춤을 상실한 테이프 레코드가 탱고를 부르고 있었다.
『모두가 다 자기에게 충실해 있는 거야. 송장 같은 몸으로도 내 아내는 역시 자기에게 충실하고 있어.』 『문슨 뜻이예요?』
『딴 사나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야.』
『어마?』
『아내는 나의 물질적 원조를 거부했다. 마음 놓고 철저히 자기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 포옹이 끝났다.
『아이, 시장해.』
『정열이 가면 시장기가 온다. 시장기가 가시면 정열이 또 오지.』
『먹고야 사랑인가?』
『사랑만 있으면 먹지 않겠다는 작가들도 있지.』
『그게 누군데?』
『안개를 먹고 사는 사람들!』
『뭐요?』
『꿈만 먹고 산다는 맥의 종족들!』
『알았어, 한숨을 마시고 산다는 예술가 나부랭이들 말이지?』
『대포만 쾅쾅 놓는 성현 군자들도 마찬가지지.』
『그렇지만 그들도 결국 창자가 차야만 대포도 놓고 꿈도 꿀 것이 아냐?』
『그러기에 말이래도, 밥을 먹으면서도 안개를 먹고 산다는 잠꼬대 같은 수작만 늘어놓는 작자들!』 『아이, 정말 시장해요.』
『자아, 요릿상으로 가서 뭐든지 좀 집어 넣고 와요.』
둘이는 홀을 나와 총총히 주방으로 사라져 갔다.
뜨기가 바쁘게 응석을 부리던 칠월 중순의 태양은 오전 열 시를 맞이한 대구 역전 드넓은 광장 위에서 벌써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오르고 내리고 승객들의 무더기가 여기 저기서 물결치고 있었다. 수십 대의 울긋불긋한 택시가 역사 맞은편 주차장에 도사리고 있다가 손님들을 잡아 싣고는 손살 같이 시내로 흩어져 들어가곤 하였다.
새하얀 파나마 모자에 보스톤 백을 든 강석운과 그린빛 후레야 스커트에 저고리를 벗어 한쪽 팔에 걸친 고영림은 한길을 건너 역전 광장을 들어섰다.
『선생님, 저기 멋진 차가 한 데 있어요.』
영림은 주차장 쪽을 가리키며 깜자주 빛이 반짝반짝 윤을 내고 있는 고급 택시 하나를 골라 잡았다.
『아, 그건 닷지야, 고급이지.』
깜자주 빛 고급차에는 기억이 있다. 지난 날, 을지로 입구에 있는 다방 「 기다림 」에서 옥영을 붙들어 간 차가 바로 깜자주 닷지였었다.
『닷지, 맞았어요. 선생님, 차에 대한 지식도 상당하시네요.』
『암, 상당하지. 하성 양조 고사장의 자가용도 바로 저것이었지.』
『어마,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소설가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되겠어?』
『어쩌면……』
『귀신 같지.』
『참 모를 일이예요.』
『칸나가 나를 이모 저모로 연구한 것처럼 돌구름도 칸나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연구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아버지의 자가용까지 연구하셨군요.』
『그 뿐인가. 고사장의 소실 황산옥 여사의 왼손 약지에는 비취 가락지, 장지에는 카랏트 반쯤 되는 다이야 반지, 기름진 손목에는 백금 시계…… 』『 아, 그만 그만! 이제 알았어요. 언젠가 수도극장 앞에서 식사를 같이 하시던 때…… 그렇죠?』 『그렇죠!』
『아이, 남의 흉내만…… 』 칸나의 팔꿈치가 홱하고 돌구름의 옆구리를 찔러왔다.
『불국사까지 몇 시간임 가요?』
깜자주 차 앞으로 걸어가며 영림은 물었다.
『빠르면 두 시간임 갑니다.』
대답보다 먼저 조수는 차 문을 열고 있었다.
『요금은?』
『왕복에 삼만환입니다. 가기만 하는 데가 이만환이구요.』
『아이, 비싸! 우리 돈 다 떨어졌으니 좀 싸게 했요.』
영림은 벌써 올라 타고 있었다.
『아가씨는 돈이 떨어졌는지 몰라도 선생님의 보스톤 백에는 만환 몽 치가 하나 가득…… 』『 말 말게. 이 속에는 헌 옷가지 밖에 들은 게 없네.』 『선생님, 겸손일랑 마셔도 괜찮읍니다. 보기에는 우락부락 소도독놈 같아서 경계를 하시는 모양이지만 마음은 천사처럼 이쁘장하답니다.』 『호호홋…… 이쁘장한 마음씨! 선생님, 아주 독창적인 표현이죠?』
『음, 확실히 대 문호의 소질이 풍부한 걸! 뜻하지 않은 동호자를 얻었으니 자아, 빨리 랫스 꼬오.』 『오 케! 기분 나이쓰!』
차는 휘익 광장을 감돌아 일로 금호강(金潮江) 다리를 향하여 질주하기 시작 하였다.
십 여일 동안 둘이는 대구에서 묵었다. 부산행 차표를 사 가지고 무작정 올라 탄 야간열차가 대구역에서 멋없을 순간, 둘이는 또 무작정하고 내려 버렸다.
부산이 한국의 끝이기에 무작정 갈래야 갈 수가 없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시베리아 벌판을 생각하고, 사하라 사막을 그리워 하며 여정(旅程)을 아끼고 한국 땅에 절약하는 의미에서 둘이는 부랴부랴 내렸다. 둘이가 다같이 대구가 낯선 도시였던 것도 매력적이었다.
역 앞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매일처럼 둘이는 고독과 권태와 무료를 모르는 행락(行樂)의 과정을 하나 하나씩 밟아 갔다. 낯선 얼굴과 낯선 사투리가 이방인처럼 서먹서먹한 것이 둘에게는 더우기 좋았다. 서울에서처럼 숨막히지 않고 서둘러 대지 않는 대구의 공기가 둘이의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남이 하는 행락을 둘이는 빼놓지 않고 모조리 했다. 다방 출입도 했고 교회에도 나갔다. 음악회도 가고 극장에도 갔다. 빠아에도 가고 땐스홀에도 갔다.
그러는 사이에 둘이는 행락의 피로를 가끔 느끼고 호텔 일실에 고슴도치처럼 들어 앉아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웃기도 했다.
트럼프로 한나절을 보낸 적도 있다.
달랑달랑 돈도 떨어져 갔다. 물쓰듯이 혜프기도 했다. 더구나 아는 얼굴을 두셋 만난 것이 석운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볼 일이 있어서 잠간 내려왔다는 서울 젊은이들었다. 글 쓰는 사람도 있었고 신문사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놀란 표정을 하고 영림을 힐끔힐끔 바라보면서 「 유혹의 강 」 이 중단된 이유를 발견하고 있었다. 그중 한 젊은이는 대구에 온지 이틀만에 거리에서 만났다.
연배가 비슷하든가 또는 가까운 사이라면 적당히 발뺌을 해 두고도 싶었으나 그런 친분이 못 되기에 양쪽에서 다 같이 어물어물 했다. 호기심과 경 제 심이 서로 대결을 하다가 헤어지고 말았다.
『세상은 좁아.』
『좁아서 무서우시지.』
『무섭긴……』
『좀 더 아는 얼굴이 없는 데로 가요. 불국사 같은 데로…… 』『 괜찮아.』
『가요.』
그래서 불국사행을 결행하게 된 두 사람이었다.
차는 금호강 다리를 건너서고 있었다.
『아이, 저 사람들…… 』 영림은 차창에 기대어 오른편쪽 동촌(東村) 유원지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유흥 객과 피서객들을 내다보았다. 강에는 보트 떼가 죽끊듯 했다. 모터 보트가 물결을 가르기도 했다.
닷지 치고는 어쩐지 차체가 무거워 동요가 적다. 그래서 석운은 물었다.
『이 차 닷지지요?』
『아닙니다. 올스 모빌입니다.』
『아, 올스 모빌! 제네랄 모터스에서 나오는…… 』『 그렇습니다. 시보레 회사지요.』 『어쩐지 보데가 좁 육중한 것 같더니만.』
『원거리 용으로는 마춤입니다. 닷지는 가볍지요. 시내용으론 무방 하지 만요. 올스 모빌은 대구에 이것 하나 밖에 없읍니다. 폰데약이나 캐다락 모두다 같은 시보레 회삽니다.』 『알아, 포오드 회사 치로서는 링컨이 역시 제일 고급이지!』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님, 차 많이 가지고 굴리셨군요?』
『음, 과거에는 자동차 밀수입으로 한 밑천 잡았는데 요즈음 와서는 바람을 피울래기에 졸딱 망했어. 패가망신 격이네.』 『후후……』
하고 영림은 웃다가 말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얼른 석운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작가로서, 성실한 남편으로서 한 밑천 잡았던 것을 칸나 때문에 졸딱 망했다는 풍자처럼 영림은 들었기 때문이다.
시내 버스가 다니는 반야월(半夜月)까지는 포장된 도로에서 드라이브가 사뭇 흥겨웠다.
하양(河陽)까지는 육십리 길이요 구십리 길인 영천(永川)에는 한 시간 남짓에서 들어 닿았다.
차체가 무거운 올스 모빌은 아무리 속력을 내도 까불 줄을 모른다.
라디오는 배가본드를 방송했다. 〈스폐인의 귀부인〉이 흘렀다. 〈센트 루이스 블우스〉도 흘렀다. 그 격정적인 고조된 메로디가 피로했던 두 사람의 감각을 모닝 커피처럼 은근히 자근했다.
『춤추고 싶어.』
『호텔에 가서 추지.』
영림은 살그머니 머리를 안겨 왔다. 석운은 영림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 안았다. 머리를 안기고 석운의 남은 손을 무릎 위에서 영림은 더듬어 잡으며, 『 선생님 품 안에서 칸나는 지금 청춘을 밭갈고 있어요.』 석운은 대답 대신 영림의 어깨에 힘을 주었다.
『유행가처럼…… 사랑해선 안될 사랑이지만…… 유행가처럼 눈물의 부산 정거장이 될는지 모르지만…… 가는 데까지 이 땅이 끄치는 데까지은 가 보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가는 거 아니야?』
『내일을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
『과거를 생각하시는건 가급적 절약해 주세요.』
『누가 과거를 생각한댔어?』
『흐응……』
영림은 눈을 가만히 감으며, 『 세상이 좋아서 싫어서지?』
『또 쓸 데 없는 말만…… 』『 한 밑천 잡았었는데 그만 쫄딱 망하셨지.』
『응?』
석운은 얼른 영림을 들여다보았다. 영림은 눈을 반짝 뜨고 석운을 추켜 보며 해쭉 웃었다.
『무슨 말이야?』
『아냐, 아냐! 자동차 밀수입으로 한 밑천 잡았던 거 말이야.』
석운은 웃으며, 『 난 또 무슨 말이라고…… 』『 패가망신두 하시고…… 』『 응?』 『다 알아요. 그렇지만 괜찮어, 괜찮어요 』 다시금 눈을 감고 석운의 품 안에 얼굴을 묻어 왔다.
건천(乾川) 거리에는 우시장(牛市場)이 열려져 있었다. 수십 마리의 황소 암 소가 넓은 마당에 웅기종기 모여 있었다. 조수가 라디오를 껐다. 왁자지껄 우시장은 벌 등지를 터뜨린 것처럼 웅성대고 있었다.
『아, 능이 보여! 저것 좀 봐요.』
건천 시가를 빠져 나오면서 부터 거대한 왕릉이 드문드문 한길가에 흩어져있었다.
『빨리 저것 좀 보래도!』
『안 봐도 좋아요. 보고 싶지 않아요.』
얼굴을 묻은 채 영림은 종시 우시장도 보지 않았고 능도 보지 않았다.
이윽고 경주시가를 통과할 무렵에야 영림은 얼굴을 들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쓸쓸한 거리예요.』
『쓸쓸한 것이 고도(古都)의 정취지.』
『칸나의 영혼처럼 쓸쓸하군요.』
『칸나가 왜 쓸쓸할까?』
『아마도 선생님의 본을 따는가 봐요.』
『내가…… 내가 언제 쓸쓸해 했어?』
영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석운은 가정을 생각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고 마음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 어두운 마음을 영림은 재빨리 계산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랑 해 선 안될 사람을 유행가처럼 사랑했다고 느끼는 데 칸나의 의욕과 정열은 이 미감상과 애수의 모체(母體)로서 변모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저 돌무더기, 기와장 무더기…… 아, 저 능 좀 봐요. 우뚝 우뚝…… 하나, 둘, 셋 넷…… 』 경주 시가를 차는 빠져 나오고 있었다.
『아까 보라니까 안 보고…… 』『 지금도 늦지 않아요. 여학생 때 한 번 왔었으니까요. 아 저것이 첨성대( 瞻星臺)죠?』 쓰러질 것처럼 한 쪽으로 기울어진 첨성대가 창 밖으로 휘 날아 갔다.
『저기 보이는 저 구름이 계림(鷄林)이구.』
『조그만 더 가면 안압지(雁鴨池)라는 못이 있죠.』
『기억력이 그만인 걸.』
이윽고 왼쪽으로 안압지가 바라다보였다. 집 한 채가 물 가에 둥실 떠 있었다.
사십리 길인 불국사에는 반 시간도 못 돼서 들어 닿았다. 석운도 영림 도두 번째 보는 불국사였다.
울창한 수목이 대웅전 앞마당에 솟아 있었다. 사람들이 희뜩희뜩 나무 사이를 꿰다니고 있었다.
신라호텔은 양실이 없다고 해서 철도호텔에 둘이는 들었다.
뒷뜰에 면한 단층 방이다. 소파가 있고 침대가 있었다. 뒷뜰이 곧 남향이다. 높고 낮은 산줄기와 구름이 멀리 가까이 묵화처럼 아련했다.
『조용해서 좋아.』
푸른 그늘이 방안에 범람해 있었다.
『목욕을 하고 식사를 해요. 영림이 먼저 들어갔다 나와.』
『레디 훠스트니까.』
『여자란 떠받쳐 주면 좋아한다니까.』
『흥.』
영림은 불라우스와 스커트를 벗었다. 양말도 벗어 던져다. 대구에서 산 파자마를 슬리퍼 위에 덧 입으며, 『 연애 시절에는 레디 훠스트지만 결혼만 하고 나면 젠틀맨 훠스트라죠?』 『나만은 달라.』
『그렇지만 나 선생님과 결혼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타월과 비누를 들고 방을 나서려는 영림을 향 하여, 『 잊은 것 뭐 없어?』
『뭐?』
핸들을 쥐고 영림은 돌아섰다.
『정열의 퇴각이다. 레디 훠스트가 젠틀맨 훠스트로 변모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 아, 선생님, 용서, 용서…… 그만 깜짝…… 』 영림은 달려와서 입술을 주었다.
『에스큐스 미! 그렇지만 선생님, 사람에게는 망각의 기능이 있다는 걸 이해 하셔야지.』 『망각의 기능을 방해해서 미안하오. 정열도 휴식이 필요했던가.』
『어마?』
영림은 민감하게 눈썹을 추키면, 『 그건 일종의 세타이어(諷刺)가 분명한데…… 』『 정열의 퇴각은 망각의 기능을 재촉한다. 그리하여 시간이 흘러간 뭇 애인들은 어수선한 머리에 손질할 것을 망각했고 흐트러진 앞자락을 여밀 줄을 몰랐다. 여자의 저고리 동정과 남자의 넥타이에 때가 꾀죄죄 해도 이미 관심은 없다. 여자는 레디 훠스트를 요청했고 남자는 젠틀맨 훠스트를 강요 했다. 오오, 간만(于滿)의 조수와도 같은 정열의 역사여!』 『그건 너무해요. 슬퍼요.』
『아냐 아냐. 내가 작가기 때문에 그렇게 한 번 묘사해 본 것 뿐이야.』
『풍자는 애정의 순수성을 모독하는 거예요. 제게 잘못이 있음 왜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고.』 『알았어. 인제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자아, 빨리 들어갔다 나와서 식사를 해요 아주 전망이 좋은 식당이야.』 석운은 그러면서 영림을 다시 한 번 안아 주었다.
둘이는 목욕을 하고 식당으로 나갔다. 앞이 탁 터진 전망실이기도 했다.
손님이 두셋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석운과 영림은 다 같이 식욕을 잃고 있었다. 일품 요리도 영림에게는 겨워 절반이나 남겼다. 한참 동안 휴식을 즐긴 둘이는 호텔을 나와 불국사 경내로 들어갔다.
울창한 수목 사이로 백운교(白雲橋)와 청운교(靑雲橋)가 구름다리처럼 빗비슴히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선생님과 이런 데를 이렇게 돼서 올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나도 몰랐지.』
『가끔 공상은 해 봤지만요.』
『무슨 공상을?』
『선생님과 어떻게 알게 되어서 여기 저기로 여행을 하는 공상, 』『 공상으로 그쳤으면 더욱 아름다웠지. 현실은 추하니까.』 『추할는지 모르지만, 추한 것이 인간이지만 현실의 뿌리 없는 아름다 움은 부평초처럼 서글퍼요.』 그러한 서글픔을 영림은 올케 한혜련에게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토함산(吐含山)의 영기(靈氣)와 신라의 슬기로운 넋이 둘이의 폐부 깊이 숨어 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 석 운의 손길을 어린애처럼 부여잡고 올라가며 백운교의 계단을 영림은 셈하고 있었다.
『열 일곱이예요.』
다음에는 또 청운교의 계단을 세었다.
『열 다섯, 둘이 적어요.』
『커다란 어린애 같애. 어린애들은 층계를 곧잘 세어 보지.』
『아냐요, 선생님의 기억을 위해서 일부러 세어 드린 거예요.』
『내 기억을 위해서라고?』
『그럼요, 이 다음에 소설을 쓰실 때나 또 저와 함께 불국사 여행을 온 기행문을 쓰실 때는 꼭 필요하실 테니까요. 열 일곱과 열 다섯! 잊으심 안 돼요.』 『음, 열 일곱과 열 다섯!』
『그때는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석운은 얼른 영림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말처럼 영림의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영림은 왜 그런 말을 할까?』
『결과가 뻔하니까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송준오씨의 말이 모두가 다 어리지만 한 마디만은 어리지 않았죠.』
『무슨 말인데?』
『저번 날 축하 파티 때, 미스터 송이 저에게 한 말이 있어요. 선생님과 교제를 하지 말라고, 가정을 가진 사람은 결국에 있어서는 가정으로 돌아간다고요.』 『음………』
『그렇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이 가정으로 돌아가실 때까지는 선생님을 붙들고 있고 싶었으니까요. 선생님이 성실한 분이면 분일수록 가정으로 돌아가시는 시일이 빠를 줄도 알아요.』 『…………』
『이 며칠 동안 선생님은 저 몰래 가정을 많이 생각하고 계시는 줄도 잘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이제 가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몸이야. 죽기 전에는 못 들어간다.』 둘이는 자하문(紫霞門)을 들어섰다. 대웅전 앞 뜰에 사양이 눈부시다. 시골 아낙네들이 한 무더기 참배를 하고 있었다.
『저게 다보탑(多寶塔)이야.』
석운은 오른쪽을 가리켰다.
『선생님, 죽는다는 것 생각해 보신 적이 계세요?』
『저게 무영 탑( 無影塔)이고…… 』 석 운은 왼쪽을 또 가리켰다.
『…………』
영림은 잠자코 있었다.
무영탑 앞으로 둘이는 걸어갔다. 잠자코 걸어갔다.
서울을 등진지 십 여일, 처음에는 침묵이라는 것을 둘이는 모르고 지냈다.
그런던 것이 얼마 전부터 침묵이라는 방문객이 정열의 틈서리를 헤치며 파고 들어왔다.
『선생님, 무얼 생각하세요?』
『영림, 무슨 생각을 하나?』
이런 대화를 가끔 바꾸게 되었다. 침묵은 정열의 휴계소이기도 했지마는 정열의 계산기이기도 했다.
『이게 아사녀(阿斯女)의 비극을 만들어 낸 탑이야.』
무영탑을 쳐다보며 석운은 말했다.
『아사녀?』
영림은 무영탑의 전설을 모르고 있었다.
『이 탑을 세울 때, 당(唐)나라에서 유명한 석공(石工)을 초청해 왔었는데 그 석공의 아내가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길래 멀리 이 신라 땅까지 남편을 찾아 왔었대.』 『어마, 당나라에서요?』
영림은 비로소 침묵을 깨뜨렸다.
『응, 수년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 보려고 공사장인 여기까지 찾아왔으나 여자는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이 불국사 경내에는 통 들어서지를 못하게 했대요.』 『그래서요?』
영림의 호기심이 차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편단심 사모하는 남편을 보려고 수천리 길을 찾아온 아사녀를 가상히 여긴 일군들이 아사녀를 불쌍히 여기고 하는 말이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절대로 못 만날테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못 하나가 있다고 하면서, 탑이 준공 되면 그 탑 그림자가 그 못에 비칠 거라고, 그러니까 그리로 가서 그림자가 비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대.』 『옛날 같은 전설이예요.』
『전설 같은 옛말이지.』
『그래서 물론 기다렸겠죠?』
『암, 워낙이 열녀 같은 현모양처니까 못 가로 가서 기다렸지. 그러나 원체 심혈을 기울여서 세우는 탑인지라 좀처럼 탑 그림자는 비치지를 않고 아사녀는 그만 너무도 기가 막혀서 못에 빠져 죽었어.』 『…………』
영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석운의 이야기가 어느덧 열을 띠어 왔기 때문 이었다. 선생님은 지금 서울에 두고온 부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탑이 다 준공되었을 때야 비로소 석공은 일군들의 입으로 부터 사랑 하는아내 아사녀가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어. 그러나 석공이 허둥지둥 못으로 달려가 보았을 때는 이미 아사녀는 물귀신이 된지 오래였고고 아사녀가 신고있던 신 한 짝이 못가에 남아 있었지. 아아, 아사녀, 아사녀…… 하고 미친듯이 부르짖기를 얼맛동안 하다가 석공도 마침내 아내의 뒤를 따라 물에 빠 져 죽었다고…… 그래서 그 못을 영지(影池)라고 불렀고 이 석가탑을 무영 탑이라고 불러 왔다는 거야. 어때 재미 있지?』 『재미 있군요.』
대답이 신통치 않아 석운은 영림을 불현듯 돌아다보았다.
그랬더니 영림은 방그레 웃으며, 『 그 석공은 자기의 예술을 위하여 아내를 잃었지만 선생님은…… 』『 영림을 위해서 아내와 예술을 깡그리 버렸어.』 『가요, 저리로 해서 이제 내려가요.』
범종각(梵鍾閣)을 거쳐 극락전(極樂殿)으로 내려갔다. 마당의 석탑들을 보는 둥 마는 둥 둘이는 총총히 호텔로 돌아왔다.
영림은 확실히 우울해 있었고 무영탑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석운은 금방 금방 아사녀의 정성을 지닌 아내 옥영의 절망적이 심정을 헤아려 보며 한 사람의 인간이 과연 한 사람의 인간을 그처럼 학대해도 무방할 자격과 권리가 있을 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호텔 손님들은 석굴암(石窟庵)에 올라간다고 새벽 네시쯤부터 일어나서 서둘러댔다. 동해 바다에서 해 뜨는 것을 봐야만 석굴암을 올라갔던 보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운과 영림은 석굴암에 올라갈 생각은 통 안 하고 있었다. 이전에 한 번씩 올라갔던 것을 둘이가 다 구실로 삼고 있었으나 기실은 십리가 되는 가파른 오르막 길이 체격으로나 둘이에게는 고통이 되리만큼 지쳐 있었던 것이다.
『숙소를 옮겨야겠어. 좀 더 값싼 여관으로.』
나흘째 잡히는 날 입에 담기 싫던 한 마디를 석운은 마침내 담고야 말았다.
그때 영림은 침대에 누워서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영림도 돈이 떨어져 가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싫어요. 그런 어둑컴컴한 여관 방은.』
『싫으면 어떡하나?』
석운은 소파에 길다랗게 누워서 천장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 잡쳐요. 처음부터 여관에 들었음 모르지만 누가봄 호텔에서 쫓겨나가는 줄로 알텐데…… 』『 그래도 하는 수 없지 않아?』 『제 이어링과 넥크레스 팔아요. 이 시계도…… 』『 시계는 내게도 있어.』
『그걸 다 팔면 며칠 더 묵을 수 있잖아요.』
『여기서는 팔 수 없고, 경주엘 나가야겠는데…… 』『………… 』『 경주 구경도 할겸 같이 나가 볼까?』 『선생님, 혼자 나갔다 오세요. 전 고단해서 좀 누워 있겠어요.』
『그래?』
석운은 담배를 푹푹 피우며 여자의 귀걸이와 목걸이를 들고 금방을 드나드는 자기의 모습을 쓴 웃음과 함께 상상했다.
이런 경우가 만일 옥영이었더라면 여자의 소지품을 들고 금방엘 드나드는 남편의 꼬락서니를 생각해서라도 침대에 누워 있을 사람과 경주로 나가는 사람의 위치는 바뀌어졌을 것이다.
『그럼 혼자 나갔다 오지.』
석운은 훌쩍 소파에서 일어났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는데, 『 선생님 오래 있지 말고 곧 돌아오세요.』 『응.』
『혼자서 쓸쓸해요.』
『무얼 잠시 동안…… 』『 선생님은 그래 저와 떨어져 있어도 쓸쓸하지 않으세요?』
『커다란 어린애! 칸나의 지성은 다 어디로 갔나?』
『선생님이 홀딱 다 마셔 버렸지.』
『요것이 사람을 막 녹여!』
석운은 휙 하고 침대로 달려오자 영림의 얼굴을 마구 덮었다.
『어마, 선생님 샤쓰 깃에 입술 자욱이…… 』 거칠은 포옹이 저지른 실수…… 석운의 샤쓰 깃 앞 자락에 화판처럼 빨간 입술 꽃이 피어 있었다.
『이 일을 어쩌나? 새것은 이것 밖에 없는데.』
『다른 걸 줘요.』
『다른 것은 없어요. 두개 다 입다가 벗어 놓은 건데요.』
영림은 침대에서 내려와 보스톤 백을 열었다. 꼬기꼬기 뭉쳐서 틀어 박아 둔 샤쓰 두개가 나왔다. 옥영이었더라면 오늘날로 세탁소에 내 주었을 것이요, 지금쯤은 빳빳이 다려져 있었을 것이다.
『다른 걸 하나 사 입고 오세요.』
『여자의 귀걸이까지 팔아 먹는 신센데 무슨 돈이 있어서.』
『아이, 너무 돈 돈 하지 마세요. 사람이 돈을 써야지, 돈이 사람을 쓰게 됨 어떻게 해요?』 『흥, 좋은 말이긴 좋은 말인데…… 』 석 운은 입었던 샤쓰를 벗고 꼬기꼬기 더럽혀진 것으로 갈아 입었다.
『시계는 내것을 팔 테니까, 하나는 있어야지.』
귀걸이와 목걸이만을 주머니에 넣고 영림의 조그만 시계는 도로 내주었다.
『그럼 다녀 올께.』
석운은 총총히 호텔을 나섰다.
女性[여성]의 宿命[ 숙명] 그 무렵 중앙 문단에서는 유혹의 강을 이유 없이 중단하고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린 작가 강석운에 관한 스캔들이 날개가 돋힌 듯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강석운이가 어떤 젊은 여자와 대구시가를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여기 저기서 나타났다. 그 젊은 여성은 학생이라는 이도 있었고, 모 유부녀라는 이도 있었고, 땐서라는 사람도 있었다.
부인 김옥영 여사도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가정 낙원설의 제창자 강석운은 이리하여 드디어 실락원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강석운을 중상하려는 패들은 이와같은 사실에다 가지 가지의 추잡한 스캔들을 그럴 듯하니 덧붙여서 퍼뜨려 놓았고 강석운과 사이가 좋지 않은 모 주간지에서는 유혹의 강」의 중단과 작가 강석운의 애욕행각을 까십 풍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럭 적럭 하여 강석운의 애욕의 도피행은 문단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행인지 불행인지 안국동 김박사 부인 오 신정 여사도 모환자에게서 이런 사실을 얻어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신정 여사는 옥영의 남편 강석운이가 집에 있는 줄로만 알고 있을 뿐, 서울을 떠나 멀리 대구 시가를 방황하고 있는 줄을 꿈에도 몰랐다. 그것은 옥 영도 마찬가지였다.
오신정 여사는 사실을 옥영에게 알리기 전에 우선 혜화동을 방문하여 소문의 진위를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오여사가 부랴부랴 혜화동 옥영의 집을 방문한 것은 오후 한 시가 넘었을 때 였다. 강교수는 정릉 집이 비어서 그리로 나가 있었고, 강교수 부인이 혜숙이를 데리고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큰 아이들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강교수 부인의 입에서 오여사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옥영이가 집을 나간 이튼날 강석운은 편지 한 장을 띄워 놓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강석운이가 대구 시가를 방황한다는 소문도 신문사 송기자에게서 얻어 듣고 집안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경숙이가 참다 못해서 마침내 돌아올 줄 모르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대한 편지를 써 가지고 K신문사 송기자를 찾아갔다는 것 이었다.
『그게 언젭니까?』
『이 삼일 전이랍니다. 이왕 세상이 죄 아는 일이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하면서, 그 애도 제 어미 성미를 닮아서 무척 뾰족한 데가 있지요.』 강교수 부인은 혜숙을 무릎 위에 안아 올리며 조용한 답변을 하고 있었다.
『그래 경숙의 편지가 언제쯤 신문에 난답니까?』
『글쎄, 그런 건 잘 모르지만…… 』『 할머니, 이 편지는 제가 잠깐 빌려 갖고 가겠어요. 곧 가져 올 테니까 요.』 옥영한테 보낸 강석운의 편지였다.
『그러시오. 그런데 애 어미가 정말 어디 있는지 모르시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옥영이가 있는 데를 제가 잘 알아요.』
『그러셔요.』
강교수 부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쁜 얼굴을 했다.
『혜숙아, 이제 엄마를 데려다 줄게. 참 혜숙인 얌전도하지.』
『엄마 죽지 않았나?』
『애도, 죽긴 왜 죽어? 혜숙이가 이처럼 이쁜데…… 』 혜숙의 머리를 한 번 쓸어 보고 오여사는 황황히 몸을 일으키었다.
『혜숙이 하나만이라도 데리고 나올 걸.』
날이 갈수록 옥영은 아이들 생각이 골똘히 사무쳐 왔다. 혜숙은 막내 아이라서 남편이 제일 귀여워 했다. 아버지만 있으면 혜숙은 어머니가 없어 도과 히 쓸쓸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할머니도 따르는 혜숙이었기에 홀몸으로 나온 옥영 이었지만…… 『이래서 남편을 잃은 아낙네들이 가정을 지키게 되는지도 몰라.』 남편에 대한 체념이 차차 생기면서 부터 옥영의 모성애가 점점 강렬하게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을 위해서 남 몰래 흘리던 눈물이 날이 갈수록 아이들을 위해서 옥영은 흘리게 되었다.
아이들만을 위해서도 살아 갈 수 있는 체념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는 옥영 이었다. 조석으로 남편의 얼굴을 대하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오늘 내일 하면서 옥영은 그냥 삼청동에 주저 앉아 있었다.
모성애로서 아내들을 가정에 동여매 두도록 만들어 준 조물주의 사상이 그지 없이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 무한히 고맙기도 했다. 이 모성애마저 아내들에게 없었던들 무엇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갈 것이냐고, 뭇 아내들이 그렇게 하듯이 옥영도 결국은 한 사람의 평범한 여성으로서 아이들을 기르는데 삶의 이유 같은 것을 발견하고 있었고 또한 발견하려고 노력을 해야만 하는 여성들의 숙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성들의 숙명일 뿐 여성들의 기원은 아닐 것이라고 그 떠맡겨진 대의명분 속에서 자기의 참다운 삶의 자세는 여전히 발견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영림! 나의 행복을 송두리째 뽑아 버린 고영림!』
처음에는 고영림보다도 남편을 탓했던 옥영이가 오늘에 와서는 남편보다 고영 림을 좀 더 탓하는 심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옥영은 석양 볕에 내려 쪼이는 화단을 멍하니 내다보며 지난 날 남편을 찾아 와서 방글거리던 영림의 얼굴과 그래도 가 봐야겠고, 종시 나가 버리던 남편의 최후의 얼굴 모습이 축 늘어진 봉선화 무더기 위에서 주마등처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화단이 차차 번져지고 주마등이 갑자기 뭉그러졌다. 눈물이 주 루루 옥영의 볼을 스쳤다. 옥영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비쭉비쭉 어린 애들처럼 보기 흉하게 이그러지려던 입술이었다.
울어서는 안 된다고 울었댔자 별 수 있느냐고 자기 불행의 증언( 證言) 과도 같은 눈물이기에 아무도 보지 않는 잠자리에서 까지 기를 쓰고 막아 온 눈물 이었다.
자기의 불행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동정 받고 싶지 않았기에 불행의 목격자요 불행의 동정자인 눈물은 옥영에게 있어서 위안이 되기 전에 자학(自虐)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래서 피가 나도록 꼭 깨물어 댄 입술이었으나 옥영의 눈물은 마침내 옥영의 입술을 적시고야 말았다.
『변함 없이 영영 같이 살다가 죽자던 당신이…… 』 아무리 깨물어도 입술은 마침내 불쭉비쭉 이그러져 갔다. 조수처럼 흐느낌이 밀려 나왔다.
옥영이가 방문을 닫는데 『 사모님, 좀 건너 오세요. 쓸쓸해서 못 견디겠어요.』
안방에서 혜련의 목소리가 응석을 하듯이 흘러 나왔다.
며칠 전부터 또 다시 자리에 누워버린 혜련의 병세였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것만 같다고, 혜련은 옥영을 언니처럼 모시기도 했고 언니처럼 어리광도 부렸다.
『그래요, 이제 건너갈 게요.』
옥영의 대답은 젖어 있었다.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간단히 고치고 옥영은 안방으로 건너 갔다. 혜련의 어머니는 건너방에서 재봉을 하고 있었다. 더운 날이었다.
『덥죠, 사모님?』
혜련은 누운 채로 머리맡에서 부채를 집어 옥영에게 권했다.
『그래도 어제보담 좀 난 것 같아요.』
옥영은 권하는 대로 부채를 들며 『 각혈을 해서 그런지 얼굴이 창백해요.』
『항상 그런 걸요.』
『걱정이예요.』
『걱정…… 저 정말 아무런 걱정도 없어요. 이렇게 사모님과 조용히 이야기 하다가 덜컥 숨이 끊어져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정말 한이 없을 것 같아요.』 혜련은 그러면서 빙그레 웃었다.
『아이 혜련씨도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죽긴 왜 죽어요?』
옥영은 헤련이가 측은하여 견딜 수 없었다.
『어머니, 뭐 없어요? 사모님이 건너오셨어요.』
혜련은 건너방에서 재봉을 하는 어머니를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아이 그만 두세요, 내 걱정은…… 』 그러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 그래 내 화채를 만들어 줄게.』 재봉틀 소리가 멎으며 어머니가 방을 나섰다.
『밤낮 얻어만 먹고 아이 부끄러워요.』
『원 무슨, 뭘 대접한 것이 있어야죠. 사모님만 옆에 있으면 그 애는 항상 마음이 편하답니다.』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하는 어머니의 말이다.
『아이 참, 제가 말동무나 했지, 뭐 해 드린게 있나요?』
『그 애는 어렸을 적부터 강선생님의 소설이라면 죽을 둥 살 둥 이었답니다. 돌구름 돌구름하면서 원산해수욕장에서 한 번 보 선생님인데 글쎄 어쩌 면 그렇게 따르는지…… 』『 아이, 어머니도! 따르긴 누가 따른댔어요?』 어머니의 말을 욱박지르는 혜련의 창백한 두 볼에 핏기가 홱 떠올랐다.
『어머니는 참 주책도 없으셔.』
『그럼 어떠세요.』
옥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독자가 한 둘 뿐이냐고 남편의 수 많은 여 성 독자들을 불현듯 머리에 그려 보며 무심 중 그대로 넘겨 보내려다가 후딱 기억을 새롭힌 것이 꽃봉투였다.
(혹시 그 꽃봉투의 발신인이 이 한혜련이가 아닐까?)
고영림의 필적은 분명히 아니었다.
《선생님은 항상 제 금심(琴心)에 살아 계시오며, 이렇게 일년에 두 차례씩…… 글월을 올릴 수 있는 행복만이 제 삶의 보람인가 하옵니다. 금심( 琴心) 은 조용히 올림 》 옥 영은 언제나 판에 박은 듯이 꼭 같은 꽃봉투의 글월을 생각했다. 혜련의 별명이 혹시 금심(琴心)이 아닐까?
(금심이란 거문고의 마음이라는 뜻인데……) 그러다가 옥영은 돌연( 가만 있어! 그이는 그때 혜련에게 봉선화의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지 않아? 피리를 부는 학녀와 거문고를 타는 봉선이의 이야기…… 그러니까 거문고의 마음은 곧 봉선이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봉선이의 서글픈 심정을 한혜련은 남편에게 대해서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후딱 바라본 옥영이었으며, 그래서 또 후딱 눈을 감고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혜련인지도 몰랐다.
옥영은 갑자기 혜련의 필적이 보고 싶어졌다.
사과와 도마도를 썰어 넣고 어머니가 화채를 만들어 왔다. 어머니는 도로 건너가서 재봉틀에 올라 앉았고 혜련은 일어나 앉아서 옥영과 같이 화채를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혜련의 필적을 볼 도리가 없고 심심 풀이인 것처럼 옥 영은 책상에 꽃힌 잡지나 소설책 같은 것을 여러 권 뽑아 가지고 뒤적 거리고 보았으나 혜련의 필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모님!』
한참 동안 잠자코 앉았던 혜련이가 잡지를 뒤적거리는 옥영을 조용히 불렀다.
『네?』
옥영은 시선을 들었다.
『이 다음…… 그게 언제가 될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멀지도 않은 일 이지 만요 제가 죽을 때, 사모님을 보고 싶다면 사모님, 와 주시겠어요?』 쓸쓸한 미소와 함께 혜련은 옥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말만 자꾸 하세요?』
옥영은 잡지를 가만히 접어 놓았다.
『왜 그런지, 사모님의 손을 꼭 쥐고 죽고 싶어요.』
『언제든지…… 그야 언제든지 뛰어 오겠지만…… 』『 정말 이세요?』
『내가 왜 혜련씨에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 같은 걸 다 언니처럼 믿고 따라 주는 혜련씬데.』 『사모님, 정말 꼭 와 주셔야 해요.』
『글쎄 꼭 온대도 그러셔.』
옥영은 한 걸음 다가앉으며 혜련의 손길을 끌어다 잡았다.
『사모님, 약속!』
혜련은 옥영의 새끼 손가락에다 자기의 핏기 없는 새하얀 새끼 손가락으로 깍지를 꼈다 옥영도 힘껏 손가락에 힘을 주며 『 봉선화가 어쩍면 이렇게 곱게 들었을까?』 깍지를 낀 혜련의 새끼 손가락을 옥영은 들여다보며 『 봉선화 꽃 좋아하세요?』
혜련은 웃는 낯으로 어린애처럼 끄덕끄덕 했다.
『오오, 그래서 봉선화를 저렇게 많이 심으셨군.』
『사모님은 봉선화 좋아 안 하세요?』
『왜 안 좋아해요.』
『봉선화의 전설을 제가 들은 건 선생님한테서예요.』
『아, 옛날…… 원산 송도원에서 요 』『 네,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아이, 봉선이가 가엾어서 죽을 뻔했어요.
슬퍼서 자꾸만 울었지요.』
『참 서글픈 전설이예요. 거문고 소리가 나지만 않았으면.』
옥영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기에 말이예요.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모를 일이라구, 그때는 어린 마음에 먼저 와서 피리를 불던 학녀가 어찌나 미운지.』 『그랬었어요?』
『그럼요, 피리나 거문고나 마찬가지 악긴데 하나는 소리가 높고 하나는 소리가 낮았을 뿐이지, 두 처녀의 정성이야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피리를 부는 마음이나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나 똑 같을 텐데…… 』 옥 영은 언뜻 생각이 나서 『 그럼요. 학녀의 적심(笛心)이나 봉선이의 금심(琴心)이나 마찬가지죠.』 금심이라는 말을 옥영은 일부러 썼다.
순간, 깍지를 낀 혜련의 손길이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혜련의 시선이 옥영의 표정을 후딱 살펴보다가 오들오들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혜련은 깍지를 풀고 화단을 내다보았다. 옥영은 이제 모든 것을 안 것 같았다.
여기에도 또 자기의 남편을 극진히 생각하는 여인이 있었더냐고, 꽃 봉투의 주인공인 금심을 한혜련이라고 단정하는 순간, 늘상 그러하던 것처럼 그 어떤 불안 같은 것을 희미하게 느끼면서도 옥영은 한혜련의 그 지극한 정성에 눈물 겨운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자기의 손길을 아니 자기의 손길이나마 꼭 붙잡고 죽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혜련의 서글픈 심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며 『 혜련씨의 말마따나 모든 것이다. 숙명인가 봐요. 학녀의 행복도 봉선 이의 불행도…… 』『 그 런가 봐요. 그렇지만 봉선이의 불행이 없었던들 그처럼 아름다운 봉선화의 전설은 생기지 않았을 거 아냐요?』 『봉선화의 전설을 무척 좋아하시나봐요.』
『정말 좋아요. 손톱이 벗겨져서 피가 나도록 거문고를 탓지요. 그리고는 죽었지요. 아무 말도 없이 봉선이는 죽었지요.』 아무 말도 없이 혜련도 죽을 것이라고 고영림의 의욕과는 딴판인 한 혜련의 기라처럼 예쁘고 호수처럼 조용한 애정의 자세를 옥영은 그지없이 다사 롭게 여기고 있었다.
『옥영이 어디 갔어?』
말을 잃고 두 여인이 조용히 앉아 있는데 오 신정 여사의 목소리가 대문을 들어서며 뜰 아랫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 언니, 나 여기 있어요.』
『사모님 좀 들어오세요.』
옥영과 혜련이가 오신정 여사를 맞아 들이는데 혜련 어머니가 건너방 재봉틀에서 일어서며, 『 아니, 이 더위에…… 그렇지 않아도 저녁 무렵쯤 치마가 다 될 것 같아서 갓구 갈려던 참인데…… 어서 좀 올라 오셔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오신정 여사는 안방으로 들어서며 『 일어나 앉았구먼, 좀 어떤가?』
『괜찮아요. 어서 사모님 좀 앉으세요.』
혜련은 자리를 권했다. 오여사는 털썩 주저앉으며 『 환자 둘이 마주 앉아 있는 풍경이 그럴 듯하구먼. 아이 더워!』 옥영은 부채를 쥐어 주며 『 이 더위에 어떻게 왔어요?』
『글쎄 병쟁이 노릇을 잘 하는지 알아 보러 왔다니까.』
옥영과 헤련은 조용히 웃었다. 웃으면서 옥 영은 『 병쟁이 노릇 인제 안 해도 무방하게 됐어요. 혜련씨가 날 알아보는걸.』 『그래? 탄로났구먼.』
어머니가 또 화채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아이, 고맙구먼요. 목이 말라.』
오여사는 그릇째 들고 벌컥 벌컥 마셔 댔다.
『천천히 앉아 노세요.』
어머니는 이내 자기 방으로 건너갔다.
『좋은 어머님이야.』
그러다가 오여사는 옥영을 향 하여 『 야, 너 빨랑빨랑 집에 들어가야겠드라. 집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네 남편인데 인제 가 보니까 꿩 구어 먹은 자리야.』 『…………』
『네가 집을 나온 그날 밤부터 여태껏 안 들어왔다는 거야. 소문을 들으니 영림인가 뭔가를 데리고 팔도 강산 유람을 떠났대나. 대구에서 본 사람이 있대. 모 주간지에 까십까지 나리만큼 모두들 알고 있는데 너 혼자 맨 꽁무니로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겠느냐 말이야 』『 대구엘 갔더래요?』 『잘 되지 않았어? 보기 싫은 사람이 없어졌으니 빨랑빨랑 집으로 들어가거라. 혜숙인 엄마가 죽은 줄로 알고 있더라.』 『할머니, 안 와 있어요?』
『왜 안 와 있겠니? 아들 며느리가 하루 저녁에 없어졌는데.』
옥영이가 발딱 일어섰다.
『왜 이리 질겁이냐?』
『언니나 집에 가겠어!』
울먹울먹 하고 섰는 옥영의 손목을 끌어 앉히며 『 이야기나 듣고 가야지. 이것 좀 읽어 보구…… 』 석 운의 편지를 오여사는 내놨다.
남편의 편지를 읽고 난 옥영에게 오여사는 그의 독특한 변설로 추켰다 하면서 한참 수선을 떨다가 핸드백에서 신문 한 장을 끄집어냈다.
『이것 좀 읽어 봐라.』
그것은 가도 판매의 K신문이었다. 사회면 사단 제목으로 아버지 어머니에게 호소하는 경숙이의 편지였다. 경숙이의 사진도 났다.
《아버지 어머니, 돌아오시라── 작가 강석운씨의 장녀 경숙양의 절절 한호 소문 ──》 이러한 제목의 글이었다.
『흥, 아버지 어머니가 유달리들 똑똑하더니만 부모의 가르침을 본받았는지 경숙이도 무섭게 똑똑하더라 얘.』 오신정 여사는 여전히 빙글거리고 있었다.
옥영은 신문을 펴 들었다.
기사는 매우 온건하였다. 소설 게재 관계도 있고 하여 강석운의 인신 공격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작가 강석운의 오늘의 행동을 진지한 태도로써 취급하고 있었다. 「유혹의 강의 작가로서 작품과 작가의 행동성과의 관련 문제로 한 보도 기사였다. 강석운의 행동에 대한 진지한 세평을 요망 한다는 간단한 앞말과 함께 경숙이의 호소문을 좀 더 중대히 취급하고 있었다.
《사실 경숙양의 호소문 가운데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새로이 움트고 있는 현대적인 윤리 관계가 다분히 암시 되어 있었다. 자식의 눈에 비쳐진 부모의 행동이 신랄하게 비판되고 있는데 오늘의 새로운 윤리관이 형성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모랄은 이미 그들 틴에이저(十代)의 소녀들의 생리화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아닐까 한다.》 이것이 기사 앞 말의 한 대목이었으며 경숙의 호소문은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그립습니다. 밀물이 갑자기 찌듯이 하루 저녁에 저희들 눈앞에서 사라진 아버지와 어머니, 허황한 꿈결처럼 사라져 간 아버지와 어머니, 집안은 일순간에 폐허처럼 쓸쓸하고 어둡고, 무더운 날씨이거만 찬바람만 불고 있는 가정으로 돌변했읍니다. 아이들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았고 그러다가는 시무룩해서 벽을 향하여 슬며시 돌아 누워서는 소리 없이 웁니다. 처음에는 소리를 내서 훌쩍훌쩍 울었지만 요즈음에 와 서는 절대로 울음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제가 울지 못하게 했읍니다. 울기만 하면 무작정 제가 욕을 했읍니다. 커다란 자식이 뭐냐고, 도현이가 울 때는 쥐어 박기도 했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인 아이들을 제가 함부로 욕지거리를 하고 쥐어 박을 권리가 제게 있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아이들을 버렸기 때문에 저희들은 응당 부모를 잃은 고아일 수밖에 없읍니다. 따라서 부모가 팽개치고 간 권리와 의무가 제게로 돌아온것 같아서 욕도하고 쥐어 박기도 했읍니다.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 했기 때문에 절대로 울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위 해서울어 주지 않는 것을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울 필요가 없다고 저는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네 아이의 사랑을 합쳐 봐도 그 젊은 여자 하나의 사랑만 못해서 가정을 버리고 나갔읍니다. 어머니는 저희들 네 아이의 사랑을 합쳐 봐도 아버지 하나의 사랑만 못해서 집을 나갔읍니다.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서 저희들이 울어야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죽어도 울지를 않으렵니다. 어느 누구든지 우는 자식을 보기만 하면 경숙은 마구 갈겨 줄텝니다. 울기 전에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먹고 살아야 합니다. 고아라도 모두가 다 죽지는 않습니다. 경숙은 반드시 살아 보일 테예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어도 동생들을 훌륭하게 키워 보일 테예요.》 옥영은 더 읽어 나갈 기력을 잃고 와락 신문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세계가 있었고,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니의 세계가있듯이 저희들은 또 저희들의 세계가 있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읍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믿어왔던 저의 생각이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순간, 저는 그지 없이 허무했고 쓸펏읍니다.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모두가 다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저는 보았읍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 해야 한다는 학교 교단에서 들은 말이 얼마나 공소한 교훈인지도 이제는 절실 히 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 아버지와 제 어머니 만은 그렇지 않을 줄 로 믿고 있던 저희들의 긍지는 무너졌읍니다.
나쁜 아버지와 무정한 어머니! 어머니의 슬픔과 절망은 저도 잘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나이는 어리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어머니를 무척 동 정은 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들까지 내버리고 집을 나간다는 것은 너무 해요. 아버지는 원체 나쁜 아버지니까 말할 나위도 없지만 어머니까지 저희들을 버리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어머니, 어서 돌아오세요. 아버지 없는 가정이지만 우리 사남매는 열심히 어머니를 모시겠읍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처럼 소중히 여기시던 이 가정을 영영 버리시겠읍니까? 그렇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진정 돌아오기가 싫으시다면 안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우리 사남매는 기어이 살아 가겠 읍니다.》 옥영은 신문을 접어 쥐며 홱 일어섰다.
『신정 언니, 나 집에 가겠어!』
옥영은 울고 있었다.
『잘 생각했어. 필시 그럴 것 같아서 택시를 돌려 보내지 않고 골목 밖에 세워 두었지.』 『혜련씨, 다시 찾아 뵙겠어요.』
『사모님, 어서 돌아가 보셔야겠어요.』
옥영은 건너방으로 들어가서 『 어머니, 신세 많이 졌어요.』
『어머나, 어떻게 그처럼 갑자기?』
혜련 어머니는 재봉틀에서 훌쩍 일어섰다.
『옥영이의 속앓이 병이 다 낫나봐요.』
오신정 여사가 그런 말을 하면서 뜰아랫방으로 들어가서 옥영이가 쓰던 자실 구레한 도구와 이부자리를 꾸려가지고 나왔다.
혜련과 어머니는 골목 밖까지 따라 나와서 친절한 전송을 했다.
『혜련씨, 어서 들어가서 누워 있어요.』
오여사와 함께 옥영은 차에 올랐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알 수가 없구만. 그래도 그처럼 부랴부랴 떠날 줄은 모르고.』 헤련의 어머니는 여전히 어리벙벙해 있었다.
『노인네는 모르시는 편이 좋아요.』
오여사는 유쾌히 웃었다.
『그렇지만 혜련이가 오죽이나 서운해 할라고.』
『혜련씨, 몸 조리 잘 하세요.』
옥영은 눈물을 씻으면서 말했다.
『사모님도……』
혜련은 말끄러미 옥영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 사모님, 종종 들러 주세요.』
옥영은 혜련의 손길을 한 번 잡아 보며 『 들리고 말고요. 너무 마음 약하게 가지지 말고 희망을 품어야 해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차가 저만큼 서 커브를 하여 보이지 않을 무렵까지 혜련 모녀는 골목 어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국동 병원에 들러 이부자리를 내려 놓고 오신정 여사와 옥영이가 혜화동에 도착했을때는 도현이와 도선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다.
『아, 어머니가?』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던 도현이가 허리를 펴며 주춤하고 서서 정문을 들어서는 옥영을 낯선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보는데 『 엄마, 엄마아!』 짱아채를 들고 잠자리를 쫓아가면 도선이가 짱아채를 냉동댕이 치고 다람쥐처럼 기를 쓰고 달려 왔다.
『도선아!』
『엄마!』
달려드는 도선을 옥영은 꽉 부여안았다. 옥영의 배꼽노리에서 도선의 까만 대강이가 무섭게 비비적거렸다. 옥영은 무릎 하나를 마당에 꿇고 앉아서 자기의 키를 줄이며 『 도선아, 엄마가 왔다! 엄마 보고 싶었지?』 도선은 말을 않고 끄덕거리기만 했다. 글썽글썽 눈물이 어린 도선의 눈 이 어머니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 들여다보았다.
포옥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옥영의 시야를 희뿌옇게 뭉그러뜨리고 있었다.
눈물을 씻으며 송글송글 땀이 배인 도선이 이마에 옥영은 입을 맞추었다.
안으로 들었갔던 오여사가 혜숙의 손목을 끌고 나왔다. 오여사의 뒤로 식모가 뒤쳐 나왔고, 할머니는 복도에 서서 웃는 낯으로 멀리 옥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오여사의 손을 뿌리치며 혜숙은 바르르 달려왔고 『 혜숙아!』
옥영은 도선을 놓고 맞받아 달려갔다. 얼싼안은 옥영의 목을 혜숙은 두 팔로 꼭 껴안으며, 『 엄마, 죽지 않았어?』 『죽긴…… 혜숙을 두고 엄마가 왜 죽어.』
『엄마 죽은 줄 알았어. 작은 오빠가 죽었을 거라고 그랬어.』
일단 멎었던 눈물이 되짚어 솟구쳐 나왔다. 이 조그만 넋들이 자기를 하늘처럼 믿고 있지 않았더냐고, 저번 날밤, 재동약국으로 수면제를 사러 들어섰던 이기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던가를 뼈 아프게 옥영은 느꼈다.
『엄마, 이제 또 가나?』
도선이가 감히 쳐다보지 못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혜숙은 말똥히 들여다보면 선 물었다. 옥영은 혜숙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 안 간다. 혜숙이하고 꼭 같이 살께. 언제까지나.』 『아이, 좋아! 오빠, 엄마 이제 안 간대. 아무 데도 말이야.』
비를 든 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섰는 도현이를 향하여 혜숙은 재빨리 보고를 하였다.
『도현이 너는 기쁘지 않니 어머니가 돌아왔는데.』
오여사가 멍하니 섰는 도현을 향하여 그런 말을 했다. 그랬더니 도현은 거북스런 웃음을 한 번 희쭉 웃었다.
그리고 나서 도현은 다시금 마당을 쓸기 시작하였다.
『도현이가 마당을 다 쓸 줄 알구…… 』 옥 영은 물끄러미 도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도현의 변모가 다시금 옥영의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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