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총독부에서 새로운 정치를 시행한 지 다섯 해 된 기념으로 공진회를 개최 하니, 공진회는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을 벌여놓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경하게 하는 것이어니와, 이 책은 소설 공진회라. 여러 가지 기기묘묘한 사실을 책 속에 기록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한 것이니 총독부에서는 물산 공진회를 광화문 안 경복궁 속에 개설하였고, 나는 소설 공진회를 언문으로 이 책 속에 진술하였도다. 물산 공진회는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 이오, 소설 공진회는 앉아서 드러누워 보는 것이라. 물산 공진회를 구경하고 돌아와서, 여관 한등 적적한 밤과 기차 타고 심심할 적과 집에 가서 한가할 때에 이 책을 펼쳐들고 한 대문 내려보면 피곤 근심 간데 없고, 재미가 진진하여 두 대문 세 대문을 책 놓을 수 없을 만치 아무쪼록 재미있게 성대한 공진회의 여흥을 돕고자 붓을 들어 기록하니, 이때는 대정 사년 초 팔월이라.
천강(天江) 안국선( 安國善)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 주는 글
사람들은 울지 말지어다. 슬픈 후에는 기꺼움이 있느리라. 사람들은 웃지말지어다. 기꺼운 후에는 슬픔이 생기느니라. 기꺼운 일을 보고 웃으며, 슬픈 일을 보고 우는 것은 인정의 상태라 하지마는, 사람의 국량(局量)은 좁으니라. 넓은 체하지 말지어다. 사람의 지식은 적으니라. 많은 체하지 말지어다. 하늘은 크고 큰 공중이라 누가 그 넓음을 측량하리오. 지구에서 태양을 가려면 몇백만 리가 되는데, 태양에서 또 저 편 별까지 가려면 몇 억백만 리가 되고, 그 별에서 또 저 편 별까지 가려면 몇억천만리가 되어, 이렇게 한량없이 갈수록 마치는 곳이 없으니 그 넓음이 얼마나 되느뇨, 세상은 가늘고 가는 이치 속이라. 누가 능히 그 아득함을 발명하리오. 사람마다 생각 하라.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으며,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으니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혼인이 되었으므로 아버지를 낳으셨으나, 그때 만일 할머니와 혼인이 아니 되고 다른 부인과 혼인이 되었으면 그래도 우리 아버지를 낳으시고 또 내가 생겨났을는지. 또 아버지가 어머니와 혼인이 되었으므로 나를 낳으셨으나, 그때 만일 다른 부인과 혼인이 되었다면 그래도 내가 이 모양으로 이 세상에 생겨났을는지. 이것으로 말미암아 종조부, 고 조부, 오대조, 육대조, 시조까지 올라가며 여러 십 대, 여러 백 대 중에서 어느 대에서든지 한번만 혼인이 빗되었으면 오늘 이 모양의 나는 이 세상에 생기게 되었을는지 알지 못할지니, 세상 사람이 생겨난 것부터 이렇게 요행이요, 우연한 인연이라. 그 아득함이 어떠한가. 하늘은 큰 공중이라 넓고 넓어 한량이 없고, 세상은 가늘고 가는 이치 속이라 아득하고 아득하여 알지 못할지니, 사람의 국량이 아무리 넓을지라도 공중에 비할 수 없고, 사람의 지식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조화주는 따르지 못할지라. 그러나 사람은 일정한 국량이 있고 보통의 지식이 있는 고로 기뻐하며 노여워하며, 슬퍼하며, 즐겨하며, 사랑하며, 미워하며, 욕심내며 겁내는 인정이 있으니, 사람은 이 여덟 가지 정이 있는 고로 사람은 아무리 하여도 사람에 벗어나지 못하고, 국량은 아무리 하여도 그 국량이오 지식은 아무리 하여도 그 지식이라. 술 취하여 미인의 무릎을 베게하고 술 깨어 천하의 권세를 주무르며, 한 번 호령하면 천지가 진동하고, 한 번 나서면 만민이 경외하는 고금의 영웅들이 장하고 크다마는, 역시 한때 장난에 지나지 못하고, 물리를 연구 하여 화륜선, 화륜차, 전보, 비행기 등속을 발명하여 예전에 없던 일을 지금 있게 하는 이학박사여, 용하고 가상하다마는 세상 이치의 일부분을 깨달음에 지나지 아니하도다. 영웅의 끼친 역사(歷史)는 슬픔과 기꺼움의 종자요, 박사의 발명한 물건은 욕심과 희망의 자취라. 그러한즉 사람은 욕심과 희망으로 살고 슬픔과 기꺼움으로 소견하는 것인가. 사람이 아들 낳기를 바라다가 아들을 낳으면 기꺼워하고 그 아들이 죽으면 슬퍼하리니, 아들 낳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며 희망이오, 낳을 때에 기꺼워하고 죽을 때에 슬퍼 함은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역사를 지음이오, 사람이 부자 되기를 원하다가는 재물을 얻으면 기꺼워하고 그 재물을 잃으면 슬퍼하리니, 부자 되 기를 원함은 욕심이며 희망이요, 얻을 때에 기꺼워하고 잃을 때에 슬퍼함은 또한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역사를 만듦이라. 크고 넓은 천지에서 내가 지금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하고 이곳에 있으며, 가늘고 아득한 이치 속에서 내가 이 왕에 나지도 아니하고 장래에 나지도 아니하고 불선불후 꼭 지금 이 때 에나서 입을 열어 기껍게 대소할 때도 있고, 주먹을 두드려 슬프게 통곡할 때도 있고, 지금은 먹을 갈고 붓을 들어 눈으로 보이는 세상 사람의 슬퍼하고 기꺼워 하는 여러 가지 형편을 재료로 삼아 이 책을 기록하니, 이것은 슬픈 중에 기꺼움을 얻고 기꺼운 중에 슬픔을 알아 한때는 소견하려 하는 나의 욕심이며 희망이니, 이 책 보는 여러 군자는 나와 인연이 있도다. 여러 군자가 이 책을 볼 때에 기꺼워할는지 슬퍼할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여러 군자의 슬퍼함이 있고 기꺼워함이 있으면 또한 여러 군자가 세상에 지나가 는 역사를 지음인즉, 크고 넓은 천지와 가늘고 아득한 이치속에서 여러 군자와 나의 사이에 한 가지 심령이 교통함을 깨달으리로다.
기생
문명이니 개화이니 발달, 진보이니 하는 여러 가지 말이 지금 세상에 행용들 하는 의례건의 말이라. 조선도 여러 해 동안을 문명진보에 열심 주의 하여 모든 사물의 발달되어 가는 품이 날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도다. 이번 공진회를 구경한 사람은 누구든지 조선의 문명 진보가 오륙 년 전에 비교 하면 대단히 발달되었다고 할 터이라. 그러나 외국의 문명을 수입하여 내 지 의문명을 발달케 하는 때는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사치(奢侈)라 하는 풍속이라. 교화의 아름다운 풍속은 별로 들어오는 아니하고 사치하는 풍속은 속히 들어오니, 외국 사람은 상등 사람이라야 파나마 모자를 쓰는 것인데, 조선 사람은 하등 연소한 사람도 그것만 따르고자 하고, 외국 사람은 하이 칼라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경향이 있건마는 조선 사람은 도리어 하이 칼라를 부러워하는 모양이라. 이것은 무슨 연고인가 하면, 역시 세상의 풍조를 따라 남보다 신선한 풍채를 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까닭이오, 남보다 신선한 풍채를 내고 싶은 까닭은 오입쟁이 풍류랑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까닭에서 생기어나는 법이라. 사나이가 고운 의복에 말쑥하게 차리고 버선 등이나 맵시를 내고 다니는 것은 점잖은 사회교제(社會交際)에 자기 위의( 自己威儀) 를 보전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기생이나 다른 계집들에게 곱게 보이 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음이오, 여자가 자기 지위에 상당치 아니한 사치를 하는것도 남의 눈에 예쁘게 보이기를 바라서 그리함인즉, 사치의 풍속은 사회 이면에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관계로 인연하여 생기는 것이라. 그 중에도 기생이라 하는 무리가 있어서 직접 간접으로 사치의 풍속을 조장( 助長) 하는 일대 기관(一大機關)이 되었도다. 기생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예전에는 약방 기생이니 상방 기생이니 하더니 지금은 무부기 유부기 삼패 색주가 밀 매음 은근자 여러 무리의 계집들이 있어서 화용월태를 한 번 세상에 자랑 하면 부랑 남자는 더 말할 것 없고 남의 집 청년 자제들이 놀아나기를 시작 하여, 여러 대 내려오던 세전 기업을 일조에 탕패하는 일이 많이 있더라.
경상도 진주라 하면 조선 안에 유명한 도회처요, 진주군에는 두 가지 명산이 있으니 파리와 기생이라. 파리의 수효와 기생의 수효를 비교하면 기생수 효가 파리보다 하나 둘 더하다 하는 말이 거짓말 같은 참말이라. 닭이 천이면 봉이 한 마리 있다더니, 기생이 하도 많으니까 그 중에 절대미인 하나 가 있던 것이야 진주성 안에 한 기생이 있으니 얼굴이 절묘하고 행동이 얌전하여 사람마다 한 번 보면 두 번 보고 싶고, 두 번 보면 껴안고 싶고, 껴안으면 집어 삼키고 싶을 만치 되었는데, 어느 누가 한 번 보기를 원치 아니하는 자가 없으나, 이 기생은 무슨 까닭인지 남자의 소원을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고로 진주성 안 청년 남자의 경쟁거리가 되었더라.
이 기생은 성질이 다른 기생들과 다르고 언어, 행동 모든 범절이 일 반 기생계에 일종 특별한 광채를 빛내게 되었는데, 이름부터 다른 기생들과 같지아니 하도다. 기생의 이름은 행용 많이 사월이니 산홍이니 매월이니 도홍이니 하는 두 자 이름을 짓건마는, 이 기생의 이름은 석 자 이름인고로 또 기생계에 보지 못하던 이름이라. 이름을 향운개라 부르는데 어찌하여 이름을 향운개라 지었느냐고 물은즉, 처음에는 대답지 아니하더니 부득이하여 향 내 나는 입을 열어 말을 하는데, 말소리만 들어도 아리따운 꾀꼬리가 버들 가지에서 우는 소리같도다.
"이름이야 아무렇게 지으면 상관있습니까. 그러나 저는 실상 그러할 수는 없지요 마는, 마음으로는 춘량(春香)의 절개와 춘운(春雲)의 재주와 논개( 論介) 의 충성을 본받기 위하여 춘향이란 향자와 춘운이란 운자와 논개라는 개자를 가지고 향운개라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생각한즉, 춘향은 남원 기생으로 일부종사하기 위하여 정절을 지키던 춘향전의 주인이오, 춘운은 김춘택씨가 지은 구운몽이라 하는 책에 있는 가춘운인데, 신선도 되었다가 귀신도 되었다가 막판 재주를 부리어 양 소유를 농락하던 계집이오, 논재는 진주 기생으로 예전에 어느 나라 장수가 조선을 치러 왔을 때에 촉석루에서 놀음을 놀다가 그 장수를 껴안고 강물에 떨어져서 그 적장과 함께 죽은 충심 있는 계집이라. 그러면 아 기생은 내력을 듣지 아니하면 알 수 없으나, 절개와 재주와 충성을 겸전한 계집인가.
향운개의 집 이웃집에 강씨 부인이 사는데 이십 전 과부로 다만 유복자 아들 하나가 있어 구차한 살림살이를 근근히 지내는데, 세상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도 열두 번씩 나지마는, 어린 아들을 길러낼 마음으로 그럭저럭 살아오는 터이라. 그 아들의 이름은 유만이니, 향운개보다 나이 두 살이 위가 되는 터이로되, 어려서부터 장난도 같이 하고 음식도 서로 나누어 먹고, 자주 서로 오락가락하며 놀다가, 향운개는 열한 살이오, 유만이는 열세 살 되었을 때에 남녀의 교정을 알지 못하는 두 아이들이 살음 한데 대고 드러누웠다가 아이들 장난으로 남녀 교합하는 흉내를 내었더니, 그 후로는 두 아이의 정의가 더욱 깊으나 다시 놀지 못할 사유가 생겼으니, 강씨 부인 이그 아들 교육하기 위하여 천리원정에 서울로 올라가서 학교에 입학을 하게하고, 강씨 부인은 방물장사를 하면서 그 학비를 대어주기로 하였는데, 이 것도 사소한 까닭이 있어서 강씨 부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결심을 하게 함 이러라.
그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향운개의 어미는 추월이라 하는 퇴기로 젊어서 기생 노릇할 때에 여러 사람의 재산도 많이 없애어주고 사나이의 등골도 많이 뽑던 솜씨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 딸 향운개의 얼굴이 절묘함을 보고 큰 보물덩어리로 생각하여, 사오 년만 지나면 조선 천지의 재산 있는 집 자제들은 모두 후려들일 작정인데, 향운개는 기생 노릇하기 싫어할 뿐 아니라, 유만이를 특별히 정 있게 굴며 상대하는 모양이 다른 아이들과 다른 지라, 추월이가 하루는 향운개를 꾀어가며 말을 물어 유만이와 향운개 사이에 그러한 사정이 있는 줄 알고, 강씨 부인집에를 가서 은근히 포달을 부리며 유 만이는 남의 집 아이 사람 못되게 하는 놈이라고 대단 포학을 하는 것이한 두 번이 아니오, 또 강씨 부인은 가세가 빈한하여 추월의 집 의복 빨래와 침선 등을 맡아 하여주고 살아오던 터인데, 그 후로는 생명을 끟어진 것 같은지라. 강씨 부인이 살아갈 생각도 하고 유만이 교육시킬 생각도 하다가 추월에게 그러한 불법의 창피한 꼴을 당하고 분김에 살림을 헤치고 유만이를 앞세우고 서울로 올라와서 방물장사도 하며 남의 집 드난도 하여 목숨을 보전하는 동시에, 유만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하고 돈푼이나 생기는 대로 학비를 대어주되 조금도 게으른 기색이 없더라.
세월이 흐르는 물결같이 달아나는 서슬에 향운개의 연광이 십오 세에 이르고 세상 물정은 문명개화의 풍조를 따라 사치하는 풍속이 날마다 늘어가매, 사람마다 비단옷이 아니면 입지 아니하건마는, 진주성 중에 사는 김부자는 위인이 검소하기로 짝이 없어 수백만 원 재산을 가지고도 비단옷은 단 한번도 몸에 대어보지 못하였더라. 김부자는 여러 대를 내려오는 부자로되, 자손은 그리 대대로 귀하든지 일가친척 하나 없고, 자기 집에는 자기와 그 모친과 그 부인과 두 살 먹은 딸 하나뿐이오, 아들이 없이 삼십 세나 되었는 고로 그 모친과 그 부인이 항상 첩이라도 치가하여 자손을 보라고 권고 하는 터이로되, 김부자는 위인이 재산을 아끼기 위할 뿐만 아니라, 평생에 옷 잘 입고 음식 사치하고 첩 두고 호강하는 것은 남자의 숭상할 것이 아닌 즉, 자손 없는 것은 한탄할 바이로되 첩 두는 것은 패가의 근본이라 하여 친구 상종도 별로 많지 아니하거니와 기생이나 남의 계집은 별로 구경 하지못하였더니, 하루는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촉석루에서 논개의 제사를 지 내는데 대단히 야단법석이라는 말을 듣고 구경을 갔더라.
이 위에 말하였거니와, 논개는 예전 기생으로 충심이 갸륵하다 하여 일 년에 한 번씩 촉석루에서 남강물을 향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이 제사는 진주 기생이 모두 모여서 설비도 장하거니와 사람도 많이 모여들어 대단 굉장하도다. 그 중에 향운개는 원래 논개의 충심을 사모하는 터이라, 자기 집 제사는 궐할지언정 어찌 논개의 제사야 참례치 아니하리요. 수백 명 기생이며 수만 명 구경꾼이 모였는데 기생마다 사람마다 제집에 있는 대로 궁 사 극치하여 의복도 잘들 입었거니와 맵시도 이상야릇하게 잘들 내었도다. 구경 하는 모든 사나이들이 이렇게 궁사극치의 고운 모양을 내는 연고는 사람마다 필경 코 수백 명 기생에게 어여뻐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까닭이 아닌가. 그 중에도 보잘것없이 무명의복에 아무 모양도 내지 아니한 사람은 김부자라. 김부자는 여러 사람의 호화한 기상과 찬란한 모양을 보고 혼자 마음으로 한탄하여 말 하기를, "세상이 이렇게 사치가 늘어가다가는 나중에는 어찌되려는고, 진주 같은 지방 풍속이 이러할 제야 서울 같은 번화한 곳이야 오죽할꼬. 참, 한심한 일이로고."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만 생각하고 이리저리 구경할 새, 어여쁘고 고운 기생을 보아도 심상하 게 여기더니, 한곳에 이른즉 어떠한 기생 하나가 다른 기생과 마주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도다. 모든 것을 심상히 보고 다니던 김부자가 그 기생을 보더니 우두커니 서서 한참동안을 정신없이 바라볼 때에, 무슨 까닭인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자기 몸뚱이가 그 기생에게로 부썩부썩 가까이 가는 듯하도다. 다른 이에게 수상스러이 보일까 두려워하여 고개를 돌이키고 다른 것을 보는 체하여도 눈은 자연히 그 기생에게로 가는지라. 그리할 때에 마침 아는 사람 하나가 앞으로 오거늘, 김부자가 그 사람과 두어 말 수작한 후에 저 편에 있는 기생의 이름을 물어보아 향운개라 하는 당년 십오 세의 유명한 기생인 줄도 알았으며, 가무 음률 서화의 모든 재주가 당시에 제일인 줄도 들었더라. 그날 밤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이루려 한즉 향운개의 형용이 눈앞에 왕래하여 가슴만 뚝딱거리고 잠은 조금도 이룰수 없는지라, 드러누웠다가 일어앉았다가 일어서서 거닐다가 도로 드러누워 무슨 생각도 하다가 도로 일어앉아서 담배도 피우다가 다 타지 아니한 담배를 재떨이에 탁탁 털고 도로 드러누워 혼자 마음으로, '내가 이 것이 무슨 일인가, 망측하여라. 마음이 튼튼치 못하여 이러하지. 다시는 생각지 아니하리다’하되 자연히 생각은 도로 향운개에게로 간다.
김부자가 여러 시간을 혼자 공연히 번뇌하다가 나중에는 벌떡 일어나서 의 관을 정제하고 대문을 나서서 사고무인 적적한 밤에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다가 향운개의 문을 두드리니, 맞아들이는 사람은 향운개의 어미 추월이라. 추월이는 김부자의 얼굴도 자세히 알고 그 성질도 또한 짐작이나 하는 터인데, 아닌 밤중에 자기 집을 찾아온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 건마는 부자에게 아첨하는 것은 세상 사람의 보통 형편이라. 추월이는 더욱 김부자가 자기 집 대문 안에 발 한 번 들여놓는 것만 하여도 얼마쯤 영광으로 생각 하는 터인 고로 우선 반가이 김부자를 맞아들이며 한편으로 담배를 권한다. 주안을 차린다, 들어왔다 나갔다, 얼렁얼렁하며 분주불가한 중에도 김부자가 어찌하여 우리 집에를 이 밤중에 찾아왔을까 하는 의심이 가슴속에 풀리지 아니하여 솜씨 좋은 수작을 난만히 벌여 놓으며 한편으로 눈치를 보고 한편으로 말귀를 살피는데, 김부자가 주저주저한 모양이 저절로 나타나지마는 역시 옹졸한 사나이는 아니라. 이런 말 저런 말로 추월의 말을 따라 한참을 늘어놓다가, "향운개는 어디 갔느냐. 지금 데려오너라." 한즉 추월이는 굿들은 무당 같아서 속마음으로, '인제 제 ㅡ 밀 수가 나나보다’ 하고 지급히 사람을 보내어 촉석루 논개제에서 아직 돌아오지 아니한 향운개를 불러왔더라.
김부자는 향운개를 앞에 앉히고 술잔이나 마시며 행용하는 수작으로 한참 동안을 노닐다가 취흥이 도도한 중에 아무리 하여도 그저 갈 수는 없는지라, 향운개를 대하여,
"오늘밤에 좋은 인연을 맺고 내일부터는 기생 영업을 그만두고 나와 백년 가약을 맺자." 하였으나 향운개는 당초에 듣지 아니하려 하여 처음에는 좋은 말로 김부자의 소청을 거절하다가, 나중에는 불쾌한 말로 김부자의 얼굴을 붉게 하기까지 이르렀더라.
김부자가 할 수 없이 그날 밤에는 향운개의 집을 사례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사랑방에서 혼자 잠을 자면서 향운개와 놀던 꿈만 꾸었도다. 김부자는 향운개와 인연을 맺지 못한 것만 한탄하고 한편으로 분한 마음을 금 할수 없으나, 향운개를 어여쁘게 생각하는 사랑마귀는 김부자의 가슴속을 떠나지 아니하더라.
그 이튿날 김부자의 집에는 양반 상하 없이 괴상스럽게 생각하는 별안간 생긴 일이 있으니, 다름 아니라 김부자가 수천 원 돈을 들여 시체 비단을 필로 끊어다가 의복을 지으라 재촉이 성화같고 금반지, 보석반지, 금테 안경, 금시계, 파나마 모자, 단장, 맵시 있는 마른신까지 꾸역꾸역 사들이는 것이라. 평생에 검소하기로 짝이 없고 세상 사람의 사치하는 풍속을 꾸짖고 비평 하던 김부자가 이렇게 의복을 장만하고 사치품을 사들이는 것은 아무라도 괴상히 생각할 수밖에 없도다. 김부자가 이렇게 호사를 찬란히 하고 어디를 가느냐 하면 첫 출입이 향운개의 집이라. 김부자가 향운개를 생각 하는 품이 이도령이 춘향이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하면 더하였지 지금도 덜하지아니한데, 향운개와 인연을 맺고자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후로는 혼자 생각 하기를, '내가 얼굴이 남만 못한가, 돈이 없는가. 어찌하여 제가 일개 기생으로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노, 아마도 내가 의복이 추솔하여 고운 모양이 없으므로 제 눈에 들지 아니하여 그러한가’하고 아무쪼록 향운개의 눈에 들기 위하여 의복범절을 찬란히 하고 향운개의 집을 자주자주 찾아다니게 되었더라. 말을 하여도 총채 수작을 배워가며, 재담은 듣는 대로 기억 하여 두고 말솜씨를 이상야릇하게 지어서 한다. 혼자 다니는 것은 심심도 할 뿐 아니라 자기 혼자 수단으로 능히 향운개의 마음을 돌리기 어려울까 하여 기생좌석에 익달한 친구 두어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데, 이 사람들은 모 양도 썩 하이칼라요, 수작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음률도 반짐작이나 하는 위인들이니, 기생집이라면 자기 집 안방으로 알고 기생을 마음대로 농락 하는 사람들이라. 하루 다니고 이틀 다니고 그럭저럭 수십 일이 넘었으되 향운개 마음은 조금도 김부자에게 따르지 아니하는 고로, 김부자는 할 수 있는 대로 수단을 부리며 돈을 들이며 향운개를 집어삼키려 하고, 함께 다니는 여러 사람들도 김부자를 위하여 향운개의 마음을 돌리려고 제갈량 같은 모든 기기묘묘한 계략을 다 부리는 터이라.
향운개의 집에서는 그 어미 추월이가 향운개를 시시로 때리며 어르며 혹간 달래기도 하여, 향운개로 하여금 김부자의 소청을 들어 김부자의 재산으로 호강을 하려 하니, 향운개는 사면수적이요 고성낙일의 비참한 지경에 빠졌는데, 향운개는 일개 섬섬한 약질이오, 한 사람도 도와줄 사람은 없고 대적은 모두 위의당당한 출출명장이라……. 이 책을 기록하는 이 사람은 향운개를 위하여 불쌍한 눈물로 뿌리노니, 향운개여, 네가 어찌하여 이 지경을 당하느냐, 네가 장차 어떻게 하려느냐, 향운개여…… 향운개는 지금 겨우 십오 세의 어린 기생이로되 숙성하기는 열칠 팔 세나 되어 보이는 고로 향운개의 어미 추월이는 어서 하루바삐 부자들 많이 상관케 하여 재물을 뺏어 먹을 작정인데, 향운개는 일향 청종치 아니하고 어미 추월이가 꼬이고 달래며 김부자와 상관하라 하면 향운개는 온순한 태도로 공손히 말하되 "내가 불행히 기생의 몸이 되었을지라도 절개는 지킬 수밖에 없으니, 계집 사람이 일부종사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뭇 사람을 상관하면 짐승이나 다른 것이 무엇 있사오리까. 짐승 중에도 원앙새나 제비 같은 것은 그렇지아니하니, 사람이 되어 미물만 못하오리까. 나는 어려서 유만이와 상종이 있었으니, 유만이는 나의 남편인즉 유만이를 만나기 전에는 결코 다른 사람과 추한 관계를 맺지 아니하겠사오이다. 또 지금 법률에는 기생이라 하는것이 재주를 팔아먹으라는 것이지 매음하라는 것이 아니온즉, 여간 재산을 욕심하여 법률을 위범하는 것은 국미의 도리가 아니오이다. 어찌 사람이 법률을 범하고 행실을 부정히 하여 금수만 못하게 된단 말씀이오니까. 기생 노릇을 하더라도 정당하게 할 것이지. 뭇 사람들 상관하여 매음을 하는 것은 기생이 아니라 짐승이올시다. 나는 죽어도 어머니 말씀을 청종할 수 없어요."
향운개의 어미 추월이가 이 말을 듣더니 하도 기가 막히고 분하여 열길 스무 길 반자가 뚫어지도록 날뛴다.
"잘났다, 잘났다. 우리 집안에 정절부인 났구나. 이년, 정절이 다 무엇 말라 죽은 것이냐. 정절, 정절, 이년, 네 어미는 뭇 서방질을 하여 너를 낳았으니 네 어미도 기생노릇을 아니하고 짐승노릇을 하였다는 말이로구나. 이년, 유만이 하고 상관이 있었다고. 계집아이년이 남부끄럽지도 아니하여 그런 말을 하느냐. 여남은 살 먹은 어린것들이 철모르고 장난친 것이지, 상관이 다 무엇이냐. 이년아, 네 두 살 먹어 같이 잤어도 서방이라고 정절을 지킬 터이냐. 네가 나이 어려서 철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유만이 그까짓 가난뱅이 빌어먹는 놈이 네 서방이란 말이냐. 요년, 굶어죽기는 똑 알맞다. 이년, 네가 아무리 하여보아라. 내 솜씨에 내 말 아니 듣고 견디어내나. 요 년, 법률은 어디서 그렇게 똑똑히 배웠느냐. 이년, 법률을 그렇게 자세히아니 변호사가 되겠구나. 이년아, 변호사는 목구멍을 팔아먹고 기생은 그 구멍을 팔아먹는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느냐."
입으로는 소리를 지르고 손으로는 방망이를 가지고 사정없이 때리며 금방 향운개를 죽일 것 같이 날뛰는데, 향운개는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도 없고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고, 다만 죽으면 죽었지 그러한 행위는 아니할 터이야, 하는 기색이 자연히 그 얼굴에 나타나더라.
추월이는 날마다 날마다 하루도 열두 번씩 향운개를 들볶는데 향운개는 혼자 생각하기를, '내가 아무리 철모르고 어려서 유만이와 그리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잊히지 아니하니 다른 남편은 세상없어도 얻지 아니하리라’하고 어미가 야단을 칠수록 향운개의 결심은 더욱 단단하여 지는지라.
김부자의 마음은 더욱 간절하고 어미의 욕심은 더욱 불같아서 향운개를 에 워 싸고 만반 수단을 다 부리고 일천 가지 꾀를 다 써보아도 향운개의 마음 은 항복받지 못하였는지라, 김부자는 추월이와 여러 사람들과 의논을 정하고 이제는 할 수 없이 배성일전에 단병접전으로 돌관할 방침을 작성 하였더라.
하루는 어미 추월이가 향운개를 대하여 말 하기를,
"너는 그전부터 기생노릇하기를 싫어하기에 오늘부터는 기생 영업을 폐지 하게 되었으니 그리 알아라. 경찰서에 기생 영업 폐지신고도 다 하여 놓았고 기생 조합에 이름도 빼었다."
향운개는 벌써 추월의 눈치도 짐작하였으며, 김부자의 음흉한 계략인 줄도 심량 하였다.
하루는 낯모르는 사람 수삼 인이 향운개의 집을 찾아와서 술도 먹고 노닥 거리 더니 그 중에 한 사람이 저희끼리 하늘 말이,
"내가 서울 갔다가 작일에 내려왔는데 서울서 불쌍한 일을 보았거니."
또 한 사람은 무슨 일이냐 물은즉,
"유만이라는 진주학생이 학교의 공부도 잘하고 사람도 착실하여 사람마다 칭찬을 이 대단하더니, 그 아이가 일전에 괴질 같은 급병으로 죽었는데 유만 이의 어미가 울고 돌아다니는 꼴은 참 불쌍하기가 이를 데 없어……."
저희들끼리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야기로되 자연 향운개의 귀에도 들릴 만치 하는 말이라.
그 후 수십 일이 지난 후에 향운개는 김부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것은 향운개의 마음이 아니라 김부자와 향운개의 어미 추월이와 언약을 정하고, 경찰서에 대하여 향운개는 첩으로 들어가는 입가신고를 하여놓고 부지 불각에 향운개를 김부자의 집으로 데려갔더라.
향운개는 아무 말 없이 김부자의 집에서 거처하게 되었는데, 향운개는 김부자더러 말 하기를,
"나는 유만이를 남편으로 알았더니 유만이가 죽었다 하온즉 석 달만 유만의 복을 입을 터이니 그 동안만 참아 주시면 그 후는 영감의 말씀대로 하 오리다." 하였더니, 김부자는 향운개의 소청을 의지하여 아직 몇 달은 향운개와 동침 하지 아니하기로 되었는지라.
김부자의 집에서는 노소남녀 없이 향운개를 수직하기를 감옥에서 갇힌 죄인 간수하는 것과 일반이라.
김부자 집의 침모로 있는 김씨라 하는 젊은 부인이 있는데, 당년 이십 오 세의 청춘과부라. 얼굴이 어여쁘지는 아니하나 위인은 단정하고 침선범절이 능란한 계집이라, 자연 향운개가 침모더러 수작을 한다.
(향) "침모는 청춘에 과부가 되었으나 개가하지 아니하고 정절을 지키니 참 장한 일이요."
(침) "나는 남편을 얻고 싶었지마는 마음에 맞는 사나이를 아직 만나지못하였어."
(향) "그러면 이 집 주인영감의 별당마마가 되었으면 어떠하겠소."
침모의 얼굴은 붉어지며 남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나타난다.
(침) "그렇지 아니하여도 내가 이 댁에 침모로 들어온 것은 당초에 이 댁노 마나님이 주인영감의 첩을 삼아 자손을 보려고 데려온 것인데, 주인 영감이 첩은 당초에 아니 둔다고 떼치는 까닭으로 첩이 되지 못하고 침모가 되었어요,"
(향) "그러면 내 말대로만 꼭 하면 주인영감의 별실마마가 될 터이니 그리하여 보겠소."
(침)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요."
향운개가 침모의 귀에다 입을 대고 무슨 말을 한참 수군수군하더니 침 모 는고개를 끄떡끄떡하며 하는 말이,
(침) "그런 일은 잘할 사람이 하나 있으니 염려마시오."
그 해는 그럭저럭 다 넘어가고 그 이듬해 이월이 되었는데,
김부자는 하루바삐 향운개의 향기 나는 이불을 함께 덮고 잠을 자고 싶어서 애를 부등부등 쓰건마는, 향운개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향운개의 소청대로 지금까지 참아오던 터이라. 소청한 기한도 얼마 멀지 아니하였는데, 그 달 초파일은 김부자의 부친 제삿날이라. 부잣집 제사라 굉장히 제사를 성설하는데 집안 사람은 모두 제사 차리기에 분주하건마는, 향운개는 수일 전부터 병이 나서 제사 차리는데 조금도 내어다보지 아니하고 별당에 드러누워 한숨만 쉬고있다. 김부자가 제사를 다 지내고 제물을 철상하려 하는 즈음에, 어떤 사람이 바깥으로부터 안마당에 썩 들어서며 김부자를 청하여, 제물을 철상 하기전에 급히 할 말씀이 있다 하거늘, 김부자가 내려다본즉 풍신 좋은 백 발노인이라. 의복은 이슬밭에 쏘다니던 사람같이 휘지르고 손바닥에는 생률 친밤 한 개와 잣 박은 대추 한 개를 가졌더라. 김부자가 괴상한 늙은이라 생각하고 묻는 말이, (김) "누구이시며 무슨 일로 오셨소 "그 노인이 김부자더러 잠깐 이리 내려오라 하여 자세히 말을 하는데,
"내가 지금 남강가에서 오늘 제사 잡수시는 댁 부친의 혼령을 만났소. 댁 부친의 혼령이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우리 집이 여러 대를 내려오던 부자인데 아들 대에 와서 부자가 결딴나고 집안에 큰 화란이 장차 이르겠으 니, 내가 오늘 제사라도 잘 먹지 못하고 그 앙화를 면하게 하여 주고 싶지마는, 유명이 달라 말할 수가 없으니 당신이 내 아들을 가서 보고 말씀 하여주시오. 가서 말을 하더라도 내 아들이 믿지 아니하기 쉬우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증거를 삼이시오……’ 하고는 이 밤 한 개와 대추 한 개를 내 손에다 얹어주신 것이니, 우선 이 밤, 대추를 가지고 제상에 진설한 제물을 살펴보시오. 부탁하신 말씀과 전후 사정은 추후로 알게 하리다."
김부자가 그 노인이 주는 밤과 대추를 가지고 제상 앞으로 올라가서 밤 접시와 대추 접시를 살펴본즉 과연 중간에 한 개씩 빼어낸 자리가 있고, 밤, 대추가 다른 밤, 대추도 아니오, 정녕히 그 접시에서 빼낸 밤, 대추라, 빼어 낸 구멍으로 들여다본즉 밤, 대추 괴느라고 동그랗게 베어서 켜켜이 깔아놓은 백지종이에 무슨 글씨가 있는 듯하거늘 밤 접시를 내려다가 밤을 쏟고 그 종이를 들고 본즉 글이 있는데 하였으되, '김가 성을 취하여 아들을 낳으면 대대 영광이 문호를 빛내리라.’
또 대추 접시를 내려다가 대추를 쏟고 종이를 본즉 거기도 글이 있는데 하였으되, ' 향운개는 전생에 너와 동복이니 취하면 앙화 있으리라.’
김부자는 사물에 자상한 사람이라, 글씨를 자세히 살편본즉 먹으로 쓴 것도 아니오, 붓으로 쓴 것도 아니오, 글자 체격도 이상하여 아무리 보아 도세상 사람의 글씨는 아닌 듯하다. 돌아서서 그 노인을 찾으니 그 노인을 벌써 간 곳이 없고 그 노인 섰던 자리에는 자기 부친 생전에 쓰던 벼룻 돌이 있는데, 먹을 간 형적이 마르지 아니하였더라.
김부자는 원래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라, 부친 생전에 한 번도 그 부친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다고 자랑하던 터인데, 이번에 이러한 희한한 일을 당하여 어찌 믿지 아니하리요. 당장에 별당으로 가서 향운개를 보고 이 왕에 잘못한 일을 사과하는 동시에 남매지의를 맺고, 이튿날 즉시 경찰서에 가서신 고서를 빼고 수 일 후에 향운개의 권고를 의지하여 침모를 김부의 별실로 정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향운개가 침모 김씨의 영리한 행동과 주인의 별실 되 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인하여 전후사를 꾸미고 자기 몸을 빼 어감이 더라.
향운개는 호랑이의 아가리를 벗어났으나, 이 다음에 다시 다른 호랑이 아가리에 또 들어갈지는 알지 못하는 근심이 있는 고로, 마음을 결정하고 멀리 일본 동경으로 건나가서 고생도 무수히 하다가 반연을 얻어 적십자사 병원( 赤十子社病院) 의 간호부가 되었더라.
때는 마침 구라파에 큰 전쟁이 일어나며 덕국과 오국 두 나라가 영국, 법 국, 아라사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싸움을 시작하니, 일본은 영국과 동맹 지국이라. 일본도 역시 전쟁에 참여하여 덕국과 싸우게 되었는데, 일본의 막막 강병이 청도를 에워싸고 덕국 군사와 죽기를 결단할 때에, 부상한 군사와 병든 군사를 구호하기 위하여 적십자가 병원이 청도 공 위군( 靑島攻圍軍) 있는 땅에 설시되며, 간호부도 많이 가게 되었는데, 향운개도 역시 자원 하여 전지에 향하였도다.
강씨 부인이 그 아들 유만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비상한 곤란을 무릅쓰고천하고 힘드는 일을 모두 하여가며 학비를 대어준 공덕이 적지 아니하여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였으나, 그 학교 졸업하기 전에 강씨 부인이 병이 들어 수 삭을 꼼짝 못하는 동안에 학비를 댈 수가 없는 고로 학교 교장이 그 사정을 짐작하고, 또 유만의 위인이 똑똑하고 근실함을 가상히 여기던 터에 유만이 졸업기한도 얼마 남지 아니하였으므로 학교에 드는 비용은 자기가 대어주기로 하고, 식사와 의복은 교장의 친구 이등대좌에게 의탁하게 되었는데, 이등대좌가 유만이를 자기 집에 두고 지내 본즉 마음에 대단히 합당 하여 학교를 졸업한 뒤에 동경으로 보내어 공부를 시킬 작정이었으나, 유 만이가 그 혼자 사는 모친을 멀리 떠나지 못하겠다는 사정을 인연하여 졸업 한 뒤에도 아직 자기 집에 두었더니, 유만이가 낮에는 이등대좌의 집에 있어 심부름도 근실히 하고 집안일도 보살펴주며, 밤이면 야학을 근실히 하여 청국 말을 배웠더라.
그 후에 이등대좌는 동경 참모본부로 이적이 되었다가 청도공위군의 사령관이 되었는데, 유만이가 청국말을 능란히 하게 됨을 생각하고 불러들여 통변으로 데리고 함께 전지로 가서, 유만이는 항상 사령부 안에 있어서 청국 사람과 관계되는 일에 대하여는 혼자 통변하는 노무를 가지게 되었더라.
그때 향운개는 적십자사 병원에서 모든 간호부보다 출중하게 간호 사무를 보는데, 이왕 사오 년 동안을 동경에서 있었는 고로 언어, 행동이 조 금도 내지 여자와 다름이 없고 이름조차 내지인의 성명과 같이 부르게 되었으니, 글자로 쓰면 '향운개자(香雲介子)’라 쓰고, 다른 사람들이 부르기는 ' 가구 모 상( 香雲橡[ 향운양])’, 혹은 '오스께상(御介橡[어개양])’ 이라 부르더라.
수만 명 군대 중에 향운개자의 이름이 사람의 입으로 오르내리니, 첫째는 얼굴이 절묘하여 절대미인이라는 하는 말이오, 둘째는 향운개자가 사무에 능란하고 기운차게 일을 잘하며 부상한 병정을 간호하는 데 제일 친절하다는 말이라. 병든 군사가 한 번만 향운개자의 간호함을 받으면 병이 곧 나은 듯하고, 총 맞은 상처에도 향운개자의 손을 대면 아프지 아니한 듯 하므로 향운개 자의 손으로 여러 천 명 군사를 살려낸 터이라.
청도 함락은 금일 명일 하는데 덕국 군사는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철통 같이 에워싸인 중에도 대포를 놓는다, 총을 놓는다,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올라가서 폭발탄을 던진다 하여 마음 놓을 수는 없는 터이라. 하루는 밤중에 별안간 벽력소리가 나면서 사령부 근처에 폭발탄이 떨어져 여러 사람이 중상하 렸 다 하더니, 상한 사람을 병원으로 메어온다. 메어온 사람 중에 조선 사람 하나가 있으니 성은 최가요 이름은 유만이라. 향운개자는 분주 불가하여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치료에 종사하다가 조선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더욱 반가워서 정성껏 간호하다가 성명 쓴 종이를 본 즉 최유만이라 하였거늘, 얼굴빛이 파래지며 일신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 그 자리에 엎 드러졌다. 최유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기색하여 아직 피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향운개자는 한참 지난 후에 정신을 차려 일어나서 최유만의 얼굴을 들여다본 즉 이별한 후 근 십 년이 되었는 고로 진가를 알 수 없으나, 비슷하다 하는 관념은 가슴 속에 품어 있어 극진 정성으로 간호하더라.
공진회 구경 마당에서 외따로 떨어진 나무 그늘 밑에 다수한 사람들이 모여 서서,
"참 반갑구나, 이문둥아, 그 동안 어디 갔던고." 하고 떠드는 사람들은 진주에서 올라온 늙은 기생 젊은 기생들이오, 그 인사를 받는 사람은 향윤개와 강씨 부인과 최유만이라.
인력거꾼
해는 거의 서산에 넘어가고 겨울바람은 냉랭하여 남의 집 행랑채에 세로 들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노동자의 여편네가 쌀은 없고 나무 없어 구 구 한 살림살이 애만 부둥부둥 쓰는 이때에, 새문 밖 냉동 좁은 골목 막다른집 행랑 채 한 간 방에 턱을 고이고 수심 중에 앉아서 혼잣말로 한탄하는 여편네가 있으니, 그 남편은 병문 친구들이 부르기를 김서방이라 하고, 김 서방은 본시 양반의 자식으로 가세가 타락하여 할 수 없이 남의 집 행랑채를 얻어 들고 병문에 나가서 지게벌이도 하며, 남의 심부름도 하여, 하루 벌어다가 겨우 연명하는 터인데, 김서방의 위인이 술을 좋아하여 하루라도 술을 못 먹으면 병이 되는 듯하다. 술만 먹으면 한두 잔은 평생 먹어본 일이 없고소 불하 수십 잔이나 먹어야 겨우 갈증이나 면하는 모양이랴. 그러하므로 매일 장취 술만 먹고 살림은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사나이가 살림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면 그 여편네는 물을 것 없이 고생하는 법이라. 김서방의 아내는 일구월심 속이 타고 마음이 상하여 하루 몇 번 죽을 마음도 먹어 보았으며, 도망하여 다른 서방을 얻어 살 생각도 하여보았지마는, 오늘 이 때까지 있는 것은 그 본심이 상스럽지 아니하고 얼마쯤 장래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터이라. 이날도 김서방의 아내는 씁쓸한 방안에 혼자 앉아서 배가 고 파도 밥 지을 양식이 없고, 방이 추워도 불 땐 나무가 없이 바느질만 종일 하다가 이따금 두 손을 입에 대고 호호 불며 발가락을 꼼작꼼작 꼼작이며 한숨만 쉬고 들창에 비치는 햇빛만 바라보더니 혼잣말로, "애고, 벌써 해가 다 갔네. 저녁밥을 어떻게 하나……. 오늘은 얼마나 술을 자시기에 이때껏 아니 들어오시노……."
이때에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사람은 김서방이라. 날마다 보는 모양이라, 대단히 취한 술냄새와 방문턱을 못 넘어서고 드러눕는 그 거동을 그 여편네는 별로 이상히도 생각지 아니하고 하는 말이,
"그런데 쌀도 조금 아니 팔아 가지고 들어왔으니 저녁은 어떻게 하라 오."
"아, 쌀이 조금도 없나, 응. 나는 밥 생각이 없어."
그 여편네는 아무 말 없이 돌아앉아서 눈물이 그렁그렁. 김서방의 아내는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이목이 청수한 중에 과히 어여쁘지는 못하나, 성품이 순직하고 태도가 안존하여 아무가 보아도 밉지 아니하다. 스물두 살이나 세 살쯤 되었는데, 모양은 조금도 내지 아니하고 생긴 본바탕대로 그대로 있어 어디인지 귀인(貴人) 성스러운 자태가 드러난다.
김서방은 술기운에 걱정 없이 드러누워 씩 ㅡ 씩 ㅡ 잠을 자는데, 그 아내는 혼자 앉아서 등불만 보고 정신없이 무슨 생각을 하고 이따금 한숨도 쉬며 세상이 귀찮게 생각하는 모양이라. '제길할 것, 내버리고 달아나서 좋은 남편 만나 가지고 살아볼까. 어디 가기로 이렇게야 고생할라고. 아니 아니, 그렇지도 못하지. 귀밑머리 맞풀고 만난 남편을 어떻게 내버리고 어디를 가나……. 고생을 하면서도 잘 공경하고 살아가면 자기도 지각이 날 때가 있겠지. 종시 이러하거던 죽어버리지.’ 저녁밥도 못 먹고 곤한 몸이 밤 깊도록 앉아서 한숨으로 그 밤을 보내다가 드러누워 잠을 자려 한즉,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눈이 더욱 말똥말똥. 잠커녕 아무것도 아니 온다. 불도 끄지 아니하고 혼자 고생고생 할 때에 씩씩거리고 잠을 자던 그 남편이 벌떡 일어 앉으며, "아이고 목말라라. 물 좀 주어, 물 좀."
추위가 이를 데 없는 그 밤에 문을 열고 나가서 물을 떠다주니 꿀떡 꿀떡 한 대접 물을 다 먹고 한참 드러누웠더니 하는 말이,
"여보게, 자네 저녁밥 먹었나."
그 아내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그렁그렁하다.
"응, 못 먹은 것이로고. 아, 내가 잘못하였지. 그놈의 술집, 그놈의 술집이 원수야."
이때에 그 아내가 무엇을 감동하였는지 정색하고 돌아앉아 그 남편을 보고 하는 말이,
"여보시오. 술집이 무슨 원수요. 당신이 오늘 나와 약조를 합시다. 우리가 일생을 이대로 지낸단 말이오. 평생을 이렇게 가난하게만 고생으로 살것 같으면 차라리 지금 죽어버립시다. 당신도 사람이오 나도 사람이지. 아까 집주인이 방 내놓고 어디로 나가라고 사설하던 일과, 일수 놓는 오 생원이 돈 내라고 구박하던 일과, 쌀가게 외상 쌀값 스무 냥 내라고 욕설 하던 일을 생각하면 저녁거리가 있은들 밥이 어찌 목구멍으로 넘어간단 말이오. 당신이 내 말을 들으시지 못할 것 같으면 나는 오늘밤이나 내일 아침에 자결 하여 죽겠소."
말을 그치고 앉았는 모양이 엄숙하고 무섭도다. 김서방은 아내의 정당한말에 할말이 없어서 일어앉아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잠잠히 있는데 그 아내는 다시 말 하기를,
"우리 집안이 그전에는 그렇지 아니하던 집으로 오늘날은 떨어져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떻게 하든지 돈을 모아 집을 성가하면 남부럽지 아니하 게살아 보아야 할 것 아니오. 또 삼촌이 잘 살면서 자기 조카를 구박하여 죽이려 하고, 나중에는 내어쫓은 일을 생각하면 우리가 이를 갈고 천하고 힘드는 일이라도 아무쪼록 벌이하여 돈을 모아 분풀이를 하여야 할 것 아니오니까. 그까진 술 좀 아니 자시면 어떠하오. 내가 무슨 저녁밥을 좀 못 먹어 서분하겠소……."
말을 다하지 못하여 목이 메어 눈에는 눈물이 핑 돈다. 한참 동안을 두 내외가 아무 말도 없이 앉았더니, 김성방이 천치스럽게 하는 말이,
"자네 말을 들으면 그러한데, 아 ㅡ 술집 앞으로 지나면 술 냄새가 자꾸나를 잡아당기는 것을 어떻게 하여."
그 아내가 이 말을 듣더니 눈물은 어디 가고 빙긋 웃는다.
"여보, 당신이 집안일을 생각하면 술냄새가 비상 냄새 같을 것이오. 시 아버님이 안주를 과히 잡수시다가 끝에는 술 취하여 깊은 개천에 떨어져서 골병 들어 돌아가시고, 요부하던 재산이 다 술로 하여 없어졌으니, 술이 당신에게는 비상이오. 그러한즉 여보, 내가 아까 당신과 약조합시다한 것은 당 신이 삼 년 동안만 술을 끊고 부지런히 벌이하여 봅시다 하는 말이오. 세상에 술 아니 먹고 부지런하면 못할 이치가 어디 있겠소. 당신이 만일 못 하겠다면 나는 죽을라오."
김서방이 머리를 득득 긁더니 손톱에 끼인 시커먼 머리때를 엄지 손톱으로 바람벽에다가 탁탁 튀기면서,
"어디 그렇게 하여볼까. 그래, 술 아니 먹으면 부자 될까."
아내가 허허 웃으며
"술 아니 먹는다구 부자 될 리가 있겠소. 술을 끊고도 부지런하여야지. 자 ㅡ, 그러면 밝는 날에는 인력거 한 채 세 내가지고 인력거를 끌어서 하루 스무 냥을 벌든지 쉰 냥을 벌든지 나한테만 맡기시오. 나도 바느질도 하고 남의 집일도 하여 다만 한 푼씩이라도 돈을 모으고 살 터이니."
김서방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별안간 하는 말이,
"그러세, 제 ─ 길, 술 먹으면 개자식일세."
(이 책을 기록하는 이 사람이 김서방 부인에게 감사할 말 한마디가 있도다. 이책 보는 세상의 모든군자들이여, 김서방 부인의 '술 끊고도 부지런하여야지’ 하는 말 한 구절을 기억할지어다. 이것이 치부의 비결( 致富之秘訣)인가 하노라.) 김서방 내외의 의론이 일치하여 장래에 부자 되고 잘 살 이야기로 그럭저럭 밤을 새우고 날이 밝으매 그 아내가 머리에 꽂은 귀이개를 빼어가지고 전당포에 가서 돈푼이나 얻어 가자고 구멍가게에서 파는 쌀 서너웅큼을 팔아다가 부엌 구석의 검불을 닥닥 긁어 밥을 지어먹은 후에 김서방은 인력 거세 얻으러 나간다. 술집 앞을 지나면 억지로 고개를 외로 두고 술집을 아니 보려 하지마는 고개는 외로 두었지 눈은 저절로 술집으로 간다. 이때에 어떠한 사람이 술집에서 "한잔 더 부오." 하는 소리가 나면 술냄새가 김서방의 코를 찌르니 김서방이 깜짝 놀라며, 두 손을 코를 싸쥐고 달음박질하면서 하는 말이,
"아이고, 비상냄새야."
종일 헤매다가 해질머리에야 겨우 인력거 한 채를 세 얻어 가지고 돌아오니, 그 아내는 벌써 저녁밥을 지어놓고 기다리거늘, 두 내외가 저녁밥을 먹은 후에 지난밤에 조금도 잠을 자지 못한 까닭으로 졸음이 와서 못 견디어 어둡기 전부터 잠을 잔다. 김서방이 하늘 말이, "여보게, 나는 늦도록 잠자기 쉬우니 내일 새벽에 어둑한 때에 나를 깨우 게. 종현 뾰죽집의 종칠 때에 곧 깨우게. 새벽부터 일찍이 나가서 벌어야지."
그 여편네는 그 남편이 술을 끊고 이렇게 부지런한 마음이 생긴 것만 좋아서 그리하마 하고 허락하고, 두 내외가 전보다 유별하게 정 있게 드러누워 장래에 부자 될 꿈이나 꾸었는지.
종현 뾰죽집 종소리가 새문 밖 김서방의 마누라의 꿈을 깨워 잠든 귀를 떵떵 울리니, 김서방의 아내가 잠결에 깜짝 놀라 일어앉아 불을 켜고 그 남편을 깨운다.
"여보, 일어나오. 지금 종쳤소. 창이 훤하게 밝았나 보오. 예 ㅡ, 어서 일어나오."
곤하게 잠을 자던 김서방이 벌떡 일어나며 혼잣말로 하는 말이,
"잠든 지가 얼마 아니 되는 듯한데 벌써 밤이 새었나. 아이고, 졸리어."
그 아내가 물을 데워서 찬밥과 함께 소반을 받쳐다가 김서방의 앞에 놓으니 물만 조금 마시고 수건으로 귀를 싸매고 인력거를 끌고 나간다.
설상에 부는 바람은 몸이 떠나갈 것 같고 노변에 깔린 얼음은 발목이 빠질듯 하다. 추위가 하도 지독하고 바람이 하도 몹시 불어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도 없고 천지가 쓸쓸한데, 김서방은 인력거 채를 가슴 위에 얹고 큰 거리에 나가서 인력거 주거장에 인력거를 놓고 두루마기로 몸을 싸고 앉았으니 밤은 밝지 아니하고 점점 더 어두워간다. 김서방은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일기가 하도 지독히 추워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른 동무들은 그 저들 아니 나오나. 이것이 웬일인고. 아무리 보아도 새벽 같지 아니하고 초저녁 같으니 웬일인고. 인력거 탈 손님은 오든지 말든지 밤이나 어서 밝아야 할 터인데, 천지가 종용한데 나 혼자 여기서 이게 무슨 청승인가. 내가 도깨비한테 홀리었나. 종쳤다고 한지가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내었을 요량인데, 여태 밝지 아니하니 아마도 마누라가 다른 소리를 종치는 소리로 알고 깨운 것이나 아닌가. 이 제 ㅡ 밀, 졸리기는 퍽도 졸리네. 눈을 들 수가 없이 졸리네, 어찌한 셈이야. 내가 아무리 하여도 무엇에게 홀린 것이로고……. 이렇게 졸린 것 보았나, 여기서 잠을 잤다가는 강시할걸……. 눈을 집어서 얼굴을 씻으면 잠이 달아나겠지."
이렇게 혼자 구성구성하면서 그 옆의 언덕 위로 올라가서 길가로 쌓인 눈을 한 주먹 집어서 얼굴을 씻으려 하더니 무엇에 놀랐는지 깜짝 놀라며 머리 끝이 쭈뼛하여진다.
이때 그 아내는 남편이 나간 후로, 저렇게 바람이 불고 저렇게 추운데 남편을 내어보내고 마음이 미안하여 잠도 아니 자고 앉았는데, 오래지 아니하 여 밝으려니 하고 밝기만 기다리되 도무지 아니 밝는도다. 가만히 생각 한 즉 잠든 지가 얼마 아니 되었는데 뾰죽집의 종소리는 정녕히 들었는지라, 초저녁 일곱 시 반에 치는 종소리를 잠결에 듣고 새벽인 줄 알고 그 남편을 깨워 보내었도다. 다른 날 같으면 초저녁 이때 즈음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 다닐 터이지마는, 이날은 풍세가 대단하고 추위가 지독하여 길에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 아내는 자기 남편을 잠도 못 자게 공연히 깨워 보내서 추운데 떨고 있을 생각을 하고 더욱 마음에 미안하여 도로 들어오기만 기다린다.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야단스럽게 나면서 무엇에게 쫓겨오는 사람같이 문 열라는 소리가 연거푸 숨차게 난다. 나가서 문을 열어주니 김 서방이 인력거는 문 앞에 내던지고 뛰어 들어와 신발도 벗지 아니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헐레벌떡거리며 숨이 차서 말도 못하거늘, 그 아내는 눈이 휘둥그래서,( 처) "아, 이게 웬일이오. 글쎄 왜 이리하오."
(김) "여보게, 문 열 때에 내 뒤에 아무도 쫓아오지 아니하던가."
(처) "쫓아오기는 누가 쫓아와요 "( 김) "아이고 숨차. 정녕히 아무도 아니 쫓아오던가."
(처) "쫓아오는 사람 없어요."
(김) "누가 내 뒤를 쫓아오는 듯하던데."
(처) "아 ㅡ, 그래서 이렇게 야단이요. 신발이나 좀 벗으시오."
(김) "아니여, 이것보아. 내가 하도 졸리기에 길 옆에 쌓인 눈을 집어서 얼굴을 씻으려 한즉 눈 속에서 이것이 집혀서 깜짝 놀랐어."
(처) "그것이 무엇이요."
(김) "문 단단히 잠갔나. 누구 들어오리. 인제는 우리 부자 되었네."
(처) "글쎄, 문은 단단히 걸었소. 그것이 무엇이라는 말이요."
(김) "이것이 지전뭉치여. 얼마나 되는가 좀 세어 보아야."
이상스러운 색보자기에 똘똘 뭉쳐 싸고 또 그 속에는 신문지로 한 겹을 쌌는데, 십 원짜리, 오 원짜리, 일 원짜리 지전과 오십 전, 이십 전, 은 전이라. 김서방이 지폐를 들고 세어보려 하나 손이 떨려서 세지를 못하고 지폐를 들고 성주대를 내리는 모양이라. 그 아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이리 주시오. 내가 세리다." 하고 십 원 지폐 이백 장, 오 원 지폐 삼백 장, 일원 지폐 오백 장, 은 전 삼십이 원 오십 전, 모두 사천삼십이 원 오십 전이요.
김서방이 사천 원을 당오풀이로 풀어 보더니,
"이십만 냥일세 그랴, 단 만 냥 하나를 손에 만져보지 못하였는데 이십만냥, 참 엄청나다. 여보게 마누라, 이것 가졌으면 자네도 고운 옷 좀 하여 입고 나도 술 좀 먹고 그리하고도 넉넉히 살겠지."
그 아내가 한참 생각하고 아무 말도 없다가 그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하는 말이,( 처) "여보, 그 돈을 그대로 쓰시려오. 이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오죽 원통 하여 하겠소."
(김) "벌 제 ─ 밀 붙을 소리를 다 하네. 내 복으로 내가 얻은 돈인데 그럼 아니 쓰고 무엇하여."
그 아내가 감히 남편의 말을 항거하지는 못하고 한참 동안을 잠잠히 앉았더니,
"여보, 저 지난밤에도 한숨 못 자고, 오늘밤에도 잠을 못 자서 졸리어 죽겠으니, 이 돈은 내가 맡기고 편히 잡시다. 자, 어서 잡시다."
이틀 밤이나 잠을 못 자서 곤한 김서방이 꿈결같이 지전뭉치를 얻어서 어찌 좋은지 잠잘 생각도 없지마는, 그 돈을 아내에게 맡기고 이불을 쓰고 드러누워 눈을 감고 내일부터 돈 쓸 생각에 그 밤을 다 보내고 다 밝기에 잠을 들어 오정 때까지나 정신 모르고 잠을 자다가, 이웃집 어린아이들 장난 하다가 싸우고 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깨어 벌써 일어나서, 세수도 아니하고 곰방대에 담배 담아 왜성냥에 피워 물고 그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경사나 있는 듯이 청하여 가지고 술집으로 들어가서 모두 술을 먹이고 저 도취하 도록 먹을 때에, 술집 주인이 술값이나 못 받을까 염려하여 술을 잘 아니 주려고 한즉, 김서방의 하는 말이 "구차한 사람은 일상 구차한 줄 아는가. 이따 우리 집으로 오면 전후 술값 다 셈하여 줄 터이니 걱정말고 술을 부르라니."
곰방대 든 왼손으로 바른팔의 토시를 어깨까지 치키면서 고성대담으로 의기양양하여 예전 모양과 딴판이라. 눈이 게슴츠레하여 하늘인지 땅인지 분별 하지 못하도록 잔뜩 취케 먹은 후에 길을 휩쓸고, 갈지자 걸음이라 더니, 이 것은 강남 갈지자걸음으로 간신히 집에 와서 방에도 미처 못 들어가고 문지방에 걸쳐 누워 정신없이 잠들었다.
그 아내가 간신히 끌어다가 아랫목에 뉘었더니 해가 저물어도 깨지 아니하고 밤이 깊어도 깨지 아니하고, 그 이튿날 늦은 아침때 비로소 일어나서 얼굴 씻고 밥을 먹고 가만히 생각하니 어제 일이 맹랑하다. 돈 얻은 일과 술 먹은 일만 생각이 나고 그 외에는 며칠이나 잠을 잤는지, 술 먹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전연히 알 수 없도다. 그 아내더러 묻는 말이, "여보게, 내가 며칠이나 잠을 잤나. 어떻게 잠을 잤는지 정신이 하나 없네."
그 아내가 하는 말이,
"인력거 세 얻어오던 날 해지기 전부터 잠자기 시작하여 어젯날 점심때에 일어나서, 술 먹으면 개자식이라는 맹세는 어찌하였는지 일어나는 길로 세수도 아니하고 바로 나가서 술을 얼마나 자셨기에 그렇게 취하여 들어오셨소. 지금이야 일어났으니 잠도 무던히 잤지마는 어저께는 어찌하여 외상 술을 그렇게 많이 자셨소. 어저께는 술값이 일백팔십 냥이라고 술집주인이 와서, 집에 돈이 있으니 전후 술값을 다 셈하여 주마하였다고, 왜 돈 두고 아니 주느냐고 사설하고 갔소. 무슨 돈이 집에 있다고 술값 받으러 오라고 하였 습더니까. 집에 돈을 두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알 수 없으니 술 깨거든 와서 받아가라 하여 보내었소. 필연코 조금 있다가 또 올 것이오."
김서방의 하는 말이,
"왜 그 돈 어찌하였나. 그 속에서 내어주지 그랴."
그 아내가 새삼스러이 하는 말이,
"그 돈이 무슨 돈이오. 어느 때에 나를 주었소."
김서방이 의아하여 말 하기를,
"길에서 얻은 지전뭉치, 왜 자네가 그때 세어보지 아니하였나. 그래서 사천삼십이 원 오십 전, 당오풀이로 이십만 냥 자네에게 맡기고 자지 아니하였나 왜."
"아, 당신이 꿈을 꾸었소. 언제 어느 때에 지전뭉치를 얻어 가지고 왔소. 나는 지전커녕 종이 조각도 못 보았소. 잠을 그만치나 잤으니까 꿈도 많이 꾸었겠지."
김서방이 이 말을 듣더니 하도 기가 막히어 말 한 모금 못하고 잠잠히 앉아더라. 그 아내도 아무 말 없이 앉았더라.
한참 동안을 두 내외가 아무 말 없이 앉았더니 김서방이 입맛을 다시면서 묻는 말이,
"그래, 돈 얻은 것은 꿈이고 친구 데리고 술 먹은 것은 생시라는 말인가. 꿈에 돈 얻어 가지고 생시에 외상술을 먹었으니 술값을 어떻게 하나. 응, 입맛 쓰다."
어느 사람이든지 게으른 사람은 못 살고 부지런한 사람은 잘 사느니, 벌기는 적게 하고 쓰기는 많이 하여 술 먹고 노는 사람 평생이 간구하고 부지런히 벌이하여 적게 쓰고 많이 모아, 다만 한푼이라도 돈을 모아 두는 사람은 아무리 하더라도 굶든 아니하는지라.
새문 밖 김서방도 일하기 싫고 술 먹기 좋아하여 자나깨나 생각하기를, 저절로 돈이 생기어 술이나 매일 장취 먹었으면 이 위에 더할 낙이 없을 터인데 저절로 돈 생길 도리가 어디 있으리오. 어느 부처님이 지나다가 지 전 뭉치나 길에 빠뜨려서 다른 사람 보기 전에 내가 먼저 얼른 집어 한 구석에 감추어 두고 남모르게 꺼내어 쓰면 술 먹고 싶은 때에 술 먹고 옷 해입을 때에 옷하여 입고 마음대로 하였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하던 차에, 꿈인지 생시인지 이십만 냥 돈을 얻어 좋아하고 하였더니, 술 먹은 것은 적실하고 돈 얻은 것은 꿈이 되어 좋은 일이 허사로다. 가만히 생각한즉 하도 맹랑하고 하도 어이없어 목침 베고 드러누으니 일신이 찌쁘드듯하다.
이리하여서는 아니 되겠다고 그 날부터 부지런히 인력거 벌이할 새, 새벽에 나가서 저녁까지 술도 아니 먹고 용돈 과히 아니 쓰고 한 냥을 벌든 지열 냥을 벌든지 집으로 가지고 가서 마누라에게 맡겨두고, 밥을 조금 많이 담아도 쌀 많이 없어진다고 말을 하며, 반찬을 조금 잘하여 놓아도 용돈 과 히 쓴다고 잔말을 하여 아무쪼록 적게 쓰고 아무쪼록 많이 모으려 하며, 벌이를 할 때에도 동리사람에게 신실하게 보이고 동무에게 밉지 아니케 굴어 다른 인력거꾼은 열 냥 받아 다니는 데를 김서방은 일곱 냥이를 여덟 냥을 받고 다니며 힘을 들여 인력거를 끄니, 동리 양반들이 인력거를 탈 일이 있으면 김서방을 부르고, 심부름을 시킬 일이 있더라도 김서방을 찾아서 그 신실하고 튼튼한 것을 어여삐 보아 삯전도 많이 주고 행하도 후히 하여, 일 년 지나 빚 다 벗고 이태 지나 인력거 사고 삼 년 지나 돈 모았다. 김 서방이 이렇게 부지런히 벌이하고 열심히 돈을 모으려 하고 신실하게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 아내도 또한 바느질하며 남의 집 일도 하여 밥도 더러 얻어다가 끼니를 에우고, 반찬도 더러 얻어다가 남편을 공대할 새 그럭저럭 삼사 년이 지내었더라.
섣달 그믐께는 새해를 맞으려고 사람마다 분주하여 빚 받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고, 빚에 쫓겨 피신하는 사람도 있고, 세찬에 봉물에 오락가락 세상 이번 화한데, 어떠한 집에는 흰떡하고 인절미하고 차례 차리느라고 야단법석 하며 어떠한 집에는 아이들 설빔 하나 못해 주고 돈이 없어 쩔쩔매는 집도 있도다.
김서방도 이삼 년 전에는 섣달 그믐을 당하면 술값이니 쌀값이니 일수, 월수 돈에 몰려 쫓겨다니느라고 과세도 변변히 잘못하더니, 금년부터는 형세가 늘어서 집안이 넉넉하여 빚 한푼 갚을 것 없고, 쌀 한 되 취한 데 없다. 김서방이 동리 양반에게 세찬 행하를 많이 얻어가지고 집으로 들어가니, 그 아내는 과세하려고 흰떡을 하며 만두를 하며 혼잣몸이 분주한지라, 방으로 들어가서 심심히 앉았다가 장롱을 열고 보니 어느틈에 벌써 두 내외 입을 설빔 의복을 다 하여놓았더라. 김서방의 입이 떡 벌어져서 혼자 빙긋 웃고 마음에 좋아라고 잠깐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서 바깥으로 나와서 그 아내 의하는 일을 거두쳐 주며 이야기하는 말이, "여보게 마누라, 이번 설에는 마음이 참 좋아. 재작년 설만 하여도 우리가 빚에 쫓기어 고생을 좀 많이 하였나. 술집 늙은이가 술값 받으러 왔을 때에 돈은 없고 할 수 없어 내가 이불 개어놓은 뒤에 가서 자네 행주치마를 쓰고 숨었더니, 술집 늙은이가 자네더러 옥신각신 말하다가 나 숨은 데를 의심 하였던지 늙은이가 하는 말이……. '애고 이상하여라. 저 이불 위의 행주치마가 왜 꿈지럭꿈지럭하여…….’하는 소리에 떠들어볼까 하여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네. 그때 만일 그 늙은이가 떠들어보았으면 내 모양이 어찌 될 뻔하였어. 지금 생각하여도 우습고 기가 막히지, 하하하."
일을 다한 후에 저녁밥을 차려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서 재미있게 먹은 후에 그 아내가 하는 말이,
"우리가 삼 년 전보다 형세가 늘어서 굶지 아니하고 넉넉하게 살며 명절을 재미있게 잘 세는 것은 당신이 술을 끊고 부지런히 벌이한 까닭인데, 그동안에 백사를 절용하여, 쓸 것을 아니 쓰고 돈을 모아 지금은 어지간히 많이 모였소. 얼마나 되는지 시원하게 세어보시려오."
김서방도 본래 자세히 알지 못하여 궁금하던 터이라, 속마음으로 인력거나 두어 채 사서 다른 사람에게 세로 줄만한 돈이나 모였는가 생각하고 기꺼이 대답 한다.
"그것 참 좋은 말일세. 아마 돈천이나 모였겠지. 당오 만 냥이 되어도 걱정 없겠는데."
그 아내가 벌떡 일어서서 장롱 안에서 무슨 뭉치를 두 손으로 무겁게 들고꺼내어다가 김서방의 앞에 놓으며 말이,
"이 것을 세어보니까 모둔 삼천삼백 원이니 당오풀이로 이십일만 오천냥 입니다."
김서방이 깜짝 놀라며,
"웬 돈이 이렇게 많이 모였나."
그 아내는 온순한 태도로 조용히 말하되,
"오늘은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시오. 내가 남편에게 죄를 많이 지었소. 당초에 당신이 인력거를 끌고 나가서 지전뭉치를 얻아가지고 들어오셔서 그 이튿날 벌이할 생각은 아니하고 그 전날 밤에 약조한 말과 맹세한 말은 모 두 잊어버리고 술 자시기를 시작하시기에, 하릴없이 당신을 속이고 당신 술 취한 것을 이용하여 꿈으로 돌려보내고 그 지전뭉치를 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모든 사정 말을 하고 임자를 찾아주라 하였더니, 경찰서에서 광고를 붙이고 지전 잃은 사람을 사면으로 찾으나 돈 임자가 나서지 아니하는 고로 수 일 전에 나를 부르기에 내가 경찰서에 갔더니, 경찰서장이 그 지 전 뭉치를 내어주며 이 돈은 삼 년 지내어도 임자가 나서지 아니한즉 네게로 내어 주노니, 그것 가지고 잘 살아라 하옵기 대단히 놀랍고 고마워서 가지고 나왔으나, 그 동안 삼 년이나 당신을 속인 일이 여편네 된 도리에 대단히 죄송하오니 용서하시오. 경찰서에서 내어주신 돈은 사천삼십이 원 오십 전 이오 그 나머지는 그 동안 우리가 모은 돈이오."
김서방은 그 아내의 말만 듣고 잠잠히 앉았더니 별안간 하는 말이,
"아니여, 이것은 또 꿈이로군. 내가 또 지금 꿈을 꾸는 것이야."
그 아내는 김서방의 하는 말이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김 서방이 돈 많은 것을 보고 도로 예전 마음이 생기어 술이나 먹고 게을러질 까 염려하여 엄연한 태도로 말을 한다.
"아니오, 꿈도 아니고 정말인데, 인제는 이것 가졌으면 전답 사고 추수 하여 존절히 쓰고 먹으면 구차치 아니하게 살터이니 우리가 더욱 마음을 굳게 먹고 규모를 부려가며 잘 사십시다."
김서방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없더니 눈에 눈물이 핑 돌면서 하는 말이,
"내가 오늘 이러한 기쁘고 좋은 말하게 된 것은 모두 자네 덕일세. 마누라가 그때에 그렇게 아니 하였더면 나는 그 돈을 다 썼을 터이오. 구차한 놈이 별안간 돈 잘 쓰는 것을 경찰서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있는가. 징역은 갈 데 없이 하였을 것이오. 또 오늘 이렇게 돈이 남을 수가 있었겠는가. 자 ㅡ, 나는 부자 되었다고 마음 놓을 수는 없으니, 돈은 다 자네가 가지고 논도 사고 땅도 사게, 나는 인력거벌이는 내어버리지 못하겠네……."
김서방은 인력거를 끌고 병문으로 나아간다.
공진회를 개최한다는 소문이 있더니, 서울서 공진회 협찬회가 조직이 되었는데, 공진회는 총독정치를 시행한 지 다섯 해 된 기념으로 하는 것이라 하는 말을 김서방의 내외가 들었던지, 경찰서에서 돈을 내어준 것을 항상 고마워하고 총독정치의 공명함을 평생 감사하게 여기던 터이라, 공진회 협찬 회에 대하여 돈 이백 원을 무명씨로 기부한 사람이 있는데, 이 무명씨가 아마 김서방인 듯하다더라.
시골 노인 이야기
벼루에 먹을 갈고 한 손에 붓대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권연초에 불을 달여 입에다 대었다 떼었다 하는 동안에 입으로 권연초 연기만 후 ㅡ 후 ㅡ 내 불고 앉았는데, 생각이 아니 난다 붓방아만 찧고 있다가 권연초는 재떨이에 내던지고 붓은 책상 위에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 쓰고 문 밖으로 썩 나서며 혼자 입속말로 중얼중얼하는 말이, "내가 붓을 들고 책을 지을 때에 하루에 열 장 스무 장은 놀면서 만드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아무 생각도 아니 나고 종일 앉아 붓방아만 찧고 소설한 장도 못 만들었으니 이렇게 아무 재료가 도모지 없을까……."
남산을 바라보니 성긴 나무 울울충충 무슨 의사 있는 듯하나 별로 신기한 생각이 아니 나고, 길거리를 내어다보니 사람들이 오락가락 제각기 일 있는 모양이나 깊은 사정 알 수 없다. 아서라, 저기 시골서 노인 한 분이 이번에 공진회 구경하러 올라왔다 하니 그 양반이나 좀 찾아보고 이야기나 들어 보겠다.
그 노인 거처하는 방은 매우 정결하고 소쇄하나, 한 옆에는 화로에 불을 피우고 약탕관에 약을 달이며, 한 옆에는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는 그 노인에게 당치 아니한 신학문 서책이 쌓여 있고, 재떨이는 의례건이어니와 요강, 타구도 그 앞에 놓여 있더라. 한 번 절하고 일어 앉아 행용하는 인사를 마친 후에 역사적(歷史的) 이야기를 청하였더니, 그 노인은 안경 너머로 눈을 들어 넘겨다보며 한 손으로 담뱃대에 상초 한 대를 꽉 눌러 담아 피워 물고 하는 말이, "내가 칠십 세를 살았으니 철모르고 자라난 이십 년 동안을 뺄지라도 오십 년 동안 일은 지내어 보았네. 그 동안에 별별 이상한 일도 보았고 고생도 하여 보았고 세상 변천하는 것도 여러 번 지내어 보았네. 그런고로 자네 같은 소년들은 나를 오십 년(五十年) 역사(歷史) 책으로 알고 성가시게 구네 그랴…… 하…… 하…… 그런데 무슨 할 이야기가 어디 있나. 그러나 이 것은 참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자네한테나 이야기하는 것이니, 행여나 소설 책이나 그러한 데 내지 말게, 부디. 이것은 몇 해 아니 된 일일세."
한 시골사람이 어린 조카자식을 서울로 올려 보내며 당부하는 말이라.
"용필아 ㅡ, 잘 가거라. 서울은 시골과 달라서 대단히 번화하여 길에 잘못 다니다가는 말에게 밟히기도 쉬우니 조심하여라. 사동 김갑산 영감은 나와 죽마고우로 어려서부터 사이가 좋게 지내었다가 근래 칠팝 년을 서로 소 식 없이 지내었는데, 그 집을 찾아가서 내 편지를 전하고 보이면 그 사람이 필연 반가워할 것이오, 또 너를 위하여 출세할 길도 열어줄 것이니 그런 데를 가서 있더라도 똑똑하게 하여라."
이렇게 당부하고 말하는 사람은 용필의 삼촌이니 만초선생이라면 그 동리 근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오, 그 동리는 강원도 철원 고을 북편으로 십 리쯤 되는 땅이라. 무슨 까닭으로 자기 조카를 서울로 보내느냐 할지면, 좋은 일에 보내는 것이 아니오, 사세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집에 있을 수 없는 형편이 있는 고로 서울로 보내는 터이라. 당초에 용필의 조부는 상당한 재산이 있어서 요부하게 살 뿐 아니라, 그 근처에서 세력이 남에 지지 아니하고 행세도 점잖게 하는 고로 사람마다 존경하더라. 아들은 둘이나 있으되 손자를 못 보아 대단히 바라더니 맏아들에게서 용필이를 낳은지라, 아이도 대단히 탐스럽고 똑똑하게 생겼거니와 늦게 본 손자라 더욱 귀 애하여 금지옥엽같이 사랑할 새, 이때 그 친구로 항상 서로 추축하는 박감역이 있으니 역시 가세가 넉넉하고 세력도 있고 문벌도 비등한데 늦게 손녀 딸을 보아 대단히 사랑하여 이름을 명희라 부르고, 아침이든지 저녁이든지 명 희를 품에 안고 용필의 조부 되는 김도사 집에 가서 담배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놀다 오는 터이라.
용필이는 돌이 지내어 아장아장 걸어오고 걸어가매 김도사가 귀애하여 재미를 보느라고 사람마당 양지짝에 앉아서 용필의 걸음 걷는 양을 보려고 손에 들었던 담뱃대를 멀지 않게 집어 내던지고,
"오 ㅡ, 내손자야, 저기 가서 저 ─ 담뱃대 가져온. 옳지, 옳지, 아이고 기특하다."
김도사가 이러할 즈음에 박감역이 명희를 품에 안고 나와서 역시 내려 놓고 손을 붙들고 귀염을 본다. 두 어린아이가 빵긋빵긋 웃으며 혹 걷기도 하고 혹 기기도 하여 둥실둥실 노는 모양 남이 보아도 귀엽고 대견하여 어여 삐 여길 터인데, 김도사와 박감역이야 오죽 귀여워하리요. 두 늙은이가 어떻게 마음에 귀엽든지 그 자리에서 서로 언약을 맺고 혼인을 예정하여, 용필이 열일곱 살 되거든 성례하기로 작정한지라, 남녀가 일곱 살만 되면 한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이 우리 조선의 예법이로되, 용필이와 명희는 예 혼을 언약한 터인 고로 십여 세가 되도록 한방에 함께 앉기도 하며, 어른들이실 없이 구느라고 한 자리에 앉히고, "명희가 네 아내다."
"용필이가 네 남편이다." 하며 재미를 보고 웃고 지내더니, 세상만사가 사람의 뜻대로 되기 어려움은 옛적이나 지금이나 일반이라. 박감역이 세상을 이별한 후 일 년이 못 되어서 김 도사가 역시 별세하니, 김도사의 집에는 환란이 그치지 아니하여 해마다 초상이 아니 나는 해가 없어, 김도사의 맏아들 죽고 그 둘째 아들 만초 선생의 내외도 중병으로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니, 어언간 가산이 탕패 하여용 필이는 부모 없는 고아가 되고 가난한 살림살이로 궁하게 지내는 그 삼촌에게 의탁하여, 숙모가 뒤를 거두어 길러내니 수삼년 전에는 철원 고을에서 일반이 부러워하던 김도사 집이 지금은 아주 보잘것 없이 되어 사람마다 세상의 부귀영욕이 일장춘몽과 같다 하는 말을 믿게 하는도다.
어제까지는 사람마다 떠받들고 집집마다 귀여워하던 용필이가 지금은 간데족족 천덕꾸러기가 되어 헐벗고 주리고 모양이 아주 말 못되는데, 그 삼촌 숙부 되는 만초선생은 평생에 좋아하는 것이 글뿐이오. 돈 같은 것은 변리도 따질 줄 모르고, 집안 살림은 당초에 상관치 아니하여 그 아내가 어찌 어찌하여 지내어 가는 터이라. 그러한 고로 용필이는 더욱 말 못되게 지내어 어떠한 때는 끼니도 굶지 의복은 남부하여 불쌍한 경우에 이르 렀 는데, 세상 사람이 하나도 돌아보아 주는 사람이 없으되 오직 남모르게 속으로만 불쌍히 여기고 마음으로만 애닯게 여기는 사람 하나이 있으니, 이는 다른사람이 아니라 박감역의 손녀 명희라. 박감역이 죽은 후로 박감역의 아들명 희의 아버지 박참봉은 원래 인색하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 빈궁한 사람은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부자나 세력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아첨하는데, 당초에 김도사가 살아 있을 때에는 김 도사 집이 요부하고 세력이 있어 자기 집보다 나은 고로 자기 딸 명희와 용 필이와 예혼 언약한 것을 좋아하였으나, 지금은 김도사 집이 망하고 용 필이가말 못되게 있음을 보니 혼인할 마음이 없는데, 명희의 얼굴이 절묘하고 침선범절과 언어, 행동이 세상사람 같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듯 하여 원근간에 칭찬이 자자하고 소문이 널리 나서, 아들 있고 혼처 구 하는 사람은 청혼하지 아니하는 자 없는 고로, 박참봉은 더욱 용필이와 성혼 하기를 싫어하여 만초선생에게 돈을 주고라도 파약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 하나, 만초 선생은 원래 전재를 탐내는 사람이 아닌 고로 말도 하여보지 못하고 어떻게 하여 세력으로 내리눌러서 파혼할 마음이라. 명희는 나이가 아직 어리되 지각이 어른보다 출중한 고로 자기 부친의 눈치를 알아채었도다. 출중한 사람은 출중한 마음이 있나니, 명희의 마음은 용필이를 장래 자기의 배필로 알고 천하없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것은 변치 못하겠다 하여 이따금 담 너머로 용필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말은 못하되 속으로만 간이 사라지는 듯이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저절로 나서 옷이라도 하여주고 밥이라도 먹였 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터이라.
하루는 명희가 그 모친과 함께 일갓집 혼인 잔치에 갔다가 저물게 돌아오는데, 만초선생의 집 앞으로 지나갈 새 어떤 아이가 담 모퉁이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무슨 생각을 하며 대단히 슬퍼하는 모양인데, 자세히 보니 용필이라. 명희의 오장이 녹는 듯하고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 것을 모친 모르게 씻고 집으로 돌아와 그 날 밤에 잠을 못 자고 규중에서 방황하다가, 달은 희미한데 후원으로 들어가서 높은 곳에 올라서서 용필이 섰던 곳을 바라보니 마침 용필이가 어디를 가는지 집 앞으로 지나가는지라. 큰 소리로 부를수 없는 고로 담 너머로 지나갈 즈음에 명희가 담을 넘겨다보고 가는 목소리로 용필이를 부른다.
"용필아 ㅡ, 용필."
용필이가 돌아다보고 조용히 단둘이 만나 하나는 담 너머 서고, 하나는 담안에 있어 나직나직한 말소리로 이야기를 하는데, 저편에서 기침 한 번을 에헴 하고 이리로 향하여 오는 사람이 있는지라, 깜짝 놀라 명희는 제 방으로 들어가고 용필이는 갈 데로 갔으나, 기침하고 오던 사람은 명희의 부친 박참 봉인데, 자기 딸이 용필이와 무슨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대단히 괘씸하고 분이 나서 용필이를 죽여 없이 하였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까지 나는 도다.
이때 철원읍에 사는 유승지는 가세가 심히 요부하여 강원도 안의 제 일가는 부자요. 돈이 많으면 세력이 있는 것은 세상의 상례라. 서울 재상가에도 반연이 있어 벼슬을 승지까지 얻어 하고 철원 고을 안에서는 호랑이 노릇을 하는 터인데 아들이 혼처를 구하되 적당한 데가 없어 경향으로 구혼 하더니, 박참 봉의 규수가 심히 절묘하고 범절이 갸륵하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탐지하여 본 후에, 바싹 욕심이 나서 중매를 놓아 청혼한즉 박참 봉의 생각도 매우 좋이 여기지마는, 용필이가 있는 까닭에 허락지 못 하고 그 사연 이야기를 말한 후에 중매장이 귀에다 박참봉의 입을 대고 수군수군 하는 말이, "그 아이를 어떻게 없이 하였으면, 내 마음에도 유승지의 아들과 혼인 하는 것이 매우 좋겠소."
중매장이가 박참봉의 하던 말을 유승지에게 전한즉 유승지가 하는말이,
"그까짓 것, 내 수단으로 그것이야 못 없앨라구."
유승지가 그 고을 육방관속을 자기집 하인 부리기보다 더 쉽게 부리는 터인데, 즉시 이방과 호장을 불러 분부하니 이방과 호장이 감히 거역치 못 하여,
"그리하오리다." 하고 물러가더라.
이방이 유승지의 소청을 듣고 나와서 생각하기를, '내가 호장과 부동 하여용 필이라 하는 아이를 무슨 죄에든지 얽어 몰아 죽이기 어렵지 아니하나, 무죄한 사람을 애매히 죽이는 것이 옳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 선친이 용필의 조부 김도사 그 양반에게 은덕을 입은 일이 있은즉 내가 이 아이를 살려내는 것이 옳다.’하고 즉시 만초선생의 집을 찾아가서 용필이 살려낼 일을 의논한 다.
(이방) "유승지 영감의 본부가 이러하니 감기 거역할 수는 없고 그리 할수도 없어서 하는 말씀이오. 어떻게 하시려 합니까."
(만초) "큰일났네 그랴. 그러니 박참봉이 그리 할 수가 있나. 이 연유로 관찰 부에 고발하면 어떠하겠나."
(이방) "그러면 나는 이방도 못 다니게요. 그뿐 아니라 유승지는 돈이 많고 사람이 간사하고 세력이 있으니까 아무리 하여도 댁에서 질 터인즉 고발 하여도 쓸데없지요. 내 생각 같으면 도련님을 서울이나 어디로 멀리 보내는것이 좋을 듯 하오이다."
(만초) "자네 말이 옳은 말이세. 그러면 그리하세. 서울 가서 상노 노릇을 하더라도 여기서 이 고생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오, 또 내 친구도 더러 서울 있으니 세의로 하더라도 뒤를 보아줄 터이지."
(이방) "세의 말씀 마시오. 지금 세상 인심이 세의를 압니까. 박참 봉은 댁과 세의가 없어서 그렇게 마음을 먹습니까. 어찌되었든지 멀리 보내시오."
이방이 간 후에 만초선생이 용필이를 불러 앉히고 전후 이야기를 자세히말하여 들리고 서울로 가라 하니, 용필이도 하릴없이 지라나던 고향 산천을 떠나서 산도 설고 물도 선 서울로 가게 되었도다.
용필이가 그 삼촌 숙부 만초선생을 하직하고 서울로 찾아가서 동대문을 들어서니, 만호 장안에 인가가 즐비하고 거마가 도로 연락부절하여 사동 김갑 산 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길거리에서 방황하다가, 사동으로 가는 장작 실은 말몰이꾼을 만나서 사동까지는 함께 왔으나, 김갑산 집을 물은즉 하나도 아는 사람이 없어 사동 천지를 집집마다 상고하여 김갑산 집을 찾되 알수 없는지라,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낙심천만하고 길에 서서 어찌할꼬 하고 정신없이 걸음 걸어 안동 네거리에 이르러, 이상한 복색에 칼 차고 말 탄 사람이 말을 달려오는데, 또 한편에서는 사륜남여에 검은 복색 입은 구종들이 늘어서서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는 서슬에, 그것을 보고 길을 비키려 하 다가 달려오는 말에게 다닥드려 용필이는 넘어지니, 말은 용필의 가슴을 밟고 지나가니, 그 말 탄 사람이 말에게서 뛰어내려 넘어진 용필이를 붙들어 일으키니 단단히 다쳐서 까물쳤는지라, 급히 교군을 얻어 태워 가지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의원 불러 치료하니 그럭저럭 여러 날이 되었더라.
말에게 상한 용필이가 다른 체도 대강 나아서 일어앉고 걸어 다닐만 하니, 주인은 집을 알아 보내주려고 거주, 성명을 묻는데 용필이 대답 하기를,
"내 고향은 강원도 철원인데 서울로 올라와서 김갑산 집을 찾으려 하다 가길에서 말에게 다쳐쳤나이다." 하거늘 주인이 이 말을 듣고 즉시 하인을 불러,
"작은댁 영감 오시라고 여쭈어라." 하더니 조금 있다가 얼굴이 거무스름하고 눈에는 흰자위가 많은 한 사람이 들어오는데, 주인이 용필이를 대하여 말 하기를,
"네가 이 양반을 찾느냐. 이 양반이 지금은 진주병사라는 벼슬을 하였는고로 김병사라 하지마는, 이왕엔 갑산 원을 다녀와서 김갑산이라 하였더니라."
용필이가 김갑산을 찾기는 하지마는 삼촌의 편지를 전하려 함이오. 제가 김갑 산의 안면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삼촌의 이름과 올라온 사정 이야기를 대강 하고, 우리 삼촌과 죽마고우로 친분이 자별한 김갑산 영감을 찾노라 하니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며 하는 말이, "아 ㅡ, 그러면 네가 만초의 조카냐. 김도사의 손자로구나. 오 ㅡ, 만초를 만난 지가 벌써 칠팔 년이나 되었지."
이때 철원읍에서는 유승지가 박감역의 딸 명희와 자기 아들의 혼인을 맺으려고 김도사의 손자 용필이를 무슨 죄에 얽어서 남모르게 죽여 없애려 하였더니, 용필이가 집을 떠나 부지거처 소식이 없다. 한 달 지내어도 소식이 없고 일 년 지내어도 돌아오지 아니하매 박참봉을 졸라서 성혼하자 하니, 박참 봉도 용필이 없음을 다행히 여기어 유승지의 아들과 혼인하려 하나, 혼인에는 무엇이 제일이라던가, 제일 긴요한 색시가 병이 들어 작년 봄부터 이불 덮고 드러누운 사람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내어 다시 봄철이 돌아오도록 방문 밖에를 나와보지 못하여 병 낫기만 기다리고 그럭저럭 지내더니, 세상이 차차 소요하여 난리가 난다, 피난을 간다, 서 학군을 죽이느니, 동학이 일어나느니 하고 예제없이 소동하여, 밤이면 좀 도적, 낮이면 불한당, 어디 어느 곳이 안정한 땅이 없더라. 동학난리가 지나고 의병 난리가 일어나서 각 지방의 소동하는 그동안에 유승지는 강원도의 부자라 하는 소문으로 동학에게 잡혀가서 여간 재산 다 빼앗기고 생명만 겨우 보존 하여 집으로 돌아온즉, 실인 심한 사람은 난리세상에 더욱 살기 어렵도다. 동학이 가장 창궐한 곳은 삼남지방이라. 경군이 내려가서 겨우 진멸하매 강원도 일경으로는 의병이 또한 창궐하여 서울서 병정을 파송하여 의병을 토멸 하려 할 새, 연대장은 원주에 앉아서 작전계획을 만들어내고 각 대대장과 중대장, 소대장이 각 고을에 출주하여 연대장의 명령을 받아 의병 진정하기에 힘쓰니, 철원 고을에 출주한 군대는 대대장이 김참령이오 소대장이 참위 김용 필이라.
당초에 김용필이가 김창령의 백씨 김부령의 말에게 다쳐서 김부령 집에서 여러 날 치료하고, 김참령을 만나서 만초선생의 편지를 전하고 김참령의 집에서 유련하니, 김부령은 위인이 대단히 인자하여 용필이를 사랑하나, 바라고 찾던 김참령은 도리어 성품이 표독하고 마음이 음흉하여 별양 반갑게 여기지 아니하는 모양이라.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천대를 받고 지내되 그 큰집에를 가면 김부령이 항상 말 한마디라도 친절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는 모양인즉 자연히 김부령에게 따르더라.
용필의 위인이 똑똑하고 문필이 유려하고 매사에 영리하여 시골아이의 태도가 도무지 없는 고로 김부령이 매양 사랑하더니, 자기 아우 김참령이 강원도 의병 진멸 차로 대대장으로 출주하게 되니, 그 아우 김참령이 강원도 의병 진멸 차로 대대장으로 출주하게 되니, 그 아우 수하에 사람스러운 보좌원이 없음을 한탄하여 김용필이를 병정에 넣어서 김참령의 수하병이 되게 하여 함께 강원도로 출진할 새, 의병과 수삼 차 접전하여 김용필이가 접전 할 때마다 비상한 대공을 이루니 이 일이 자연 연대장에게 입문되어, 연대장이 대단히 김용필의 공로를 가상히 여기어 서울로 보고하였더니, 특별히 참위 벼슬에 임명하여 소대장이 되게 하매, 항상 김참령의 하관이 되어 병정 거느리기를 제제창창하게 하고 의병 진정하기를 귀신같이 하여 명예가 더욱 나타나더라.
한 번은 의병 관련한 사람들이라고 잡아왔는데 그 중에 박참봉이 있거늘 자세히 조사한즉, 당초에 유승지와 박참봉이 부자의 득명으로 의병에게 패 하여 달아나는 서슬에 유승지는 총을 맞아 죽고 박참봉은 자기 집으로 돌아와 있더니, 동리사람 중에 그 인색하고 더러움을 평생 미워하던 사람이 있어 김참령에게 말을 하여 잡히어왔는지라, 김용필이가 대대장 앞에 가서, (용) "여쭐 말씀이 있삽나이다. 저 의병 관련으로 잡혀온 박 아무는 자세히 사실하온즉 의병에게 붙잡혀 다니기는 하였으나 죄는 실상 없사오니 무죄 방송하 옴이 어떠하오리까."
(대) "그래도 의병에게 전재를 대어주고 함께 따라다닌 놈은 백방( 白放) 할 수가 있나."
말을 하면서 용필에게 눈짓을 하여 잠깐 이리로 오라 하더니 사람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입을 귀에다 대고 수군수군 말을 한다.
(대) "내가 들으니 박가의 딸이 지금 열아홉 살인데 대단히 절묘한 미인이라네. 아직 시집도 아니 갔대여. 자네 알다시피 내가 아들이 없어서 첩을 하나 두려 하던 차인즉 박가를 살려주고 그 대신에 내가 첩장가를 들겠네. 그리하여서 내가 일부러 병정을 보내어 탐문하여 가지고 잡아온 것이니 내놓지 말게."
(용) "에 ─ 엣. 아이고, 가슴이야."
용필이가 대대장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가슴이 꼭 막히고 목이 메어 말을못하더니, 한참만에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어 전후 일을 자초지종 모두 설파 할 새, 자기 조부와 박참봉의 부친 박감역이 예혼을 언약한 일로부터 칠팔 세를 지내어 십여 세가 되도록 같이 자라나던 이야기와, 자기 조부 죽은 후에 집안이 결단난 일과, 박참봉이 예혼을 파약하려 하는 심술과 명회가 저를 생각하고 서로 아끼던 정의와, 한 번 담 너머로 넘겨다보고 이야기 하려다가 박참봉한테 들키던 일과, 유승지와 박참봉이 동모하여 저를 죽이려 하던 일과, 제가 부득이하여 서울로 올라간 일을 낱낱이 이야기하고 나중에 하는 말이, "하관은 영감의 아들이나 진배없는 터인즉 하관과 이러한 관계있는 것을 아시면 그 아이는 영감의 며느리같이 생각하시옵소서."
김참령의 시커먼 얼굴이 무안을 보아 붉어지면 마치 아메리카 토인의 홍색 인종 같은지라, 검은 얼굴이 새카매지며 코를 실록실록하고 증을 내어 하는말이,
"어린 연놈들이 상사라니, 으응."
그러한 후 이삼 일이 지난 후에 김용필이 거느린 소대 병정 하나가 촌에나 가서 술먹고 행패한 일이 있는데, 다른 때 같으면 그 병정을 포살을 하든지 벌을 주든지 할 터이오, 또 김용필이가 그리하였더라도 이 다음에는 그 리하지 말라 하는 말 한마디 훈계로 용서할 터인데, 김용필이가 시킨 것이라고 억지로 죄목을 잡아 이러한 사람은 부하에 둘 수 없다는 연유로 즉시 보고서를 써서 연대소로 보내어 김용필은 갈고 다른 소대장을 보내어 달라 하니, 연대장은 그 보고서를 들어 참위 김용필을 서울 본대로 상환 시키고 다른 소대장을 파송하다.
하루는 김참령이 병정 수십 명을 거느리고 박참봉의 집으로 나가서 조사 할 일이 있다 하고 집안 구석구석이 가택수색을 할 새, 안방에서 박참봉의 딸 이 나오는 것을 본즉 참 일색이라, 김참령이 정신을 잃고 물끄러미 보고 섰다가 조사할 것을 다 마친 후에 박참봉을 불러 앉히며 하는 말이, (대) "박참봉 죽고 사는 것은 오늘 내 손에 달렸지."
(박) "살려주십시오."
(대) "내가 나이가 사십여 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어서 자손을 보기 위 하여 다시 한 번 장가들려 하는데 마땅한 데가 없더니, 들은즉 박참봉의 따님이 과년하고 또 유승지 집과 혼인하려다가 지금은 못하게 되었다 하니, 내 말을 들으면 박참봉이 목숨도 살고 우리 집과 척분을 맺어 좋을 일이 많을 터이니 어떠한가."
(박) "…… "
(대) "내 말을 아니 들으면 지금 당장 포살이여, 자 ㅡ, 어서 좌우간 대답을 하여."
박참봉의 생각은 그렇게라도 하여주고 목숨이나 살아났으면 하고 허락을 하려 하나, 딸의 마음을 짐작하는 고로 딸의 마음을 들어보아야 하겠는지라, 그 연유로 말을 한즉, 김참령은 제 욕심만 채워서 하는 말이,
(대) "물어볼 것 무엇 있나. 박참봉의 허락이면 그만이지. 물어볼 터이면 이 리로 나오래서 물어볼 일이지."
이때에 박참봉의 부인과 명희는 어찌되는 일인고 염려하여 뒷문 밖에서 엿듣던 차라.
명희가 김참령이 자기 부친을 위협하는 거동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 하나 부친 목숨에 해가 될까 염려하여 온순한 언사로 문밖에서 하는 말이,
(명희) "아버님께 여쭈옵나이다. 대대장 영감께서 나라의 왕명을 몸 받아 지방 인민을 안돈시키려고 이 고을에 내려오사, 무죄한 사람은 죽이실리 없고 유죄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실 터인데 일개 소녀로 인연하여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무죄한 아버님이 목숨을 취하겠다 하시오나, 소녀는 이왕 정혼한 곳이 있어, 말하자면 남편 있는 계집이오니 왕명을 몸받아 오신 그 영감님께 이렇게 하시는 것은 국가의 불충이요 소녀로 하여금 정절을 깨 트리게 함이온즉 옳지 못한 일인가 생각하나이다. 그 말씀은 결단코 봉행 할 수 없사오니 돌려 생각하십사 하고 말씀하시옵소서."
김참령이 처음에는 허락하는 말인가 하고 아리따운 목소리에 그 향기로운 살결이 자기 등어리에 대어 있는 듯하여 등이 간질간질하더니, 나중에 결단코 봉행할수 없다 하는 말에 화증이 와락 나서, 내친걸음이라 병정 불러 호령하 되,
"이 놈 내다 포살하여라." 하니 병정 십여 명이 우르르 들어와서 박참봉을 끌어내어 살결박을 하는지라, 명희가 이 광경을 보고 정신이 산란하여 어찌할 줄 모르다가 방문을 펄쩍 열고 들어가서 김참령 앞에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머리를 푹 숙이고 하는말이, (명) "소녀가 지금 영감의 말씀을 듣자 하오면 두 번 시집가는 음녀가 될것이오, 아니 듣자 하면 부친의 목숨을 구완치 못하는 불효가 될 터이오니, 효와 열을 쌍전할 수 없는 지경이오면 차라리 효도나 지킬 수밖에 없 사오니 소녀의 부친을 살려주시옵소서. 소녀가 영감의 말씀을 봉행하오리다."
(대) "아 ㅡ, 기특하다. 진작 그리할 일이지. 어서, 그만 두어라. 박참 봉을 풀어놓아라."
병정이 박참봉의 결박하였던 것을 풀어놓고 나간다. 명희가 일편단심을 내어 보일까 하다가 다시 돌쳐 생각하고 말을 온순하게 한다.
(명) "소녀가 허락하는 자리에 따로 또 청할 말씀이 있사오이다."
(대) "응, 무엇. 무엇이든지 소청은 다 들어주지. 채단 말인가."
(명) "아니올시다. 그런 말씀이 아니라, 혼인은 인간대사요, 또 영감께서는 부인이 계신 터이니, 소녀가 댁에 들어가면 이렇듯이 어엿하게 행세 할수 있겠삽나이까. 지금 여기서 병정들이라도 이러한 형편을 눈으로 보았은즉 서울 가서 소문새라도 흉하게 나오면 영감 전정에 관계가 적지 아니 할 터이오니, 원주에 출주하여 계신 연대장 영감과 소녀의 부친과 영감이 한자리에 합석하여 앉으시고 정중하게 혼인을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니, 그리하신 후에 연대장 영감으로 증인을 삼고 혼인하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영감께서 위협으로 혼인하였다고 소문이 괴악하오리다."
(대) "아 ㅡ, 그것 참 명철한 말이로고. 연대장은 나와 대단히 친한 터 이오. 또 이 달 보름께는 이리로 오실 터이니 원주로 갈 것 없이 그때 연대장이 오거든 그렇게 하지, 며칠 안되니까."
원주에 있는 연대장이 각 대대를 시찰할 차로 돌아다니다가 철원읍에 이르니, 김참령은 연대장 오기를 잔뜩 기다리던 터이라, 배반을 성설하여 간곡히 대접한 후에 첩장가 드는 말을 한다.
(대) "하관이 간절히 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연) "응, 무슨 말이오."
(대) "다른 말씀이 아니라 하관이 지금까지 혈속이 없어 항상 걱정 하던 터에 상당한 처녀가 있으면 치첩을 하여 자손을 볼까 하더니, 마침 이 고을에 사는 박참봉이라 하는 사람의 딸이 있는데 하관도 마음이 간절하고 박참 봉도 허락이 된 터이오니 상관께서 한 번 수고하시와 중매되시면 혼인이 영 광 스럽겠사오이다."
(연) "그것이야 어려울 것 무엇 있나, 그리하지. 그러면 박참봉을 지금이 리로 부르시오."
박참봉의 집에서는 연대장이 철원 고을에 들어와서 대대장과 만나서 이야기 한다는 말을 듣고 명희의 혼인수작이 되려니 짐작하였으며, 명희도 역시말은 아니하나 속마음에 작정한 일이 있는 모양이라.
하루는 연대장과 대대장이 합석하여 앉고 박참봉을 청좌한다는 말을 듣 고명희가 그 부친 박참봉에게 말을 하여, 자기 집에서 주안을 차리고 연대장과 대대장을 오라 하여 혼사를 말하게 하였더라.
연대장과 대대장도 또한 좋은 일이라 하고 박참봉 집으로 나와서 술잔씩이나 먹은 후에 혼인 이야기가 시작되며, 사랑방 뒷문이 열리며 향내가 방안에 가득하고 옹용한 태도로 윗방자리에 나와 섰는 사람은 명희라.
(명) "연대장 영감께 여짜올 말씀이 있삽나이다. 소녀는 일개 미혼 전 처녀로 감히 좀전에 말씀하옵기 황송하오나, 소녀는 조부 생존시부터 김 도사 손자 되는 지금 본대 소장으로 있다가 서울로 갈려간 김용필이와 혼인을 정 하여 성례만 아니하였다 뿐이지 성혼한지 이미 오래오니, 소녀는 남편 있는기 집 이온 즉 다시 다른 곳에 시집갈 수 없사온데, 대대장은 속에 짐승 같은 음흉한 마음을 품고 위협으로 소녀를 탈취하려 하여 부친을 의병에 간련 있다고 얽어몰아 가두고, 김참위가 소녀의 예혼한 남편인 줄 안 후에 김참 위를 무고하여 서울로 올리쫓고 병정을 거느리고 소녀의 집에 와서 부친을 위협하고 소녀를 탈취하려 하옵기, 소녀가 부친의 생명을 염려하와 거짓 허락하고 연대장 영감의 중매를 청하온 것은, 저 금수같은 김참령의 행위를 연대장 영감께 말씀한 후 죽기로 자처함이오니 살피시기를 바라나이다."
고은 목소리는 녹음 중에서 나는 꾀꼬리소리 같고, 엄숙한 태도는 심산 중에 앉은 호랑이의 위험 같도다. 김참령은 얼굴이 붉다 못하여 숯검정 같고 박참 봉은 죽어 가는 사람같이 벌벌 떠고 있으며, 연대장은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듣는다. 연대장이 이 말을 듣더니 김참령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나라의 명을 받아 백성을 안돈시키러 내려온 사람이 마음을 이렇게 음흉하게 먹고 행위를 이렇게 부정하게 하면 저 처녀로 하여금 정절을 깨 트리게 하는 동시에 영감은 나라에 대해여 역적됨을 면치 못하겠소."
경사로 이루려 하던 혼인담판은 살풍경으로 깨어지고, 김참령은 도망 하여 서울로 가고, 연대장은 원주로 돌아가서 보고서를 써서 서울로 보고 하니, 김참 령은 파면을 당하여 육군법원에 갇히고, 김용필은 대대장으로 승차 되어 철원에 출주하고 세상이 평정한 후에 명희와 김용필은 성례하여 지금 화락 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세상이 잠깐이라, 벌써 아들을 형제나 낳았지…….
"이리 오너라. 너 안악에 들어가서 영감 내외분더러 아기네들 데리고이리 나오라 하여라."
하인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조금 있다가 기우헌앙한 장부 사나이가 요조숙녀 부인을 데리고 아들 형제를 앞세우고 나온다.
그 노인이 나더러 인사를 붙인다.
"자네 인사하게. 이 사람은 김용필인데 내 조카요, 저기 저는 내 조카 며느리, 애명이 명희인데 박참봉의 딸이오, 이 아이들은 그 아들들……."
이야기하던 노인은 만초선생인 줄을 그제서야 깨달았도다.
차차에 탐정순사(探偵巡査)라 명칭한 일편(一篇)과 외국인(外國人)의 화( 話)라 칭한 일편(一篇)이 유(有)하나 경무총장(警務總長)의 명령( 命令)에의 하여 삭제(削除)하였사오며, 본(本) 책자(冊子)의 체재(体載)가 완미( 完美) 치 못함은 독자 제군의 서량 하심을 요( 要) 함 이 책 본 사람에게 주는 글
예전 성인이 말씀하시되 사람은 일곱 가지 정이 있으니 희, 노, 애, 낙, 애, 오, 욕이라 하였도다. 기꺼워하며 노여워하며 슬퍼하며 즐거워하며 사랑 하며 미워하며 욕심 내는 것이라. 그러나 나는 여기 한 가지를 더하여 여덟 가지 정이라 하노니, 겁내는 것이 즉 이것이라. 사람이 반가운 일을 보면 기꺼워하고, 분한 일을 보면 노여워하고, 궂은 일에 슬퍼하며, 좋은 일에 즐거워하며, 어여쁜 것을 사랑하고, 미운 것을 미워하고, 고운 것을 욕심 내며, 두려운 것을 겁내는 것이 인정은 일반이라, 넓고 넓은 천지에서 우리가 한 세상 한 나라에 살며 전으로 몇천 년 후로 몇만 년 오래고 오랜 세월 중에서 우리가 지금 한 세상 한 시대에 났으니 인연이 지중하도다. 그 사이에 무슨 슬퍼하며 노여워하며 미워하며 겁낼 까닭이 있으리요. 또 사람이 천하를 움직이는 영웅이오, 고금에 이름 있는 호걸이라도 넓고 넓은 천지간에 한낱 작은 인생이오, 사람이 백 년이나 천 년을 산다 하여도 오래 고 오랜 세월 중에 꿈결같이 잠깐 있는 인생이라. 그동안에 무슨 기꺼워 하며 즐거워하며 사랑하며 욕심 낼 것이 있으리요. 그러나 사람은 국량이 좁고 지식이 적은 고로 하늘의 넓은 뜻을 몸받지 못하고 세상의 요행을 깨닫지못하여, 희, 노, 애, 낙, 애, 오, 욕, 겁, 여덟 가지 정으로 꼼 작 거리는 도 다. 예전 성인이 희, 노, 애, 낙을 얼굴빛에 드러내지 아니한다 하였으나, 이 것은 생각건대 형용에 드러내지 아니할 뿐이오. 속마음에는 반드시 기꺼워 하며 노여워하며 슬퍼하며 즐거워하는 정이 있음은, 성인도 사람은 사람이라 능히 면치 못할지니, 공자님 같은 성인도 그 도가 행치 아니함을 한탄 하여 슬퍼하였으며, 소정묘를 미워하다가 국법으로 죽인 뒤에 이를 기꺼워 하였으니, 어느 사람이 이 정이 없는 자 어디 있는가. 볼지어다, 세상은 울고 웃는 사이에 지나가고, 사람은 옳으니 그리니 하는 동안에 늙지 아니하는가. 한편에는 눈물을 뿌리고 대성 통곡하는 사람이 있는 동시에, 한편에는 즐거워서 웃고 지껄이는 사람이 있으며, 한때는 사랑하느니 귀여워하느니 하여 죽을지 살지 모르다가 별안간 미워하고 노여워하여 죽일 놈이니 살릴 놈이니 하는 사람도 있고, 한편에는 천동지진, 전쟁, 질병 등의 두렵고 무서운 일이 있어 사람마다 겁내건마는, 그 중에서도 일만 가지 욕심이 불 같아서 분주불가한 사람도 있지 아니한가. 그러한즉 사람은 기꺼움과 즐거움과 사랑과 욕심으로 인연하여 슬퍼하며 노여워하며 미워하며 겁내는 중간에는 꼼작거리는 동물이라. 그러한 고로 사회이면(社會裏面)에는 이상야릇한 별별 사정이 많이 생기어 나는도다. 이 책을 기록한 이 사람도 국량이넓지 못하고 지식이 많지 못하여 희, 노, 애, 낙, 애, 오, 욕, 겁의 여덟 가지 정을 가진 사람이라. 이 여덟 가지 정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이 여덟 가지 정에서 꼼작거리는 세상사람 사이에 생기어나는 모든 사정을 관찰 하여이 책 속에 기록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한 것인즉, 이 책에 기록한 모든 사실은 기꺼워하며 노여워하며 슬퍼하며 즐거워하며 사랑하며 미워하며 욕심하며 겁냄으로 생기어 일어난 사정이라.
그러나 마음의 옳고 그름으로 인연하여 나중 결과가 다르니, 마음을 옳게 먹은 사람은 슬프고 겁나는 중에 있을지라도 나중에는 즐겁고 기꺼운 결과를 보고, 마음을 옳지 않게 가진 사람은 그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면 항상 슬프고 겁나는 걱정, 근심 중에서 몸을 마치는지라, 이 책 읽은 여러 군자는 책 속에 기록한 여러 가지 사정을 가지고 각기 자기의 마음을 비치어 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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