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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고한승 옥희와 금붕어

by 워낙3 2022.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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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와 금붕어

1

따뜻한 봄날이 되었습니다. 부드러운 대기 가운데는 아릿한 아지랑이가 끼고 간사히 가는 바람이 사르르 불어와서 버들가지를 흔듭니다.

옥희의 집 뒤뜰에도 어리고 생기 있는 파-란 풀들이 하나씩 둘씩 나기 시 작하더니 이제는 벌써 비단 위에 고운 채석을 옥침한 듯이 가지런히 요를 깔았습니다. 겨울 동안 창문을 꼭 닫고 무거운 이불을 덮고 병상에 누워서 답답하고 괴롭던 옥희의 방에도 이제는 들창문을 할신 열어놓고 연하고 따 뜻한 태양광선을 마음껏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옥희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에 다- 헤치며 펴버린 머리칼을 날리면서 바깥뜰을 내려다보게 된 것 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오다가다 다리팔이 아픈 것도 잊어버 리고 열심히 바깥을 내다보고 있게 되었습니다.

울타리에 나란히 선 진달래와 노란 꽃이 벌써 반쯤 봉오리가 폈습니다.

오다가다가 멀리서 제비와 참새가 봄을 노래하는 것 같은 유쾌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공기는 스스로 가엽고 녹신-하였습니다. 옥희는 매일 그 꽃들이 봉오리가 조금씩 벌어지는 것을 재미있게 내다봅니다. 버들 잎이 하나씩 둘씩 점점 늘어가는 것을 손꼽아 셀 것 같이 주의해서 보는 것 으로 하루하루의 봄날을 보내며 갑니다.

그중에도 옥희가 매일 열심히 보고 어리고 고운 근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저 -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컴컴하고 음침하던 것 같은 겨울 하늘과 달라 푸르고 양기 있는 봄 하늘은 무슨 경치보다 고상하고 좋았습니다.

맑고 푸르고 멀고 높은 그 정한 하늘 그 아래 솜송이 같고 함박꽃 같고 연사의 춤추는 것 같은 흰구름 만 덩이가 뭉게- 떠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할 거룩한 경치인지 몰랐습니다. 그것은 맑은 바다 속 같고 훌륭한 성인의 기슴속 같았습니다. 오다가다 그 넓고 깊은 하늘을 그 솜송이 같은 흰구름 이 다- 가리고 그 사이로 조금씩만 푸른 하늘이 내려다보일 때에는 꽃처럼 연신 웃는 얼굴을 내놓고 옥희를 손짓하여 부르는 것 같고 혹은 거룩하고 뜻 깊은 종소리가 가랑랑히 울려 새어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 푸른 끝 모르는 하늘에는 옥희의 알지 못할 무슨 힘이 가득한 것 같습 니다. 옥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그것을 사모하며 사랑하였습니 다. 어떻게 그곳에 갈 수가 없을까 어떻게 그 힘을 가득히 마음껏 쥘 수가 없을까 하는 것으로 어린 가슴을 적지 않게 태웠습니다.

화려한 태양의 나라,기이한 종소리가 들리는 저 나라를 가고 싶고 가고 싶어서 못 견뎠습니다.

‘내 이제 병이 나으면 가리라’ 하고 생각하였으나 저- 한없이 높고 깊은 곳에는 아무리 병이 나아도 갈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옥희는 더 어렸을 때 어마님이나 혹은 시집간 형님들에게 들은 이 야기를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시골 어린 남매들이 자기 어머니를 잡아먹고 어머니 복색을 하고 온 호랑이 때문에 밤중에 도망을 나와서 하나님에게 열심히 기도를 한 결과 금 동아줄을 내려 보내서 곧 타고 올라가서 누의는 해가 되고 오래비는 달이 된 이야기를 늘-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금동아줄이나 내려 보내 주셨으면 하고 가만히 기도하였습니다.

2

사방에서 버들호렉이 소리가 점점 많아지고 진달래 노란 꽃이 만발할 때 오랜 병상에 누웠던 옥희의 병도 많이 나았습니다. 아직 기운이 회복되지 못하였음으로 그대로 누워 있기는 하지마는 두통과 열은 거진 다 없어졌습 니다. 그러나 옥희의 몸에 병이 점점 나아갈수록 옥희의 마음은 점점 무거 워갑니다. 옥희의 얼굴에는 날로 근심의 빛이 늘어갑니다. 조금만 무슨 심 사 틀리는 일이 있으면 금방 눈물이 핑 - 돌면서 여윈 손으로 가슴을 괴롭 게 만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항상 먼- 하늘만 쳐다보고 하염없이 누웠 습니다.

어머니는 다만 병을 앓고 나서 몸과 마음이 약하여졌음이라고 말하실 뿐 입니다.

하루는 전에 옥희의 다니던 학교 선생님이 옥희에게 금붕어 세 마리 담은 유리 어항 하나를 갖다주었습니다. 옥희는 낮에는 창으로 바깥 하늘을 내려 다보는 것으로 날을 보내지만 어젯밤에는 머리맡 상 위에 금붕어를 보는 것 으로 심심함을 참고 지냈습니다.

조그만 유리 항아리 속에 물은 칠분이나 담겼습니다. 전신이 다- 밝고 금 빛 도는 조금 큰 붕어가 한 마리요, 등으로부터 배까지 반만 벌겋고 꼬리 는 세 갈래로 난 조금 작은 붕어가 두 마리였습니다 이 세 마리 붕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돌아다닙니다. 옥희는 그것이 마치 유쾌히 노는 것 같지는 않고 어디로 도망갈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래서 옥희는 저 금붕어가 불쌍하게도 생각되었습니다.

붕어들이 옥희의 앞으로 올 때에는 조금 조그맣게 제대로 보이지마는 옥 희의 저편으로 갈 때에는 제 몸덩이보다 몇 배나 더 크게 보였습니다. 옥희 는 그것이 퍽 이상하고도 재미있게 보였습니다.

옥희는 차차 그 금붕어에 대하여 이상한 생각이 많이 나기 시작하였습니 다.‘저것들은 돌만 먹고 사나’, ‘왜 사람처럼 말을 못하나􋺴,‘물속 에서 어떻게 살까? 나 같으면 한시도 못할 터인데’하는 의심을 품을 때마 다 옥희는 자기가 금붕어보다 얼마나 행복한 지위에 있는 것을 짐작하였습 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수록 옥희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갑니다.

옥희는 한번 어머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머니,저 금붕어들은 저- 넓은 연당속으로 가고 싶겠지?"

어머님도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 살려줘요.”

하였습니다. 이 말에 어머님은 아무 대답도 안 하시고 그대로 바느질을 하시는 것을 보고 옥희는 다시 말을 이어

“너무 불쌍해요. 어머니 - 좀 답답하겠지요? 나는…….”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 하였습니다. 어머님은 앞으로 와서 옥희의 머리를 어루만지시면서 눈물을 씻어주시며

“울지 마라! 왜 우니? 남들도 다- 놓고 보는걸. 그리고 도로 갖다 놓아 주면 또 잡혀가지 않겠니

하셨습니다.

옥희는 속으로‘그렇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금붕어의 신세가 불쌍하 게 생각되었습니다.

“내가 잘- 사랑해서 기르리.”

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여덟 살 된 옥희의 오라비가 들어왔습니다.

“아- 금붕어 봐!"

하고 손으로 어항 놓인 책상을 탁 쳤습니다. 고요히 돌아다니는 금붕어들은 갑자기 난리를 만난 듯이 도망을 다닙니다. 물은 흔들- 파도를 치는 대로 붕어들이 꼬리를 빨리 저으며 좁은 자기네들 세계에서 피해 다닙니다. 더욱 이 제일 작은 놈이 제일 무서움을 많이 타는 것 같이 제일 빨리 빙빙 돌아 다닙니다.

오라비는 재미나는 듯이 손가락을 어항 속에 넣어 물을 휘저었습니다. 그 때는 세 마리가 일제히 한 군데로 우- 몰렸다가 손가락 가는 데마다 피해 돌아서서 또 우-몰려다닙니다. 마치 까막잡기를 할 때에 눈감은 사람이 오 면 서로 우르르 몰려나는 듯이 죽을 기를 다- 쓰면서 도망을 다니는 것을 옥희는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옥희는“야 장난 마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라비는 들은 척 만척하고 그대로 손가락을 휘두르고 섰습니다. 금붕어들은 숨이 찬 것 같이 입을 자 주 놀리면서 부르르 떨듯이 전신을 놀리면서 피해다닙니다. 옥희는 그만 눈 물을 머금고 목 메인 소리로,

“글쎄,가만두어라! 만약 붕어가 말을 해봐…….”

하고 원망하듯이 오라비를 보았습니다.

3

옥희는 하루 아침에 거룩하고 이상한 꿈에서 깼습니다.

옥희는 전과 같이 금붕어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금 방 유리 어항이 수백 칸 되는 큰 바다같이 커지면서 그 속에 물은 깊고 푸 른 강물같이 고요히 파도를 칩니다. 그 많은 강물 위에는 아름다운 무지개 가 곱게 걸쳐졌습니다.

무지개는 물에 비쳐 아래위로 채석다리를 놓은 것 같았습니다 옥희는 한 편으로 너무 휘황하여 무서운 마음조차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지금까지 꼬 리를 치고 놀던 금붕어가 변하여 번쩍 하는 금빛 밝은 빛의 활옷 같은 것을 입고, 황금빛 머리를 뒤로 곱게 풀어 헤친 아름다운 여신이 되어 물속에서 불끈 솟아올라 무지개다리 위에 섰습니다. 그 까맣고 또렷―한 눈으로 처음 에는 옥희를 무섭게 보더니 차차 부드럽게 내려다보며 예쁜 얼굴에 웃음을 띠었습니다. 옥희는 화려하고 기이하고 예뻤으나 목이 꽉 막혀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넓고 푸른 하늘 문이 열리면서 오색구름을 타고 금붕어 여신은 나는 것같이 고요히 올라갑니다. 하늘 위에부터 오는 상쾌한 바람에 여신들의 고운 옷자락은 펄펄펄 나부낍니다.

그 깊은 알 수 없는 하늘 속 세계에는 금은들로 지붕을 하고 산호, 진주 로 기둥을 한 궁전 같은 누각이 있으며 , 그 속에서는 금붕어를 환영하는 유량한 음악 소리가 새어나옵니다. 금붕어의 여신들이 타고 올라가는 구름 양 끝에 백설 같은 날개가 달린 여신이 서서 인도를 하며 오색구름이 올라 가는 곳마다 눈을 쏠 듯한 기이한 서광이 빛나서 온-하늘을 색색으로 곱게 장식합니다. 옥희는 그 거룩한 광경을 감격한 눈물조차 머금은 눈으로 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금붕어의 여신 셋은 백옥 같은 손으로 옥희를 향하여 손 짓을 하면서 셋이 같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옥희야 오너라

옥희야 오너라

하늘 나라로

구름을 타고

무지개 나라로

노래를 부르며

옥희야 오너라

옥희야 오너라

거룩한 저 나라

해의 나라로

펄펄펄 날아서

무서움 없이

옥희야 오너라

옥히야 오너라

옥희가 이런 알 수 없는 꿈을 깨니 봄날 아침 해가 옥희의 베갯가를 비춥 니다.

옥희는 그 꿈에 보던 그 광경이 아직 눈을 휘황케 하며 그 노랫소리가 아 직까지 귀를 울립니다. 옥희는 마치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같이 마음이 시원한 듯하고 환-한 듯하였습니다.

옥희는 얼른 생각난 듯이 어항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세 마리의 금붕 어는 죽어서 둥둥 떠 있었습니다.

‘아- 금붕어는 그만 갔구나.’

하고 옥희는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옥희는 그만 눈물을 흘리면서 꿈꾸는 듯한 눈으로 창을 열고 넓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하늘은 티 끌 한 점 없이 환- 하였습니다. 옥희는 그 자리에 엎드려 흐느 끼며 울었습니다.

옥희는 그날부터 도로 병이 더해 점점 열이 높아졌습니다. 눈은 상혈 이 되어 붉으면서도 항상 꿈꾸는 것같이 몽롱하였습니다.

진달래 노란 꽃이 지고 복사꽃이 만발한 때, 푸르고 넓은 하늘은 다른 날보다 한층 더 밝고 정한 날,새벽 해가 동산에서 붉은 빛과 무한한 기운 을 토하면서 올라올 때 옥희의 집 조그만 문에서 는 옥희의 장사가 나왔습 니다.

옥희의 적은 영혼은 아마 아름다운 금붕어와 같이 저 - 해의 나라 무지개 나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동아일보》신년 제4호 3면, 19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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